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아나 공화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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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아나 공화국의 역사 (History of Belgiana)
고대중세근대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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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벨기아나 공화국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입니다.

고대

고대 벨기아나는 그저 부족단위, 또는 중소규모 국가에 불과했다.

카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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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벨기아나 지역에서 활동했던 카파족을 묘사한 그림

기원전 2세기 경 현재의 중화제국령 대중 북쪽 해안가에 살던 카파족은 3세기 경 현재의 벨기아나 지역으로 남하하였다.벨기아나 지역에서 카파족 외 다른 민족의 문화로 보이는 자기가 발견되어 정통성 논란이 일어나긴 했지만 현재 학회에선 카파족을 벨기아나의 시초로 보고 있다.

카파족은 그 당시 벨기아나 지역의 패권을 잡고 활동하였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500년 경 카파족은 국가화가 진행되었다고 추정된다.

북쪽 대중제국 지역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인 카파족은 마침내 국가를 세우게 된다.

라구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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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사 왕국의 9대 국왕 ‘다리엔 에드워드’

카파족들의 수장이였던 ‘드 라게네 라트비얀’ 이 첫 번째 국왕으로 등극한다. 라구사 왕국은 주변 국가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려 가면서 그 세력을 넓히고 800년 경이 되면 마침내 북쪽의 선진문명을 지닌 국가들을 위협할 수준이 된다. 이후 9대 국왕 시대에 이르면 라구사 왕국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라구사 왕국의 건국

라구사 왕국은 본래 대중제국 지역의 도시국가 ‘라구사’ 를 지칭하는 말 이였다. 하지만 라구사가 멸망한 이후 난민들이 카파족과 연대하여 새로운 국가 ‘라구사 왕국’ 을 세우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많았던 라구사 난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모두 카파족에 의해 살해당했다. 새로운 국가가 설립된 걸 기념하기 위한 축제에서 매복해 있던 라구사 왕국군들은 구 라구사 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고 전국에 분포해 있던 구 라구사 난민들을 전부 학살, 또는 추방하였다. 이를 ‘라구사 학살’ 이라고 지칭한다.

라구사 왕국의 성장기

라구사 왕국은 작은 도시국가 였지만 특유의 용맹함과 강한 신체능력, 선진문물과 뛰어난 무기 및 전술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가며 몸집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이에 관한 말도 많은 편이다. 그 당시 기록의 부재로 남은 기록은 석판에 묘사된 글 밖에 없었는데 해당 글은 대중제국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외에 또다른 논란으로는 3대 국왕부터 5대 국왕 까지의 기록이 전무하다. 즉 이 사이에 어떠한 일이 발생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소리이다.

라구사 왕국의 전성기

라구사 왕국은 마침내 벨기아나 고원 지대를 비롯한 호수 주변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850년 경 북쪽의 ‘사믈리에 왕국’ 을 격파하며 최전성기를 쟁취한다. 그러나...

중세

벨기아나는 이 시기부터 대격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라구사 왕국

라구사 왕국은 이 시기에 몰락하고 여러 격변을 거쳐 칸다브 제국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라구사 왕국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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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제 12대 국왕

라구사 왕국은 후임자를 제대로 정하지 못한 10대 국왕의 사망을 기점으로 몰락한다. 연패를 거듭하며 민심을 날로 떨어져갔고 심지어 과거 충신들 마저 왕을 모함할 정도로 권위가 떨어진 채로 11대 국왕이 급사하고 12대 국왕이 재위한다.

폭군 12대 국왕

12대 국왕은 음주와 폭력, 폭언을 일삼는 국왕이였다. 이렇다보나 사실상 국정 운영은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시민들은 죽어나갔다. 12대 국왕은 마침내 충신들 22명을 자신의 눈에 거슬렸다고 처형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작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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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혁명 묘사화

보다 못한 군중들이 작센에서 혁명을 일으킨다. 국왕에 대한 불만이 날로 싸여가던 시민들은 결국 작센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국왕과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던 고위층들을 전부 살해한다. 결국 도망갈 준비를 하던 12대 국왕 마저 혁명군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러나.....

진실

위 내용은 모두 칸다브 제국에 의해 훼손된 역사로 밝혀졌다. 라구사 왕국의 12대 왕은 무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성실하고 현명했던 왕인 것이 밝혀졌다.

흑사병

라구사 왕국 멸망의 진짜 원인
라구사 왕국의 다마스쿠스 지역에서 정체불명의 병이 발생하여 사람의 살이 썩어들어간다는 소식이 왕궁에 까지 전해졌고 그 지역에 유난히 쥐와 벼룩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쥐와 벼룩을 모두 박멸하였으나 이미 다른 지역에까지 속수무책으로 퍼진 상황이였고 거리두기, 집함금지, 이내 그를 넘어 외출금지령 까지 발효되었으나 겉잡을 수 없게된 질병의 확산으로 작센에서 폭동이 발생, 혁명으로 확산되어 라구사 왕국은 멸망하고 작센국이 세워진다. 이후 칸다브 제국 건국 이후 2년만에 흑사병은 종식한다.

작센국

작센 혁명으로 12대 국왕이 살해되고 새로운 국가 작센국이 건국된다. 그러나 군주가 없던 작센국은 얼마 안가서 멸망한다.

멸망?

멸망이라 부르기엔 애매하다. 왜냐면 사실상 칸다브 제국이 작센국의 뒤를 이은 국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칸다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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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다브 제국의 군대

908년 건국된 칸다브 제국은 국내의 혼란을 진압하고 국경을 확정지으며 지속하여 팽창 정책을 이어간다. 이렇듯 옛 전성기의 위상을 되찾아 가던 도중 발목을 잡는 사건이 일어난다.

근대

벨기아나가 또 다시 역번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부터 벨기아나는 선진국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칸다브 제국

혼돈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왕자의 난

본격 패륜 끝판왕
7대 국왕이 즉위한 이후 그의 자식이였던 ‘제임스 쿡’ 은 권력욕이 굉장히 강하였다. 그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였던 7대 국왕을 살해하고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국왕이 된다. 그는 강력한 절대왕정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팽창해나가 1084년에 이르러선 벨기아나 총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이륙한다.

칸다브 제국의 몰락

그러나 칸다브 제국은 이후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곪아갔고 결국 멸망하게 된다. 대제국 치고는 상당히 허무한 멸망이라고 평가된다.

제1대 건국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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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위원회를 묘사한 그림

칸다브 제국의 왕조에 불만을 품고 탄생한 서민들의 비밀단체. 칸다브 제국을 엎어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창설되었지만 엎어버리기 전에 칸다브 제국이 붕괴하여 본의 아니게 매우 쉽게 새로운 국가를 창설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대 벨기아나 공화국의 전신인 ‘벨기아나 왕국’ 이 탄생하게 된다.

벨기아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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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아나 왕국 초대 국왕

벨기아나 왕국은 칸다브 제국의 전성기에 비해 매우 영토가 줄어든 상태였다. 비옥한 영토의 상당수를 일었으며 자원 또한 극한으로 줄었고 인구 또한 1/3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허나, 오히려 이것은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주변국들의 견제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고 고도의 교육 수준과 기술 발전을 이륙하였다.

벨기아나 왕국은 이렇듯 건국 초기부터 급속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회 내부에는 큰 불안요소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내전으로 터지게 된다.

벨기아나 왕국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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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아나 왕국 내전 묘사화

기존 칸다브 제국의 기득권과 상류층들은 자신들을 평민 취급하는 벨기아나 왕국의 왕실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었고 하누아투교를 믿고 있던 일부 국민들 또한 가톨릭을 국교로 하는 벨기아나 왕국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 초대 국왕이 “칸다브 제국의 구 기득권층에게 주던 혜택들을 모두 폐지하겠다.” 라고 선언하자 결국 혁명이 일어났고 이는 더욱 규모가 커져 내전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개전의 원인

당시 벨기아나 왕국은 칸디브 제국을 무너뜨린 직접적 원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칸디브 제국은 특성 상 못배운 사람들이 많았고 자연스레 벨기아나 왕국이 칸디브 제국을 무너뜨린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 번째로는 당시 벨기아나 왕국의 국교는 가톨릭이였으며 이는 기존 하누아투교를 믿던 칸디브 제국 사람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개전 초기

개전 초기에는 반란군 측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그들은 신체 능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자금이 많아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하여 정치적 고점 또한 가져갔다. 이후 벨기아나 왕국은 반란군에게 영토의 2/3 를 빼앗기고 수도마저 함락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왕세자가 사망하여 자칫 잘못하면 건국 10년도 안 되어 왕가의 대가 끊길수도 있는 상황이였다.

전쟁 중기

그러나 승기는 얼마안가 벨기아나 왕국에게 넘어갔다. 벨기아나 왕국은 훈련된 정규군과 고도의 전략을 통해 다시 영토를 회복해나갔고 자신들의 편에 섰던 정치인들에게 보상을 주며 자신들을 배반했던 정치인들은 가차없이 처형했다. 또한 반란군의 민간인 학살으로 민심 또한 등을 돌렸다.

전쟁 후기

몇 년전까지만 해도 벨기아나 왕국의 수도 였던 작센은 이제 반란군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반란군은 몰락하기 직전이였고 주요 수뇌부들이 분열/배신/항복/자결 등의 이유로 빠져나가며 마침내 반란군은 함락된다.

전쟁 이후

벨기아나 왕국은 이 전쟁 이후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성장해 나간다. 2대 국왕이였던 ‘알브레드 포타스’ 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되며 4대 국왕이였던 ‘핸리 포커슨’ 은 무역업의 활성화와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고 5대 국왕 ‘라 게리슨’ 은 뛰어난 외교 기술을 바탕으로 국제에서의 위상을 높혔다.

현대

벨기아나가 다시 한번 역사상의 황금기를 되찾는 시기이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벨기아나의 선진화가 시작되었으며 국제적으로도 영향력 있는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군주제가 폐지되고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를 이륙하게 된다.

벨기아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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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아나 왕국 말기 평민 복장

벨기아나 왕국은 안정적인 통치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역사상의 황금기를 열 준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9대 국왕에 이르러서는 민주주의가 흥하게 되고 결국 벨기아나 왕국은 공화정을 선포하여 지금의 벨기아나 공화국에 이르게 된다.

벨기아나 공화국

벨기아나 공화국은 세계 최고의 선진국가가 됨과 동시에 세계 최강국인 중화제국, 대륙 하나를 이끄는 워대국과 겨루는 것이 어느정도 가능한 경제대국이 되었다. 또한 중립국 선포, 대중제국 흡수 등으로 자신의 외교적 입지를 확고히 하게 된다.

제0차 세계대전

점점 더 강력해지는 중화제국과 그를 막기 위한 워대국의 힘겨루기로 촉발된 전쟁이다. 결과는 중화제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대륙연합 세력은 힘을 잃게 된다. 또한 이는 대중제국의 몰락을 불러오고 중화제국의 초강대국화와 벨기아나 공화국의 부상에도 직간접적 영향을 주었다. 이 전쟁으로 벨기아나 공화국은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본격적인 기술경쟁에 돌입한다.

현재

벨기아나 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