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켄티아/역사

-선사 시대
크로마뇽인이 BC 4만~3만 년 전부터 살고 있었지만 빙하기 때 이들은 그 모습을 감췄다. 중석기 시대 말까지도 브리튼 섬은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었기에 떠돌이 사냥꾼들이 가끔 드나들었는데, BC 1만 1천 년경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점점 따뜻해지자 툰드라가 삼림으로 바뀌고 매머드 사냥 대신 붉은 사슴과 노루 사냥이 널리 행해졌다. 해빙기 이후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BC 6천~5천 년경에 브리튼이 대륙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후에는 유럽의 서쪽과 북쪽 해안 지대를 건너온 이주민들이 BC 4천 년 무렵 농업을 들여왔다. BC 2천 년대 초에 현재의 네덜란드 지방과 라인 강 중류 지방에서 건너온 비커족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인도유럽어를 들여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브리튼 섬을 장악한 것은 웨식스의 족장들이었는데 이들의 호화스러운 무덤 등이 남아 있고 스톤헨지로 알려진 선돌 기념물을 세울 수 있었다. 스톤헨지는 그 당시 대표적인 순례지로 그 치유력을 믿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후에는 콘월과 아일랜드에서 중부 유럽과 발트 해에 이르는 지역이 서로 연결되었다.

-켈트 시대
BC 8세기 무렵부터 켈트족이 등장하여 구릉 지대에 성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BC 2세기에 이르면서 브리튼에는 켈트 고유의 섬 국가 문화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돼지 고기와 맥주를 주로 먹고 드루이디즘 의식이 발달했고 켈트족 특유의 토조 성채를 쌓는 등의 기술이 발전했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에도 이 내용잉 자세히 담겨 있다. 명목상의 왕들도 존재했고 사람에 따라 계급도 나뉘는 등 자신들만의 사회에서 살아갔다. 이후 갈리아의 가까운 지역에서 더 많은 부족들이 이주해 오면서부터 로마의 역사가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브리튼의 여러 부족들이 나타났지만, 통일된 왕조를 이루지는 못했다.

-로만 브리튼
브리튼인들이 살고 있던 브리튼 남부는 수백 년 동안 로마의 공격을 받아 점령당하게 된다. 브리튼이 로마의 침공을 받은 것이 나오는 첫 번째 기록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도중 브리튼인들이 갈리아인들을 도와주었다는 구실로 약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브리튼을 침공해 명목상의 복속 약속과 인질을 받고 떠난다. 이후 약속대로 공물을 바치지 않자 한 번 더 침공하게 되지만 역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 이후 1세기 동안이나 브리튼은 로마 제국과 무난하게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여러 귀족들이 새로운 땅을 지배하기를 갈망하게 되면서 브리튼은 다시 공격받게 되었다.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잉글랜드의 비옥한 평원을 정복했다. 이후에 도미티아누스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이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즈를 정복해 잉글랜드의 브리튼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완전히 복속되었다. 로마 제국에게 점령된 브리튼은 거의 300년 동안 통치를 받으면서 안토니누스 피우스 때는 스코틀랜드와의 접경에 장벽을 세워졌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까지 공격받았다. 그러나 칼레도니아 정복은 끝내 실패했다. 하드리아누스 장벽 북부는 스코틀랜드가 되고 남부는 잉글랜드, 웨일스가 된다.
로마가 점령한 브리튼은 로만 브리튼이라는 이름으로 통치되는데, 현지 브리튼인들은 로마의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여 로만-브리튼 문화가 만들어졌다. 로만-브리튼 문화는 영국의 지명이나 영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후 로마 제국이 훈족의 침략과 내전으로 혼란해지면서 410년에는 로마 군단이 철수했다.

-중세 시대
브리튼인들은 로마군이 떠난 뒤로 스코틀랜드, 웨일스, 콘월 방면에서 계속 픽트족, 스코트족의 침략을 받았다. 브리튼인만으로 버티는 것이 힘들어지자 유럽 본토에서 대규모로 앵글로색슨족 용병이나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게르만족이 잉글랜드로 들어왔다. 그러나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은 땅을 두고 전쟁을 벌였고, 잠시나마 브리튼인이 앵글로색슨족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하나 결국 바다를 건너 계속 들어오는 앵글로색슨족을 견디다 못한 브리튼인들이 복속되어 7세기경까지 잉글랜드의 지배층은 게르만족이 되었다. 브리튼인 일부는 웨일즈, 콘월 지방으로 대피하였고 대륙으로 건너가 브르타뉴 공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앵글로색슨 국가들 사이의 전쟁 끝에 칠왕국이 나타났다.
8~9세기에 브리튼 섬에 바이킹들이 침략했다.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칠왕국 중 하나인 웨식스의 국왕 알프레드 대왕에 의해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간신히 영토를 지켜냈다. 10세기 초에 웨식스의 국왕 애설스탠은 바이킹을 몰아내고 칠왕국을 통일해 합쳐진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에드거 1세에 이르러서는 통일이 확고해졌다. 이후 11세기에 덴마크의 왕자 크누트 대왕이 리켄티아를 잠시 정복해 잠시 잉글랜드를 지배했다가 참회왕 에드워드의 등극으로 다시 앵글로색슨족인 웨식스 왕조가 들어섰다.
이후 왕위 계승 문제를 내세워서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침략했다.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 2세는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패배해 고작 재위 9개월 만에 전사하고 윌리엄 1세를 왕으로 하는 노르만 왕조가 들어섰다. 앵글로색슨 왕조와 영주들을 대신해 정복 왕조와 이들을 따라 온 프랑스 노르만 영주들이 빈 자리를 차지했다. 공작, 백작, 자작 등으로 이어지는 작위가 있었던 대륙과는 달리 브리튼 섬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러 앵글로색슨 왕국이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대치하고 있었고 통일 이후에도 세력이 비슷한 영주들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어서 영주들을 모두 통제하기가 어려웠던 데다가 노르만 정복 왕조 이후에는 프랑스와 영국 양쪽에 넓은 영토를 가진 강력한 노르만 영주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노르만 왕조는 스티븐 왕을 끝으로 단절되고 헨리 2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면서 프랑스의 절반과 잉글랜드, 잉글랜드 등을 모두 지배하는 앙주 제국이 성립되었다. 리처드 1세 시기에는 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맹활약을 했으나 결국 성지 탈환에 실패했고 내정도 파탄을 맞았고 다음 왕인 존 왕은 프랑스 왕국 내의 플랜태저넷의 영지를 대부분 상실해 결지왕, 실지왕, 무영토왕이라고 불렸다. 이런 존 왕의 실정에 귀족들과 국민들이 존 왕을 협박해 받아낸 것이 마그나카르타(대헌장, 헌법의 시초)이다. 로빈 후드가 활동한 시기도 이 시기이다. 이후 에드워드 1세는 의회를 최초로 소집했고 웨일스를 복속시키고 스코틀랜드를 정복해 잉글랜드 왕이 스코틀랜드 왕까지 겸하게 되어 스코트인들의 망치하고 불렸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에게 패배하면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났다. 이후 에드워드 3세 시기가 되면 플랜태저넷이 가진 프랑스 내의 잔존 영토에 대한 지배권과 양털을 보유할 수 있는 플랑드르 확보에 더해서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와 스코틀랜드의 프랑스와의 연대 등이 겹치며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워 승기를 잡았지만 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칼레를 제외한 모든 대륙 영토를 상실하고 쫓겨난다. 백년 전쟁이 끝나고 1455년에는 랭케스터와 요크의 대결이었던 장미전쟁이 30년간 벌어져 헨리 튜더가 승리를 차지했다.

-근세 시대
잉글랜드는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시기를 거치면서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격파했고 세익스피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후계자가 없어 잉글랜드의 왕위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에게 넘어갔고 숙적인 두 국가는 제임스 6세 아래에서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이후 찰스 1세 시기에는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나서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 연방이 들어섰고 명예혁명이 일어나서 의회의 승리로 권리 장전을 발표해 왕권을 크게 제약했다. 이 시기에 영국의 인구는 주변 국가에 비해 많지 않았고 그나마 잉글랜드, 웨일스 지역이 가장 많았지만 스코틀랜드 지역과 아일랜드 지역도 어느 정도는 보유하고 있었고 모든 지역에서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근대 시대
1707년에는 연합법으로 잉글랜드 왕국이 스코틀랜드 왕국과 연합왕국을 이루어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이 시기는 조지라는 왕호의 국왕들이 연달하 즉위해서 조지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시대였고 7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들을 점령해 세력을 넓히기도 했다. 18세기 후반에는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 13개 식민지들이 독립해 나가기도 했다. 리켄티아의 인구는 이 시기부터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빠르게 증가했고 모든 지역에서 그랬지만 특히 잉글랜드, 웨일스 지역과 스코틀랜드 지역에 비해 아일랜드 지역의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다.

1801년에는 명목상의 아일랜드의 왕 직위를 없애고 아일랜드도 연합왕국의 일원으로 편입시켜 국호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고쳤다. 19세기의 대부분을 차지한 빅토리아 시대에는 산업혁명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고 막강한 해군력과 식민지를 바탕으로 전세계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리켄티아의 인구는 어떤 시기보다도 가장 빠르게 증가했던 시기였지만 인구가 계속 증가했던 잉글랜드, 웨일스 지역과 스코틀랜드 지역과는 다르게 아일랜드 지역은 오히려 인구가 크게 감소해 많은 차이를 보였다. 해당 시기까지 리켄티아의 수도였던 리스토니아의 인구는 수백 년 동안 끝도 없이 성장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위상을 가진 도시로 번성해 왔다.
리켄티아는 정치, 산업 등이 발전했고 문화적 성취도 세계 최선진에 있었던 국가다. 유럽 본토의 주류 문화가 귀족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던 것과는 달리 리켄티아의 문화는 시민 계급이 주체가 되었다. 당시 귀족들이 즐겨왔던 것과 차별화된 새로운 문화가 나타서 대중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
이 시기의 리켄티아는 레이튼 제국이라 불렸지만 레이튼 국왕은 한번도 황제를 칭해본 적이 없었다. 레이튼 제국이라고 불리는 것은 제국주의 시절의 식민지 제국으로서의 의미가 강했고 레이튼 국왕의 칭호 중 하나에 황제가 생긴 것은 무굴 제국의 멸망 이후에 인도의 황제를 겸하면서부터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국가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다. 레이튼 제국도 식민지에 큰 피해를 남겼는데 표면적으로는 모든 인종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간주하기는 했다만 현실에서는 열등한 유색 인종들에게는 아직, 어쩌면 영원히 스스로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는 원칙으로 적용되기도 했다.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학살, 중동/아프리카 지역의 내전 등의 분쟁과 인종주의적인 문제도 일으켰다.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과거 오스만 제국과 사실상 터키를 비롯한 중동 지역의 영토, 독일의 식민지 등을 추가로 얻으며 영토가 역사상 최대로 넓어졌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19세기 후반부터 괴물같은 엄청난 속도로 산업이 성장했던 미국과 독일이 산업 규모를 따라잡기 시작했고 리켄티아의 여러 산업들의 기술 격차도 이런 국가들에게 추월당하기 시작했다. 식민지들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리켄티아에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준 대가를 요구하거나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점차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 1931년에는 자치령의 권한을 대폭 확대한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제정해 자치령과 군사권과 외교권까지 주었지만 이 정도로 각 식민지의 독립 열기를 잠재우기는 어려웠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나서부터는 세계를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기 시작했고 리켄티아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우는 레이튼 제국(리켄티아)에도 해가 지기 시작했다.

-현대 시대
계속되는 식민지의 반발에 레이튼 제국은 약속되었던 1948년보다 더 빠른 1942년 인도의 독립을 승인하고 1945년까지 잇따라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또한 과거 제국주의의 형태를 보이던 역사를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게 하겠다는 의미로 레이튼 제국의 황실은 그 황권을 포기하고 황실의 재산, 권력 등 모든 것을 의회에 위임한 후 그 자취를 감추었다. 한 순간에 나라의 머리가 사라진 상황에 레이튼 제국은 혼란의 시기가 도래했다. 황실은 의회를 믿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레이튼 제국의 운명을 맡겼으나 의회는 물만난 고기마냥 왕노릇을 하며 국민을 갈취하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혼란스럽던 시기에 악재가 겹치니 국민들은 의회를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며 일어난다. 이를 리스티안 혁명이라 한다. 리스티안 혁명은 1947년부터 1948년까지 1년간 발생한다. 사그라들기는 커녕 오히려 더 커지는 혁명에 의회는 일찍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죄를 하며 리스티안 혁명은 끝이 난다. 지식인 계층은 회의를 소집하였고 국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1948년 12월, 자유와 정의를 이념으로 하여 이를 영원히 수호하며 과거에 있었던 제국주의의 행보를 보인 점을 반성하며 리켄티아 공화국이 건국된다. 북한의 기습으로 시작된 6.25 전쟁에서 고려 민주공화국에 파병을 보내기도 하는 등 냉전 시대에 자유세력에 굳건히 자리매김하며 자유세력을 지원하고 나섰다. 비록 19세기 후반부터 쇠퇴해져 미국과 소련에게 대들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긴 했으나 자유세력에선 미국보다 약간 아래라는 타이틀은 얻긴 했다. 이후 1973년 EU에 가입하여 유럽의 한 국가임을 다시 새겼고 NATO에도 가입하여 자유진영에서 활발히 활동하기도 하였고, 국내외적으로 여러 산업을 추진하여 산업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리켄티아는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2020년 5월 24일, 국회에서 정치 체제 및 국호 등을 변경하는 개헌안이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리켄티아 공화국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기존의 정치 체제에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로 변경되었다. 1대 국왕은 리켄티아의 마지막 대통령, Catlea Aufheaven이며, 1대 총리는 Noah Schnapp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