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연방/역사

~ 17세기: 발트의 고대와 중세

Original Timeline

1700~1721: 대북방전쟁과 발트

루스 차르국이 발트해 진출을 위하여 시라비시카 제국령 리보니아를 침공하면서 대북방전쟁이 발발하였다. 루스 차르국, 덴마크-노르웨이, 작센의 동맹군이 시라비시카를 공격하였으나 칼 12세의 시라비시카군은 덴마크-노르웨이를 빠르게 전쟁에서 이탈시키고 나르바 전투에서는 루스 차르국을 상대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면서 제국의 건재함을 보였다. 발트해 지역에서의 교전은 수 년에 걸쳐 이어졌으나 루스 차르국에 큰 성과는 없는 상태였다.

한편 카자크 봉기에 이은 리베르티아의 대규모 농민 봉기로 인해 수습에 바쁜 상황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전쟁 초기에 중립을 유지하면서 외교적으로는 루스 차르국을 편들고 있었다. 그러나 1707년에 마침내 리베르티아 독립을 인정하면서 내부적인 안정이 필요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당시 동맹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어나가고 있었던 시라비시카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위협하자 셰임은 칼 12세와 친밀하였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국왕으로 선출하고 시라비시카측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1709년 칼 12세는 동맹인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통해 스몰렌스크를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러시아령 동우크라이나의 카자크 봉기 세력과 결탁하여 동우크라이나의 폴타바를 포위하게 된다. 그러나 카자크 봉기 세력이 조기에 러시아에 진압당하고 시라비시카-폴란드 동맹군 역시 앞선 레스나야 전투 등의 패배로 많은 손실을 겪은 상태에서 성급한 공격을 시도한 칼 12세는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군에 오히려 포위당해 참패를 겪었다.

칼 12세와 패잔병들은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즉시 철수하여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와 함께 반시라비시카 동맹이 재건되고 루스 차르국의 공세가 강해지자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내쫓고 작센의 아우구스트 2세를 국왕으로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아우구스트 2세가 암살당하면서 13세에 불과한 아우구스트 3세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동맹군은 1714년 경에 시라비시카령 리보니아 전역과 북독일 지역의 시라비시카 영토를 거의 점령하였으며 1716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발트해 지역까지 점령하면서 현재 발트 연방에 해당하는 지역 전체를 획득하였다. 1717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빼앗긴 지역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전쟁에서 이탈하였으나 빌뉴스와 흐로드나를 비롯하여 연방 북부의 핵심 지역들을 심각하게 상실하면서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1721년 시라비시카와 루스 차르국의 협상으로 대북방전쟁은 종결되었으며, 발트해 지역 전체를 러시아 제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1721~1914: 러시아 제국 치하

Original Timeline

1914~1922: 제1차 세계대전과 발트 연방의 성립

독일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국가 전체가 만신창이 상태였던 소비에트 러시아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며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강요하였고, 그 결과로 발트 지역에서 발트 연합 공국이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동맹국이 패망하면서 현대의 리에투바 주와 제마이티아17세기: 발트의 고대와 중세 ==
Original Timeline

1700~1721: 대북방전쟁과 발트

루스 차르국이 발트해 진출을 위하여 시라비시카 제국령 리보니아를 침공하면서 대북방전쟁이 발발하였다. 루스 차르국, 덴마크-노르웨이, 작센의 동맹군이 시라비시카를 공격하였으나 칼 12세의 시라비시카군은 덴마크-노르웨이를 빠르게 전쟁에서 이탈시키고 나르바 전투에서는 루스 차르국을 상대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면서 제국의 건재함을 보였다. 발트해 지역에서의 교전은 수 년에 걸쳐 이어졌으나 루스 차르국에 큰 성과는 없는 상태였다.

한편 카자크 봉기에 이은 리베르티아의 대규모 농민 봉기로 인해 수습에 바쁜 상황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전쟁 초기에 중립을 유지하면서 외교적으로는 루스 차르국을 편들고 있었다. 그러나 1707년에 마침내 리베르티아 독립을 인정하면서 내부적인 안정이 필요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당시 동맹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어나가고 있었던 시라비시카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위협하자 셰임은 칼 12세와 친밀하였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국왕으로 선출하고 시라비시카측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1709년 칼 12세는 동맹인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통해 스몰렌스크를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러시아령 동우크라이나의 카자크 봉기 세력과 결탁하여 동우크라이나의 폴타바를 포위하게 된다. 그러나 카자크 봉기 세력이 조기에 러시아에 진압당하고 시라비시카-폴란드 동맹군 역시 앞선 레스나야 전투 등의 패배로 많은 손실을 겪은 상태에서 성급한 공격을 시도한 칼 12세는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군에 오히려 포위당해 참패를 겪었다.

칼 12세와 패잔병들은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즉시 철수하여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와 함께 반시라비시카 동맹이 재건되고 루스 차르국의 공세가 강해지자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내쫓고 작센의 아우구스트 2세를 국왕으로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아우구스트 2세가 암살당하면서 13세에 불과한 아우구스트 3세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동맹군은 1714년 경에 시라비시카령 리보니아 전역과 북독일 지역의 시라비시카 영토를 거의 점령하였으며 1716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발트해 지역까지 점령하면서 현재 발트 연방에 해당하는 지역 전체를 획득하였다. 1717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빼앗긴 지역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전쟁에서 이탈하였으나 빌뉴스와 흐로드나를 비롯하여 연방 북부의 핵심 지역들을 심각하게 상실하면서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1721년 시라비시카와 루스 차르국의 협상으로 대북방전쟁은 종결되었으며, 발트해 지역 전체를 러시아 제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1721~1914: 러시아 제국 치하

Original Timeline

1914~1922: 제1차 세계대전과 발트 독립 전쟁

독일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국가 전체가 만신창이 상태였던 소비에트 러시아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며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강요하였고, 그 결과로 발트 지역에서 독일계 군주를 둔 두 괴뢰국인 발트 연합 공국과 리에투바 왕국이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동맹국이 패망하자 두 나라의 의회는 각각 공화제로의 이행을 결정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무효화되면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가 상실한 영토의 수복에 나섰으나, 공산 혁명의 확산을 경계한 협상국과 동맹국 양측의 이해 관계의 일치에 의해 그 대부분은 종전과 함께 회복되지 못했다. 구 협상국들의 적극적인 러시아 내전 개입과 전선 국가들에 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적군과 백군 양측은 재정비를 거쳐 영역 확장에 힘을 쏟게 되었고, 그 과정으로 1918년 11월 소비에트 러시아는 괴뢰국 리투아니아 SSR을 앞세워 발트 양국 침공을 시작했다. 두 나라는 1918년 11월 18일 동맹을 체결하고 1919년 8월까지 러시아 적군을, 1919년 7월부터 1919년 12월까지는 러시아 백군을, 그리고 1920년 8월부터 1920년 11월까지는 다르큰군까지 차례로 막아내며 독립을 사수했으나 리에투바 공화국의 역사적 수도인 빌뉴스를 다르큰 제2공화국의 괴뢰국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에 빼앗기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다르큰이 아무런 제재 없이 빌뉴스를 점령함으로서 리에투바 공화국은 카우나스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고, 1920년 12월에 발트 양국은 소비에트 러시아, 다르큰, 시라비시카와 각각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후 1921년에 발트 양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다.

한편 소련의 적극적인 세력 투사와 주변국들의 압박으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혼란에 시달리던 발트 양국은 민족주의적 가치를 내세운 합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발트인으로서의 통합된 정체성을 선전하며 국민투표를 통해 합병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에 발트 연합 공화국과 리에투바 공화국은 1922년 1월 3일 리가 조약을 체결하며 발트 연방으로 탄생했다.

1922~1939: 전간기 발트 연방

신생 발트 연방은 발트 독립 전쟁의 전쟁영웅 에드가르 뤼텔 장군을 1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제헌 의회를 구성하였으며 2월 26일에 미국과 프랑스 코뮌 등의 예를 참고하여 연방 헌법을 발표했다. 같은 해 6월에는 7개 주의 영역이 확정되고 최초의 지방 선거가 치루어졌다.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발트 국민당은 전간기 내내 개발 독재적 정책을 펴며 독주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자유당과 사회당으로 분열되고 각각 오늘날의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의 전신이 되었다.

신생 발트 연방은 발트해 방면 러시아 항만에 비축된 다량의 러시아 물자와 산업 시설, 상당한 수준의 기술 인력을 동원하여 금속공업과 석유화학공업 등을 필두로 한 중공업 집중 투자에 성공해 경제와 기술 양면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냈다. 한편 뤼텔 대통령이 첫 임기 이후 재신임을 거부하자 마찬가지로 발트 독립군 출신의 레나르트 벨리아스 대통령이 1927년 1월 20일 집권하였다. 그의 재임 시기에 닥쳐온 대공황에서 연방정부는 발 빠르게 적극적인 개입을 시도하여 경제 충격을 극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당시 빠른 공업화와 국가 주도의 국토 개발 과정에서 정부의 시장에 대한 높은 지분과 적은 수출량으로 인하여 대공황의 타격은 실제로 미미했다. 대공황의 성공적인 극복을 계기로 연방은 금을 비롯한 각종 재화를 축적하며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1939~1945: 제2차 세계대전과 궁극적인 독립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자 연방정부는 나치 독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히틀러는 한때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이었으며 1923년 이래 발트 연방에 귀속된 클라이페다(메멜란트)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며 1939년 3월 최후통첩을 보냈다. 지난 1년간 이어진 나치 독일의 경제제재와 군사 위협에 지친 연방정부는 최후통첩을 수락하게 되었다. 연방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은 끝내 같은 해 9월에 다르큰 침공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열었으며, 발트 역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소련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따라 1940년 리투아니아 SSR, 리보니아 SSR의 수립과 소련군의 점령을 받아들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왔고, 연방정부는 이를 거부했지만 다르큰이 나치와 소련에 분할당해 지리적으로도 고립된 상태에서 가뜩이나 변변치 않았던 발트 연방군이 소련군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1940년 6월 소련군이 발트 전역에 진주하게 되었고 발트 연방은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발트 연방정부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발트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발트의 소련 병합 이후 10만 명에 달하는 발트 지식인들과 추산할 수 없는 숫자의 발트인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되거나 처형당했으며 강제적인 집단화가 진행되었다. 1년 남짓의 소련 점령기에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발트 지역 내의 발트인 비율은 91%에서 72%까지 추락하는 등 소련의 강력한 동화 정책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발트의 반러시아 감정은 사그라들지 못하고 있다.

1941년에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발트 내부에서는 여러 독립군 출신 인사들과 소련에 의해 수배된 반체제 인사들이 무장 조직을 결성하여 망명정부와 나치독일의 지원 아래 소련군에 함께 맞서싸웠다. 그러나 이들 발트 해방군 인사들은 대부분이 이후 SS에 자원입대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치 독일에 부역하여 국제적으로는 여러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43년에는 마침내 발트 전역이 나치 독일의 동방국가판무관부 치하에 들어섰다. 나치 독일이 점령한 여타 지역과는 이질적으로, 나치가 발트인을 아리아인으로 취급한 덕분에 발트 지역에서는 유대인과 슬라브인을 제외한 인종에 대한 박해가 가해지지 않았다. 이런 사실이 소련의 폭압적인 지배로 인해 만연한 반러시아 감정과 겹쳐 발트 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부역한 사례로 남았다. 최소 6만 명에 달하는 발트인이 자발적으로 독일 국방군과 SS에 입대하여 독소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마무리되어 가던 1945년 2월,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이 참여하여 전후의 세계 질서를 논의한 얄타 회담에서 소련은 발트의 위성국화를 요구하였으나, 소련의 세력 확장을 극도로 경계해 종전 이후 서방 연합국과 독일이 즉시 동맹을 맺어 소련을 침공한다는 내용의 언싱커블 작전마저 염두에 두고 있던 처칠의 강력한 반대를 수용한 루스벨트와의 입장 충돌로 인해 발트 연방의 복구가 합의되었다. 다르큰의 위성국화가 거의 확실시된 시점에서 연합국의 요구에 의해 빌뉴스 일대는 이때 발트 연방이 다시금 인계받기로 합의되었다. 이후 포츠담 회담에서 이 사안은 확정되었고, 망명정부는 1945년 6월 19일 귀환하여 연방정부의 복구를 선언하였다.

1945~ : 현대 발트 연방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여러 입장 차이로 인해 발트 국민당은 1945년 자유당과 사회당으로 분열되었다. 벨리아스 대통령 임기 말인 1950년에 4년 임기의 대통령제로 완전한 개헌이 이루어졌으며, 독일 제국의 괴뢰국 시절부터 독일의 영향으로 양원제로 구성되었던 의회는 단원제로 개편되었고 2년 주기의 중간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이후 집권한 자유당의 제6대 아우구스츠 그리뉴스 대통령은 산업 복구에 주력하였으며, 자유 진영의 최전선에 위치한 지정학적 이유로 마셜 플랜의 상당한 수혜자가 된 발트는 195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에스토니아의 셰일오일 채굴과 의약 산업, 화학공업의 부흥은 이 시기에 급격히 이루어졌다.

그리뉴스 대통령은 전쟁 피해 복구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 하에 재선에 성공했지만 기업과의 유착 문제와 당시의 낮은 인권 의식에 의한 노동자들의 반발로 인해 집권 당시에만 해도 세력이 자유당과 비교할 수 없었던 사회당의 지지층이 늘어나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그리뉴스 대통령은 1962년 대선에서 자유당 후보로 4선을 시도헀지만 끝내 실패하고 사회당 마르트 파울루스 후보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이후 발트 정치는 자유당계와 사회당계의 양당 구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뉴스 대통령의 임기 내내 러시아인 추방 정책이 시행되면서 그의 임기 후반에 발트 연방 내 러시아인 비율은 1% 미만까지 추락했다. 이후의 통계로부터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당시 국적이 말소되었던 러시아인의 상당수가 행정력의 부족으로 인해 러시아로 추방되지 않았으며, 연방 내 잔존한 무국적 러시아인들의 인권 문제는 추후 수십 년간 큰 사회 문제로 남아있었다. 한편 국내 러시아인에 대한 강경한 조치에 비해 독일인에 대한 조치는 따로 취해지지 않았다. 이는 발트 독일인이 19세기부터 발트에 정착해 엄연한 발트 사회의 한 축을 이루는 소수민족으로 남아있었던 시점이기에 이상하지 않은 처사였으나, 나치 잔재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은 그리뉴스 대통령과 연방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비판의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 에스티 독립운동은 절정조에 달했다. 에스티 지역의 주류는 엄연히 연방 중남부와는 민족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뿌리가 달랐으며, 에스티 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계속되어왔으나 독립전쟁이 시작되며 흐지부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에스티 독립운동은 다시 달아올라 에스티 주 내부에서 1949년과 1953년에 두 차례 국민투표를 치르며 독립을 시도했지만 그리뉴스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며 무마시켰다. 이는 에스티 주가 결정적으로 사회당계 우세 지역으로 남은 계기가 되었다.

파울루스 대통령은 자유당과 사회당을 가리지 않고 국민당계 전체에 강력한 반공주의가 퍼져 있었던 상황에서 인권, 복지 개혁을 여럿 시도하며 생활 수준 향상에 주력하였고, 1964년에는 여성 참정권과 아동 노동 금지를 보장, 1969년에는 최저임금법을 도입하는 등 여러 개혁을 이루어냈다. 또한 이 시기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연임 횟수를 3회로 제한하였다. 그러나 생산력이 점차 감소하면서 1970년대에 들어서서 닥쳐온 오일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 등이 낳은 극심한 경기 침체는 파울루스 대통령의 3선 도전을 좌절시켰다. 이에 1974년 대선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내세운 자유당 카지스 파르츠 후보가 사회당 카렐 비르크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파르츠 대통령은 복지 정책을 대폭 축소했으나 이는 당시 발트 재정에 비해 과한 복지 정책으로 인해 주어졌던 부담을 해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중공업과 금융업에 호황이 계속되며 발트 경제를 다시 한번 도약시켰다. 반면 이와 상반되게 빈곤층에 대한 구제 조치는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많은 빈곤 계층이 서민층으로 계층 이동을 이루며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파르츠 대통령은 당시 연방 내에서 범죄의 표적이 되고도 별다른 구제를 받지 못하는 등 인권에 심각한 위협을 받던 무국적 러시아인들에게 국적을 지급하는 등의 행보로 좌우 양쪽으로부터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소련과의 관계도 일부 향상되는 진전을 거두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발트 연방은 동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성장했으며, 1980년에는 동독의 인당 GDP를 따라잡고 1985년에는 OECD에 가입하며 선진국의 위치에 도달했다.

파르츠 정권의 강한 반공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임기 초반에 소련과 몇 차례 심각한 갈등을 겪기도 하였으나 연방 내 러시아인에 대한 처사와 임기 말인 1985년부터 개방 정책을 내세운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이루어진 몇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동구권과의 관계가 상당히 진전되어 안정적인 외교를 이루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1986년 대선에서는 자유당 지그문드 얀센 후보가 사회당 에드가르 칼닌슈 후보보다 2배 이상의 표를 받으며 당선되었고, 소련 해체의 반향으로 발트 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을 누리면서 안정적인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얀센 대통령은 복지 확대 문제 및 군비 축소 문제 등에 대하여 당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었고, 그 결과 자유당에서 얀센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 계파가 신국민당으로 독립하여 당이 분열되는 위기를 겪었으나 결국 대선을 앞둔 1993년, 자유당의 양보로 신국민당이 자유당으로 다시 통합되고 얀센 대통령은 자유당의 지명을 받는 데 실패하며 이후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반면, 얀센 대통령 임기 중인 1991년에 사회당은 의회 내에서의 약세를 극복하고자 원내 군소 정당이었던 민주사회당과 발트 노동자당과 합당하여 사회민주노동당으로 재탄생했고 1992년 당명을 사회민주당으로 변경했다. 1994년 대선에서 사민노동당의 유스타스 크베이시스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이기며 20년 만에 사회당계 정당의 집권이 이루어졌다.

크베이시스 대통령은 '선진국형 정치'를 내세우며 파울루스 정권에서 시행되었으나 이후 폐지된 복지 정책들을 여럿 부활시키고 병역을 축소하는 등 민생 친화적인 정책을 폈다. 자유보수당의 당내 혼란과 부패 문제가 대두되며 크베이시스 대통령은 3선까지 성공하고 2006년 대선에서 사민당 아르놀드 칼닌슈 후보에게 정권을 넘기며 퇴임했다.

칼닌슈 대통령은 크베이시스 대통령의 여러 정책을 계승하는 반면 보다 적극적인 친미 외교를 펴는 데 주력했지만 임기 중반에 닥쳐온 2008년 세계경제위기에서 연방 내 자본이 시라비시카 등 해외로 크게 유출되고 은행 도산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해 2010년 대선에서 자유당 케르스티 레비츠 후보에게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레비츠 대통령은 경제위기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신용불량자들과 빈곤층을 적극적으로 구제하여 경제위기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복지 정책과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적당한 타협을 시도하였으며 적극적인 친서방 외교를 이어나갔다. 이러한 외교 노선의 결과로 임기 말인 2021년에는 IMC에 가입하고 제2차 지중해 전쟁에 파병하는 등 자유 진영의 최전방 국가로서 발트 연방의 입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2022년 벨라루스 사태가 일어나자 그 여파를 타고 자유당 페트라스 그리치우스 후보가 2022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제2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