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을 독재자로 간주하기 힘든 이유

우리들은 많은 언론기사들을 통해 시진핑이 통치하는 중국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계적 투자자이자 오픈소사이어티 회장인 조지 소로스(사진)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독재가 중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경고했고, 사회적 명사들 뿐만 아니라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미국의 언론등, foreign affairs같은 미국의 주요 외교 잡지들도 시진핑이 1인 권력을 구축하려 한다며 대한 강력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타임즈 같은 경우, 마오와 시진핑의 절대 권력을 비교하기까지 했죠 우리 한국 언론들도 서구 언론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몇가지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독재자란 무엇입니까? 독재자는 정치에서 국정을 혼자 조종할 수 있는 인물이며, 여러 권력이 집중되고 있는 인물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불립니다.독재자의 판단이 편협하거나 불합리해도 그것을 멈출 방법이 합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다는 매우 큰 문제가 있으며, 정치 체계로서의 독재는 독재자의 폭주에 대한 견제 기능이 없는 것이 문제이며, 항상 폭정으로 변모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시진핑은 마오쩌둥처럼 절대적 권력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중국 정당였던 마오쩌둥(毛澤東)과 달리 당내 지도자에 불과한 시진핑이 일인지배로 역행하기는 쉽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중국 정치의 현재 상황이 시진핑이 절대 권력을 추구하기에 쉽지 않고, 둘째로는 시진핑 세력이 절대적 권력을 추구하기보다는 다른 선택지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는 시진핑 세력의

중국의 권력을 이해하면 중국 정치 구조가 보입니다

조금이라도 중국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시라면, 상하이방, 공청단, 태자당이라는 중국 정치의 세가지 파벌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을겁니다. 또한 최근 기사들에서 많이 등장하고 있는 단어, 시진핑의 사단을 의미하는 시파등의 단어들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류는 중국 정치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어이지만, 중국 공산당의 권력 대립이나 권력 구조를 전부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한국 정치도 크게는 여러 정당으로 나누어져 있긴 하지만, 사람을 중심으로도 설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 보수정당과 진보정당 이전에, 김대중계, 김영삼계, 김종필계등 여러 사람 중심의 정파들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끼쳐 왔습니다.그러나 어느 누구도,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을 논하기 이전에, 특정 정치인을 중심으로 한 정파가 대한민국 정치의 흐름을 알려주는 유일한 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대중계와 김영삼계의 대립만으로는 1980년대 90년대의 한국 정치 흐름을 논할 수 없습니다. 정당과 계파, 그리고 여론등의 수많은 축들을 알아야만이 한국 정치 흐름을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도 똑같습니다. 상하이방, 공청단, 태자당, 시파 이러한 분류들은 중국 정치의 정치적 흐름을 설명해주는 수많은 축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저는 중국 정치를 크게 본다면, 보수파와 개혁개방파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수파 중에서도 공청단을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개혁개방파중에서도 태자당이 존재하죠.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대충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 중국 공산당의 보수파는 대체적으로 마오쩌둥에게 영향을 받은 세력들입니다. 평등지향과 토론과 협의를 통한 수평적 의사결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지요. 이들은 중국의 관료제를 증오하다시피 합니다.
  • 진보파는 중국 전통 관료제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덩샤오핑이나 장쩌민에 의해 적극 섭외된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다루어 보겠지만 관료제의 재건은 급속한 경제 발전, 시장 개방에 가장 필요한 요소중 하나였습니다. 독일의 재건, 미국의 경제 부흥 모두 관료제의 급속한 발전에 의해 견인되었듯이 중국의 관료 문화는 개혁개방의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파는 시장 친화적이고 상명하복식의 관료제를 지지했으며, 사회의 자유화를 이끌었습니다. 천안문 사태에서 덩샤오핑을 반대하면서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시장화를 통한 박탈감, 평등한 토론에 의한 의사 결정을 요구했던 것처럼 개혁과 개방이란 정치의 관료화, 기업가들의 정치 참여, 그리고 해외 시장의 과감한 개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공의 역학은 이렇게 나누어지고, 사실 후진타오와 장쩌민은 한배를 탄 정치적 동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선배격인 덩사오핑이 격대지정의 원칙을 정해준 탓으로, 장쩌민은 불가피하게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장쩌민의 일탈은 결국 개혁개방을 따르는 덩샤오핑의 후계자들과 무시무시한 권력투쟁을 낳았다. 장쩌민은 결국 자신의 지역에서 알던 사람들을 자리에 앉혔고 사람들은 이들을 상하이방이라고 했다. 이들은 당내 권력자들보다는 실무자 출신에 가까웠다. 리커창-후진타오로 대표되는 개혁개방파는 장쩌민과 권력 투쟁을 벌였다.

궁지에 몰린 장쩌민은 당내 보수파랑 손을 잡기 시작했다. 이 당내 보수파도 사실은 복잡한 배경을 가진 곳이다. 장쩌민이 몰락하던 시기가 바로 이 보수파랑 손을 잡으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군이 장쩌민에게 등을 돌렸다. 이 시기에서 영입된 사람이 시진핑이라고 볼 수 있다
.
시진핑은 엄밀히 말하자면 지방출신의 관료기득권인데, 지방에서 민간 기업들과 대립하는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다. 보시라이같은 정통 보수파와는 다르다. 시진핑은 태자당이라는 인맥의 한 사람이었지만, 개혁개방 노선을 이끌었던 실무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시진핑은 관료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개혁개방을 실천했던 신흥 자본가 세력과도 선을 긋는 복잡한 스탠스의 사람이었다.

시진핑의 가족배경: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은 누구인가?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은 마오쩌뚱에게도 덩샤오핑에게도 탄압받은 인물입니다.

마오쩌뚱이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은 진보파를 형성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 시중쉰은 하루아침에 반당 세력으로 몰려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다. 가택은 몰수되고 뤄양(洛陽)광산 노동자로 축출당했다. 멸문지화의 일보직전의 경지, 부인 치신(齊心 1926~)과 시진핑 등 네 자녀가 뿔뿔이 헤어지는 ‘강제성 이산가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시진핑의 어린 시절이 말해주듯이 시진핑은 마오에 대해서 좋을래야 좋은 감정을 가질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개혁개방을 이끌던 장쩌민에 의해 발탁되었고, 장쩌민의 개혁개방을 같이 주도한 인물입니다. 반면에 그는 후진타오, 상하이방과 공청단같은 진보파와는 다른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국공신의 자제였고, 그 과정에서 보시라이같은 소위 금수저 도련님들과 필연적으로 어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금수저 도련님이라고 해도 모두가 보수파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모택동의 장정을 함께한만큼 마오에 대한 반감이 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자신의 아버지가 마오와 충돌을 빛고 탄압을 당했던 사람이었고, 자신이 신흥 자본가와 반대되는 관료 기득권인 탓에 마오주의로 대표되는 당내 보수파랑 한 배를 탔지만, 보수파의 이념에 공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상무위원에 든 것도 당내 보수파를 달래면서도 개혁개방노선을 최소한으로 견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상하이방과 공청단파의 묵인아래 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다.

결국 장쩌민과 개혁개방파로 대표되는 후진타오의 권력 싸움은 후진타오와 장쩌민이 시진핑을 낙점함으로서 끝이 났다. 시진핑은 장쩌민의 권력을 어느정도 보장해줄수 있으면서, 개혁개방 노선에 대한 유지와, 당내 보수세력의 요구를 어느정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후진타오 시기의 중국의 병폐와 높아가는 불만들

후진타오 시기에는 전인대 회의에서 조는놈들도 많이 나오고 박수도 대강대강 치는 분위기였다면, 시진핑 시기에서는 무언가 경직되고 철저하게 박수를 치고, 국가를 힘있게 제창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얼핏보면 후진타오 시기보다 더욱 경직되게 보일 수도 있다.

이유인즉슨 시진핑 시기에서의 전인대 대표들과 후진타오 시기의 전인대 대표들의 출신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충 예를 들어보자면, 조선족 대표 명단에서, 후진타오 시기의 조선족 대표들은 종교사무국, 목사(!!!), 무역공사 사장등의 민간출신 사업가들이거나 인물들이 많다.

그러나 시진핑 시기에서의 조선족 대표들은 그 출신들이 매우 다르다. 대표적으로 교수와 같은 공무원들, 그리고 당서기와 같은 공직자 출신이거나, 아니면 당에서 문화공작등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진핑 시기에서의 전인대 위원들은 관청과 얽혀 있는 외부자이거나, 촌민위원회 출신등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고위공직인 경우가 많다.

후진타오는 중국의 암적 시기를 대표하는 사라이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서구 언론들이 평가했듯, 좋게 말하면 민간인도 참여할 수 있게되어, 진정한 당내 새로운 바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붉은 자본가 정권이었다. 후진타오의 집권 아래에서 농민공을 비롯한 도농격차문제는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었으며, 도농격차 문제에서 "농"을 대변할 수 있는 당내 의견이 무시되기 일쑤였다.

(참고로 중국의 빈부격차는 도시 내부보다는 도시-농촌 갈등이 심각하다. 오죽하면 중국의 중산층을 이야기할때 농촌은 집계조차도 안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서 시진핑의 시대는 이러한 사회의 세태에 강력한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공직에서 20-30년씩 뛰는 사람들이 많았고, 중국 공직의 특성상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이 주로 전인대에 영입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분배"를 요구했던 사람들이기에, 어떻게 하면 당에 투고되는 인민의 의견들이 정부의 정책들에 반영되게끔 정부의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전인대 회의에서 1/3의 반대표가 나오던 시절도 바로 시진핑 때였다. 그만큼 전인대 내부에서의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이 강력했다는 증거이리라.

후진타오 시절의 중국은 한없이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가깝던 국가였다. 민간의 엘리트들이 정부와 결탁하여 그들의 목소리만을 듣고 경제효율의 최대치를 뽑아내던 시절이었다. 그와 더불어 중국 사회의 모순은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진핑 시절의 중국은 오히려 박정희의 안티테제 같은 모습을 보인다. 정부에서 민간 엘리트를 철저히 제거하고, 기업가들에게 당의 통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후진타오 시절 당원 수를 줄아고, 자격을 강화한다는 노선을 대놓고 페기한 후 당의 팽창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머리수로 따지면 중공당의 최다 세대는 20-30대이다.

나는 오히려 민주주의로 따지고 본다면 후진타오 시절보다 시진핑 시절이 더 민주적이라고 본다. 대놓고 민간영역과 이익집단에 놀아나던 후진타오 시절보다는, 시진핑 시절에서는 오히려 더 다양한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들이 반영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도 높은 성과를 보였는데, 시진핑 집권 이후 유례없는 분배를 통해 농촌 빈곤률이 극단적인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도시 중산층 비율이 서구 국가보다도 높아졌다.

결론: 시진핑의 권력과 "시진핑 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의도

"시진핑은 황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의 영구적 임기를 그 근거로 들곤 한다. 그러나 그 내막을 살펴보면 그 시진핑을 권좌에 올려준 사람들은 그 곳에 참여했던 전인대 대표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엄청난 기세로 당에 침투한 중국 신흥 자본가들과 당내와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맞서려면 결국 시진핑을 황제로 만들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 전인대 대표들이 서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개혁을 하려면 지속적인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라고 말한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하면 다르게 들리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어짜피 중국의 권력 구조는 미국의 대통령제와는 다르게 매우 유동적이다. 시진핑 이후 다음 정권은 덩샤오핑처럼 다시 임기제로 회귀할 수도 있으며, 종신 임기가 유지되더라도 권력 구조가 수평적으로 재배치될수도 있다. 중국 지식인들이 예상외로 시진핑의 종신임기에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이유 역시도 중국 정치의 이런 자신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는 중국의 문제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그는 계획경제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자유무역에 기반한 중국 체제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진핑은 당내 보수파의 요구에 따라 빈부격차를 줄이고 가진자와 가지지 않은 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화해를 바란다는 화해사회를 넘어가, 소강사회(샤오캉)를 강조하며 빈부격차의 처리가 중국의 제 1의 과제임을 강조하며, 당내 부정부패에 대해서 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타겟이 장쩌민의 최측근인 석유재벌출신 저우융캉이었고 이미 장쩌민의 안전보장을 해준 상황에 저우융캉 처리를 막을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었다. 저우융캉은 개혁개방의 안좋은 점을 모아놓은 적폐였는데 그 힘이 워낙 강한 탓에 아무도 터치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개혁개방파의 보시라이이자 자본가들이 당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대 창구였다. 시진핑의 시대는 결국 저우융캉을 처리하고, 외부 수출 중심의 경제를 내수위주로 전환하며 당내 자본가들의 반발을 샀다. 알리바바등 거대 자본가들에 대한 체포 및 길들이기, 기업내 당조직 신설등이 그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진핑은 결코 마오주의에 대한 동의를 할 수 없는 사람이고, 결국 개혁개방에 대한 유지, 리커창을 위임시키고 자신의 사상을 마오와 동등하게 박아 넣음으로서 덩샤오핑조차 건드릴 수 없는 마오의 위상을 건드렸고, 당의 보수파와 척을 지고 말았다.
시진핑 사상을 세운다는 의미는 결국 개혁개방은 지속될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시진핑 사상의 의미는 시진핑의 개인숭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경제의 유지와 개혁개방의 사상은 마오쩌뚱 사상으로 대표되는 평등과 "동등"하다는 의미였고 이미 당내 보수파와 척을 지기 시작한 상황에서 시진핑 사상을 세움과 동시에 종신 집권이라는 수를 둔 것도 이를 염두한 것이다.

그런고로 시진핑은 당내에서 외톨이일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자신과 측근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는 1인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진핑은 철저히 국가주의적인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오주의에 동감할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시진핑을 마오와 비교할 수 없는건 자명하다. 당내 권력 역학이 틀리다. 마오는 당은 물론이고 국가의 모든 군중조직을 장악하고 있었고, 측근들이 마오에게 반기를 드는 경우 조져버리기가 가능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국가를 장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당내에서도 적이 많으며, 상무위원회 내에서도 1인 우위 체제를 유지할 뿐, 당내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몇년간의 발악을 통해 당내의 권력을 어느정도 잡는데 성공은 했지만 그 체제가 매우 불안정하며, 아직도 개혁개방파가 시퍼렇게 살아있으며, 노동자-농민동맹으로 대표되는 보수파들도 건재하다.

중국의 체제를 시진핑 1인독재체제라고 보는건 사실 무리수인 것이다. 기회가 되면 중국 상무위원회의 권력 구조에 대해서 적어볼 생각이 있다. 중국 상무위원회의 권력 구조는 일정하게 변화했는데, 시진핑과 마오, 덩샤오핑, 후진타오의 권력 구조는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글을 써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