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룩스 연합 왕국

가장 고귀한분에 의해 대표된 의사결정을
위한 회의와 영토 및 가장 신성하신분의
권리로서 보장된 하나되고 거룩한
바일부르크-오라녜-나사우 왕가의 국왕령

네덜란드 연합 왕국

Besluitvorming met de edelste tak Koninklijk besluit Barnburg-Aura Wong-Nassau
국기 국장
네덜란드 연합 왕국 국기 헤르만.png
Royal coat of arms of the Netherlands (1815-1907).svg
국가 상징
국가 헷 빌헬뮈스
수도 암스테르담
국화 튤립
국조 황조롱이
표어 우리는 유지할것이다.
Je maintiendrai
하나되고 거룩된 힘은 우리를 발전시킨다
Unum et Sanctum, potestatem facimus
인문 환경
인구 29,060,778명
인구밀도 389.4명/㎢
공용 언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불어
지역 언어 기타 언어
군대 네덜란드 왕국군
종교 로마 가톨릭국교
정치 정보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단원제
국왕 빌럼-알렉산더르 입헌군주
정부요인 공석 제 -대 수상(무소속)
공석 초대 연합의회의장(무소속) 경제 정보
경제 체제 자유주의 시장경제
GDP(명목) 전체 GDP $1,313,576,226,378
1인당 GDP $45,201
공식 화폐 유로화

EUR
기타 정보
ccTLD .nl
국가 코드 NL
시간대 UTC+01:00
공식 채팅방 네덜란드 연합왕국 채팅방
위치
Benelux map.png
Royal coat of arms of the Netherlands (1815-1907).svg

개요

네덜란드 연합 왕국(네덜란드어:Verenigd Koninkrijk der Nederlanden)은 서유럽에 위치한 입헌군주국이다. 정식 명칭은가장 고귀한분에 의해 대표된 의사결정을 위한 회의와 영토 및 가장 신성하신분의 권리로서 보장된 하나되고 거룩한 바일부르크-오라녜-나사우 왕가의 국왕령(네덜란드어:Besluitvorming met de edelste tak Koninklijk besluit Barnburg-Aura Wong-Nassau)이며, 단원제를 택한 국가이다. 연합의회는 귀족이나 일반 신민들로 구성되며 가장 고귀한 국왕 폐하의 의사결정을 위한 귀족들과 서민들의 회의(네덜란드어:Bijeenkomst van edelen voor besluitvorming van de meest nobele koning)과거에는 공동체 협의체 형식이었지만, 현재는 선출된 의원을 통해 운영하는 평의회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네덜란드 연합 왕국을 다스리는 왕가는 바일부르크-오라녜-나사우 왕가 이다.



역사

네덜란드는 고대 로마시대부터 현대에 오기까지 프랑스와 독일 지역 사이에서 존재하였다, 과거에는 동인도회사를 주도로 대제국이 되었지만, 현재는 식민지 지역의 주권을 포기하고 오직 유럽에 영토에 한해서 존립하고 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지배

로메이넨 시대는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조상이자 그 기원이 되는 프리시족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을 말한다. 당대 최대의 제국이던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57년, 저지대 남부(오늘날의 리에주, 안트베르펜 근방)로 진군하였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도 지속적인 저지대 정복사업을 벌였다. 농업과 목축업으로 생계를 해결하던 저지대인들은 로마의 진출 이후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유목민적 성격을 가졌던 저지대 민족들 사이에 로마인들이 진출하면서 큰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로마의 쇠락과 게르만 족의 침입

2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의 내부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저지대 지역에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지에 요새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게르만족들로 구성된 군대로 국경을 지키게 될 정도로 로마 제국은 쇠퇴하는 가경에 이르렀고, 뒤이어 "게르만족의 대이동" 으로 불리는 색슨족과 프랑크족, 고트족 등 게르만족이 대거 로마 제국 내로 침입하자, 로마는 제국을 경영할 힘을 상실하고 말았다. 특히 프랑크족은 340년 로마 제국과 협정을 체결하여 저지대 지역 방위를 맡게 되었다. 395년에는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완전히 나뉘어졌다.

4-5세기 동안 서로마 제국은 고트 족, 반달 족 등 이민족으로부터 이탈리아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북서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철군시키기 시작했다. 406년 로마 군대가 철군하고 주인이 없어진 지역들을 새로이 들어온 이민족들이 차지하면서 로마 제국의 저지대 지역 지배는 사실상 끝이 났다.


암흑시대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기록은 없다.


중세

중세 시대에는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의 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성장하는 동프랑크 왕국에 편입 되었다. 저지대 지역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인 플랑드르, 브라반트, 홀란트 등 여러 공국들이 등장하였으며 교통의 요지로서 사람이 많이 드나들어 상공업 발달에 적합한 위치였기 때문에 저지대 지역은 서유럽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부유한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룩셈부르크 지방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룩셈부르크 가문의 대공에게 통치받고 있었다. 원래 이 땅을 다스리던 룩셈부르크 가문은 한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고, 헝가리와 보헤미아까지도 손에 넣었었지만 결국은 혈통이 끊겨 지금은 지명으로만 남게 되었고, 결국 지속적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16세기 네덜란드에 통합되게 된다.


근세

네덜란드-스페인 독립 전쟁

개요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에 이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 제국에 귀속된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반란/독립전쟁이다.1568 ~ 1603년간 일어나서 35년 전쟁이라고도 한다. 최초로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의 연합이 탄생하였으며, 네덜란드 3국이 연합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기초가 여기서 마련되었다 볼 수 있다.

배경

15세기 이후 부르고뉴 공국이 네덜란드 남부 지방을 통치하게 된다. 그런데 부르고뉴 공국의 남자 자손이 끊겼고 유일한 후계자는 여성인 마리 드 부르고뉴였다. 부르고뉴와 네덜란드를 둘러싸고 프랑스가 눈독을 들였으나 마리는 프랑스를 뿌리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태자인 "마지막 기사"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와 결혼하면서 저지대의 땅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에 이어 부르고뉴 공작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카를 5세는 네덜란드 남부에 있는 헨트 출생이었다. 최초의 네덜란드 출신 황제라는 점 때문에 처음에 카를 5세는 지역 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나 이러한 기대는 곧 무참하게 꺾이고 말았다.

수많은 서유럽 국가와 오스만 제국 등 수많은 적국과 전쟁을 치루느라 네덜란드 3국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게 되었고, 유례없는 가혹한 징세에 시달리게 된 저지대인들은 1539년 마침내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카를 5세는 원수지간이었던 프랑수아 1세에게 양해까지 구해가며 프랑스 영토를 가로질러 고향의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한편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발표되며 시작된 종교개혁의 물결은 네덜란드 3국 모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자유와 관용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와 벨기에 북부에서 개신교는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특히 네덜란드 지역에 칼뱅파 개신교가 널리 스며들었다. 그러자 카를 5세는 1550년 4월 29일 '피의 칙령'을 내려 개신교 신자를 모조리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1556년 카를 5세가 퇴위한 후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는 카를의 장남이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상속되었다. 카를 5세는 가혹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3국을 자신의 고항으로 본 반면에, 스페인에서 태어나 자란 펠리페 2세는 즉위하자마자 저지대와 룩셈부르크 전역에 가혹한 과세와 개신교 탄압 정책을 실시하였다. 게다가 알바 공과 같은 스페인 파견 총독들의 실정과 전쟁으로 인한 수탈, 거기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주둔한 스페인 군대의 약탈 등으로 반발이 거세진다. 빌럼 반 오라녜를 위시로 한 귀족들은 일련의 자유를 요구했으나 펠리페 2세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전쟁

펠리페 2세의 억압적인 통치가 이어지자 처음에 저지대의 대표적인 지도층이었던 에흐몬트, 흄, 오라녜공 빌렘 등은 펠리페 2세에게 억압적인 통치를 완화해줄 것을 지속적으로 탄원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는동안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인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펠리페 2세에 대항한 반란의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반란을 경고하는 귀족들의 청원을 무시했다.

1566년 마침내 개신교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칼뱅주의자들은 성당에 있는 성인들의 성상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성당과 성상 등을 파괴하는 성상파괴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최남부 혼트스호터에서 최북부 흐로닝언까지 네덜란드 지방과 벨기에 일부의 성당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성상 파괴 운동을 반역으로 간주한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이 지휘하는 대군을 파견하여 저지대와 룩셈부르크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알바 공은 "피의 법정"이라 불린 특별 종교재판을 열어 매일 수백명 이상을 처형했다. 네덜란드의 지도자였던 에흐몬트, 호르너같은 귀족들까지 모두 사형당했다. 이들은 저지대의 지도자였지만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스페인의 강압 통치를 완화해보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알바 공은 이들이 개신교도들에게 관용을 배풀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허나, 또다른 귀족 출신 지도자인 오라녜공 빌렘은 알바 공의 탄압을 피해 아내의 친정인 작센으로 피신했다가 1568년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로 귀환했다.

오라녜공 빌렘은 네덜란드 3국의 귀족과 지도자들부터 용병과 농민까지 많은 수의 독립군을 소집하였고 수백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통적인 이름인 네덜란드(더치)을 따와 네덜란드 독립군을 조직하게 된다. 이로서 빌렘이 이끄는 네덜란드 독립군과 알바 공과 스페인 사이에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 초기에 오라녜공 빌렘이 이끄는 프뤼셀은 헤일리헤를레 전투에서 처음으로 스페인군에게 대승을 거두었고 빌렘은 네덜란드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 때를 기점으로 벨기에 북부와 네덜란드 일대는 사실상 스페인의 지배가 무력화되었다. 비밀리에 반 스페인 국가로부터 재정 과 군사 지원을 받아왔던 프뤼셀과는 달리 스페인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비롯해 많은 국가와의 전쟁 또한 치루고 있었기에 점점 재정이 고갈되어 갔고, 결국 이에 스페인 궁정은 군대에 급료를 지불하지 못했고 이에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군은 1576년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 각지에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특히 악명 높은 "벨기에의 학살"이 발생하자 많은 벨기에인들이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협조하지 않고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던 남부 벨기에 지방의 가톨릭 교도들도 스페인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느니 네덜란드에 가담하기로 했고,1576년 네덜란드 3국에서 스페인을 축출하기 위해 네덜란드, 벨기에 북부와 룩셈부르크, 벨기에 남부가 서로간의 종교의 차이를 불문하고 협력하기로 하는 겐트 협약이 체결되었다.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금은을 들여와 재정을 확충하려 했으나, 반 스페인 국가와 영국, 그리고 포르투갈의 방해로 이마저도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10년 간의 휴전

결국 재정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스페인은 1580년 네덜란드 외 2국에 휴전을 제의하게 되고 자국 국민의 피해가 심했던 네덜란드는 10년의 휴전에 동의하게 된다. 이 휴전 기간동안 네덜란드는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을 추대하였으며, 영국과 동맹을 맺었지만, 스페인은 오히려 더 심해지는 국외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 2차 전쟁

1590년, 10년 간의 휴전이 끝나고 스페인은 벨기에 남부를 집중 공격하여 몇몇 성들을 함락시켰지만 이미 기울어가던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1603년 네덜란드의 영토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후 스페인은 네덜란드 지방에 대한 네덜란드의 통치권을 인정한 리에주 조약(1604)을 맺게 되고 네덜란드 연합 왕국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통합하여 암스테르담 시를 수도로 하였고, 이는 통합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건국이자 독립인것이다.


황금기

독립은 했지만 국토, 인구, 자원 모두 열세였고 스페인과의 관계도 악화될 만큼 악화돼서 네덜란드 연합 왕국 선박의 스페인 입항이 금지당해 스페인과 무역을 할 수 없어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하자, 1605년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더 끌어모은 다음 대양으로 나섰다. 동인도 회사에 최초로 자본을 모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선주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유대인이었다.

또한 동인도 주식회사 이외에 1607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를 설립해 영국과의 국채 거래로만 매년 2800만 파운드 이상의 수익을 얻는 등 너무 빨리 돈이 돌자 과부하를 막기위해 1607년에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프뤼셀의 금융업은 더욱 발전되었으며, 특히 네덜란드에서는 불과 3%에 불과한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한편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40%가 넘는 이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며 결국 파산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가지 혁신이 하나의 체계가 되자 네덜란드 연합 왕국은 신대륙과 아프리카, 인도, 중국, 일본 등과의 귀중품(설탕 등)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결국 17세기의 2만여 척에 달하는 세계 전체의 무역선 중 만 오천 척 정도는 네덜란드 연합 왕국 국적선이었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전성기는 황금시대라고 불리우고 있다.

쇠퇴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싸운 4번에 걸친 영란전쟁 이후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 조례에 의해 재해권을 상실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로 유통/중개업이 중심이던 네덜란드의 경제가 하향세를 타게 된다.


근대

1793년에 프랑스 혁명군에게 점령되어 1795년 프랑스의 자매공화국인 바타비아 공화국이 수립되기도 하였다. 1806년에는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이 자신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임명하여 홀란트 왕국이 수립되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이 낙하산으로 앉힌 여러 친인척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와중에 그나마 괜찮았고 친저지대적인 왕이어서 프뤼셀들에게 지지도 받았으나 대륙 봉쇄령을 거부했다는 빌미로 나폴레옹에 의해 1810년 홀란트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의 아들 나폴레옹 루이가 왕위에 오르지만 즉위 10일 만에 나라가 프랑스 제국에게 합병당하고 말았다.

위기와 체제 변혁

벨기에 독립 운동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빈 회의를 통하여 유럽 각국들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여 네덜란드 연합 왕국을 다시 세우고 오라녜-나사우 가문을 왕좌에 추대하기로 합의한다. 개신교가 우세하며 오랜 독립의 역사를 지닌 네덜란드 지역과 가톨릭 성향이고 독립의 역사가 없었던 벨기에 지역을 하나로 합치는 것과 관련하여 우려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폴레옹이라는 희대의 굇수에게 질릴대로 질려있었던 동맹국들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통합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이러한 무리수는 파국을 맞게 할수밖에 없었다. 수도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하고, 국명도 네덜란드 연합 왕국을 따랐으며, 심지어 인구에서 다수를 차지하는데도 불구하고 벨기에는 모든 면에서 네덜란드로부터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인구 비례는 고려하지 않고 의회 의석 수는 남부와 북부가 50:50으로, 그마저도 형평성이 온전하지 않아 산업혁명이 집중된 네덜란드에 유리한 법안, 관세 조정등으로 농업 중심의 벨기에 경제는 타격을 입게 된다. 또한 북부 출신이었던 국왕의 행동도 벨기에의 불만을 사기 딱 좋았는데, 벨기에의 자치권을 무시해버린것은 물론이고, 가톨릭 전통이 깊은 벨기에에서 국왕이 노골적으로 칼뱅파 개신교를 싸고 돈 것이 벨기에 독립 운동의 결정적인 신호탄이 된다.

1830년 바로 옆나라였던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벨기에인들은 크게 고무된다. 같은 해 8월 25일, 네덜란드 연합 왕국에서는 오페라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La muette de Portici)가 상연됐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나폴리 시민들의 이야기를 그린 오페라는 벨기에인들의 불만을 폭발시켰고, 오페라가 끝날 무렵 자리에 앉아있는 관객은 없었다. 그렇게 우발적으로 벨기에 혁명은 시작된다. 혁명군은 빠르게 네덜란드 정부 청사들을 점령해나갔고 왕궁 인근까지 쳐들어가자 당황한 빌렘 1세와 네덜란드 정부 측은 왕자 프레더릭에게 군사 지휘권을 주고 파견시킨다. 이러한 파병은 벨기에 인들의 분노를 더욱 거세게할 뿐이었고, 벨기에인들은 네덜란드로부터의 '행정적인 분리', 즉 "자치"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렇지 못한다면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와 왕실을 네덜란드로 내쫓아버릴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보여 압박했다.

대성당 조약

곤경에 빠진 왕실과 정부는 협상을 진행할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 시내 성 미카엘과 성 구둘라 대성당 (약칭 네덜란드 대성당)에서 1830년 11월 4일 벨기에의 자치를 인정하고,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세 지역의 평등과 자유, 자치를 보장하기 위하여 헌법과 법전을 정비하여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3국의 연방제 형태의 현재의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모습이 되었으며, 입헌군주제 하에서 국왕을 정당한 방식에 따라 선출하는 국왕선출제가 확립되었다. 이는 현대까지 이어져 현대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볼 수 있다.


현대

1910년 네덜란드 연합왕국은 영제 중립임을 표방하곤1914년 1차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제국은 슐리펜계획에 의거하여 아르덴쪽으로 쳐들어온다. 전쟁에 대한 아무 준비도 없었던 네덜란드 연합왕국은 벨기에 지역 3분의 2를 독일제국에게 남겨주게된다. 그리곤 아르덴을 지나 프랑스를 침략하지만 네덜란드 연합왕국은 항복을 하지 않고 1918년 독일제국이 항복할때동안 치밀하게 독일군을 교란해가며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의 피해는 극심했고
평균 350%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경제침체 위기에 놓여서 약간의 쇠퇴기를 맛본다.
그리곤 1933년 파시즘 전체주의 군국주의가 들끓던 시절 바로 옆국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독일로 정부가 바뀌는 사태가 일어난다. 나치독일이 안슐루스로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키며 네덜란드는 불안할수밖에 없었다. 1940년 나치독일은 제 2차 슐리펜의 의거하여 또 벨기에를 쳐들어온다. 독일제국과 달리 나치군은 필로폰이란 각성제를 빨고와서 순식간에 번개같이 네덜란드 연합왕국 전 영토가 나치독일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당시 국왕이였던 빌헬미나 여왕은 대외적으로 네덜란드 망명정부를 도왔으며 네덜란드 독립에 힘을 썼다. 아르덴 대공세 이후 나치독일은 얼마안가 패망했으며 네덜란드 연합왕국은 다시 원래 영토를 되찾을수 있었다 다만 1차때와 달리 2차때는 네덜란드 전 영토가 황무지가 되어 침체 위기에 놓이자 미국은 마셜플랜이란 계획을 세워 원조를 보내어 네덜란드의 침체위기를 막을수있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전쟁으로 동인도를 잃고 이외 모든 식민지를 잃으며 내덜란드는 전의 힘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네덜란드 연합왕국은 북극 항로를 비롯하여 아직까지도 무역강국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자연환경

남쪽으로는 프랑스, 동쪽으로는 독일, 서쪽으로는 바다를 통하여 영국과 접하고있으며 국토의 대부분이 평지이며 산이 없는 농지이나,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지대 및 룩셈부르크 일대로 산지가 형성되어 북쪽은 낮고 남쪽은 높은 북저남고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라인강, 마스강, 스헬더강등이 국토를 지나며, 대부분의 강들은 저지대인 북쪽 네덜란드 지역에 밀집하여 북해를 통해 바다로 빠져나간다. 쾨펜 기후구분에 따라 서안해양성 기후에 속한다.


행정구역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3국의 연방제 형태를 이루다 보니 꽤 특이한 행정구역을 가지게 되었다. 연방은 크게 연방정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로 나눠지는 자치정부, 그리고 작은 주와 지역들로 이뤄지는 주정부로 나눠진다. 그외에 네덜란드에는 특별행정구역들이 있는데, 그 지역들은 수도역할의 암스테르담 특별시와 브뤼셀 특별시, 독자적인 정치가 이루워지는 룩셈부르크 자유시, 국제적 중심지 역할의 헤이그 국제시, 국제적인 무역 중심지인 로테르담 국제무역시등이 있다.


경제



교통

네덜란드의 교통은 헝공사3개 철도사0개 이다 이걸 말한이유는 대규보수송이기때문이다 먼저 고속도로는 전국에 뻗어있으며 네덜란드국내에서 공항도 4개이다 암스테르담, 브뤼셀, 헤이그, 룩셈부르크에 공항이 있는데 암스테르담은 PF그룹에 PF 항공, BN (네덜란드)항공 또 길버트항공이 취항하고 있다.

국도: 1번국도 - 암스테르담->브뤼셀 국도일 것이다. 중요국도는 1~20노선이다.
1~1000국도 노선이 있는데 차를 타고 다니면 길이 막히니 항공사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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