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내전

루마니아 내전
2차대전[3]의 일부
교전국

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1]
소련

루마니아 국민군단국가
독일[2]
지휘관

미하이 1세

이온 칼리네스쿠

이온 안토네스쿠(~1944)[4]
니콜라에 타타르스쿠(1944)[5]
군대

루마니아 민주수호군

루마니아 철위대
병력

21만+5만(소련군)

19만 5천+3만 5천(이탈리아군)
피해 규모

사망 10만명, 부상 14만명. 민간인 피해 1만 5000여명

사망 14만명, 부상 45000명, 포로 4만명.

개요

루마니아 내전(루마니아어:război civil român 러즈보이 치빌 로믄)은 1944년 1월 1일부터 1944년 5월 24일까지 루마니아에서 일어난 내전을 뜻한다.
이는 루마니아 사상 가장 피비린내나는 내전으로 기록되었으며 공식적으로 사상자는 총 550만명에 달한다. 그 어떤 정권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다, 심지어 그 차우셰스쿠 정권에서도.

경위

2차대전 패색 역력

1944년, 추축국의 전쟁 패전은 사실상 확실시 되었다, 이 상황에 이르자, 루마니아 내에서도 정권 타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국민군단국가는 이를 진압했지만,민중들은 루마니아 민주수호군을 결성, 4년째 감금되었던 미하이 1세를 구출한다.[6]

내전의 시작

내전의 시작은 민주수호군의 키러즈시 장악으로 시작된다, 1944년 1월 1일, 키러즈시와 몰도바주 대부분을 장악한 민주수호군은 자신이 정통 루마니아 정부라 선언,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국민군단국가에 선전포고를 선언한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

몰도바 주를 장악한 민주수호군은 손쉽게 부코비나를 장악한다, 동시에 도부루자주에서도 봉기가 일어나고 민주수호군의 통치구역이 된다. 그들의 첫 전투는 브러일라 시 공방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민주수호군은 국민군단국가군을 격파, 브러일라 시를 장악한다, 이 전투는 문테니아, 즉 수도권 장악의 첫 걸음을 의미한 아주 상징적인 전투였다.
그들은 이후 2월 20일에 문테니아주 절반을 장악, 부쿠레슈티시로 진격하나, 이 전투에서 뼈아픈 손실을 겪고 후퇴한다.
3월 1일, 아르데알과 바나트를 장악한 민주수호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국민군단국가에게 치명타를 날릴 준비를 시작한다.

부쿠레슈티 전투

3월 10일 새벽 5시, 민주수호군은 부쿠레슈티 시를 습격, 5일에 거친 전투 끝에 이온 안토네스쿠를 체포하고 부쿠레슈티 시를 장악한다, 국민군단국가는 수도를 기우르기우시로 옳기게 된다.
그 후의 루마니아 국민군단국가의 지도자는 니콜라에 타타르스쿠가 되었다.

힐렌 산 전투

국민군단국가는 4월을 전후하여 전투에서 패배가 계속된다. 그들의 도시 거점은 힐렌산의 안톤 시였는데,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민주수호군단은 그들의 마지막 전투를 개시한다.
이 전투는 10일간 계속되었고, 니콜라에 타타르스쿠의 사망으로 병력이 항복하면서 사실상의 내전은 끝나게 된다.

내전의 끝

그후, 5월 24일, 남아있는 게릴라까지 소탕한 루마니아 왕국군은 연합국에 가입하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1. 집적참전. 1월 1일부터 3월 2일까지는 루마니아 민주수호군단이었다
  2. 정확히는 독일제 무기를 국민군단국가가 사들였으며 독일은 공식적으로 루마니아 국민군단국가를 도와준 적이 없다. 솔직히 전쟁이 급한데 왜 도와주겠는가.
  3. 비록 2차대전과는 별 상관이 없긴 하지만 파시스트 정부군과 민주군이 서로 독일, 소련제 무기로 싸웠으니까 어찌보면 2차대전의 축소판이라고 할수있을것이다.
  4. 부쿠레슈티 전투 도중 루마니아 민주군단에게 체포되었다.
  5. 힐렌 산 전투 중 사망했다.
  6. 미하이 1세의 도주가 성공한 배경에는 논란이 일고있다, 그 감옥에는 경비가 삼엄했는데 어떻게 민주수호군이 그를 구출했을까, 학계에서는 대부분 "감옥 경비도 민주수호군에 가담했다"라는 설을 채택하고 있으나 아직도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