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군주제

개요

선거군주제(영어:Elective Monarchy)는 '군주의 지위가 선거에 의하여 계승되는 정치 체제'이다.

군주제의 한 형태로 군주를 세습으로 세우는 게 아니라 선출하여 세우는 정치 체제이다.

특징

군주가 혈연에 의해 세습되는 여타 군주제와 달리, 선거군주제는 말 그대로 군주를 별도의 선출 과정을 거쳐 세운다. 이는 공화제, 특히 대통령제와 유사하지만, 이들과 선거군주제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신분, 계급, 혈통, 가문 등의 비민주적인 요소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보통선거의 원칙이 선거군주제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선거로 뽑혔다 뿐이지 군주이므로 선출된 후에는 종신의 임기를 가진다.

사실 선거군주제는 대통령제와의 구별이 모호한 감이 있다. 위의 조건을 뒤집으면 대통령제는 민주적인 보통선거로서 국민 대다수가 투표 가능하며 대다수가 피선거권을 가지면서도[1] 임기가 정해진 군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의외로 두 체제가 공화주의라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최초의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에서 대통령이 탄생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미국 대통령은 영국 국왕을 대체할 목적으로 만든 자리였는데, 막 건국된 초기만 하여도 갓 국가연합의 티를 벗어나 느슨한 연방제 국가로 나아가던 미국 정치체제 상 군주제를 시행했다가는 군주의 지위가 모호해질 상황이었다. 식민지였으니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류층도 끽해야 영국으로 치면 젠트리에 가까운 유지와 명사들이었으며, 그렇다고 다른 나라의 왕실에서 군주를 모셔오자니 명분도 부족했다.[2] 그리하여 미국은 군주는 아니지만, 미국을 대표하고 미국 독립선언의 가치를 실현해 줄 국가수반으로서의 연방 최고지도자가 필요했다. 이에 연방의회에서 논의 끝에 '상석에 앉은 자' 또는 '회의를 주관하는 자' 정도를 의미하는 "President"(대통령)라는 단어를 만들어 국가 수반의 명칭으로 삼았다. 이렇듯 기존의 군주를 대신하는 존재였으므로, 당시 미국 국민들은 물론 초대 대통령 본인인 조지 워싱턴 관점에서도 대통령은 일종의 선거군주로 인식되었으며, 워싱턴은 임기 동안 국민들에게 자신을 "전하(His Elective Highness)"로 부르도록 하고 황제처럼 스스로를 3인칭으로 말하는 등 군주제의 의전을 행했다.[3] 그러나 워싱턴은 국민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끝내 종신집권을 거부하고 낙향했고, 그 덕분에 선거군주제와는 구별되는 현재의 대통령제가 확립될 수 있었다.

양자 간 모호성은 미국보다 앞서 성립한 네덜란드 공화국을 살피면 더 잘 드러난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명목상 공화제 연방국가로서 선출직인 스타트허우더가 국가원수였으나, 실제로는 오라녀 가문이 독점하다시피하는 군주제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공화국 시대 동안 오라녀파와 공화파 간 갈등이 벌어지고는 하였고,[4] 결국 프랑스의 괴뢰국이 되었다가 해방되었을 때는 연합 네덜란드 주권공국을 거쳐 네덜란드 연합왕국이 되어 완전히 군주제로 전환되었다.

일반적으로 민주공화제귀족공화제, 선거군주제 중 어느 것으로 분류할지 여부는 주권 문제, 즉 정체국체를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예컨대 주권자가 국가원수를 선거로써 선출한다면 이 세 유형에 속하되, 주권의 행사가 전적으로 국가원수에게 달려있다면 선거군주제가 되고 법이 정하는 공공에 의하면 공화제가 되는 것이며,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국민 전체에 부여되면 민주공화제가 되고 특정 집단에 한정되어 주어지면 귀족공화제가 되는 것이다. 사실 대통령제보다도 귀족공화제야말로 선거군주제와의 경계가 애매한데, 로마 제국폴란드-리투아니아 등의 사례에서 보듯 서로 체제가 전환되기도 하였다.

관련 문서

군주제

채택중인 가상국가

각주

  1. 이 조건이 전 국민이 되기까지는 대통령제 등장 이후에도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사실 지금도 옛 제한들 중에서 연령 만큼은 완화되었을지언정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2. 당대의 영국 왕실인 하노버 왕조이나 후대의 그리스 왕국 등 여러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군주를 나라 밖의 인물로 추대하는 일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 국왕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까지 한 상황에서 새로운 왕을 "외국에서" 불러들여 추대하는 것은 그 "취지"에 맞지 않았다.
  3. 다만,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주권국가로서 국가 간 지위가 대등하다면 국가원수 또한 대등해야 하는데, 당시 기준으로 대부분 군주제 국가였으니 설령 본인이나 국민이 싫더라도 취해야 했을 것이다.
  4. 예컨대 영국-네덜란드 전쟁 및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의 영웅이었던 미힐 더라위터르 제독도 이러한 정쟁에 휘말려 숙청당했다. 심지어 이 사람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공화파 총리 요한 더 비트(Johan de Witt)는 아예 오라녀파 폭도에게 살해당한 후 식인까지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