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소비에트/역사

개요

러시아 소비에트의 역사에 대하여 서술한다.

고대

기원전

동슬라브족이 거주하기 전 남러시아 쪽에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각 민족들이 역사에 이름을 드러냈다.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스키타이인과 킴메르인이, 기원전 7세기 경에는 사르마티아인이 각각 남러시아에 진출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는 동고트족의 일부가 남러시아에 들어왔지만, 7세기부터는 동유럽 평원에서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초기 슬라브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문화를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동, 서, 남의 많은 여러 슬라브 원주민들 중 동슬라브인들은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온 투르크 민족들의 지배를 받고 튀르크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슬라브인들은 5세기부터 투르크 민족 국가인 사바르 카간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후에는 아바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나중에는 러시아를 포함한 동슬라브족 초기 국가인 루스 카간국에 막대한 영향을 준 하자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있었다. 하자르 카간국의 영향에 따라 동슬라브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서 9세기에 루스 카간국이라는 고대 투르크어인 카간을 자칭하는 동슬라브 민족의 첫 국가가 등장하였다.그 전까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던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으나 그 지배 아래 동슬라브 민족들도 완전히 종속과 동화되어 동슬라브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그 후 동슬라브 민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다. 동슬라브 원주민들은 중앙아시아의 동유럽 정복을 받아들이고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3세기부터 10세기까지 이르는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의 러시아 민족 지배에 의한 투르크화의 영향력으로 동슬라브 문화는 서유럽 문화와는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됐었다

루스 카칸국

753년에 라도가 호수 부근에 루스인 최초의 도시인 스타라야라도가가 형성된 이후 튀르크족과 동슬라브인들의 영향으로 루스인들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하였고, 830년 경에는 튀르크의 군주 칭호인 카간을 루스인들의 군주의 칭호로 사용하면서 루스인의 첫 국가인 루스 카간국이 등장하였다. 루스인들은 이후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의 원형이 되었으며, 이들이 세운 국가인 루스 카간국은 키예프 루스의 전신이 되었다.

중세

노보고로드 대공국

루스 카간국의 마지막 카간이자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가 862년에 오늘날 노브고로드 방면에 정착하였는데, 이 시기부터 올레그 베시가 키예프 루스를 형성한 882년까지의 루스인들의 정체를 노브고로드 루스라 일컫는다.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추드인, 동슬라브인, 메레인, 벱스인, 크리비치인들이 루스인들을 내쫒고 스스로 통치하려 하였으나 그 후 부족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질서를 잡기 위해 다시 루스인들을 불러들여 862년에 류리크가 노브고로드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루스인들은 10세기까지 투르크족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따라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 또한 위대한 카간이자 왕으로 불렸지만, 류리크가 노브고로드에 정착한 후에는 피지배층인 동슬라브족에 서서히 동화되었으며, 카간이라는 호칭보다는 대공이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게 되었다.

키옙 루스

키예프 루스는 882년 류리크의 후계자인 올레그 베시가 키예프를 점령한 후 루스인들의 중심지를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옮김으로써 형성되었다. 당시 키예프 루스의 북동부 지방이 바로 오늘날의 유럽 러시아 지역이다. 키예프 루스는 9세기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동방 정교회와 비잔틴 문화를 수용하였고 10세기와 11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되어 후의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3국의 국가 정체성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키예프 루스는 13세기 류리크 왕조의 분할 상속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이후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 대공국, 랴잔 공국, 트베리 공국, 스몰렌스크 공국, 프스코프 공화국, 모스크바 공국 등의 군소 루스 공국들이 키예프 루스의 명맥을 이어받게 되었으며, 동시에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리게 되었다.

타타르의 멍에 & 모스크바 대공국

이 시기에 오늘날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가 1147년에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대공인 유리 돌고루키의 치세에 처음 이름을 드러냈으며, 이후 류리크 왕조 출신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막내아들인 다닐 알렉산드로비치의 치세에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이 형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킵차크 칸국은 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사방의 루스인들의 공물과 세금을 걷게 하는 방식의 간접 통치를 실시하였으며 2세기의 지배가 지나 1317년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은 킵차크 칸국의 공주와 결혼하여 킵챠크 칸국으로부터 전 루스인의 대공으로 인정받는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모스크바 대공국은 트베리 공국과 같은 다른 루스 공국들과의 투쟁,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같은 서쪽의 외국 세력과의 전쟁 속에서 점차 킵차크와 루스 전체의 통일을 이루는 곳으로 인정받게 된다.

근세

러시아 제국

17세기 말, 차르로 즉위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는 겨우 동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발트 해에 진출하기 위하여 대북방 전쟁에 참가하여, 발트 해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표트르 대제가 로마 황제의 정식 칭호인 임페라토르를 러시아 황제의 칭호로 채용하고,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도 이때다.

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는 급격한 서구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작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아 농노제는 폐지되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대제 시기에는 농노제가 확장되기까지 했다. 농민들은 톨스토이(일명 '대문호')의 단편소설에 언급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알렉산드르 2세 황제는 본격적인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이는 크림 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한 영향이 컸으며, 알렉산드르 2세의 대표적인 근대화 작업은 농노 해방령이었다. 그러나 정작 농노들이 살 토지를 마련해주지 않아, 도시에서는 농민 출신의 빈곤한 노동자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황제는 1881년에 암살당했고, 알렉산드르 3세에 이르면 부황이 행했던 대학 자치제 등의 자유주의가 일부 제한되었고, 전제정치는 더욱 강해졌다.

니콜라이 2세도 알렉산드르 3세 못지않게 전제 정치를 행했다. 그는 러일 전쟁의 패배에 대한 질책과 이에 따른 개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기병대에 의해서 살해 당한 사건인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을 맛본 뒤에야 비로소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1906년 4월 24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1889년에 근대적 헌법을 도입한 일본보다도 늦은 것이었다.

러시아 군은 제1차 세계대전 초반, 프로이센의 동부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맹국 세력에게 패퇴하여 동부 전선은 프로이센에서 우크라이나로 점차 후퇴하였고, 1917년 제국은 전쟁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혼란 속에서 군대의 사기마저 저하되었다.

1917년 차르 정부는 전쟁을 도저히 부담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자유주의자, 기업가, 장군, 귀족 모두가 차르 정부에 등을 돌렸다. 빈곤한 노동자 계층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차르 정부의 퇴진을 원했으며, 이는 곧 2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퇴위되었고, 권력은 임시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OTL

소련 해체 이후

소련 존속에 관한 전국민 투표

소련 존속에 관한 전 국민 투표에서 찬성이 된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캅카즈 지역을 제외한 다른 구 소련 지역은 모두 독립하고, 나머지 지역만 러시아 소비에트로 독립하면서 소련은 1991년 완벽하게 해체 된다. 그 이후로 93년까지 OTL.

1992 러시아 경제 위기

가이다르가 펼친 경제개혁이 실패하면서,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되어버렸다. 소련 시절 축적한 고급 인력들은 생존을 위해 좋은 조건을 제시하던 외국으로 이민가버리면서 순식간에 유출되었다. 군대와 경찰은 제대로 된 월급조차 받지 못해 많은 장교들이 제대하거나, 뇌물을 받고 무기를 파는 등 부패가 만연했다. 이렇게 러시아 국민들은 소련 시절 구축한 복지제도마저 잃어버리고 가난과 절망에 빠졌다. 여기서 경제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너무나도 급진적 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한 국가라면 모를까 이제 거의 70년 가까이 사회주의 체제로 살아온 경제를 몇년만에 너무나 급격하게 자본주의 시장경제화 하려고 하니까 안그래도 고르바쵸프가 망쳐놓은 러시아 경제를 더 망가뜨린 것 이다. 이로 인해 옐친은 정치적 입지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이 상황에서 1992년 러시아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국민들은 옐친 행정부의 경제개혁 실패에 분노했고, 그 결과 공산당이 대거 약진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정부관료 내 옐친의 개혁에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 증가하면서 민주화 운동가로써의 옐친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정치적으로 위협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옐친의 경제개혁에 불만을 품었던 이들은 옐친의 경제개혁을 중지시키고 더 나아가 옐친을 견제하려 하기 시작했다. 1992년 4월 러시아 최고회의는 옐친이 제안한 가이다르의 총리 임명안을 기각했다. 이는 최고회의가 8월 쿠데타 당시 공산당에 맞서 협력하던 관계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국가의 급진적인 개혁을 원했던 옐친과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대통령과 의회는 이후 협상을 통해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을 총리에 임명했지만, 이후 옐친 행정부의 정책이 바뀌거나, 체르노미르딘이 훌륭한 국정운영 능력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대통령과 의회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의회가 비협조적으로 자신의 정책을 거부하자, 옐친은 점차 행정명령 등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반면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한다고 판단한 의회는 반옐친 세력인 정당들과 연대하여 옐친의 폭정을 막고 부통령과 연대한 뒤 대통령 탄핵을 실시하여 조기 총선과 대선을 실시 한 후, 새로운 행정부를 구성한 다음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물론 이대로 가다가는 당장 정치적인 파국이 몰아닥칠 걸 직감한 러시아 정부, 즉 옐친 측 에서는 1993년 4월 29일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 제정 과정에서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대선, 총선의 조기선거에 대한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게 된다. 물론 옐친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어 마지막으로 꺼내든 카드였고, 옐친 나름대로 러시아 국민들은 민주화를 위해 열렬히 투쟁한 자신의 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국민들은 이미 경제 폭락과 급격한 변화에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그 결과 두 국민투표 모두 다 대통령 불신임과 조기 총선이 과반 넘는 표를 받으면서 조기 총선 & 조기 대선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93 러시아 헌정 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국민투표 결과가 압도적으로 조기 총/대선으로 결과가 결정 지어졌기 때문이다. 즉 옐친으로서도 거부 하고 최고회의 해산을 때릴 수가 없는 것.)

1993 러시아 국민투표

우익 민주화 계열, 즉 옐친 쪽 정당들에게 크게 실망한 러시아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우익보다는 좌익 정당들에게 관심을 보였고, 옐친의 자랑스러운 수식어였던 "위대한 민주화 투사"는 더 이상 자랑스러운 수식어가 아닌 옐친을 놀리는, 즉 비꼬는 말이 되었고 옐친을 비롯한 우익 정당들은 그게 온건우파건 극우건 하나도 빠짐 없이 엄청나게 의석을 상실했고,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이때를 틈타 다시 한 번 집권하기 위해 옐친의 실책이나 경제가 파탄나고 생활이 이렇게 핍박해진 이유를 옐친과 우파 정당의 폭정이라 비난하고 공약을 소련 때의 복지체계 복구와 사회주의 경제체계로의 회귀를 약속하며 선거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중심에는 겐다니 쥬가노프 당대표가 있었다. (하지만 1993 헌정 위기가 없으므로 당 내에서의 입지는 현재처럼 그렇게 막강하지 않다.)

1993 러시아 조기 총선

조기 총선에서 러시아 연방 공산당과 좌익정당 정당연합인 인민전선 (Народный фронт) / НФ가 전체 투표인 40,209,764 표 중 31,694,027표, 백분율로는 58.96%p 라는 미친듯한 지지를 받으며 단숨에 원내 1당에 등극한다. 게다가 러시아 공산당을 제외하고는 다 군소 정당이라 러시아 공산당의 단일 지지율만 해도 51.93%p에 가까웠다. 이 뜻은 대다수 러시아 시민들이 지금이나 (2016년 여론조사 중 70% 이상이 소련이 그립다고 응답.) 예전이나 소련을 매우 그리워 했다는것과 소련시절 복지체계를 다시 원할만큼 힘들었다는것을 의미한다. 최고의회 450석 중 265석을 НФ가 차지하고 그중 240석이 러시아 연방 공산당 소속이니만큼 사실상 러시아 공산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 했지만 확실한 집권과 혹시 모르는 공산당 내 분열 (겐다니 쥬가노프의 영향력이 약하고 당파 싸움이 있음.) 로 인하여 НФ 정당연합은 유지했으나 사실 НФ 소속 국가들은 사실상 공산당 2중대나 다름 없었기에 유지하나마나 의미가 없었다.

1993 러시아 조기 대선

대통령 선거에서도 러시아 공산당 후보로 출마한 겐다니 쥬가노프가 보리스 옐친을 상대로 거의 1천만표 가까운 차이로 누르면서 대선에서도 공산당이 승리한다. 쥬가노프가 받은 표는37,640,23
1표로 약 68.8%p의 참여율을 보인 이번 조기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보리스 옐친을 눌렀다. 이버누대선과 총선이 의미하는 것은 러시아 국민들은 급진적인 자유화와 시장 자본주의 경제체제 보다 작어도 지금보다는 안정적이고 살기 좋은 소련의 향수를 믿고 겐다니 쥬가노프에게 표를 던져준 것 이다. 쥬가노프도 구소련 재건이라는 사실상 헛 된 꿈을 접고 공약으로 "소련 복지 시스템 복구, 제도브시나 (데도브시나) 완전척결, 올리가르히 재산 국유화"를 공약으로 걸었고 옐친과 우파 정권 측의 실책만 골라서 전 러시아를 돌아다녔기에 가능했던 압도적 당선이었다.

RSFSR 부활

이후 쥬가노프는 '인민명령 1호'를 지시하여 국명을 러시아 공화국에서 ->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Российская Совет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로 다시 변경했다. 러시아 소비에트에서 러시아로 바뀐지도 얼마 안됐고 공산당을 뽑은 이유 중 공약이 좋아서도 있었지만 소련의 향수도 큰 이유였기에 문제 되진 않았다. 또, 총리로는 같은 공산당 소속인 블라디미르 오브치니코브 (가상인물.)를 임명시키고 옐친 때와는 달리 국민들의 지지와 의회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바탕으로 총리 또한 임명시키며 국정을 안정시킨다. 이렇게 인기를 얻어가며 빅토르 안탈로프 같은 소련 복원을 주장하고, 발트 수복과 구소련 국가를 러시아 주도로 병합하자는 급진 공산주의자 세력을 공천 학살로 당내에서 숙청하는등 입지를 다져 나갔으며 1994년이 끝나갈때 쯔음엔 공산당은 겐다니 쥬가노프 대표의 안정적인 지도로 당파 싸움이 종결되게 된다. 실각 후 빅토르 안탈로프는 투바 자치 공화국에 망명하여 가족과 함께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역사에서는 현실처럼 1993년 러시아헌정 위기로 친위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고 옐친이 결과에 승복, 대선에서의 공산당 승리가 이루어졌기에 본래 1993년에 개헌되어야 했던 헌법은 개헌되지 않았다. 그 뜻은 굳이 개헌선 까지 의석을 확보하지 않아도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헌법을 그대로 차용 할 수 있다는 점 이었다. 즉, 껍데기만 공산국가인게 아니라 법부터 내부 조직까지 전부 공산국가로 다 탈바꿈 한 것 이다. 또한 인민대표회의와 최고 소비에트도 원래 현실에서는 1993 러시아 헌정 위기에서의 옐친 승리 이후 해산 됐지만 여기선 국민투표로 조기 총/대선이 확정됐기에 최고 소비에트 체제가 유지 된다. 다만 여기서 또 정치 문제가 발생한다.

소련의 맹주격인 RSFSR은 초기에는 소련처럼 의원내각제 국가의 총리 격인 인민위원회의 의장에게 최고권력을 부여해, 어느 정도 의원 내각제 국가처럼 운영되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레닌 이후 실권을 장악한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 과정에서 자신의 직위였던 서기장(또는 총서기, 제 1 서기 등.)을 활용해 최고권력으로 부상했다. 따라서 이후 소련 최고권력은 행정기관 수장인 소련 장관회의 주석이나 입법기관 수장인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이 아닌 집권당의 총대표인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에게 있었다. 이러한 정치 모순을 막기 위해 쥬가노프는 정치 개혁을 실시했고, 서기장에게 집중 됐던 권력을 소련 초기처럼 분산시켰다. 현재 RSFSR의 지도자는 소련 장관회의 주석이 맡으며 임기는 6년이다.

겐다니 쥬가노프 실각 & 블라디미르 푸틴 선출

어쨌든 겐다니 쥬가노프는 이후 소련의 복지 체계 복구와 올리가르히 숙청에 힘 썼다. 다만 복지 자체는 겨우겨우 유지됐지만 이에 쓸 예산이 점점 바닥 나고 있었고 러시아 경제는 다시 한 순간에 몰락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경제 악화와, 1차 체첸전쟁의 패배로 인해 1998년 러시아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에 이르고, 러시아는 최악의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이 상황에서 RSFSR의 장관회의 주석인 겐다니 쥬가노프가 장관회의 주석,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공산당 제 1서기 직에서 사임함을 선언하며 안정 됐던 정국이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후 소련 지도층에서 선출한 소련의 주석은 레닌그라드 부 시장 대신 모스크바 KGB 본부를 택한 뒤, 비록 계급은 높지 못했지만 모스크바 중앙 본부에서 능력을 통하여 입지를 높혔고 옐친과 소브차크 (푸틴이 따르던 레닌그라드 시장.), 그리고 KGB 사이에서 워낙에 줄타기도 잘했던지라 모두에게 평이 좋았고 마침내 97년에는 KGB 주석직에 까지 올라가 있던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을 RSFSR의 2대 상무회 주석 겸 장관회의 주석으로 선출하게 되면서 푸틴이 RSFSR의 지도자로 오르게 된다. KGB 주석출신 지도자는 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서기장 이후 2번째.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기술과 국방기술력, 그리고 중공업이 발달한 덕에 각종 무기시장에 값싼 무기들을 대량 유통시키며 짭짤한 수익을 얻은 데다 허허벌판이던 시베리아가 자원의 보고로서 각광을 받고, 유가 상승으로 크게 호황을 맞았으며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한 산유국이 되어 전세계 에너지 자원을 쥐락펴락 하고 있다. 게다가 1대 주석때 행했던 올리가르히 숙청 덕에 일부 재벌이 소득을 차지하는 일도 적었다. 푸틴은 수출을 더 극대화 시키기 위하여 가즈프롬이라는 국영기업을 설치하는등 자원 수출 위주 경제로 향하기는 했으나 덕분에 그동안 외국에 있던 채무를 대부분 처리했으며(그것도 현금 박치기) 오히려 대침체 때 자국이 다시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가 부도위기에 처하자 돈을 꿔주는 채권자로 격상되었다. 2000년 넘어 1인당 GNP가 만 달러가 넘어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옐친처럼 매우 급진적이고 과격한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이 아니라, 쥬가노프 때의 복지와 올리가르히 숙청을 진행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얻고 점진적으로 시장경제 체제를 인정하며 예전처럼 너무나 급진적인 체제 변경으로 러시아 경제가 무너지는 일이 없게끔 시스템을 구축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러시아는 경제체제가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으며 시민들은 이제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과 자유시장경제 체제가 혼합된 경제에 익숙해졌다.

현대

RSFSR는 다시 부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소련 해체로 인해 축소된 영향력 회복에 골몰하고 있다. 과거에는 최전방이 수백 km 떨어진 동독이었지만 지금은 소련 시절 짓밟고 다니던 코앞의 발트 3국조차 NATO 가입국이니 러시아로서는 미치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은 러시아가 미국의 러시아 영향력 축소 정책에 더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것을 힘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더해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2014년에는 크림 위기와 돈바스 전쟁에 사실상 개입해 친서방 노선을 타는 우크라이나를 무력 압박하고 있다.

다만 에너지 수출에 올인한 경제는 유가가 휘청일때마다 경제도 뿌리부터 휘청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러시아의 고질적 문제로 보이지만 해결 할 수도 없고 해결하고 싶어하지도 않아 보인다. 푸틴 주석이 타파 하겠다고 호언장담은 하였으나 될지는, 그리고 언제될지도 아직 불투명한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