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 왕국 역사

개요

호주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선사 시대

호주 원주민들은 약 6만년 전 호주 대륙으로 이주하여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살아갔다. 유럽인들과 처음 조우하였을 때, 당시 원주민 인구는 35만명으로 집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75만명에 가까웠을 거라는 추측도 많다. 그리고 당시는 현재의 뉴기니 섬과 태즈메이니아 섬이 대륙과 육지로 이어져있을 시기라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역사상 초기의 장거리 항해자들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근대

1606~1803년까지 유럽인들의 호주 항해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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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자 항해년도 국적
 빌렘 얀스존  1606년 Flag of the Netherlands.svg 네덜란드
 루이스 바에스 데 토레스  1606년 Flag of Cross of Burgundy.svg 스페인
 딕 하토그  1616년 Flag of the Netherlands.svg 네덜란드
 프레드릭 드 하우트만  1619년 Flag of the Netherlands.svg 네덜란드
 아벨 타스만  1644년 Flag of the Netherlands.svg 네덜란드
 윌리엄 드 블라밍  1696년 Flag of the Netherlands.svg 네덜란드
 윌리엄 댐피어  1699년 Flag of England.svg 잉글랜드
 제임스 쿡  1770년 Flag of Great Britain (1707–1800).svg 영국
 조지 배스  1797~1799년 Flag of Great Britain (1707–1800).svg 영국
 매슈 플린더스  1801~1803년 Flag of the United Kingdom (1-2).svg 영국

160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다프켄 호 선장이었던 빌렘 얀스존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발견한 이후 연안 탐험을 실시하여 대륙의 북쪽, 서쪽, 태즈메이니아 섬을 묶어서 뉴홀란드(New Holland)라 명명하였다. 호주가 발견될 당시 약 100만명의 에버리진 원주민과 300여개의 부족국가가 있었고 이들 사이에서 최소 250여개의 언어 및 700여개의 방언이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작 네덜란드는 이곳에 대규모 이민자를 보내거나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지는 않았다. 이후로도 네덜란드인들의 탐험은 지속되었으나 경비가 갈수록 가중되고 실질적 이익은 없었기에 금방 중단된다.

또한, 1699년 윌리엄 댐피어가 뉴홀란드를 조사한 보고서의 내용이 다소 비관적이었다는 점과 루이스 바에스 데 토레스가 그 일부를 바라본 데에 그치기도 하면서 탐험의 열기는 점차 냉각되어갔다. 그러나 1770년, 제임스 쿡에 의해서 타히티, 뉴질랜드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 탐험이 실시된다. 그리고 그 일대를 점령하여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1]라 명명한다. 이후 1769년에 영국에게 지배권을 넘기면서 유럽인들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시 영국의 엄벌주의적인 사법체계로 인해 죄수가 폭증하고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영국 정부는 죄수들을 수용할 새로운 유배 식민지를 찾고 있었는데, 뉴사우스웨일스가 적임지로 떠오르게 된다. 1788년 1월 26일 아서 필립이 이끄는 11척의 배와 1500여명의 죄수와 관리가 시드니 항구에 도착하여 식민지 건설을 시작한다. 마지막 죄수를 호송한 1868년까지 약 16만명의 죄수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호송되었다. 이 시점부터 호주가 하나의 대륙으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아서 필립이 최초로 상륙한 1월 26일은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의 날(Australia's Day)로 기념되고 있지만, 원주민들은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며 비판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이다.

어느 정도 개발이 진행되고 있던 도중, 뉴사우스웨일스와 빅토리아 일대에서 금이 발견되었고 배서스트, 벤디고, 벨러렛 등에서 발견된 금을 채굴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쇄도하였는데 이를 오스트레일리아의 전환점이라 불리우는 골드 러시(Gold Rush)라 한다. 골드 러시로 1850년 40만명 이었던 인구가 10년 후에 110만, 30년 후에는 223만명 까지 급격히 증가한다. 이와 더불어 양모 산업까지 발전하였는데, 1850년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으로 수출하던 양모는 17,500톤에 불과하였으나 1879년에는 134,000톤으로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금을 채굴하러 온 이주민들에게는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고, 매달 1.5파운드에 달하는 세금을 청구하였다.[2] 이런 야만적인 징세 절차와 선거권의 부재로 노동자들의 가혹한 처사가 이어지자 광산업자들의 분노가 절정에 달하게 된다. 1854년 10월에는 제임스 스코비(James Scobie)라는 광산업자가 살해되고 용의자들이 정부조사위원회에서 무죄석방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군중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이 잇따랐다. 같은 해 11월 11일에 광산업자들은 밸러랫 개혁동맹을 결성하고 권위주의자였던 찰스 호섬 빅토리아 부총독에게 자신들의 불만사항에 대한 시정을 요청한다. 이에 대한 호섬의 답변은 긍정적이었으나 11월 28일에 군부대가 증원되면서 광산업자들은 군사 조직을 편성하고 피터 랠러(Peter Lalor)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해 정부군에 맞서게된다. 이때 유레카 금광에 급하게 진지를 구축했다고 하여 이 사건을 유레카 봉기(Eureka Stockade)라 불리게 된다. 정부군이 진지를 포위하고 광산업자들의 첫 사격으로 교전이 개시되었으나 광산업자들의 참패로 끝난다. 피터 랠러는 사면령이 발표될 때 까지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중국계 인구도 이 당시에 증가하였는데, 중국인들은 이민의 목적이 아닌 호주에서 돈을 벌어 고향에서 금의환향을 누리겠다는 생각으로 넘어온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래서 벤디고와 발라라트 같은 대도시에 차이나타운을 건설하여 백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자적인 생활을 하게 되지만, 차이나타운에서 일어나는 각종 범죄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 행정관리를 파견하고 중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의 금을 중국으로 유출시키는 등의 이질적인 행태가 이어지자 이를 기점으로 백인들은 노동 조합을 결성하고[3]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계 인종들을 철저히 배척하자는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를 제창하게 된다.

  1. 영국의 웨일스에서 따온 명칭이다.
  2. 당시 이주민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실정이었다.
  3. 노동당도 이 시점에 창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