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프리카 연방/역사

동아프리카 연방의 역사

연방 성립 준비

1960년대 초반 케냐, 탕가니카, 우간다가 독립했다. 그러나 삼국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삼국의 지도자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에 대해 생각했었다. 한편 삼국의 협력을 위해 동아프리카 공동체라는 기구가 만들어졌었다. 각국의 정치인들은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공동체의 회원국들의 연방 구성에 대해서 논의했다. 1963년 8월 7일 삼국은 나이로비에서 ‘동아프리카 회의’를 가졌고, 이는 각국에서 연방 성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처음에는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었으나, 경제위기가 점점 심해지자 대부분 연방 성립에 동의하는 쪽으로 기울어 결국 연방 성립에 동의하는 측이 더 많아졌다. 이후 연방건국위원회가 만들어져 연방 성립을 준비했다.

헌법 발표

연방건국위원회는 각 구성국의 법을 바탕으로 헌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1964년 1월 3일 발표된 동아프리카 연방 헌법이다. 권위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국민의 56%가 헌법에 찬성해 이 헌법은 통과되었다.

연방 건국

1964년 3월 1일 헌법의 일부 수정을 거친 뒤 연방 설립에 대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해 3월 4일 연방 완성을 선언했다.

첫 동아프리카 총선

1964년 3월 18일 첫 동아프리카 총선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 동아프리카의 인민회의, 진보주의 정당 진보주의 연맹(현재 동아프리카 진보연합의 시초), 그리고 보수정당인 민족의 당(현재 동아프리카 민족연합의 시초) 3당의 연립정부가 세워졌다.

잔지바르의 가입

1964년 술탄을 몰아내고 공화제로 전환된 잔지바르 인민공화국은 경제위기 때문에 연방 가입이 논의되었다. 1964년 4월 26일 국민투표의 결과로 70%가 연방 가입에 찬성했고 연방도 수락해 잔지바르는 자치공화국(구성국보다는 낮지만 자치권이 보장되는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

민족의 당 선거 압승과 정치

민족의 당이 1968년 3월 18일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사회개혁을 시작했다. 풍부한 자원을 이용해 경제를 성장시켰다. 케냐 대통령이자 연방 대통령인 민족의 당의 조모 케냐타는 동아련을 아프리카의 신흥국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헌법을 수정해 타 정당들을 해산시켜 일당제가 되고(몇몇 구성국들은 정당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정당들은 구색정당이 되었었다) 1974년에는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했다. 1975년 1월 인민회의의 극단 공산주의자들이 동아프리카 공산주의 연방공화국을 선언하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나 실패했고, 동공련은 1개월 만에 멸망했다. 1978년 조모는 사망하나, 그의 후계자였던 대니얼 아랍 모이가 이었다. 대니얼은 막장 독재자의 기미를 보였으나, 1979년 하이킹 중 추락사해 죽었다. 그래도 또다시 후계자인 식 딘이 이었다. 그는 조모의 정책을 이어 안정적이게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 역시 독재자였고, 성장도 비교적 주춤한 편이었다. 이 시대에 동아련은 성장을 했으나 독재, 빈부격차, 지역분쟁 등의 문제는 남아 있었다.

민주화

이전에도 여러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아무리 경제가 좋아도 20년 정도 되는 일당 독재에 지쳤던 국민들은 1986년 인민회의의 이전 회원들과 함께 9.7 민주화 운동으로 식을 퇴임시켰다. 민족의 당은 폐당되고 식은 알제리로 망명했다가 2000년에 죽었으며, 인민회의와 진보주의 연맹이 부활했다.

민주화 이후

선거에서 탄자니아의 대통령이었던 알리 하산 음위니가 60%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총 투표 수가 100.2%인 등 부정선거 논란이 시작부터 있었고 많은 부패를 저질러 경제는 정체되었다. 이 시대에 동아련의 문제가 더 심해졌다고 평가받는다. 그래도 1992년 임기가 끝나자 순순히 퇴임했다. 이때쯤 연립 여당이었던 인민회의가 여러 스캔들로 야당으로 전락하고 새로운 당인 동아프리카 국민회의가 연립 여당에 합류했고, 국민당의 온건파들이 모여 만든 민족연합도 연립 여당에 합류했다.

1992년 선거와 그 이후

이후에는 대부분 케냐, 탄자니아의 대통령들이 연방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동아련은 그동안 상당히 성장했으나 여전히 고질적인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르완다와 부룬디의 가입

두 국가는 긴 내전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내전이 끝난 뒤 두 국가는 르완다-부룬디 연방을 만들었고, 폴 카가메가 대통령으로 되었다. 그는 독재자였지만 경제 회복에 힘을 써 큰 지지를 받았다. 경제 정책의 수월함을 위해 2007년 국민투표로 동아련에 가입했다.

남수단의 가입

남수단은 2012년 독립 이후 2016년까지 내전이 진행되어 심각하게 피폐해졌었다. 이의 원인이었던 독재자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가 살해당하고 새로운 남수단 대통령 보슈아 루돌프는 동아련 가입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무려 76%로 남수단은 동아련에 가입하게 되었다.

폴 카가메

2024년 케냐의 라일라 오딩가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몇 개월 만에 건강 문제로 폴 카가메 부통령에게 권한대행을 시켰다. 폴 카가메 부통령은 르완다에서 했던 것처럼 독재자였으나 여러 개발 정책으로 동아련의 성장을 다시 크게 확대시켰다. 또한 빈부격차를 줄이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라일라 오딩가는 퇴임했다. 남아민공와의 전쟁이 일어나 미군과 협력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탄자니아 최남부를 제외하면 동아련 본토에 큰 피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