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인들의 반란과 콤니노스 황조의 시작 (공동세계관)

세르비아인들이 로마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세르비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지속된 높은 세금에 반발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반란이 실패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 원로원 인사들이 콤니노스 황가의 인사를 황제에 앉히는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두카스 황조가 많은 지지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두카스 황조는 정계에 많은 주요 인물들과 연줄이 있었고, 중앙에서 그 세력은 강대했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파와 두카스파로 나뉘어 내전이 벌어졌다.
원로원파는 비록 지방의 군대를 기반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튀르크의 공격 때문에 이들을 동원할 수 없었고, 두카스파는 중앙의 관료들을 기반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파는 세르비아 쪽 군사를, 두카스파는 중앙의 군사를 이용해 서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반란을 진압할 군사들이 사라지자, 세르비아인들은 즉시 독립을 선언했고, 세르비아 지역에 몇 안 남은 군사들을 처리해 왕국의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원로원파와 두카스파 모두 세르비아의 반란이 성공했음을 알았지만, 내전의 혼란으로 인해, 개입하지 않았고, 테살로니카 전투에서 두카스파가 승리하자, 미하일 7세가 제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미하일 7세는 세르비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이수스에 군대를 모아 타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중앙군대가 테살로니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탓에, 나이수스의 전투에서 미하일 7세는 패배하였고,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미하일 7세를 폐위하고, 콤니노스 가문의 알렉시오스 1세를 즉위시키게 된다.
알렉시오스 1세는 세르비아의 반란을 제국이 진압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를 포기하는 대신 내치에 신경쓰기 시작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중앙 군대를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내전의 피해들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문화 발전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는 등, 여러 일을 도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