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비시카 연방 공화국

시라비시카 연방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Shirabis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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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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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국호시라비시카 연방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Shirabisaka
상징국가국민을 위하여
국화장미
국조독수리
표어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자연환경면적(영토)2,486,330km²
인문환경인구44,204,708명
인구밀도25km²
공용 언어영어,독일어,스웨덴어,핀란드어
정치국체민주공화제
정부형태공화제,연방제,이원집정부제,양원제
대통령제임스 소프타르 민주당
총리미에라 로에트 보수당
경제GDP$2,346,887,290,351
1인당 GDP$53,091
총 PPP$2,446,332,745,428
1인당 PPP$​​55,341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38.7%
공식 화폐시라

개요

라카니오 전경.jpg.jpg
시라비시카의 대표도시 라카니오의 전경

시라비시카는 3관 북유럽에 있는 스칸디나비아의 강국이며 약칭은 영문 약칭은 FRS 영문 전체는 Federal Republic of Syrabifika로 표기한다.

시라비시카의 역사

고대~중세

이전 역사는 스웨덴과 동일하며 단지 스웨덴이 "시라비시카"라는 국가로 시작한것외엔 변화는 없습니다.

중세시대

30년 전쟁이후 바사 왕조가 폐위되자 시라비시카는 의회를 중심으로 새 국왕을 선출하기위한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스톡홀롬 의회에서 새 국왕의 선출을 두고 고종 사촌 칼리프 세자를 지지하는 상인계층과 자본가 그리고 남부의 귀족들로 구성된 스톡홀롬 동맹과 구스타프 왕자를 지지하는 지주층과 봉건적 호족중심의 토리 동맹이 결국 왕의 취임을 두고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고 결국 6개월간 공위사태가 지속됩니다. 일단 양측은 중립파 스테판 멜런 재상을 섭정으로 임명하고 왕위 협상을 계속하였고 또한 입장차가 크던 나머지 귀족들도 영주들이 많은 북부는 헬싱기파로 상업이 발달한 남부와 중부는 주로 스톡홀롬파로 흡수되게 됩니다.

장기적인 공위사태를 우려한 칼리프 세자와 스톡홀롬 동맹은 결국 토리 동맹과의 화의를 진행했고 결국 3년간의 협상끝에 1657년 부왕을 구스타프 왕자로 왕을 칼리프 세자로 하는 대협상이 타결되고 이때부터 대공위시대를 방지하기위한 "섭정법"이 탄생하였으며 새로운 국왕 임명이 지연될경우 의회 의장이 왕위 협상을 주도하고최장기 3년동안 국정의 총괄을 담당하게되는 체제를 성립하게 됩니다.

구스타프 즉위이후

이후 구스타프 왕자는 칼 10세로 시라비시카 왕국의 국왕에 취임하며 수오미 공국을 왕국으로 승격한뒤 시라비시카 연방을 결성하게되었지만 30년전쟁으로 발생한 재정적인 문제에 시달렸으며 카자크 전쟁으로 정신없는 폴란드를 공격하여 북방전쟁을 일으키고 이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도 승기를 잡으면서 로스킬레 조약을 맺게됩니다. 이후 시라비시카는 덴마크령 스칸디나비아 영토의 상당수를 얻어내게됩니다. 하지만 북방전쟁중 칼 10세는 사망하게 되고 이후 의회는 1655년 토리파의 구스타프를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키고 부왕으론 카를로스 왕자(현실 칼 11세)를 임명시키는데 당시 카를로스 왕자가 5살이라는점으로 인해 논란이 컸지만 구스타프 왕자는 시라비시카 중앙은행(현 연방은행)과 카이사 대학,스톡홀롬 대학등 인재양성을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했지만 이후 스코네 전쟁(1675~1679)에서 구스타프가 병사하자 1679년 칼 11세로 취임하였으며 칼 11세는 그동안 유지되던 봉건지주들의 영토를 몰수하고 배분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후 젠트리 계급의 선거참여와 피선거권 보장 헌법개정과 법률 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때부터 국왕은 의회에 출석하여 의원들의 질의를 받을 의무가 박히게 되었고 조세권과 국방권도 이때를 계기로 완전히 의회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또한 군제도 개혁을 통해 유럽국가들의 긴장을 불러왔으며 이로인해 토리파와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이후 1697년 칼 11세가 사망하자 구스타프 2세가 취임하는데 구스타프 2세는 토리파의 교육을 받고 칼 11세의 즉위당시 부왕으로서 활동했던 인물로 특히 토지개혁에 대해 반발심이 컸으며 칼 11세와 잦은 갈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칼 11세의 전제정치와 대북방전쟁

하지만 즉위이후 자신에 반대하는 귀족세력과 젠트리 세력을 숙청하고 스톡홀롬파를 불법화시킨뒤 전제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시라비시카에서 유래없는 권한을 누렸고 대북방전쟁을 일으키게됩니다. 초반엔 현실역사대로 대부분 전투에서의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폴타파 전투에서 구스타프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지휘가 어렵게되자 결국 대참패를 겪었고 이후 전쟁 후반부 결국 구스타프가 유탄에 맞아 전사함으로서 결국 1721년 러시아 제국과 종전협상을 맺게됩니다. 종전협상이후 종전협상이후 시라비시카는 시-러간 국경이 확정되고 평화를 얻었지만 시라비시카 제국의 몰락을 불러온 토리파에 대한 분노가 극에 치닿았고 결국 토리파 출신의 섭정 구스타프 3세가 내정개혁에 합의하면서 젠트리 계급의 참여를 허용한 제헌의회가 개회되었고 이 제헌의회의 주도권을 가진 젠트리 세력들은 영국식 내각제를 본따되 왕정이 폐지된 본국의 특성을 반영하여 의회의 투표를 통해 선출된 제 1 재무경이 행정권을 의회가 입법권을 사법원을 분리시켜 사법권을 분리한 3권 분립체계를 확립시키게 됩니다. 현재 시라비시카 대통령이라는 직위는 1820년대에 신설되고 미국식 대통령 선거제를 본따는 개헌을 할때까진 재무경이라는 직책이 이를 대체하였으며 형식도 영국의 총리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1722년 구스타프 3세의 퇴위와 함께 "윌리엄 켄트리"의 스톡홀롬 정권이 들어서고 스톡홀롬과 토리파를 중심으로 스톡홀롬은 자유당으로 토리파는 보수당으로 개칭한뒤 양당제가 수립되었으며 기존의 귀족원의 계파등록도 선거관리국을 신설하고 정당제로 변환함에 따라 본격적인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후 시라비시카는 노르웨이 지역을 제외한 스웨덴-핀란드 연합형의 정부로 출범하게됩니다.

근대사

시라비시카는 당시 공화국이였지만 지금과는 다른 중앙집권형 국가로 탄생하였으며 스톡홀롬 동맹은 민주당을 창당하였고 토리 동맹은 보수당을 창당하는 양당제가 수립되게됩니다. 중간에 완전한 공화주의를 추진하는 공화당과 왕정당등이 등장하긴했지만 이들의 세력은 만년 야당신세였다가 결국 1730년대에 원내에서 퇴출되게됩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당시에는 반 개혁 성향의 보수당 정부가 들어섰지만 나폴에옹의 침공으로 1802년 포메른지역을 빼앗기고 1808년에는 러시아가 혼란스러운 시라비시카 정세를 틈타 수오미 지역을 습격하지만 결국 헬싱키 전투에서의 승리와 러시아군의 실책으로 카렐리야의 일부지역을 빼앗기긴 하나 핀란드는 지켜내게 됩니다. 결국 이 전쟁으로 1809년 보수당 내각은 실각 친 나폴레옹 성향이였던 자유당 정부가 집권하게됩니다. 하지만 민주당 정부는 나폴레옹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반 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여 덴마크령 노르웨이를 공격하여 1814년 노르웨이를 할양받고 제 1차 행정구역 조정을 진행함에 따라 현재의 시라비시카 영토가 나오게 됩니다.

나폴레옹 전쟁이후 1815년 자유당은 재무경제를 폐지하고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에 입각한 대통령제 헌법을 공표하며 시라비시카 제 2 공화국을 건국하게됩니다. 이때 보수당은 자유당과 다른 봉건주의적 요소때문에 군소정당으로 몰락했고 자유당은 압도적 여당이 되게됩니다. 이후 자유당은 대통령제를 이용하여 선거제 개혁과 부패선거구 개혁을 추진하면서 양원제 시행과 현재의 시라비시카 사법부 형성 선거법 개정을 통해 신흥 상공업자의 선거권을 부여하는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그리고 시라비시카의 정책에서 영토확장보단 내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산업진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종교의 자유도 인정됩니다. 6명의 자유당 대통령 기간동안 시라비시카 산업화의 기틀이 마련되고 점진적으로 종교의 자유와 선거권 확대등이 확대되어 자유주의가 확대되나 싶었지만..

자유당도 일부 자본가층이 주도했던 만큼 빈체제 하의 자유무역을 선호했고 계속되는 자유주의자의 정치개혁 의견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1839년 영국의 인민헌장 발표와 시라비시카 노동자들에 대한 하등대우로 분노한 노동자들이 차티스트 운동에 영향을 받아 정부에 선거법 개정을 원하는 탄원서를 냈지만 정부가 이를 무시하자 결국 1838년 8월 폭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비록 7개월이라는 짦은 기간이였음에도 노동자들은 국회를 점거하여 정부의 타협이 없다면 의회를 태워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1839년 선거법 개정이 추진되면서 영국과는 다르게 남성에 한해서 평등선거권이 인정됩니다.

이후 치러진 대선에선 직선제가 시행되었고 시라비시카는 농본주의 좌파정당인 농업당이 자유당 우위체제를 깨고 1840년에 집권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들은 주로 부패선거구 개혁과 소작농과 지주간 불평등 관계개선등을 집중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산업화도 기존 자유당 정부처럼 개혁정책을 강하게 추진하게 됩니다. 그렇게 1890년대에 시라비시카는 2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때 카루나의 철광산과 새로운 수력발전의 방식을 토대로 산업화를 빠르게 추진하였고 당시 여러국가들이 자유무역으로 전환한 시기였기때문에 철광석과 구리 목재등을 중심으로 다른 대륙에 수출하는데 용의했으며 특히 이때 쓰리 시티 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유럽은 오슬로가 중부유럽은 스톡홀름 러시아는 헬싱키가 담당하는 방식으로 분권화를 추진하였고 이때부터 시라비시카의 3대 광역도시권이 정부의 계획이 산업화 열풍을 맞으면서 많은 시민들이 도시로 몰리기 시작하는등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를통해 시라비시카는 발트와 함께 전산업 분야가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고 특히 2차 산업혁명 시기부터 혁신적인 개발과 발명을 통해 성공한 기업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들은 시라비시카의 경제에서 중요한 원동력이 되며 농업국가였던 시라비시카는 빠르게 산업화를 이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기간동안 길드의 폐지와 많은 언론들의 등장 조세제도 개편등의 개혁정책들이 추진되었고 급격한 경제성장까지 겹치면서 대 격변의 시기를 맞게됩니다.

또한 이때부터 노동당 정부는 자본가-노동자간 중재의 창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법령들이 시라비시카에 등장하면서 어느정도 노동문제가 해결되게 됩니다.

1913년부터 공적연금의 도입등의 복지전략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했고 이후 시라비시카의 사회노동당-보수당으로 이어지는 복지국가 건설의 초안이 됩니다. 그리고 1914년부터 시라비시카 정부는 '스톡홀름 협정'을 통해 "노동관리위원회"를 신설하여 해고는 물론 쟁의절차까지 철저하게 제도화하여 시라비시카의 극한의 노동운동을 막을수 있었고 이는 시라비시카의 노사관계의 기초를 만들게 되어 추후 공산주의의 열풍을 시라비시카에 번지지 않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 됩니다.

이후 1차대전이 발발했을때 시라비시카는 무장중립을 선언한뒤 생산력이 증가하게되는데 바로 독일의 U보트 전략으로 영국의 무역길이 막히자 시라비시카 기업들은 이때를 통해 성장할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고 독일의 철 수출도 최고조로 나오는등 시라비시카는 이때 상당한 호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추가로 1차대전 직후엔 복구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영국의 중동 식민지를 구매하게되고 현재까지도 자치령이라는 이름아래 중동의 유럽으로서 바레인,바레바르,쿠웨이트 3개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면서 일부 핀란드 분리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손을 잡고 1918년 시라비시카 노동당 정부와 전쟁을 벌이지만 결국 1년만에 진압되었으며 이때부터 시라비시카 보수당은 온건파인 사회노동당과 손을 잡게되면서 점차 좌경화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보수당원들이 민주당으로 옮기면서 시라비시카 정치권은 2003년까지 진보정당은 보수당 보수정당은 민주당이라는 이질적인 정치체제가 나오게 됩니다.

전간기

사회노동당 정부는 전간기 당시 대공황의 책임으로 인해 정치적 위기에 맞이하기도 하였지만 유능한 경제전략으로 대공황을 어느정도 해소하면서 안정화 시기에 접어들었으며 '인민의 집'이라는 구호아래 시라비시카의 복지국가 전략의 토대를 잡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노동당은 1918년 수오미 사태이후 공산주의자를 강력하게 혐오하는 반공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복지주의를 이용한 대대적인 확대제정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이때부터 현재와 비슷한 출산수당정책도 시행되었으며 수오미 사태이후부턴 어느정도 온건한 반공정책을 같이 추진하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폴란드 분할과 함께 세계는 화염속에 휩싸인 가운데 시라비시카는 첫번째 소련의 침공을 받으며 1939년 겨울전쟁으로 불리는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개전 당시 소련은 25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시라비시카의 핀란드로 향했고 소련은 개전 초기 스톡홀름과 헬싱키를 폭격하며 승전보를 이어나갔지만 당시 시라비시카군은 남부에서도 대공황때문에 군축을 한 상황이였고 수오미주 주방위군은 전차 2400:1 그리고 수오미주가 동원할수 있었던 병력의 세배가 넘는 병력으로 온 만큼 초기엔 수오미 주 방위군이 수적열세로 인해 밀리게 됩니다.

하지만 수오미 주 방위군은 기후를 통한 방어전을 시작하기 시작했고 모티 전술을 통해 소련군을 고립시키자 소련군에게 막대한 인명피해를 주게되었고 남부의 증원군까지 오자 소련군은 세묜 티모셴코가 군을 재정비할때까지 모티 전술로 고립된 상태로 큰 피해를 보게됩니다. 이후 겨울이 지나고 1940년대 봄이 되었을때 어느정도 진군이 가능해지고 90만명의 인력도 추가 투입하자 결국 시라비시카 군 그중 수오미 방위군의 피해가 70%에 달할정도로 컸으며 결국 1940년 3월에 강화협상을 맺어 소련에 비푸리(오늘날의 비보르크. 당시 헬싱키에 이은 수오미 주의 제 2의 도시)를 포함한 카렐리야 지협 및 라도가 카렐리야, 라플란드 동부의 살라, 리바치 반도, 수오미 만의 섬들을 할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일로 인해 수오미주는 당시 트롬스오그핀마르크로 불리던 키나주의 지역을 할양받고 다른 주들과는 다르게 기초단체 선거에 대해 독자적인 직제를 가질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됩니다. 다만 소련은 이일로 인해 소련의 전술변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후 사회노동당은 98사태로 불리고 시라비시카의 대숙청이라고 불리는 숙청과 당시 보수당의 반발이 있었지만 민주당과 함께 "비밀보호법"과"감시법"을 통과시키며 공산주의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언론검열을 진행하였으며 국민들도 이에 크게 반발하지 않고 노동당을 계속해서 지지했으며 오히려 비난의 화살은 보수당에게 날아오게 되었는데 당시 보수당이 "우리는 소련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진행해야한다. "라는 입장으로 인해 국민들에게 비현실적인 매국노라는 욕을 먹게되고 결국 겨울전쟁이후부터 제 2~3당 자리에 남게됩니다.

이로인해 시라비시카는 독소전이 터지자 마자 바로 독일편에 가담하였고 사회노동당은 "공산주의자로부터 우리의 형제들을 해방시키자"라는 구호아래 계속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겨울전쟁과는 반대로 나치의 지원을 받던 시라비시카였던 만큼 동 카렐리야까지는 수복할수 있었지만 1944년 6월에 독일의 요구로 의회의 동의없이 방위조약을 맺은 사실이 밝혀지며 정계에선 논란이 커졌고 바그라티온 작전과 같은 소련군의 대공세로 인해 결국 시라비시카는 동 카렐리야를 포기할수밖에 없어지자 결국 의회는 독일 외무장관과 대통령간의 개인명의로 체결된 약속에 불과하다는 공식 성명을 통해 전쟁의 중지를 선언했지만 루이카 대통령은 이에 맹렬히 반발하며 전쟁의 유지를 원했지만 결국 의회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고 지미 루케이보 대통령권한대행이 "독일과 맺은 방위조약은 의회의 적절한 토의를 거치지 않았다"라며 파기를 선언하고 소련과 평화협정을 맺어 계속전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로인해 시라비시카는 나치독일이 시라비시카에 향한 민간인 학살을 목격해야했으며 결국 라플란트 전투와 키나 전투를 겪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시라비시카는 핀란드의 독일군을 쫒는데엔 성공했지만 그 독일군이 시라비시카의 제 2의 도시가 있는 오슬로를 포함한 현 노르웨이 지역 일대를 점거하였고 국경에서 연합군으로 군종이 변한 시라비시카군과 산발적으로 대립하였으며 1945년까지 독일에 항복할때까지 대다수 수도권의 유대인들은 죽어나갔으며 일부를 제외하고 다르콘의 죽음의 수용소에 끌려가 참혹한 생을 끝내게 됩니다. 결국 이 일로 시라비시카 사회노동당에 대한 국민적 민심은 죽어나가게 되었고 독일 항복이후 노르웨이가 시라비시카로 반환된뒤 치러진 대선에서 보수당이 73.4%의 지지를 받아 결국 노동당의 40년 정권이 끝나게 되었고 보수당은 전후상황을 다시잡기위한 대책정부를 세우게 됩니다.

당연히도 독일편에 섰다가 진것이기때문에 시라비시카는 소련에 상당한 배상금을 물고 포르칼라 임차, 동 카렐리야와 페차모 일대의 완전 할양 등 추가적인 영토 손실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권한대행의 외교력을 인해 추축국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정치인들만 전범재판에 회부됨은 물론 특별지위국 직위를 따내면서 전범국이라는 호칭에선 벗어나게 됩니다.

전쟁이후

이후 1945년 종전이후 보수당으로 정권이 교대된 가운데 주도권을 잡은 스기하라 마사코등 사회자유주의자들을 필두로 파시스트법을 통과시켜 전범,협력자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추진하고 헌법수호청을 신설하여 반 민주주의적 단체의 조사를 진행하여 789곳에 달하던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부터 파시스트단체등 반민주주의적 단체를 모두 9년만에 척결하였으며 이들에 부역한 경력이 있는 사람은 공직진출은 물론 취업,주택구매,출국등이 모두 제한당하고 전향서를 써도 2대부터 이 제한이 풀리며 정치적 행동에 상당한 감시를 받게됩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도 마찬가지였으며 이때 약 1,350명의 사람들이 부역 혹은 부모의 신념으로 인해 국민으로서의 삶을 제한받게 됩니다.

하지만 보수당 정부는 이런 대내적 불만을 달래고자 1940년대 스기하라 모델이 제안되었으며 제한적 제정정책과 "동일 임금,동일 노동","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높은 사회복지의 연합"을 섞은 보편적 복지전략과 선별적 전략이 섞인 짬뽕전략이며 메커니즘을 설명하면 동일 노동ㆍ동일 임금 정책을 모든 산업에 걸쳐 실시하면, 이에 사양산업은 몰락하고, 생산성이 높은 산업은 이윤이 높아져 투자를 극대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산업체계가 전환되는데 여기서 정부가 높은 사회보장으로 사양산업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그렇게 보호한 노동자들을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생산성이 높은 산업으로 이전시키는 것. 인플레는 동일 노동ㆍ동일 임금 정책을 통해 억제하게된다는 원리입니다. 초기엔 보수당 사회주의자들도 반발하였지만 1951년대 보수당 전국최고위원회에서 보수당의 공식입장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추진되었으며 이를 통해 산업체별 임금편차는 150%내외로 줄어들면서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1980년까지 시라비시카 복지의 전성기를 이끌게 됩니다.

복지의 전성기와 별개로 시라비시카는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이자 권위주의적인 국가였는데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으로 당시 시라비시카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68 대학행진이 진행되었는데 이때 수오미에서도 "핀란드 혁명회"라는 조직이 무장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지만 몇시간도 안되어 진압되었고 이후 수오미 지역의 혁명주도권이 평화시위 성향의 스톡홀롬 대학가 학생조합으로 넘어가면서 결국 수오미의 독립운동은 싹이 잘리게 됩니다. 이 혁명의 영향으로 시라비시카에선 정부의 억압적인 몇몇 규제정책이 폐지되고 인종평등이 이루어졌는데 그중 시라비시카의 일본계를 제외한 아시아인들은 이 혁명의 영향력으로 본격적으로 시라비시카에 정치적 영향력을 펼치게 됩니다.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자로 이민온 아시아계는 고용주 아래에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고 노동조합 가입도 안되고 투표권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유화시대에 아시아계는 대대적으로 봉기하기 시작했고 스톡홀롬 시청을 평화적으로 점거하고 "민권혁명"을 외치며 시라비시카에서의 투표권 인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때마침 다른 유색인종과 대학생들이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1970년대 시라비시카는 내각제하에서 아시아계의 정치적 진출을 허용하는 헌법개정과 선거법 개정안 그리고 자유화 정책으로 아시아계의 민권은 점차 존중되기 시작했고 아시아계의 입김도 커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됩니다.

현대사

신자유주의 시대 시라비시카 복지의 페러다임

시라비시카 복지는 1980년대부터 복지병이라고 불리는 한계에 직면하면서 결국 보수당이 몰락할 위기에 처했으나 개혁세력인 오리칸 소냐(1세)가 신임 총리로 취임하면서 겨우 과반을 시키게 됩니다.

소냐 총리로 리더가 교체된 보수당은 복지병을 개선하기위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선회하게 되는데 이때 신자유주의 정책은 대처리즘과 달리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를 100% 받아들이지 않고 "제정준칙법"을 통해 시라비시카의 2% 제정수지를 법제화시키고 연금제도와 함께 보편적으로 지급되던 기초연금까지 끊는 연금개혁을 단행하게됩니다. 이로인해 많은 시민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노조와의 적극적인 소통과 노조의 무리한 요구가 없던점도 정부의 복지개혁의 원동력이 됩니다.

이후 시라비시카는 경쟁형 복지라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게되었고 연금형 복지는 능률에 따라 지급하고 특히 해고된 노동자에게 들어가는 실업연금을 폐지하는 대신 무상으로 직업교육을 할수있는 기회를 부여하면서 초반의 반발을 줄이고 고도성장을 이룩하게 됩니다. 또한 정부는 이때부터 컴퓨터나 자동차등 미래산업들을 집중 투자하고 인프라를 개선하면서 복지위기라는 그늘에서 벗어나고 다시 최고의 흥행기를 맞게됩니다. 이후 90년대 독일의 통일후유증시기로 인해 경제가 휘청거리자 최저보장연금제를 도입 기존의 기초연금과는 매우 적은 인원만이 지급대상에 포함되는 제도였고 이후 2005년경 스테츠킨 정부 주도로 병가자의 노동능력을 점검하는 정책을 노조와 함께 추진하게 되며 전반적으로 복지에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로인해 생긴 빈부격차는 또다시 논란이 되었는데 특히 2008년 금융위기당시 정부주도의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복지개혁정책은 많은 실업자를 양산되게되었고 결국 1945년 이후 최초로 1당 직위를 빼앗기게 되었고 2011년 라카니오 역 점령사태라는 비극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2011년 라카니오 사태당시 제임스 소프타르 (현 대통령)이 주도하여 직접 역을 점거하고 정부의 책임있는 실업자 구제정책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정부는 강경진압으로 대응하였지만 시민사회의 압박과 시위대로 기우는 여론으로 인해 정부는 경제민주화를 일부 받아들이고 실업자 구제를 어느정도 확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시위대와의 화의를 요구했고 결국 화의가 받아들여지면서 당시 해고되었던 노동자들이 복직하고 청년들을 위한 직업훈련도 확대되게 됩니다. 이후 책임을 지고 고시키 아기리 총리가 실권을 잡았을때 친환경 정책이 추진되어 시라비시카의 내연기관 차량에 대한 장기적인 퇴출정책 그리고 친환경 소재에 대한 M&A확대,석탄발전소 퇴출정책이 추진되어 시라비시카는 친환경에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됩니다.

이후 73년만에 정권교대를 성공한 콘라트 로비에르 정권에선 청년주택정책과 정부주도의 친환경 확대정책이 추진되었지만 2020년 로비에르 정부 출범 2년만에 실권을 잡은 사르테야 내각이 교육민주화를 추진하여 세계최초로 교육부 장관에 대한 직선제가 추진되어 학생과 교사의 의견이 교육에 적용되기 시작하고 직업학교도 본격적으로 확대되고 학제개편도 추진되면서 4차산업혁명을 본격적으로 대비하는등 미래지향적인 정책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이후 2026년 시라비시카는 준 대통령 중심제성향의 개헌을 추진하여 그동안 총리의 권한확대로 인한 논란을 바로잡고자 하였고 결국 2026년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 2011년 혁명의 당사자인 제임스 소프타르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됩니다.

제임스 소프타르 정부 이후

(작성예정)

시라비시카의 정치

시라비시카 의회 .jpg

시라비시카는 상원 300석 하원 800석으로 구성된 연방의회를 입법부로 칭하면서 대표적인 양원제 국가이다. 하원은 주로 예산심사,정부 감시,인사청문회,인사추천권,법률안 제의권을 가지며 시라비시카 총리는 하원에서 단독 불신임을 할수 있지만 대통령의 경우 상원의 최종 결정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상원은 인사동의권과 대법관 지명권 탄핵권을 가지며 법률안의 경우 하원이 이를 번복하고 2/3이상의 동의를 받으면 처리되지만 대법관 지명권 그리고 인사동의권 탄핵권의 경우 하원이 상원의 의사를 번복할수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상원은 지역별로 다르나 대부분 인구가 많은 지역은 소선거구제 인구가 적은지역은 중선거구제로 선출하고 일부는 불구속 명부제에 입각한 지역별 비례대표로 뽑는지역도 있습니다.

시라비시카의 현재 의회구성과 원내정당

민주연합당(여당) 하원:430/상원 120
보수당하원:210/상원 60
민중의 소리하원:46/상원 13
민주당하원:22/상원 3
녹색당하원:13/상원 4

시라비시카 주요정당 설정

시라비시카의 대통령과 총리

시라비시카는 2026년전까지만 했어도 총리의 권한이 컸으나 2026년 개헌이후부터 다시 대통령의 권한이 강해졌으며 2026년 이후부터는 사실상 대통령중심제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추가설명 예정)

시라비시카의 문화

이 문서는 시라비시카 종교를 서술하는 문서입니다.

시라비시카 경제

화폐 단위 :시라화

- 달러화와의 환율:스웨덴 크로나와 동일
- 인구:36,244,036명
- 명목 GDP:$2,225,818,738,832
- 1인당 명목 GDP:$61,412
- 전체 PPP:$2,259,634,424,420
- 1인당 PPP:$62,345
-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38.7%
- 고용률:78.2%
- 국부:3조 9,400억 달러 (OTL기준)
- 외환 보유고및 구성:$13,507,000 (화폐기준:미화 61.4% 엔화 14.2% 마르크화 12.7% 파운드화 8.5% 금 3.2%)
- 중앙은행 기준금리:1.4%

수출 구조

서비스업 (61.2%)
석유 가스산업 (37.5%)
제조업 (27.1%)
농업(3.4%)
기타 (1.3%)

경제 설명

시라비시카는 인구대비 경제력이 가장 큰 나라중 하나로 시라비시카는 경제 규모는 (3세계관 기준) 세계 8위의 경제대국이다. 시라비시카의 주력산업은 북해연안의 석유,가스등의 시추업과 강력한 제조업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제조업에선 IT업종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OTL기준) 2008년에 발표된 세계 IT리포트에서 시라비시카가 2위를 차지하였고 2년연속 세계경제포럼의 세계 IT 리포트에서도 1위권을 차지하는 성과를 이룩하기도 하였다.이에 더불어 2010년에는 세계 IT 경쟁력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시라비시카는 공업국으로 생산과 수출의 절반이 공업품이며 시라비시카 경제에서 석유,화학제품과 함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으며 참고로 대기업 재벌중심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고율의 조세제도로 인해 소득분배는 평등하지만 자산분배는 미국과 엇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시라비시카는 소냐 내각부터 IT 산업에 규제조치를 푸는 대대적인 개혁과 아기리 내각의 친환경 정책의 확립으로 현재의 모습을 가췄으며 이 과정에서 과감한 개혁이 단행되고 IT산업과 신산업에 대한 진보적인 접근과 복지국가로서의 장점을 살리면서 유럽에서 가장 빠른 4차산업 확립속도를 보여주고 있다.

공업

북유럽의 독일이라는 별명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조업 강국이며 스카니아,볼보(볼보트럭 포함),사브,일렉트로눅스,에릭슨등 유명한 제조업기업외에도 노키아를 선두로 한 IT 사업이 아트라스콥코를 중심으로 한 유명 중공업 메이커들도 시라비시카에 소속되어있다.

광업

스칸디나비아와 발트 3국을 포함한 북유럽 전체 광업생산량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을정도로 광업강국이다.

금융업

영국에 비하면 적지만 세계 9위 규모의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말뫼 중앙증권거래소가 시라비시카에 위치해있으며 현재도 시라비시카의 경제도시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있다. 이는 소냐 내각시절에 전반적인 법인세 인하와 친기업 복지국가 추진 해외자본 유치등을 추진했던 시라비시카의 시장개방과도 관련이 깊다. 이 당시 소냐 총리가 금융업에 대한 법인세를 완화하고 각종 규제를 일시적으로 해제하면서 해외자본 유지에도 공을 들였는데 물론 영국과 독일이라는 대안시장으로 인해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경제관료들의 혁신적 개혁전략으로 해외자본을 어느정도 유치하면서 금융업의 영향력을 유지합니다.

이와 함께 후임 내각들이 추진한 금융업-제조업-석유라는 고리경제를 이룩하여 상당한 호황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금융기업들이 타격을 입는등 휘청거리기도 하였지만 금융업 비중이 비대하지 않고 적절한 경기부양책과 복지제도 개혁으로 선방하는데 성공하였고 역으로 이 기회를 이용해 발트의 기업들을 인수하는등의 과감한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현재는 아기리 내각이후 금융업보단 제조업의 기술혁신에 집중하고 있고 금융업에 대한 법인세 인상과 규제 강화책으로 쇠퇴 양상을 보였지만 2차 펜더믹 이후 소프타르 대통령 주도하에 금융산업 규제 완화가 추진되고 있어 향방은 아직 모른다는게 지배적이다.

그 외 특징적인 부분

  • 이 문서에서 언급되지 않은 사안은 실제 스칸디나비아 3국 OTL로 처리됩니다.

시라비시카는 북해유전과 핀란드내 지하자원 스웨덴의 공업력을 통해 성장한 북유럽의 강대국중 하나이며 인구가 적은 특성으로 인해 수출주도형으로 경제체계가 확립되어있다. 특히 시라비시카는 영국과 우크라이나와 달리 금융업에 의존하는 경향이 덜한데 이로인해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한 유럽 경제위기 당시에도 경제적으로 선전하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시라비시카의 교육

시라비시카는 2010년대까지는 사립유치원까지 허용되는 사립교육의 성지였으나 2008년 라카니오 사립유치원 연대 대량 비리논란으로 사립학원에 대한 문제가 수면위로 올라오면서 시민들이 사립유치원의 회계시스템을 원하는 여러 평화시위를 진행하였고 이후 들어온 존 그리즐리 정권에 의해 유치원 회계시스템 도입 의무화가 진행되었지만 유치원 교사들의 복수성 폭행등 문제가 붉어지자 결국 강제 공영화를 진행하였고 5년만에 국.공영화 되었고 이에 탄력받아 초,중,고가 2015년 공영화를 시작하였고 2019년 7월 공영화 선언을 시작하면서 시라비시카 교육체계는 대부분 주나 나라가 관리하게되었습니다.

시라비시카의 군사력

스칸디나비아 3국 (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 3국) OTL이며 지리적 특성상 주요 육군 병력은 러시아 지역에 주둔하며 북해를 총괄하는 관문적 역할을 하여 해군력도 NATO내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방대한 장비들이 포진해있다.

또한 중동 3국(바레인(바레인+카타르),바레바르(오만+아랍에미리트),쿠웨이트)의 경우 현실과 같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바레인군의 경우 1940년대 중동전쟁으로 인해 안보의 위협을 대비하기위한 군사력 보유가 절실해졌고 그 결과 아이언돔 5기를 현재 바레인 지역에서 운영중이다. 또한 바레바르군은 오만군과 아랍에미리트 군사력정도로 해당지역을 관할하지만 바레인군은 현실 쿠웨이트군+바레인군+카타르군 정도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제 2 중동군구 (걸프만 내부지역 쿠웨이트 포함)은 바레인군이 전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