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3관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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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서민원의 원내구성
House of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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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메이 내각 
2021.02.19. ~ 2026.02.19.
여왕 폐하의 정부 여왕 폐하의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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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당
358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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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217석
기타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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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국민당
36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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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당
16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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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연합당
9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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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페인
6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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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드 컴리
4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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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노동당
2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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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
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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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 동맹당
1석
무소속  1석 
재적의원  650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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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ervative and Unionst Party
한국어 명칭보수연합당
영어 명칭Conservative and Unionst Party
창당일1834년
이념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재정보수주의
영국 연합주의
친유럽주의[1]
반공주의
스펙트럼중도우파
상징색 파란색 (#00AEEF)
주소영국 런던 매튜 파커가 4
청년 조직젊은 보수당 (Young Conservatives)
당원 수214,000명 (2021년)
당수테레사 메이 (총리)
스코틀랜드 당수더글러스 로즈
웨일스 당수폴 데이비스
북아일랜드 당수에마 피딩
서민원 의석
358석 / 650석 (55%)
귀족원 의석
261석 / 786석 (33.2%)
약칭CON
국가영국(3관) 영국(3관)
100%
선거유세 중인 테레사 메이

개요

영국의 대표적인 보수정당. 2010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집권여당이다. 보수주의와 영국 연합주의를 지향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다. 현재 보수당 대표는 제76대 영국 총리인 테레사 메이이다.

로버트 필이 기존 토리당의 현대화를 위해 창당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시내각을 이끌던 윈스턴 처칠과 1980년대 신자유주의로 영국 경제를 회생시킨 마거릿 대처를 배출해낸 정당이다. 북아일랜드에서 활동하지 않는 다른 정당과 달리 보수당은 공천을 지속적으로 해왔으나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강경보수 성향을 지닌 민주연합당에게 지지세력을 완전히 흡수당했다.

창당

영국 보수당은 17세기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토리당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로버트 필이 토리당의 현대화를 적극 강조하며 1834년에 로버트 필이 당수로 선출되면서부터 당명을 보수당으로 변경, 당을 재편하고 선거전 당시 매니페스토에 '보수'라는 이름을 작성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보수당은 자유당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가 이끄는 거국내각에 참여한다. 앤드루 보너 로가 자유당-보수당 연립내각의 총리로 선출, 종전 후에도 재직하며 1923년까지 보수당 단독내각을 이끌기도 했다. 엔드루 보너 로는 건강문제로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못하게 되자, 스탠리 볼드윈에게 당수직을 위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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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대, 제63대 총리 윈스턴 처칠
건설은 더디고 수년이 걸리는 힘든 작업이지만, 파괴는 단 하루의 무분별한 행동만으로 가능하다.
— 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네빌 체임벌린 총리의 주도로 거국내각이 형성되었으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이후 체임벌린이 사퇴하자 윈스턴 처칠이 전시총리직을 승계하고 보수당, 노동당, 자유당 등이 참여한 거국내각이 재조직된다. 독일이 패망한 후 처칠은 승리자로 평가받아 승승장구 하는 듯 했으나 1945년 총선에서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에게 대패한다. 그러나 노동당은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민심을 잃어 1951년에 다시 보수당에게 정권을 내준다. 이후 앤서니 이든, 헤럴드 맥밀런, 알렉 더글러스 홈을 거쳐 1964년까지 정권을 이어가게 된다.

피의 일요일 사건

1971년 영국 정부가 IRA 관련자들을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게하자 북아일랜드 런던데리에서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발생했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영국군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18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여당이었던 보수당은 이 시점부터 북아일랜드에서 지지기반을 대거 상실하게 된다.

영국병과 대처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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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대 총리 마거릿 대처
이기기 위해선 몇 번이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 마거릿 대처

영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고비용, 고복지, 저효율로 영국병이라는 사회적 혼란을 맞이했다. 기업들은 거액의 실업수당을 부담하게 되자 경직되기 시작했고 경영합리화를 통해 노동자들을 대거 해고하자, 해고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해 산발적인 파업을 강행하고 나섰다. 위 과정에서 노조는 점차 기득권화 되며 임금과 퇴직수당을 무리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해 영국 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게된다. 급기야 1976년에 IMF의 구제금융까지 받아 무리한 디플레이션 정책까지 펼치게 된다. 1978년, 이를 수습하지 못한 제임스 캘러헌의 노동당 내각은 마지막 카드로 임금인상률 상한제를 도입하자 노조는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이라 불리는 총파업을 일으켰다.

결국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은 의회에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했고 1표차이로 가결되며 1979년에 조기총선거가 실시된다. 보수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해 당수였던 마거릿 대처가 총리로 취임한다. 대처 총리는 통화주의 정책, 임금동결과 함께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실시한다. 다만 무리한 통화유통정책으로 실업자 수가 300만명을 돌파하고 GDP가 감소하자 보수당의 지지도는 날마다 하락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1982년에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한 후 1983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둬 국정운영에 상당한 탄력을 받게 되었다. 대처 총리가 내세웠던 '대처리즘' 이라 불리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바탕으로 소득세 및 법인세 감면과 기업규제 완화, 민영화 등의 각종 경제 유연화를 시행한 결과, 1985년부터 1988년 주가 대폭락 전까지 매년 5%의 경제성장률, 집값 상승, 실업률 감소 등의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주며 영국은 경제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대처는 1990년에 유럽 공동체(EC) 관련 논쟁[2]에 휩쓸려 당내 지도력이 흔들리게 되고, 경제불황임에도 불구하고 인두세를 시행함으로써 민심이 최악으로 치닫게 되자 총리직에서 사퇴한다.

존 메이저의 취임과 야당생활

마거릿 대처의 퇴임 이후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 존 메이저가 총리 권한대행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보수당을 향한 국민정서는 말 그대로 최악이었고, 걸프전쟁으로 인해 영국이 막대한 부채(약 30억 파운드)를 얻게 되어 경제는 또 다시 침체기로 접어들었다. 이로써 1992년 총선거에서 노동당이 무난하게 정권교체를 이룩할 것이라고 예상되었으나...

노동당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종합특별세에 경계테세를 취한 기득권층과 마거릿 대처의 색채를 지우는데 성공한 메이저 내각에 기대를 건 샤이 지지층이 보수당에 표를 몰아주며 간신히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당내 의원들의 연이은 스캔들과 1995년 스코틀랜드 지방선거에서 보수당이 대패하자 메이저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당수 선거를 실시했는데, 다행히 재신임되었으나 1997년에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에 패배했다.[3]

  1. 신유럽연합에 가입한 후 동유럽 국가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유럽회의주의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2. 당시 마거릿 대처는 EC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사실상 EC의 수장국이나 마찬가지였던 프랑스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는 것이라며 거세게 반대했다고.
  3. 당시 노동당은 총선에서 418석을 확보했는데, 이는 서민원 의석의 64%나 차지하는 비율이다. 영국 선거제 특성상 60% 안팎의 의석을 차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당시 보수당에게는 충격과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