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나라

청륜청엽기 흰색버전.png
바람나라 제 2왕국
永風王國 | Baramkönigsreich
바람나라 국기.png청륜청엽기.png
국기국장
당신의 바람이 세상을 바꾸는 강한 바람이 되다
상징
국가손을 맞잡아
국화산수유
국조뜸부기
국가문장청륜청엽기
면적
32,8750 km²
바람나라 지구상 위치
바람나라 지구상 영토.png
지역
수도영안(永安)
최대도시영안(永安)
인문환경
인구총인구26,238,521 명
민족구성00인 00.0%
00인 00.0%
인구밀도79.8명/km²
연호倥斂
공용어한국어(바람식 한국어)
공용 문자한자
한글
독일어
종교크리스트교 38%
토착불교 12%
무종교 45%
기타 2%
군대바람나라 국가방어군
정치
정치체제왕국
입헌군주제
의원 내각제
국가요인청륜청엽기 흰색버전.png
국왕
바람 왕실 문장.png
Ethelbert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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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
李鎬 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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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李鎬 卿
여당무소속
경제
경제체제국가주도 자본주의
명목 GDP전체 GDP$1조 1,742억
1인당 GDP$4만 4,752
GDP(PPP)전체 GDP$1조 1742억
1인당 GDP$44,752
화폐공식화폐바람국 환(BH)
ISO 4217BRK
역사
B.C.1967 건국신화
AD.1712~1886 영풍국 시기
AD.1945 바람나라 출범
단위
법정연호서력기원(그레고리력)
시간대UTC (UTC+9)
도량형SI 단위
ccTLD
.br
국가코드
BR

청륜청엽기.png 개요

바람나라는 필리핀해에 위치한 가상국가이다, 우수한 수준의 군사력과 문화가 특징이다.

청륜청엽기.png 역사

선사시대

바람나라가 위치한 진명도에 인류가 거주한 것은 기원전 2천년전으로 추정하며 그 때는 동남아에서 건너온 선주민들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부족국가를 이루고 어업과 기초적인 농업을 일구며 살았고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고립된 문명이었음에도 여느 문명들 못지않게 찬란한 문명과 수준높은 문화와 기술을 일궈냈다. 또한 폴리네시아의 다른 섬과 교류한 흔적도 발견되었으며, 카누로 보이는 물체와 타 섬과 주고 받은 선물이 그것이다. 그러나 400년경을 정점으로 인구수는 줄어들었고 결국에는 700년경 한명도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된다. 많게는 십만 명으로 추정되는 바람나라의 선주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지금도 인류사의 주요 미스테리로 거론된다. 현재도 많은 인류학자들이 바람나라를 방문해 선주민들의 흔적을 찾고 있으며, 박물관에 선주민들이 거주했던 움막의 기둥석들과 계단식으로 쌓여진 제단, 마스타바형 무덤, 물고기 조각 등이 보전되어 있다.

풍운국

바람나라에 문명 국가가 들어서게 된 시기는 장보고와 그의 부하가 진명도로 피신한 847년부터로 본다. 846년 2월 청해진에서 떠난 한 무역선이 풍량에 의해 진영도에 닿았다. 3개월 후 해당 무역선은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왔고, 그곳의 선원들은 장보고에게 이를 보고한다. 선원들은 남방에 거대한 무인도가 있다고 했고 둘레를 7일 밤낯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한편 장보고는 당시 신라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왕위다툼에 휘말린 상태였고, 장보고가 위협이 되리라 생각했던 조정은 염장을 보내 장보고 암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장보고는 약간의 경상만을 입고 몸을 숨겼으며, 신라조정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확인하고 사병을 모은다. 조정은 장보고가 사병을 모은다는 사실을 반란으로 판단해 정부군을 보내 청해진을 토별하려 하였다. 위기에 빠진 장보고는 몇달 전 실종되었던 무역선이 닿았던 섬을 생각해 냈고, 자신들의 사병을 비롯한 청해진의 물품, 부하 2,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피신했으며 이 대이동을 淸府遷風(청부천명)(청해진 본부를 진명도로 옮김) 이라고 부른다.

4개월에 달하는 대이동 끝에 장보고와 그의 사병들은 진명도에 닿았다. 진명도에 도착한 그들은 10년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청해진 시절보다 더 거대한 무역거점인 신청해진(新淸海鎭)을 건설하였고, 장보고 세력은 실전 경험과 우수한 장비로 원주민 세력을 토벌하고 규합하여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후 장보고는 본인이 직접 왕조를 개창하였으며 847년 11월 풍운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신청해진은 '풍운항(風運港)'으로 이름을 바꾸고, 풍운국의 수도가 된다.

풍운국은 원주민들과 동화를 시도하며 융화정책을 펼치며 원주민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탄압하는 양면정책을 펼치며 원주민들을 융합했다. 그 결과 현재 원주민들은 한국계에 섞여들어갔으며 언어도 한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원주민과 한국계의 차이는 거의 사라져 구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뒤 풍운국은 주변의 모든 부족들까지 복속시키며 진명도와 그 부속 도서 전역을 통치하기에 이른다. 진명도의 통일 이후 진명도는 문명의 발전을 이뤄내기 시작하였다. 장보고가 풍운국을 세우자, 고대 수준에 머물던 진명도는 급격히 발달하여 문명 수준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신라는 청부천명 후 초기엔 군대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빈번히 실패하고 결국 토벌을 포기한다. 이후 풍운국은 초기 대륙과는 거리를 두며 바다를 천혜의 요새로 삼으며 침략에 대비해왔으며 여엇한 동아시아의 주류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조정의 제한이 없어지자 더욱 더 자유로운 무역을 해가며 신청해진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동아시아의 무역 중심지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풍운국의 장씨왕조는 대부분이 선군이었고, 무역항으로 경제가 성장했으며 항구를 해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해군은 더욱 더 강해졌다. 그러나 풍운국에도 크나큰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행정력의 미약함이었다. 원주민을 융합하여 진명도를 통일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여전히 관심과 개발은 무역항과 그 주변마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때문에 거의 버려진 땅 취급 받던 지방은 개척사업을 위해 파견했던 '토건단'이 분열하여 각각의 파벌로 나뉘어 지배했다.

이후 분열된 토건단 각각의 파벌들은 통합과 전쟁을 거치며 5개의 커다란 나라로 나뉘었는데, 이 나라들이 각각 동오마, 약산국, 백서노, 배동국, 풍운국이었다. 이 5개의 국가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진명도를 나누어 다스렸고, 각각이 비등한 힘을 이루어서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편, 최초로 섬을 통일했던 국가인 풍운국은 내부에서는 12대 왕인 '반례왕'이 승하 한 이후부터 50년동안 7명의 왕이 통치를 하는 등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고, 외부에서는 해군에만 치중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약했던 지상군 때문에 바로 위에 위치한 약산국에게 많은 침략을 받아왔다. 약산국의 계속되는 침략에 무역에는 차질이 생겼고, 백성들은 고통받았으며, 풍운국의 운명은 다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게속되자 1213년 풍운국의 24대 왕인 '상고천왕'은 약산국 너머에 있는 백서노로 가 항복한다. 백서노와 풍운국이 통합 된 이후, 약산국은 백서노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이에 약산국은 백서노의 동쪽과 동남쪽에 위치한 배동국과 동오마와 동맹을 체결하고, 백서노를 내외에서 공격했다.

1223년, 백서노와 약동마 동맹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을 '진명통일전'이라고 한다. 초기에는 동맹세력이 우세했으나, 이후 배동국의 상모성을 함락시키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결국 1243년 백서노가 진명도 통일을 이룬다.

대평국

통일을 완수한 백서노는 국명을 대평국(大平國)으로 정하고 통일국가로서의 발돋움을 시작했다. 이후 혜민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통일된 국가를 바로 다잡기 위하여 개혁 정책을 실시하며 국가발전을 추진했다. 1530년 네덜란드와 스페인 상인들의 배가 진명도에 상륙하게 되고, 당시 왕 현장왕은 그들과 교류해 서방과의 교역을 시작한다. 또한 양교촌(洋交村)이라는 구역을 만들어 서방 상인들의 거주지를 만들어주었으며 1년에 2번까지 왕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결과 대평국은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여 개혁을 이뤄내고 발전도 이뤄냈으며 당시 명, 조선, 일본, 동남아까지 사절을 보낸 기록이 남아있다.이후 현장왕의 뒤를 이어 집권한 국상왕은 1532년부터 1460년까지 집권하며 중앙집권의 확립, 지방 호족의 수도 거주 정책, 불교 장려, 지방 호족의 반란 제압으로 통일 국가 유지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국상왕이 죽은 뒤에도 한동안 대평국은 번영을 누렸는데, 1500년에는 바람나라 역사 연구에 중요한 서적인 《대평초지》가 편찬되기도 했다.

대평국 시기에도 중국-조선-일본과 서양 세력을 잇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아시아 지역의 해양 허브국가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의 교류도 번성했다. 당시 중계무역으로 뻗어나가는 대평국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만국호량의 종(1528년)에 적힌 명문이 있다. 1534년 즉위한 초의왕은 개혁적인 성향으로 발전을 이끌었다. 명, 일본 같은 이웃국가와의 관계보다 서양과의 관계를 우선하게 하여 다른 보수적 아시아 국가와 차별성을 두었으며 조총과 갈레온 등 포르투갈에게서 신식 군사무기와 과학기술을 수입하여 군사력과 기술력을 발전시켰다. 이후 서방 국가들과 통상우호조약 등을 맺었으며 항구를 개방해 서방인들의 거주지역을 만들었다. 유럽에서 대항해시대가 시작되어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업과 선박수리업 등도 발달했으며 대평국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통편의를 제공하고 현지 사정을 알려주는 기구도 있었다. 이렇게 대평국은 유구가 발전을 이룬 중요한 시기이다.

신묘왜란과 영풍국

1710년, 센다이 번 영내에 대평국의 선박이 좌초했고,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명령에 따라 1611년에 대평국에 송환되었다. 이후 대평국은 사쓰마를 통해 사은사 파견을 반복해서 요구했지만, 대평국은 끝까지 이에 응하지 않았다. 1711년 9월에는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다시 대자사의 승려 현운 등을 보내어 대평국에게 사은사 파견을 응하도록 요구했지만 폐왕은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모욕을 하며 사자로 온 승려를 욕보였다. 이렇게 하여 결국 대평국을 공격하라는 어지가 사쓰마에 내려오게 되었다. 사쓰마 군은 대장군에 츠타무 히사타카를, 부장군에는 히타나 마쓰무네를 임명하고, 총 5000명, 선박 80여 척을 동원했다. 그들은 1712년 2월 26일에 야마카와 항에 집결하여 순풍을 기다려 3월 4일 인시(새벽 4시)에 출항했다. 그러나 일본은 대평국의 발전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으며 사쓰마의 침공 소식을 들은 대평국은 즉시 반격에 들어가 신묘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평국은 이 침략을 오히려 기회로 여겼는데, 서방의 문물을 받아들여 질적으로 우수한 군대로 성장한 대평국군의 성능을 볼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후 대평국은 서양에서 수용한 장비와 전술 등을 사용하여 해전에서 유리한 고점을 차지하였으며, 상륙한 사쓰마군도 격퇴하는데 성공하여 사쓰마의 퇴각을 받아내어 1612년 5월 28일, 사실상 승전하였다. 신묘왜란의 승전으로 바람나라는 '바람나라 사람'이라는 국가정체성 확립과 국민들의 단결을 불러일으켰으며, 자주성을 지켰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 폐왕이 강제로 퇴위되고 신묘왜란에서 공을 세웠던 장군 태조 이검무가 왕위에 즉위하여 영풍국이 성립되었다. 태조는 신묘왜란으로 일본을 불신하게 되었으며 조선, 중국과의 교류를 조금 더 중시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신묘왜란에서 서양 무기의 위력을 알게되어 서방과의 교류를 확대하여 당시 가장 서구화되고 개혁적인 국가로 성장하였다. 이후 영풍국 시기부터는 중국을 섬기고, 조선과 연대하고, 일본을 경계한다는 친중연조경일(親中聯朝警日) 정책이 외교 국시로 자리잡았다. 그렇게 영풍국은 아시아에서 수준급의 과학기술력과 자본력,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유럽의 중국-일본 무역 항로의 이점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이 되어 세계는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 혁명, 시민운동을 거치며 자유를 갈망하던 시기가 되었고 영풍국도 이를 피할 순 없었다. 서구와 교류하던 영풍국에도 서구의 시위, 민권운동 소식이 들어갔으며 젊은 신하들 사이에서 서양의 민권운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게다가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하자 자극을 받은 개혁파를 중심으로 민중 교육 운동과 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의식 수준이 높아졌던 민중들도 민권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어났던 운동을 '입헌정우 운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수파들은 서구식 의회제도와 민권운동에 부정적이였으며 1874년 당시 국왕이던 의종에게 입헌정우 운동을 내란 음모라고 날조하게 되고 수많은 개혁파 신하와 인사, 민중을 처형하고 처벌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이를 '계유사화'라고 한다. 그러나 계유사회에 반발한 민중들의 시위는 더 거세졌으며 영안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계유민란"까지 일어나게 된다. 의종은 정말로 개혁파들이 반란을 하려 한다고 인식하고 더 큰 진압을 명하게 되나 군부에서도 민권운동을 지지하는 계파가 있어 오히려 군부가 갈라져 내전이 일어나는 일이 발생한다.

영풍국의 내전은 수도 영안 및 그 주위 수도권을 보수파와 그를 지지하는 군대가 점령하고 남부 권역을 개혁파와 그를 지지하는 군대가 점령한 양상으로 이어졌고 두 세력 모두 팽팽하게 맞섰다. 이를 본 미국, 대영제국, 독일 제국은 국력이 쇠퇴하던 영풍국의 이권을 노리려 하였고, 이권을 획득하기 위해 충돌하였다. 특히 독일은 영풍국에 눈독을 더 들였는데 19세기 제국주의 확대의 시대, 통일 독일제국에서도 다른 나라들과 같이 식민지 획득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것은 독일이 영풍국에 관심을 가지는데 크게 영향을 주었다. 당시 세계의 비유럽 시장 안에서 영풍 시장은 요지라고 판단되었고, 영풍 점령은 열강 독일의 사활을 건 문제가 되었다.

미국과 영국, 독일 제국 등 열강은 개혁파를 이용하기로 하고 개혁파에게 지원을 해 주었다. 그 결과 개혁파가 승리하여 의종은 퇴위 후 망명하였으며, 개혁파에 의해 연종이 추대되었다. 연종은 개혁파와 함께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고 민추원(民追院) 설립, 15개조 개혁안 수용 등의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개혁파들은 친미파, 친영파, 친독파로 분열되었고 영풍국은 미국과 영국, 독일 제국의 이권 경쟁터가 되었다. 연종은 세 국가의 이권 경쟁을 이용해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1898년 미국이 필리핀을 점유하며 영풍국까지 개입 할 명분이 사라지자 미국은 영풍국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으며 영국도 다른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며 영풍국에서 손을 뗐다. 결국 남은 독일 제국이 영향력을 더 확대하였으며, 친독파들을 양성했다. 연종은 독립을 쟁취하려 했으나 이미 민추원과 내각을 친독파들이 장악하게 되어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있던게 없었다. 그 결과 1900년 영풍-독일제국 보호조약을 거쳐 1903년 영풍-독일제국 합병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영풍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져 독일령 진명도로 전락하였다.

식민지배 시기

독일 제국은 1903년 식민지청을 설치했고 독일령 영풍이라는 이름을 붙여 진명도를 다스렸다. 독일은 진명도에서 무역, 의료 등에서 순조롭고, 모범적인 식민지 만들기라는 원칙을 세웠다. 독자적인 통화를 구축하여 엄격한 금융제도, 수출입 관세의 자유화, 원주민으로부터 토지 매수와 측량으로 토지를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부두나 도크의 정비, 엄격한 유럽풍 건축으로 조성한 거리풍경, 구획조성, 가로수 정비, 주위의 임야 조성, 상수도와 하수도 구축, 병원이나 초등학교 설립 등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식민지배는 겨우 15년밖에 이뤄지지 않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연합국에 속한 일본 제국의 군대가 영안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진명도를 점령했다. 1919년 전쟁이 끝나고 동년 6월 28일, 독일은 연합국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베르사유 조약 제119 조는 "독일의 모든 해외 영토 및 이권을 연합국 이사국들에게 양도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독일 제국은 해체되고, 독일 제국의 해외 영토는 연합국에 속한 각국에게 분할되었다. 그로 인해 진명도에서의 독일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진명도는 일본 제국이 점령하였고 지배권을 요구함에 따라 일본 제국에게 다시 분할되며 새롭게 일본 지배가 시작된다.

일본은 영풍총독부를 설치한 뒤 독일과 달리 진명도의 주민들을 각종 부역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새로히 발견된 구아노 광산의 소유권을 얻은 광산재벌 구하라(히타치의 창업자)는 혹독하게 풍국인들을 다뤘다. 결국 이러한 억압으로 인해 "위대한 해상 민족이던 우리가 왜 지금 일본에게 지배를 당해야 하는가"라는 민족주의가 대두되었고 이는 1924년 민족주의 운동으로 표출된다. 한국의 3.1 운동의 영향을 받은 비폭력운동으로 풍국인들은 해상 민족의 기상을 세우고 독립을 쟁취하자고 가두행진을 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불과 5년전에 벌어졌던 3.1 운동으로 가뜩히나 심란한 상황에 일본군은 더욱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결국 학살극까지 가서 당시 일본군은 이를 진압이라 하지 않고 비인사냥이라 칭하는 악랄함을 보였다.

결국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풍국에서 근무하던 프랑스인 교사에 의해 전세계에 폭로되었다. 일본은 맹비난에 직면한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풍국인의 인권대책을 수립했으며 일본령 조선에서 행하고 있던 왕공족 제도를 영풍에 도입하기로 하였으며총독부는 그를 허수아비로서 배후에서 조종하면 풍국인들을 쉽게 다스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이후 연종의 적자인 이연호 공을 영풍공으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이연호 공은 일본의 음모에 쉽게 따르지 않았으며 후에는 풍국광복군을 극비밀리에 후월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의 풍국인을 대상으로 했던 교육은 철저한 친일적인 것이었고 일본이 보호자인듯이 역사를 왜곡했다. 독립성말살을 위한 문화정책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일본이나 해외로 유학을 한 유학파 풍국인들은 결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으면 안되는 것을 알았고 자식들에게 민족주의와 정체성을 교육시켜 고유의 독립성을 보존하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김주호를 필두로한 일부 저항세력은 1929년 필리핀으로 망명했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구상한 독립된 조국을 위한 풍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면서 미국과 선을 대는 등 다방면에서 독립에 힘을 썼고 어느정도 자금력을 갖추자 미국과 중국, 호주에 해외사무소를 설치해 일제의 동향을 지켜보았다. 김주호는 독립운동을 총지휘하였으며 효과적인 전술로 풍국인들의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김주호는 1924년 민족주의 운동의 참극을 보고 평화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그래서 풍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풍국 광복군을 1925년 창군, 풍국 내외에서 비밀리에 군사를 모집해 1942년에는 약 2천명에 달하는 군사를 조직하는데 성공한다. 자주적인 풍국 해방을 준비했으며 독립운동가 강석주는 총독부 철도실과 개간실을 폭파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다른 독립운동가 주태진은 1927년 부총독을 천장절 행사식때 청소부로 위장해 잠입한 다음 들고온 대검으로 죽여 풍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보었다.

풍국 이연호 공은 풍국순환철도에 쓰일 신형 기관차의 도입을 직접 명하고 시운행식에 참석하였으며, 진명도 전역을 순회하며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소할 방안을 직접 설계하기도 하였다. 이연호 공은 풍국인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총독부는 이러한 인기를 이용하려 했지만 이연호 공은 쉽게 따르지 않았다. 1930년대는 일본 제국의 세계적 고립화가 지속되었던 시기였고, 이에 따라 일본 제국은 풍국의 자원과 물자를 공출하기 시작했다. 풍국의 석유, 석탄을 강제로 일본으로 공출하고 산림의 나무를 베어 가져다 썼다. 또한 풍국의 공장에서 철재물품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풍국인들을 강제로 일을 하게 하였다. 임시정부도 풍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는데, 풍국광복군은 풍국 내에서 500명, 풍국 외에서 천명이라는 병력을 확보하여 훈련시켜 유사시 전장에 투입하여 즉시 일본군에 맞설 수 있는 전력을 갖추는데 성공하였다. 김주호도 독립 풍국설계서를 작성하여 추후 풍국 독립시의 국정 운영을 구상하였다.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개시된 태평양 전쟁은 일본 제국을 광기로 몰아갔고 풍국도 이러한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중일전쟁때만 해도 필리핀해 해상에 있는 사정상 풍국인들이 징용되는 것 외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전역이 동남아, 태평양으로 확장되면서 진명도도 그 중심에 들어가게 된다. 진명도에 대규모 군 비행장이 들어섰다. 대륙에서 보면 후방이지만 태평양에서 보면 대양을 향해 날을 세운 칼날과 같은 입지조건상 풍국은 태평양 전쟁 전진기지가 되었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섬은 전진기지로 활용하기 충분했고 풍국 섬에 일본 최대의 군 비행장이 건설된다. 풍국 비행장에는 폭격기 부대가 배치되었고 미 본토 공습에 투입될 G10N 후가쿠 폭격기도 배치될 예정이었다. 일본군의 전초기지가 된 이상 풍국인들은 강제노동과 일본군의 횡포에 곤욕을 치뤘다. 진명도가 태평양 전쟁의 중심이 된 만큼 풍국인들은 각종 물자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진명도 전투와 미군정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전황을 뒤집은 미국은 상당히 유리해졌고 곧장 반격에 들어갔다. 맥아더 원수의 뛰어난 전술로 태평양에서의 치열한 접전을 종결시키고 필리핀 탈환을 성공한다. 점차 일본 본토를 향해 미군은 진격했고 일본 본토로 가는 관문이 바로 진명도이었다. 진명도에는 일본군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가 있었고 태평양 작전의 용이성을 위해선 반드시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전진기지인 만큼 진명도을 요새화되었고 만발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미국의 침략을 우려한 일본은 풍국인을 무려 15만명이나 강제징집하여 영풍수호대를 창설해 약간의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1만명의 학생을 학도호국단으로 강제징집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일본군도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장군을 중심으로 한 10만명의 병력이 주둔하는 등 나름대로 병력 면에서도 준비를 갖추었다. 태평양 전역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힌 전투로 기록된 진명도 전투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전함과 항모를 동원해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상륙작전을 감행하였고, 풍국광복군은 미국과 접선하여 공동으로 진명도에 진격하여 풍국해방작전을 시행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미군은 12만명, 풍국광복군은 1500명이 동원되었으며, 1945년 2월 19일 이들은 진명도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진명도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 있어 가장 치열한 접전이자 최초의 일본 영토에서의 전투였다. 이 진명도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잔인한 지옥도가 펼쳐졌던 전장으로 평가받으며,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에 양측 모두 섬을 차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타다미치 장군은 옥쇄돌격을 자제하고 예정된 희생을 미군과 풍국광복군에게 지옥을 보여주어 상륙전에 대한 경각심을 미군에게 심어주려고 시도하였다.

섬이 규모가 있었고 타다미치 장군의 전술로 인해 미군은 상당히 고전했지만 구형 네바다급 전함,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테네시급 전함, 뉴멕시코급 전함들의 대구경함포를 이용한 상륙준비포격과 항공모함 함재기를 동원한 공습을 펼쳐 해안에 설치된 토치카나 방어선을 철저히 무력화하였다. 타다미치는 해안선 안쪽으로 병력을 빼고, 부임 직후 곧바로 거대한 땅굴로 연결된 탄탄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하지만 점차 미군이 우세해지기 시작했고, 풍국인들도 해방을 위해 풍국광복군에 협조하거나 입대하였다. 영풍수호대와 학도호국단, 강제징집된 일본군의 풍국인들이 대거 탈영하면서 일본군의 방어선은 점차 붕괴하기 시작했다. 결국 본대가 격파당한 일본군들은 산으로 숨어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결국 타다미치 장군과 약 8만 2천명의 일본군은 전사하고 약 2만명의 일본군만이 살아남을수 있었다. 섬 전역이 쑥대밭이 되고나서야 연합군은 진명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풍국 전투로 약 22만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민간인은 당시 풍국 인구(1000만명)의 거의 절반인 480만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국부의 무려 1/4를 잃었으며 일제가 남긴 공업시설의 피해율은 50%를 상회하였다. 이렇게 풍국 전투는 큰 피해를 주었다. 다만 그러나, 전쟁이 격렬했던 1950년에만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높은 출산율, 월남과 전쟁특수에 의해 인구와 국내총생산은 늘어났으며 계급 의식의 타파와 지주계급의 해체로 균등한 소득과 부의 분배로 인해 유리한 초기 조건을 형성하여 급속한 경제 발전이 가능하였고, 풍국군(전쟁에 참여한 군대는 풍국광복군이지만 광복군이 풍국군의 전신이므로 큰 차이는 없음)의 현대식 전면전 경험과 미국 등의 서방국들과 함께 싸워 우호관계를 형성한 대외관계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미군에 점령된 이래 풍국은 2차 대전이 종전될 때도 미군의 수중에 있었다. 상륙한 미군들을 해방자로서 열렬히 환호를 받았고 센칸청 청사를 본부삼아 진명도에 미군정을 시작했다. 전후 필리핀에 있던 풍국 임시정부가 귀환했고 피신해있던 영풍공 이연호는 곧장 미군에게 투항했지만 미군정은 지속되었다. 일본의 전후 재건문제와 한반도 분단, 공산당의 국공내전 승리등 동북아에는 불안요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비행장과 해군기지를 접수해 미군의 태평양 거점중 하나로 삼았다. 일본은 미국과의 항복 조약으로 한반도와 류큐, 풍국, 남사할린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고 미군정청이 풍국의 임시정부 역활을 했다. 군정청은 풍국 국민들에 대한 대민지원을 펼쳤지만 일제의 수탈과 진명도 전투로 인해 초토화된 풍국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풍국인들은 극도록 빈곤에 시달렸고 미군의 대민지원이 없다면 전 국민이 아사할 지경이었다. 미군정의 지원과 국비를 통해 풍국은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으며, 재건작업에 들어갔다.

현대사

독립은 1948년으로 풍국이 안정을 되찾아갈 때 논의 되었다. 이연호 공은 미군정 하에서 영풍공의 작위를 인정받았고, 풍국인들은 자신들의 독립국을 건국하길 미국에 계속 요구했고 대규모 시위까지 펼쳐질 정도였다. 결국 풍국인들이 간절하게 원하고 풍국 내부적으로 안정되어 더 이상 군정이 필요없다는 판단을 내린 미군정청은 풍국 임시정부에 민정권을 이양했다. 그리고 국민투표를 통해 입헌군주제가 최종확정되었으며, 영풍공과 영풍공비는 각각 바람나라 왕과 왕비로 승격되었다. 바람나라의 왕실은 풍국독립운동의 구심점의 역할을 해 바람나라가 주권국가로서 건국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바람나라는 미국의 원조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지원을 바탕으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가장 먼저 구하라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구아노 광산을 국유화시키고 각종 광업을 통해 얻어낸 부를 바탕으로 다른 분야도 육성시켰다. 그리고 일제 당시 세워진 산업시설이 소수 남아 있어 그것을 통해 산업을 발전시켰다. 또한 일본과 필리핀 사이에 있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중계무역을 통해 상당한 이득을 얻게 된다. 그외 해외에 각종 인력을 파견해 실량 향상을 이끌어냈다.

경제적으로는 발전이 시작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퇴보했다. 195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그런데로 유지되었으며 1960년에는 박진우 총리가 취임하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발생한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은 주변국에 영향을 주었고 이는 바람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3년 2월 14일, 바람나라 육군 대령 노태무에 의해 쿠테타가 일어났고 정권을 탈취한 군부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군부는 당시 국왕이던 이연호 왕이 군사정권의 선서 취임식에 동의하여 적법성을 부여했음을 근거로 정통성을 내세웠으며, 현재까지도 이것에 대해 많은 의혹이 존재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연호 국왕은 처음에는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승인하였으나 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노태무의 전횡으로 인해 12월 13일 역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 다수파의 지지를 얻지 못한 국왕은 결국 일본으로 탈출했고, 노태무는 바로 당일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언, 대통령에 올라 명실공히 독재자가 되었다. 또한 그 후 많은 왕족이 실종되거나 망명하는 일이 일어나 바람나라의 이씨 왕가는 가장 큰 시련을 겪었다.

노태무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취임 한 뒤 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노태무는 박정희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고 새마을운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는 현지의 실정에 맞게 수정한 도시운동을 전개했다. 모두가 힘을 합친 도시운동은 시골의 낙후한 환경을 개선하고 경제발전계획을 통해 바람나라의 경제와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월남전에 개입하여 월남전에 바람나라군을 파견하는 조건으로 각종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2차 산업을 육성하기도 하였으며 현재의 북동임해공업지대를 만들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육성하기도 하였다.한편 1967년 망명 가 있던 이연무왕이 훙서하였으며, 1975년에는 김주호 초대총리가 서거하며 나라의 큰 별 두명이 지는 일이 벌어졌다. 군부와 노태무의 독재는 경제 발전에 공을 세웠지만 바람나라 민주주의의 퇴보를 불러왔다하여 비판을 받아왔다.

1970년대에는 경제성장과 68혁명, 일본의 신세대 혁명의 영향을 받아 청년을 주축으로 한 주공 민주항쟁같은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노태무는 민주화 요구 시위를 강력히 탄압하고 1975년 쇄신헌법(刷新憲法)을 제정하여 군부(민주정의당) 이외 정당을 모두 해산하며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대통령 간선제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강력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준 헌법을 제정한다. 결국 1980년부터 민주화 요구 시위는 김중태 등이 주도한 대규모 시위로 커지고, 홍광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시위로 혼란스러웠으며 시위 진압도 거세졌다. 결국 1984년 노태무는 앓고있던 지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이때를 노린 국방장관 박종현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를 부통령이었던 전대걸이 진압함으로서 전대걸이 정권을 이어 받게된다.

전대걸은 육군 출신 장성으로 베트남에 파병된 85,000명의 월남주둔 바람나라군의 총사령관으로 복무했었다. 월남에서 각종 전투를 전두지휘하고 베트남의 통일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무공훈장을 받아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던 자였다. 노태무는 그를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풍부한 실전경험을 가진 그로서 직접 수도사령부의 병력을 직접 지휘해 박종현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리고 대통령을 대신하는 부통령인 만큼 군부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독재정권을 이어갔다. 전대걸은 언론검열을 넘어 언론사와 결탁해서 사실상의 선전기관으로 변질시키고 민주화운동을 철저하게 진압함으로서 독재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럼으로 수반되는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각종 노력을 해왔다. 바람나라의 핵심 권력인 만큼 억압정책으로 물가를 안정시키고 각종 규제를 풀어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 했다.(포르투갈의 살라자르와 한국의 전두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 그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1986년 영안 아시안 게임을 개최한다. 당시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경쟁을 했었다.

하지만 8-90년대는 격동의 시기였고 여러 나라들에서 민주화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1987년 대만의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국민당 독재가 종결되었고 한국과 동남아의 독재자들도 차례차례 하야했다. 결국 90년대 들어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공산정부까지 몰락하자 전대걸 정권도 안전하지 못했다. 김중태는 민주화세력 국민해방운동의 대표로 선출되고 구왕가의 극비지원 하에 독재정권을 향한 마지막 거사를 감행한다. 1992년 1월 1일, 500여명의 학생권 운동가들을 이끌고 가두행진에 나선 김중태를 따라 영안 시민들이 그의 행렬에 합류해 50만명이 운집하게 되고 이는 청해같은 대도시에도 영향력을 준다. 김중태는 총리관저의 주변을 손에 손을 잡은 인간사슬로 둘러싸고 자신은 정문 앞에섰다. 그리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민중가요를 부르면서 독재정권의 종식을 촉구했다. 이것이 바로 신정혁명(新正革命, 1월 혁명이라고도 한다.)이였다.

하지만 군부와 전대걸은 끝내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고, 시위대를 탄압하고 붙잡았지만 더 많은 시민들이 나와 군부의 하야를 외쳤다. 해외의 많은 국가들까지 직접적으로 시위대 지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하자, 결국 1월 9일 전대걸은 하야하였다. 하지만 전대걸은 다음 대통령으로 온건파였던 현대호를 앉히고, 시위대와 교섭에 나서고자 하였다. 군부는 점진적으로 개혁을 한다는 교섭안을 제안했으나 국민들은 교섭안 대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요구하였다. 시위가 거세지며 전세계가 주목하고 미국까지도 시위대 지지를 선언하며 결국 군부는 하야하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약속하였다. 전대걸을 축출한 뒤 1992년 5월에는 의회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후 의회에서는 입헌군주제와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민주적인 내용을 담은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해당 개헌안은 89%의 지지를 얻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고 7월 27일 정식으로 반포되었다. 이후 8월 1일 남아있던 왕족 중 이연호의 사촌 동생이였던 이연무가 추대를 받아 재즉위하였고, 바람나라는 29년만에 다시 왕국으로서 재탄생하였다.

새로운 총리로 선출된 김중태와 민주선진당은 국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민주화된 정부를 이끌었다. 김중태는 금융실명제와 정치 청렴화, 경제성장 등의 업적을 이루어 민주화된 바람나라를 선진국 반열 위에 올려놓았지만 군부의 완전한 척결은 실패했다. 하지만 1997년 아시아를 덮친 경제위기는 바람나라도 거쳐갔으며, 바람나라는 경제타격을 받게 되었다. 김중태는 결국 "모두 내 잘못이며 내가 책임지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1997년 12월 16일 사임한다. 그 뒤 총선에서는 경제위기 해결을 내세운 평화당이 승리하여 박재인이 총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평화당은 IMF에게서 지원을 받아야한다는 의견과 독자적으로 해결해야한다는 의견이 대립하였고 결국 새천년풍국당과 정의당으로 분당하는것으로 이어지며 박재인 총리도 의회해산을 선포하며 사임했다.

그 뒤 경제위기의 책임을 민주화세력에게 돌린 군부는 1998년 1월 31일 다시 쿠데타를 선언하였고, 수도 영안도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진성 육군참모 총장이 주도했으며, 이날 밤 8시경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시작하여 영안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탱크 14대로 총리 관저가 있는 정부청사 주변 도로를 봉쇄하는 것부터 시작해, 마침내 주요 정부 시각을 점거한 군은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아무리 경제위기가 왔어도 다시 군부가 정권을 잡는 것을 반대하였고 전국적으로 100만명 이상의 시민이 반군부 시위를 벌였다. 결국 이연무 국왕도 군부의 쿠데타를 승인하지 않았고, 오히려 TV에서 국군통수권자 정복을 입고 "절대 쿠데타를 승인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에 따라 군부의 쿠데타는 실패하였다. 그 뒤 바람나라에는 민주주의가 다시 정착했지만 군부는 여전히 힘이 강력해 이는 바람나라 정치의 문제점 중 하나다. 이연무 국왕은 2015년 9월 건강상의 사유로 왕위를 딸 이연우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하고, 2016년 3월 25일 새 국왕인 이연우 국왕이 즉위하였다. 바람나라는 현재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국가며 경제적, 기술적으로 주목받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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