동로마 제국 (Terno)

동로마 제국
Imperium Romanum Orientale
Eastern Roman Empire
로마 국기.png
국기
로마 국장.jpeg
국장
국호동로마 제국(비공식)
Imperium Romanum Orientale, 로마 제국(공식)
Senatus Populusque Romanus
상징국가로마인의 정신(관습상)
표어Senatus Populusque Romanus(로마 원로원과 시민)
국교동방 정교회(그리스정교회)
자연환경면적(영토)1,055,177 km²
인문환경인구1억 명
인구밀도미상
공용 언어라틴어
정치국체입헌군주제, 집정관제
정부형태원로원 의원내각제
임페라토르하드리아누스 셉티우스
콘술공석, 공석
경제GDP$130,456,067
1인당 GDP$???
공식 화폐세르티우스, 데나리우스
시간대예) UTC +1

개요

동로마 제국이 영토를 축소하고, 현재의 터키, 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영토만을 유지했다는 설정의 국가이다.

비공식이자, 많이 쓰이는 명칭은 동로마 제국이며, 공식 명칭은 로마 제국이다.

황제

로마 제국 황제의 공식 명칭은 임페라토르(군인에게), 프린켑스(시민에게)이다. 현재 황제의 공식 명칭은 카이사르 디비 하드리아누스 셉티우스 아우구스트 이다.

황제는 21세기인 지금에도 명목적으로도, 실제로도 로마 제국의 국가원수이며, 신체불가침권, 종교, 국군을 통솔한다.

황제는 또한 동방 정교회의 수장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권한은 다시 두 집정관과 원로원에게 돌아갔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트부터, 대체로 동로마 제국의 대부분의 황제들이 공식적인 황제임으로, 계보는 매우 복잡하다.

현 황조는 유미티아누스 가문으로, 전전대 황제인 카이사르 비오 베네 유미티아누스 아우구스트부터 시작되었다.

전임
카이사르 유미티아누스 셉티우스 아우구스트
로마 제국의 황제
1990년 4월 6일~현재
후임
미상

집정관

집정관(영어: Consul, 이탈리아어: Console, 그리스어: Ύπατος)은 정무관 중 최고 지위이며, 행정 및 군사의 대권을 장악하고 원로원과 합하여 민회를 소집하는 권한을 가진다. 임기는 1년이며 한 달씩 교대로 집무하며, 상호간의 합의 하에 업무를 본다.(상호견제와 균형을 유지, 권력의 집중방지). 비상시 한 사람의 독재관(dictator)에게 전권을 위임(6개월을 넘지 못함)

집정관이 임기를 마치면 전직 집정관(Proconsul)이 된다.

원로원

공화정(共和政) 시대에, 원로원은 일단은 집정관의 자문 기관이었지만, 명망가나 현직 및 전직 요직자 대부분을 의원으로 불렀고, 명망가들은 다수의 크리엔테스를 소유함으로써 입법 기관인 시민집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실체는 로마의 외교 ・ 재정 등의 결정권을 장악한 실질적인 통치 기구였다.

로마를 가리키는 단어로 꼽히는 SPQR란 "원로원과 로마 시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어로 알려져 있다.

원로원 의원은 과거 회계 검사관을 지냈던 인물을 대상으로 재무관의 검토를 거쳐 결정되었다.

예외로 평민이라도 호민관을 맡은 경력이 있다면 자동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새로 원로원 의원이 되면 과거 의원을 배출한 가계 출신이라는 점은 유리하게 작용했다(때문에 원로원 의원을 몇 명이나 배출한 가계는 차츰 노비레스라 불리는 특권 계급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다만 노비레스가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노비레스라고 해서 자동으로 의원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세습으로 그 신분이 상속되지도 않았다.
원로원 의원으 대다수였던 노비레스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체현자라는 측면이 많았다. 싸움터로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곳에서 전사하는 사람도 많았다. 고대 이전부터 각 의원들의 수명 자체가 짧았을 뿐 아니라 노쇠해졌을 때는 스스로 물러나는 사람도 많았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의 신분 자체는 종신이었지만 신진대사만큼은 충분히 기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에서 요직을 목표로 하는 자라면 성인(17세)부터 약 10년에 걸치는 로마군 복무 경험이 필수적이었고 원로원 의원이 된 자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뒤집어 말하면 로마의 원로원은 군사 및 국정에 관한 경험과 식견을 갖춘 엘리트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신제이므로 한 번 의원이 되기만 하면 그 신분을 잃을 염려도 없다. 덕분에 각 의원에게는 장기적인 시점에서 로마가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는 임무가 요구되었다(반면 관직은 거의 모두 선거로 선출되었다).

민주 공화국 사회의 로마에서는 집정관의 선출이나 법률 제정 같은 중요한 사항이 시민집회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원로원은 단순한 자문 기관일 뿐 권력은 갖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원로원이 그들의 권위에 의한 정치를 주도하여 실질적으로 로마는 귀족 공화제이자 과두제 국가였다고 간주된다.

현대,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의회 상원으로서 기능한다.

민회

로마의 민회는 고대 로마의 통치 기구였다. 당대 역사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로마의 인민(그리고 민회)은 정무관 선출, 법령을 제정하며, 사형을 집행하고, 전쟁과 화의 여부를 결정하며, 동맹을 체결(혹은 파기)할 수 있는 최종 결정권을 가졌다고 했다. 로마 공화정 체제하에서 로마의 인민과 민회는 궁극적인 주권의 원천이었다.

로마의 정치는 공화정 제도였으므로, 시민들은 대표자를 뽑지 않고 각 민회에 직접 투표를 했다. 그러나 시민 투표자들은 투표 외에 다른 권력은 없었다. 각 민회는 로마 정무관이 주재했으며, 이 사람이 절차와 적법성에 대한 모든 결정을 내렸다. 궁극적으로 민회를 주관하는 정무관의 권력은 민회에서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 권력에 대한 견제는 다른 정무관의 거부권밖에 없었다.

현대,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의회 하원으로서 기능한다.

설정

종교

로마의 종교는 대표적으로

로마 카톨릭, 동방 정교회 등이 있다.

국민의 대다수는 동방 정교회의 신자이다.

정교회

4세기, 로마 제국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 신앙을 공인하였다. 기독교는 한발 더 나아가 국교가 되어 다신교 신앙이었던 로마 제국을 새롭게 바꾸었다. 당시 기독교의 중심지는 라틴어 지역의 로마, 고대 그리스어 지역의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에 있었지만, 신약성경 언어인 코이네 그리스어가 새 제국의 공용어가 되고, 새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 교회는 실제적 중심이 되었으며, 라틴어의 영향은 약화되었다.

기독교를 인정한 후,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였고, 국내의 안정과 일체성의 기반으로서의 종교의 역할을 중시하여 교회를 감싸는 데 그치지 않고, 교회의 인사나 교리에 직접 간섭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국 분리 후의 동로마 제국도 이 정책을 답습했다. 한편,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여 모든 로마문명은 동로마제국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 서구 세계를 지배한 게르만족은 모두 다 기독교를 믿지는 않았기 때문에, 서방의 라틴 교회는 국가의 비호를 거의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서방 세계에도 명목상은 동로마 제국의 주권이 미치고 있었지만, 실제로 통치권이 미치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이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당시 서방교회의 우두머리인 로마교회의 대주교가 서방 세계 행정권을 인준하는 기관으로 변화하였다. 이는 서방교회의 정치적인 결합만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치리에서 자립과 조직화를 재촉한 한편, 후의 로마교회 이탈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다.

초대 교회 시절에는 가끔 교리에 관한 논쟁이 일어나 역대 황제들은 그때마다 회의를 소집하여 한쪽을 정통으로 인정하고 다른 한쪽을 배제하거나 혹은 두 세력의 융화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전 교회가 소집되는 회의를 공의회라고 하며, 그 결정은 전 교회에 모두 적용되었다. 한편, 지방에서 행해진 회의는 지방공의회 내지는 교회회의라고 하여, 그 결정은 그 지방에만 적용되었다. 다만, 기본적으로는 교리에 관한 지방공의회의 결정도 다른 지역에도 존중되어 받아들여져 갔다. 그러한 중요한 지방공의회의 결정으로는, 4세기 카르타고 교회회의에서의 신약성서의 범위 확정 등이 있다.

5세기에 단성론이 이집트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파되어,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두 파가 각자 독자적으로 주교를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단성론 문제는 단순한 교리 논쟁의 테두리를 넘어 황제의 측근마저 휘말리는 교회 내의 정쟁으로 발전하여, 이를 수습하려고 451년에 소집된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단성론을 이단으로 판정하였다. 이때 단성론자들은 자신들을 배척한 양성론자들을 ‘메르키테스(황제파)’라고 불렀다. 이단으로 배제되어 독자적인 교회를 건립한 동방교회를 모두 아울러 반(反)메르키트파라고 부르게 된 것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안티오키아 교회에서도 단성론 교회가 분립하였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정교회는 동로마 제국의 국교로서 코이네 그리스어를 사용하며, 문화, 정치, 경제, 종교적 중심이 되어갔다. 그 상징적 건물이 6세기 콘스탄티누폴리스에 건설된 성 소피아 대성전이다. 오늘날에도 세계 최대급의 크기를 자랑하는 이 성당에는 1453년 동로마 제국 멸망까지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좌가 있었다.

역사

로마의 역사는 동로마제국 이후를 다루고 있다.

고대

기원전 약 10세기를 전후로 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정착하여 살던 여러 부족은 약 2-300년에 걸쳐 서로 교류하거나 전쟁을 벌였으며 융화와 추방을 반복했다. 고대 로마 문명의 초기 역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8세기 경 라티움에는 라티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이 땅은 티베리스 강 이남 중부 이탈리아 서해안에 자리잡아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평야였다.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 인도-유럽어 족이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질 때 형성된 일개 인도-유럽어권 집단이었다. 이들은 분명 농경과 목축으로 먹고 살았을 것이며, 손으로 짠 투박한 옷을 입었고, 손으로 조야한 도자기를 만들어 썼는데, 이들의 집은 화로와 대문 밖에 없는 원형 나무 오두막이었다. 몇몇 보석 장신구와 청동 혹은 철 연장을 제외하면 이들은 해외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쓴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들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라는 이름의 도시가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기원 전설은 거의 대부분 비역사적인 허구이므로, 지리적 혹은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검증이 필요하다. 기원전 750년경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들어섰는데, 이들 산지 촌락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언과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대다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는데, 이 곳에 복합 문명이 발달하게끔 깊은 영향을 준 두 집단이 있다. 하나는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 에트루리아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들이었고, 다른 한 집단은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를 통일하게 될 도시 로마의 발전에 있어 각별히 중요한 민족이었다.

왕정

왕정 시대는 공화정 이전 시대로 기원전 753년부터 508년까지이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로물루스가 세운 것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이 날짜는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의 역사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설정한 것으로, 그는 구체적인 과학적 증거 없이 고대 로마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을 연구하여 이 날짜를 도출했다. 현대 학자들은 로마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5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증하고 있다.

기원전 7세기 말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이 지역에 귀족·왕족 계급을 이루어 피지배층을 정치적으로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 말경에 이곳의 지배권을 잃은 것이 확실하며, 이 시점에 라티움과 사비니 부족이 권력 집중을 억제하는 공화정 체제를 세웠다.

공화정

에트루리아가 캄파니아에서 패배하고, 라티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게다가 산지 종족들이 라티움(latium)을 침공하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군사적 패배로 로마에 사회·정치적 위기가 일어나면서 왕정이 몰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연대 목록(fasti)에 기록된 기원전 509~507년을 왕정 몰락의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초기에는 군사 위원회 (military tribune)에 의한 공동통치의 형태였다가 독재관을 자주 선출하는 문제가 생기자 2명의 집정관 제도로 바꾸었다. 로마의 정체는 견제와 균형, 권력 분점으로 구성된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두 집정관으로 군사 통솔권인 명령권(imperium)을 통해 집행 권력을 함께 행사했다.

집정관직은 오랜 기간의 실험과 발전을 거친뒤에야 비로소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5세기 중엽쯤에는 공화정의 고위 정무관직을 집정관이라 하였다. 집정관은 원래 귀족들의 자문 회의였던 원로원과 협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원로원은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공화정의 다른 정무관으로는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이 있었다. 정무관직은 원래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공화정의 민회로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두며, 전쟁과 화의 여부를 결정하고 요직 관리를 선출하는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 하위직 주요 관리를 선출하는 트리부스회(comitia tributa)가 있었다.

로마는 점차 에트루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되었다. 그중 베이 점령은 라티움 밖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징표가 되었으며 그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 내에서 팽창을 거듭한다. 이후 삼니움 족의 캄파니아 침입에 개입하여 3차 삼니움 전쟁을 치루었고 여기서 승리한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패자가 된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앞두고 로마의 지배권에 마지막 도전장을 던진 세력은 그리스 식민시 타렌툼이었다. 기원전 281년 타렌툼은 에페이로스의 피로스를 끌어들여 로마와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다. 로마는 정복을 통해 전략 요충지에 로마의 식민시를 건설하여 이탈리아에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로마는 3차에 걸쳐 포에니 전쟁(BC 264 - BC 146)에서 카르타고와 격돌했다.

1,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초반에 카르타고가 우세했으나 결국은 로마가 승리하면서 로마는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나 에스파냐 등지를 정복한다. 후에 3차 포에니전쟁에서는 카르타고가 로마와 맺은 협약을 위반하여 로마의 침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여 폐허가 되고 만다. 이로서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기원전 2세기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와 셀레우코스 왕국을 물리치면서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다.

해외 팽창은 내분을 불렀다. 원로원 의원은 로마 속주의 부를 통해 부유해졌지만 주로 소농 출신의 병사들은 고향을 오래 떠나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했으며, 임금 노동 대신 외국 노예에 크게 의존하게 되어 대농장이 발달했다.

전리품 수입 덕분에 새로 확보한 속주에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세금 징수 할당 제도로 신흥 상인 계급인 기사 계급은 경제적 이익을 거머쥘 기회를 얻었다.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으로 원로원 의원의 상업 행위가 금지되면서 이론상 원로원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사 계급은 정치 권력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원로원은 끊임없이 정쟁을 일삼아 계속 토지 개혁에 발목을 잡았고, 기사 계급에 정치 발언권 확대를 거부했다.

원로원의 정적들끼리 도시 실업자 출신의 폭력조직을 조종하여 완력으로 유권자를 위협했다. 이런 상황은 기원전 2세기 말 평민에게 주로 귀족이 소유한 토지를 재분배하려는 토지 개혁 입법을 시도한 그라쿠스 형제 시대에 극에 달했다. 두 형제는 살해당했는데, 여기에 원로원은 불만을 품은 평민과 기사 계급을 달래고자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한 개혁의 일부 입법을 통과시켰다.

또 이탈리아 동맹국에 로마 시민권 확대를 거부하면서 기원전 91~88년에 동맹국 전쟁이 일어났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병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잃고 점차 사병화(私兵化)되었으며, 유력한 장군이 국가와 원로원을 장악하게 된다. 이로써 마리우스와 그의 부하 술라는 내전을 벌였으며, 술라가 기원전 82년 콜리네 문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결국 기원전 81년~79년에 술라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술라는 무너져가던 공화정을 부흥시키려 개혁을 하고 독재관에 취임한 지 2년 만에 자진 퇴임한다. 그러나 술라가 죽으면서 로마는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는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술라의 부하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세 사람이 제1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공화국을 농단했다. 이후 기원전 53년에 파르티아와 벌인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카이사르와 원로원파로 돌아선 폼페이우스로 나뉘어 전개된다.

기원전 58년부터 7년에 걸쳐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갈리아 전쟁) 원로원과 대립하던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에 루비콘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파 군대와 내전을 일으킨다(카이사르의 내전).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고, 탑수스 전투와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 되어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독재 의혹을 받다가 공화제 헌정을 복원하려는 정적(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에 암살당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정권을 잡지 못하였고,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수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제2차 삼두정치를 이루며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이 정치적 동맹은 권력 투쟁으로 기운다. 레피두스는 추방되며,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며,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 지배자가 되었다.

제정

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잡았지만, 공화정을 가장했다. 이때의 통치체제를 원수정이라 하며(사실상 제정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프린켑스(제1의 시민)라 칭한다(이렇게 아우구스투스가 독재관을 거부하는 등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은 양아버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때문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는 심각한 반대 없이 권좌에 올라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본격적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루었고, 이 왕조는 티베리우스 사후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의 치세를 거쳐 기원후 68년 네로가 자살할 때까지 이어진다. 이후 1년간 로마는 내전상태에 돌입하면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즉위한다.

후에 시리아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자기 군단의 지지를 받아 로마에 입성하여 비텔리우스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대를 개창한다. 제정 시대에도 영토 확장은 이어졌으며 안정을 유지했지만, 흔히 저열하고 타락했다고 평가받는 황제도 몇몇 있었다(가령 혹자는 칼리굴라를 정신이상자로 보기도 하며(즉위 후 얼마지나지 않아 정신병이 걸려 폭정을 일삼았다).

네로는 국가 정사보다 개인 관심사에 더 몰두하며 잔인했다는 평판을 받는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네로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뒤를 잇는다.(AD 69 - AD 96)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이후에 로마 번영의 시작을 알린 오현제 시대(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콤모두스)에 제국은 영토나 경제ㆍ문화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대략 80년간 지속되면서 이시기에 로마는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이루었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시대에 제국은 번영했다. 트라야누스 재위시에는 다키아(오늘날의 루마니아)의 정복과,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통하여 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되며, 그 지배 지역이 650만km²에 이르렀다. 트라야누스 사후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제국을 순찰하면서 국경 수비를 강화하는데 힘쓴다.

193년에서 235년 사이는 세베루스 황조의 치제(흔히 말하는 군인황제시대)로 헬리오가발루스같은 무능한 지배자도 나타났다. 게다가 군대가 제위 계승에 영향력을 더욱 행사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3세기의 위기’라는 혼란기(49년간 20여명의 황제가 교체됨)로 접어들었다. 이 위기는 유능했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일단락지었으며, 293년에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두 공동 황제와 부제(副帝)가 지배하는 사두 체제를 도입했다. 여러 공동 황제는 50년 이상 서로 대립하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현 이스탄불)하고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인 395년에 비잔티움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영구히 갈라졌다.

혼란의 시대

르네상스

콘스타니노플 도피

산업혁명

근대

현대

1918년, 1차 세계대전은 영, 프, 로, 미 4개국의 승리로 끝맺어 졌다.

1920~22년 사이의 대공황 발단 이전까지, 로마 제국은 아직까지 견고하게 제국을 수호하는 제국의 수호자, 카이사르 비오 베네 유미니티아누스 셉티우스 섹스투스 아우구스트의 노련함 덕분에, 전후의 혼란과 위기를 최소화 해냈다.

그렇게 평온하던 전후는 독일에 한 남자가 두각을 들어내기 시작하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제국을 지탱해오던 제국의 수호자 마저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다.

많은 사람들은 실망스러워 했고, 그렇기에 그의 아들인 새 유미니티아누스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다.

1939년, 마침내 독일은 다시 한차례의 대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제는 멍청하고 게으른 놈들만 존재하게 된 본국, 이탈리아와 함께.

로마는 새 이탈리아의 하나된 로마 제국의 기치에 휘말려, 전쟁에 뛰어들고 만다.

그러나, 되려 새 이탈리아의 군대는 적극적인 공세를 단행하지 아니하였고, 이를 틈타서 적의 주병력을 우롱한 막시빌리안 장군의 전투는 그야말로 로마의 운명을 가른 것이였다.

1945년, 두번쨰 대전쟁도 막을 내리고, 공산주의 세력과 자유주의, 그리고 로마를 중심으로 한 제3세계 세력의 끝없는 대치가 시작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것을 기념하던 제 11주년 행사 당일, 로마 제국의 영원으로 불린 새 유미니티아누스는 숨을 거둔다.

행정 구역

1967년의 대변혁 시절, 로마의 행정구역은 상위 행정구역/지방 행정구역/광역행정구역으로 나뉘게 되었다.

터키 지역은 아나톨리아, 콘스타니노플,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서부 그리스, 아테네, 스파르타, 중부 그리스, 그 외에는 불가리아와 알바니아로 나뉜다.

로마 제국의 상위 행정구역
콘스타니노플(수도)
아나톨리아콘스타니노플마케도니아
아테네스파르타서부 그리스
불가리아알바니아중부 그리스

군사

교통

항구

공항

기후

지리

문화

경제

로마의 화폐는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데, 데나리우스(지폐)와 세르테르티우스(동전)이다.

지폐의 발행은 콘스타니노플에서 이루어지며, 동전의 발행은 전 지방자치 단체에서 이루어진다.

어머니 언어 “라틴어”

라틴어(Lingua Latīna)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있는 고대 로마와 그 주변 지역 라티움(Latium)에 정착하여 살던 라티움 사람들이 쓰던 언어이다. 로마가 지중해를 정복하면서 라틴어는 지중해 전역과 유럽 지역의 상당 부분으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라틴어는 사어(死語)가 되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등 로망스어가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그 외 영어 등 다른 언어들도 라틴어에서 많은 어휘를 차용했다.

17세기까지 라틴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운문과 산문에 쓰는 문학 언어인 고전 라틴어와 일반 대중이 쓴 민중 라틴어(Latina Vulgata)가 있다. 민중 라틴어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서 유럽 많은 지역에서 구어로 남았으며, 9세기에 이르면 로망스어로 분화된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라틴어는 서양 세계의 지식인 사이에서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로 남았는데, 로마 가톨릭교회가 라틴어를 채택한 것도 이에 큰 몫을 했다. 이런 환경에서 라틴어는 2천년기까지 모국어(mother tongue)으로 존속했는데 이것을 중세 라틴어라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라틴어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이 받아들이면서 그 위상이 잠시 높아졌으나 16세기 이후 중세 라틴어는 점차 쇠퇴한다.

라틴어는 교회 라틴어의 형태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의 조서(papal bull)나 칙령에 쓰인다. 라틴어는 과거 유럽에서 과학, 학술, 법 분야의 언어로 널리 쓰였다. 20세기 초 이래 라틴어의 역할은 줄어들었지만, 로마 공화정 후기에서 제정 초기에 쓰이던 문어인 고전 라틴어를 오늘날에도 서구의 여러 각급 학교에서 가르치며, 고전 연구에서 그리스어와 함께 다룬다.

라틴어는 고대와 중세를 통하여 유럽의 대표 언어로 자리잡았다. 유럽의 학술, 외교, 종교에서 기본 언어는 라틴어였다. 따라서 고대-중세 유럽에서 지식인이란 바로 라틴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뜻했다. 특히 교회사에서 라틴어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전례와 성경에 애용되었다.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종교개혁 이전 성경은 라틴어로만 번역되지 않았고, 토착어로 옮긴 번역본들도 존재하였으나, 중요한 예외인 잉글랜드에서는 15세기에 롤러드파가 교회 전통에 맞서 자기네 번역본으로 신자들에게 호소하자 놀란 주교들이 그 번역본을 전면 금지했다.

라틴어는 학술 언어로도 정착되어 19세기 말까지도 모든 학술과 학문에서 강의와 기록은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그 예로 장 칼뱅은 신학 문서인 《기독교 강요》를 프랑스어로 저술한 뒤 라틴어로 다시 번역했다. 물론 그리스어도 사용되었으나 고대 언어를 연구할 때나 그리스어로 쓰인 문헌을 번역하는 데만 쓰일 뿐이었다. 이러한 유습은 오래 남아,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의 결정에 따라, 루브리카 양식으로 불리는 라틴어 전례로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예외적으로는 1615년 이후 중국의 가톨릭 교회는 중국어 미사를 집전했다. 성공회에서도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 '거룩하시다(Sanctus)' 등의 라틴어 전례용어들을 사용한다. 현재까지도 생물학에서 생물종을 분류할 때 린네의 분류법에 따라 라틴어로 표기하고 있으며, 그 밖에 학술 명칭들 중에도 라틴어로 표기하는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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