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철학사

철학은 로마제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철학은 로마제국의 사회를 이끌었으며, 내전의 주역이 되기도 하였고, 로마인들의 안식처가 되기도 하였다.

로마 순수철학사

고대 말에서 중세까지

로마의 형이상학사는 기독교 수용인 고대 말에서 중세 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니씨의 그레고리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당시의 일화를 보면 알 수 있 듯, 제국의 거리는 신학적 논쟁에 빠져있었다.

전체도시-광장, 시장, 교차로, 골목길-는 그것으로 꽉찼다. 낡은 옷을 입은 사람들, 환전가, 음식판매자, 그들은 모두 바쁘게 논쟁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돈을 환전해 주기를 요구하면, 그는 출생한 자(the Begotten)과 출생하지 않은 자(the Unbegotten)에 관해 철학적으로 설명한다. 만약 당신이 한 덩이의 빵의 가격에 관하여 묻는다면, 당신은 성부가 위대하고 성자가 열등하다는 방식으로 대답을 듣는다. 만약 당신이 나의 목욕통이 준비되었냐고 묻는다면, 종은 아들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대답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을 받아드림으로서, 제국 지도층부터 일반계층까지, 제국은 형이상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제국의 형이상학은 굳이 다른 지역-아랍, 서유럽-과 달리 고대 그리스의 문헌들을 재발견할 필요가 없었다. 제국 형이상학은 태생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플라톤주의에 기반을 두었다.
제국의 철학은 하느님의 위격을 존재론적으로 분석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제한된 우주의 수명 (제국 학자들이 계산한 우주의 수명을 실제로 제국 달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연속적 창조와 그의 사유, 인식되는 세계를 시간의 구현(이는 후에 하이데로스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으로 본 것 등이 주요 주제들이었다.
하지만, 이는 신학과 직접적 관련이 있으니, 이는 생략하고, 순수히 철학적 주제에 대해서 다루자면, 영혼의 불멸성과 보편자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영혼의 불멸성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하여에서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육신에 분리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마음(nous)는 몸의 특정 부위에 귀속되지 않고, 불멸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마음을 영혼의 일부로 보았던 제국에서는 이는 큰 문제였는데,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관견이었다. 일반적인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불멸하다고 보았으며, 몸과 분리될 수 있는 존재의 형태라고 보았다. 이에,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더 나아가서 영혼 단계설을 제시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즉, 식물의 영혼과 동물의 영혼, 인간의 영혼은 모두 다른 것이며, 인간의 영혼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영원불멸하다라는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보편자에 대한 관심의 경우, 보편자를 세가지로 분류했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서술을 따른 것이다. 1. 개별자 이전에 보편자가 하느님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 2. 개별자 안에 보편자가 있다. 3. 개별자 이후에 보편자는 인간들의 마음에 창조된 것이다. 이는 중세 전반과 중세 후기의 견해가 다르게 갈린다. 중세 전반에는 이 셋을 모두 하나의 관념으로 보려고 하였다. 보편자가 하느님의 마음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마음이 이를 근거로 인식한 것이다라는 기독교적이면서도 셋을 분리하지 않으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 이 시도는 중세 전반에서 받아들여졌으나, 콤네노스 르네상스 도중, 이 문제는 크게 작용하게 된다.
콤네노스 르네상스에서 제국 중앙 학문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노플 대학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반박이 이어졌다.

보편자를 비실체적 존재자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비실체적 존재자가 어떻게 성질로서 인간의 마음에 인식될 수 있는가? 성질은 실체적인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성질이 아니어도, 인간의 마음에서 정의될 수는 충분히 있지 않는가?

이러한 반박에 따라, 논쟁이 오갔으며, 인간의 마음에서 정의된 것이라고 본 인식론적 학파가 논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고, 이들은 합리론의 시초가 된다. 이에 반박해서 실체적 존재자가 아니면, 인간 마음은 인식할 수 없고, 이에 성질이며 실체적 존재자라고 보편자를 규정하였던 이들은 패배해서, 지방에 내려가, 경험을 제외한 아무 것도 의미 없다는 자신들의 사상을 지방의 학교에서 가르치게 된다. 이가 경험론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견해를 따랐던 자들은 헤카시즘의 시초가 되어, 수도원의 학교에서 가르치며, 수도원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즉, 콤네노스 르네상스부터 점차 하느님의 존재를 철학에서 축소하려고 하였으며, 철학과 신학이 분리되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논쟁들은 8년 내전과 몽골 침략,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합리론이나 경험론으로 완전히 자리잡지 못했다. 하지만, 이가 모두 끝난 팔라이올로고스 르네상스 때부터 이가 다시 주요 주제로 도래하게 된다.

근대

팔라이올로고스 르네상스는 혼란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합리론과 경험론 전통의 재발견 및 발전으로부터 시작한다. 합리론 전통을 재발견하고 발전시킨 자는 바로 카르토스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만이 반박 불가능한 명제고 이로부터 이성만을 이용해서 점차 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반대로, 경험론 전통은 지방에서 이어져 나갔는데, 아르메니아의 로코스는 타블라 라사라는 개념을 주창하며, 태어날 때는 백지 상태이고, 경험만으로 지식을 얻는다고 하였다. 합리론 전통이 중앙에서 인기를 끌고, 경험론 전통이 지방에서 인기를 끈 것은, 보편논쟁에서 합리론 측이 승리한 것도 있겠지만, 생존이 직결된 문제에 시달려서 실용적이어야 했던 지방과, 생존에 이에 비해선 덜 직결된 문제에 시달려서 합리적이어도 되었던 중앙의 차이일 것이다.
이러한 두 주장은 아주 큰 대립이 있었으나, 이 둘 모두가 배격한 사상이 있었는데, 이가 바로 형이상학이었다.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이성이나 경험의 대상이 되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생각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 둘의 갈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수용에 대해서 나오게 된다. 경험론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실험적으로 입증하려고 하였고, 이에 실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경험론자는 자연학에서 반-아리스토텔레스적 성향을 띄게 된다. 이에 반해, 합리론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논리 체계가 확실했기에, 자연학에서 친-아리스토텔레스적 성향을 띄게 된다.
이때, 아나톨리아의 갈릴레온이 나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면서 경험론자들을 옹호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갈등은 심화된다.
이 때, 상인들이 서방세계에서 케플러의 연구를 가지고 옴에 따라 더더욱 논쟁이 가속화되었으며, 해당 상인들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서양 통행 금지법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재판을 받게 된다.
마누일 4세는 상인들과 갈릴레온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에 반발한 중앙의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새 황제를 선출시킨다.
이에 마누일 4세는 빨리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피신하여, 아나톨리아 시민들에게 다음을 외쳤다고 한다.

중앙은 합리론에 눈이 멀어, 제국의 공익을 훼손하고, 자신만들의 황제를 옹립하며, 자신들이 제국의 전부를 수용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짐은 지방의 시민들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사는지 알고, 그대들에게는 실용적인 결과가 더 중요한 지를 안다. 그래서 그대들을 대변하기 위해 갈릴레온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짐을 폐위하였다. 이가 과연 제국 전체의 대변인가?

이 연설로 인해,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지방이 뭉쳐, 중앙과 내전을 벌이게 된다.

지방이 군권을 가진 관계로, 제국 내전은 마누일 4세가 승리하였으며, 결국 경험론자들의 우위로 논쟁이 끝나게 된다. 하지만, 노바코메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으로 자연 현상을 수학적으로 기술하자, 합리론 또한 다시 고개를 들게 된다.
하지만 합리론자들은 이전과 다르게 경험이 의미 없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바코메의 행적을 보고 경험도 학술적 가치가 이씀을 인정했다. 이에, 칸토스가 나타나, 선험적 이성에 대하여 논의하였고, 선험 종합명제라는 개념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다음 같이 말하였다.

모든 것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경험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이에 철학의 목적이 이성의 한계를 이성으로 정하는 것이라고 칸토스는 주장하였으며, 칸토스의 철학이 주류 철학이 된다. 칸토스를 계승하였다고 자칭한 헤겔로스는 관념을 기반으로 철학 역사상 가장 큰 체계를 구상하였다. 그는 관념을 기반으로 현실에 대입하였으며, 헤겔로스의 법철학은 제국 대칙령과 민법의 완성에 큰 도움을 끼치게 된다.
이후 제국 철학은 헤겔로스주의와 신칸토스주의로 나뉘게 되며, 자신들 모두 칸토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성 찬미적이었으며, 모든 것은 사회 발전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론에 사로잡히게 된다.
루소스의 생존권 문제를 기반으로 노동자 인권 문제도 해결됨에 따라 이 낙관론은 전 계층에게 공유된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세계 1차 대전과 함께 종식되게 된다.

현대

세계 1차 대전의 참상을 본 이들은 이성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미아페트라의 상대성 이론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외치던 철학계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에 현상으로 돌아가자는 후설로스의 현상학이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물론 프레게로스가 1차 논리를 발견하는 등, 분석 철학 또한 제국에서 탄생하였으나, 제국보다는 영국과 독일에서 큰 반향을 얻었고, 제국은 실제적 일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었던 후설로스의 현상학이 발달했다. 이 후설로스의 현상학으로부터, 하이데로스의 신해석학이 나타나게 된다.

제국은 존재론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하이데로스의 신해석학에 큰 지적 쇼크를 받게 된다. 그리고 하이데로스가 부활시킨 중세의 시간에 대한 고찰은 너무나도 획기적이었다. 하이데로스의 신해석학은 제국 법철학,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실존주의의 경우, 현상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제국에서는 그리 영향이 적었는데, 이는 의식 철학적 경향 때문이었다. 이는 주로 프랑스에서 성행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 구조를 파악하고, 구조의 해체를 외쳤기에, 보수적이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자신들의 자존심으로 가진 제국 시민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기독교의 해체라는 것은 제국 자존심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제국의 중심 철학은 아직도 현상학과 해석학이다. 후설로스의 초월적 현상학, 하이데로스의 신해석학, 그리고 현상학과 신해석학에 영향을 받은 가다모스의 해석학까지 이들 모두가 제국의 중심철학이다. 현대에는 현상학과 해석학에 분석철학적 방법론을 도입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발견되며, 이에 따라, 제국 철학의 미래는 밝다.

정치철학사와 사회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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