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월국/역사

성월 문명

구석기 성월은 빙하기로 인하여 한반도, 오키나와, 일본 열도, 백제와 이어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도래한 사람들이 성월에 정착하였으며, "성월민족"이 됩니다.
빙하기가 끝나 성월이 섬나라가 되면서 성월만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고,
기원전 1500년경, 청동기에 진입하며 "성월 문명"을 형성합니다.
성월 문명은 태음력을 사용하였으며, 당시 상고대 성월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남북국체제

기원전 100년경, 성월은 북쪽에 살던 사람들과 남쪽에 살던 사람들로 나뉘었는데,
사람들끼리 국가를 형성하며 북성국과 남성국으로 나뉘어집니다.
북성국과 남성국은 한동안 싸우지 않고 지냈으나,
기원전 100년경, 북성국이 전쟁을 시작하며 남북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북성국보다 약했던 남성국은 북성국에게 패배했고,
기원후 150년경, 통일 북성국이 됩니다.
또한, 이 시기에 기원전 90년경, 성월은 철기시대에 진입합니다.

통일북성국

북성국이 남북국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 북성국이 형성됩니다.
산악지대인 동부 (현재 오오모리부)는 험해 개척이 힘들고,
서부 (현 츄오부) 길이 남쪽과 북쪽의 세력을 이어줄 수 있는 길이였는데,
북성국이 이 길을 개척하여 남쪽을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합니다.
단, 남쪽의 문화를 존중하였으며, 남쪽을 탄압하거나 하지 않고,
유화적으로 통치하여 비교적 오래 간 국가가 되었습니다.
성월어 또한 상대 성월어로 바뀝니다.
하지만, 주요도시인 신쿄와 난쿄만 관리하는 바람에 타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며,
결국 기원후 950년경,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진입합니다.

전국시대

각각 주요도시였던 난쿄, 니시쿄, 모리우미, 산죠, 오오츠키, 코오카이에서
세력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합니다.

​전투 진행 과정

난쿄 -> 산죠 점령
니시쿄 -> 코오카이 점령
모리우미 자멸
오오츠키 전투 (북부의 니시쿄와 남부의 난쿄가 오오츠키 점령을 위해 전투)
난쿄 -> 오오츠키 점령
난쿄 -> 니시쿄 점령

​이렇게 하여 남쪽의 난쿄가 전국을 기원후 1060년경 통일합니다.
한편, 전국시대 동안엔 여러 발전도 있었는데,
전투에 필요한 무기를 생산하느라 철을 다루는 기술이 향상되었으며,
언어 또한 중대 성월어로 변화하였습니다.

고(古)성월

난쿄가 전국을 통일하고, 남부의 난쿄는 고성월을 세웁니다.
언어는 중대 성월어의 남부 방언을 채택하였으며,
동부의 산악로를 개척하여 더 효율적으로 북부를 관리합니다.
북부 관리가 그렇게 유화적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약간 강압적인 편으로 통치했습니다.
북부에 관리를 파견하고, 남부에서 북부로 시찰도 자주 가며,
개척한 산악로를 이용해 더 효율적으로 북부를 관리하였기에,
고성월은 기원후 1060년부터 1460년까지 오래 이어집니다.
하지만, 강압적 통치에 북부는 불만이 쌓였으며, 이에 북부는 반란을 일으킵니다.
결국 고성월은 멸망하였고, 전(前)월성국이 들어섭니다.

전(前)대 월성국

전(前)대 월성국은 북부가 반란을 일으켜 세운 국가이기에 역시 북부 중심의 국가였습니다.
북부의 반란으로 1460년 세워졌으며, 남부의 반란으로 멸망할 1630년까지 존재했습니다.
남부를 유화적으로 통치하였으며, 이로 인해 부패로 썩어 반란이 일어난 1630년까지
반란 하나 없이 안정적으로 운영됩니다.
월성국 초반엔 하대 성월어로 변한 성월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사용하였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일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운영은 길을 정비하고 법 체계를 정비하는 등,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부패로 썩어가기 시작하여 결국 1630년, 남부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멸망합니다.

후(後)대 월성국

후(後)대 월성국은 남부가 반란을 일으켜 세운 국가이기에 역시 남부 중심의 국가입니다.
남부의 반란으로 1630년 세워졌으며, 현대 성월국이 되는 1930년까지 존재합니다.
북부를 많이 강압적으로 통치했으며, 결국 강압적 통치에 쓰러진 북부를 남부가 통합하며
북부 vs 남부의 분쟁을 제거하는데에 성공합니다.
1930년 종성반란으로 (글 아래에 게시하는 근현대사 링크 참조) 멸망하였습니다.
공용어는 일본어를 택하였으며, 비시바 (섬) 이나 일부 남부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는 일본어가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남부 방언에는 성월어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으며,
비시바 방언은 거의 성월어와 일치하여 "성월어의 후손"으로 불립니다.)
시간이 흐르며, 비시바를 제외한 남부 지역 또한 일본어 사용을 시작,
공용어가 일본어로 통합됩니다.
체계적인 재판제도 및 법률, 정비된 도로 등이 존재하는 등,
전대 성월국과 같이 체계적으로 잘 운영됩니다.
하지만, 개화를 요구하는 개화파들에 의해 1930년 반란이 발생,
멸망합니다.

여기서부터는 근현대사입니다.

종성반란(終成反乱)

월성국은 전제군주제 국가로서, 수백년동안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도태되어 있던 대월성국은
결국 개혁파에 의하여 반란이 발생했으며, 반란은 성공하게 됩니다.
결국 대월성국 왕실은 무너지고, 성월국이 세워지게 됩니다.

민공대립(民共対立)

개혁파들은 "대월성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라는 목표 아래에,
이념은 관계없이 사람들이 모여든 집단이였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국가가 세워진 후, 결국 우려하던 이념대립이 발생했습니다.
개혁파 안에는 민주주의자도 존재하며 공산주의자도 존재했는데,
성월국이 민주주의로 건국되자 공산파에서는 불만을 표출했고,
결국 "성월공산당" 이라는 별도의 정당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성월공산당 반란

개혁파 안의 공산주의자들이 독립하여 새로 창당한 정당,
성월공산당이 결국은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반란은 성월공산당 강경파의 비밀 군사조직, "아카구미"에서 주도하였으며,
남쪽의 난쿄부 도리츠시에서 발생하여 차차 퍼져나갔습니다.
비밀리에 훈련된 아카구미는 꽤나 강했으며,
아직 훈련되지 못한 성월군을 초반에는 압도했습니다.
하지만, 남쪽의 난쿄부와 산죠부를 점령한 이후,
니시쿄로 북진하려던 아카구미는 난관에 봉착합니다.
원래 아카구미는 오오모리부를 통하여 북진할 예정이였는데,
문제는 아카구미가 오오모리부의 산악지대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산악지대가 아닌 다른 길을 이용해 남쪽에 다다른 성월군에 의해
결국 반란은 진압되고, 공산당은 해산됩니다.

공산당 재창당 대립

쿠데타 실패 이후 공산당의 강경파들은 대부분 힘을 잃었으며,
공산당 또한 점점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던 찰나,
당시 여론 위기에 몰린 민중당 총리가 온건파 공산주의자들에게 제안을 해옵니다.
"공산당의 재창당을 비무장이라는 조건 하에 허가할테니, 우리를 지지해달라."
마침 공산당의 재창당을 바라던 온건파에겐 딱 좋은 제안이였고, 온건파는 이를 수락합니다.
하지만, 역시 가만히 보고있을 우파는 아니였습니다.
우파는 "민중당이 나라를 공산주의로 만드려 한다"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
결국 여론이 최악으로 치닫아 민중당 정권은 몰락했으며,
이는 수십년간 민중당이 집권하지 못하는 현상에 한몫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한편, 공산당의 재창당은 이미 승인되었고, 공산당은 재창당됩니다.
이 재창당된 공산당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세계 제 2차대전 (전시상황)

2차대전이 발발하고 세계가 혼란상태에 빠지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모든 당은 하나로 뭉칩니다.
극우 성월제일당부터 우파인 민주자유당, 중도인 국민당에
좌파인 성월민중당과 극좌인 성월공산당까지,
5대 정당이 모두 하나로 뭉쳐, 당시 민주자유당 소속이였던 총리를 전폭 지원합니다.

민주자유당 독재와 성월 민주화 운동

민주자유당이 결국 독재를 시작합니다.
공산당 재창당 대립 이후 민중당이 수십년동안 집권에 실패해서 그런 것일까요,
민주자유당은 자만감이 들었고, 이는 독재 실행으로 이어졌습니다.
민주자유당 독재 체제에서도 일단 선거는 이루어졌습니다.
총 2회 이루어졌으나, 물론 이는 모두 부정선거였습니다.
또한 좌파 인사를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헌법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독재 시작 3년 후인 1958년, 남부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이 발생했습니다.
정부는 군대까지 투입하며 운동을 탄압하였으며,
결국 북부에서도 1962년, 민주화운동이 발생합니다.
그 이후 3년동안 어찌저찌 독재정부는 버티다가, 결국 1965년 물러납니다.

극우 폭동

극우 정당인 성월제일당의 지원을 받은 극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군대가 빠르게 진입할 수 없는, 산악지대에 둘러싸여져 있는
모리우미시에서 폭동을 발생시켰고, 2주동안 실제로 모리우미시를 통제했습니다.
2주 동안이나 군대가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
성월군이 산악지대를 넘어 모리우미시에 진입합니다.
그 이후 3시간 22분만에 모리우미시를 탈환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폭동범들은 모두 처벌받았습니다.
하지만 공산당 쿠데타 당시에 공산당이 해산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성월제일당은 해산되지 않았는데,
성월제일당은 "자신들과는 관계가 없다" 라고 꼬리자르기에 돌입했고,
결국은 나중에 와서야 "성월제일당이 지원했던 폭동" 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국민당 게이트

결국 중도에서도 문제가 터집니다.
중도 정당 "국민당"의 여러 관련자가 비리에 연루되었고,
또한 국민당의 의정 활동도 비리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에 제2야당인 국민당 의원이 총사퇴하는 엄청난 일이 발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