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외스터라이히 공화국 Republik Österreich

오스트리아 공화국 (독일어 : Republik Österreich) 중앙유럽 알프스 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다. 면적은 83,879㎢이고, 인구는 약 875만명이다.

외스터라이히 공화국
Republik Österreich
오스트리아.png 오스트리아 국장.jpg
국기 국장
국가신의 나라,강의 나라
수도
최대 도시비엔나
정치
정치체제공화제, 민주제, 입헌제, 연방제
이원집정부제
 
지리
면적83,879 km2
시간대CET (UTC+1)
경제
통화유로

개요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남동쪽, 정확하게는 독일 바이에른 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나라로 중부유럽에 있는 국가이자 서유럽에도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는 국가다.[4] 수도는 라틴어로는 비엔나(Vienna)인 빈(Wien)이다. 국토면적은 83,879㎢, 인구는 약 8,857,960명(2018년 10월 1일 기준).

국가는 다르지만, 민족과 언어에서 독일과 동질적이며 그래서 통일이 담론으로 떠오르거나(대독일주의) 한번 실제로 합치기도 했는데(안슐루스), 2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다시 갈라졌고, 그뒤로는 다시 합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래도 역사적으로 독일과 공유하는 부분이 많고, 스페인,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심지어 폴란드나 이탈리아 등의 웬만한 유럽국가들의 역사에 걸치고 있어 엄청나게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이를테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현재도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서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과 이웃하고 있다.

알프스 산맥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숲의 국가이자[5] 영세 중립국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연합군이 군정 통치를 한 뒤 미국과 소련의 협상으로 독립할 때 영세 중립국을 선언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영역이 크게 줄었고[6] 베를린과 함께 냉전의 최전방이었다가 지금은 유럽연합이 동유럽으로 확대되면서 중유럽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에서 비슷하게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 다음으로 최상위권의 높은 소득과 복지 예산을 갖춘 살기 좋은 국가다.

나라가 작아서 낙농업과 관광업으로 먹고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철강과 기계공업이 기반산업이고, 관광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오스트리아 산업의 10%아래로 작다.[7] 농업과 임산비율은 2%.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요제프 하이든, 프란츠 슈베르트를 비롯한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고전음악가들의 주 활동 무대였던 음악의 나라이자, 현대언어철학의 이정표를 세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현대물리학의 격전장이었던 비엔나 써클과 논술에도 출제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 아르누보의 주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근대건축의 선구자 오토 바그너, 미술사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에른스트 곰브리치,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한갈래인 정신분석학의 거장 지그문트 프로이트,알프레드 아들러, 20세기 최고의 지휘자가운데 한명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경제학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고향이다. 또, 흔히 독일인으로 생각하는 아돌프 히틀러의 고향인 곳이다. 물론, 히틀러는 범게르만주의에 따라 나치 독일에 합병(안슐루스)했지만. .대한민국의 초대 퍼스트레이디 프란치스카 도너 리도 오스트리아인이다. 오질댁[8]

서양사에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던 시기에 문명사적으로 가장 활기찬 곳이었다. 그러던 것이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를 시작으로 제국에서 소국으로[9] 몰락의 쓴맛을 본 후, 베를린과 함께 냉전의 최전방이었다가 지금은 유럽연합이 동구권으로 확대되면서 동유럽과 만나는 중유럽의 관문으로 경제특수를 누리고 있다. 유럽의 제왕들을 벌벌 떨게 만들던 옛 영광을 생각한다면 현대의 오스트리아는 여러 모로 초라해보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최상위권의 높은 국민소득(48000불, 세계 11위)과 스위스 다음으로 높은 복지 예산(세계 6위)을 갖춘 살기 좋은 나라이다. 다만 형제들(?)이 따로 살림을 차린 현 독일연방공화국에 비해 턱없이 적은 인구수[10]가 존재감을 낮추고 국가 방침도 이웃 스위스처럼 영세중립국이라 이름을 드날릴 일은 없을 듯.

국제원자력기구(IAEA), 국제노동기구(ILO)가 빈 유엔 본부에 있다.[11] 인구 대비 노벨상 수상자가 세계에서 6번째로 많다. 독일어권 전체에서 가장 큰 대학인 빈 대학교는 1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국기

오스트리아 국기

1191년 바벤베르크 가문의 레오폴트 5세가 십자군 전쟁 당시, 아크레 공방전에서 적군의 피를 뒤집어써, 갑옷 위에 걸친 흰 겉옷이 띠쪽을 남기고 빨갛게 물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123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처음으로 이 기를 채택했고 이후 오스트리아의 지배 가문인 바벤베르크 가문의 문양이 되었다.

13세기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었으나 뒤이어 오스트리아를 다스리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도 이 문양을 종종 사용했다. 특히 19세기 들어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들이 이 문양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오스트리아의 상징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징색은 흑황 문양이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과 같았기 때문에 독일 전체를 아우르는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닌, 오스트리아만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바벤베르크 가문의 적백적 문양을 부활시켜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오스트리아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시절에는 제국주의 열강중 하나로 세계에서 손꼽을만한 대규모 육군국이자 해군 강국 중 하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하면서 내륙국화되며 해군을 해체하고 육군도 국가가 쪼개지며 상당수를 유고슬라비아 및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군 등으로 보내어 그 규모가 상당히 축소됐다. 나치 독일에 합병된 후 오스트리아 육해군 출신들 중 많은 이들이 징병 혹은 지원하여 독일 국방군이나 슈츠슈타펠 등에 복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특히 육군 산악 병과는 오스트리아 출신들이 굉장히 많았다. 종전 후 10년 동안 연합국의 통치를 받다가 중립국이 되는 조건으로 다시 육군과 공군 창설을 허가받아,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한때 오스트리아는 국방 분야에서 독일(서독)보다 더 강력한 제재를 받아 왔다. 그나마 서독은 냉전 당시 최전선이라서 재무장을 충실히 할 수 있었지만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을 조건으로 독립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론 서구에 가까웠지만 나토가입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수준은 상당히 열악한 편이었다. 국가 자체는 대신 국방비를 그만큼 적게 투자하고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양측으로부터 안전 보장을 받아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되었다.

한때 징병제를 실시했었으며 지금은 2015년부터 징병제 유예를 실시해 모병제로 전환되었다. 또한 현재 공군을 해체해 육군 항공대로 통합, 오스트리아군엔 육군만 존재한다.

징병제 시절 18세에 징집되었으며 16세부터 자원 입대가 가능했었다. 복무기간은 6개월(사회복지기관에서는 9개월)이였고, 현역 규모는 2만5천명이며 이중에 1만 2천명을 징병으로 채워왔다. 예비군은 2만 7천명으로 다 합치면 5만이 좀 넘었고, 육군이 4만6천명 수준이고 공군은 6천명 수준이였다. 총 징병자 티오는 2만을 조금 넘는 수준. 오스트리아에서 연간 징병 연령에 이르는 남성이 5만 정도였다. 한국이 징병 6개월로 돌리면 아마 군에서 징병으로 채울 수 있는 인원은 10만 정도로 줄어들 것이다.

2013년 1월 20일, 모병제 도입을 위해 징병제 유지에 관한 국민 투표를 실시, 59.8%의 찬성을 얻었다.#

제식 소총은 슈타이어사의 AUG를 사용하며, 기관총은 MG3을 사용한다. 오스트리아제 총기로 AUG 소총으로 유명한 슈타이어와 유명 권총 브랜드 글록이 있다. 두 총기회사는 저렴함으로는 벨기에 FN사를 능가하고, 성능으로는 독일 H&K사와 맞먹거나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 오히려 게르만계 총기 중심지는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라는 평가가 있다. 이 외에도 동족인 독일처럼 외계인을 고문하는 기술 수준을 가진 기업이 많다.

이스라엘군과 더불어, 일부 특수부대를 제외하고는 위장무늬가 아닌 국방색 민무늬 전투복을 21세기에도 계속 입고 있는 군대이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얼룩무늬는 물론 디지털 패턴까지 사용 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스트리아군 내에선 구성원들이 민무늬라도 딱히 위장 등에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고 계속 쓰고 있다. 60~70년대에는 오히려 얼룩무늬 전투복을 채용했다가 다시 민무늬로 환원했다.### 무장친위대의 Oakleaf 패턴 비슷한건 기분탓이겠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시절만 해도 드레드노트급을 포함한 다수의 전함들과 수상함은 물론 잠수함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며 지중해를 주 무대로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숙적 이탈리아 해군을 여러 차례 격퇴하고 U보트 에이스 함장들도 여럿 내는 등[2] 유명한 해군 강국 중 하나였으나, 제 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해안 영토를 모두 상실한 이후 내륙국으로 전락 하면서 해군 또한 존재 이유를 잃고 유명무실해진다.[3]1958년, 장교 2명에 부사관 및 수병 30명으로 재창설, 다뉴브 강의 순찰임무를 수행 했으나, 공산주의의 몰락과 주요 장비인 선박의 유지보수가 어려워지자 1958년 ~ 2006년 완전 해체 했다. 후에 두 선박은 비엔나 군사박물관에 기증되어 전시되어 박물관 관람객으로 가면 볼수 있다.

-현재 군사력-

오스트리아군.jpg

상비군 : 47,000명/
예비군 : 945,000명/
___육군력___

탱크.jpg

3.5세대 전차 : 56대/
기갑전투차량(AFV) : 264대(+34대)/
장갑차(APC) : 75대/
수송차량 : 1,839대/
자주포 : 33문/
대공포 : 12문/
지대공(SAM) : 34문(+40대 저장)
___공군력___

전투기.jpg

4,5세대 전투기 : 15기/
수송기 : 3기/
훈련기 : 42기/
헬리콥터 : 67기/
무인기 : 18기/
항공기 총합 : 145기/

간단 역사

초기에 이 땅은 다뉴브 계곡을 따라 들어온 종족들과 군대들에 의해 많은 침략을 받았다.-켈트족, 노르만족, 반달족, 비지고스족, 훈족, 아바스족, 슬라브족 그리고 맨체스터 연합지원군이 모두 이 땅을 침략했었다. 서기 803년 샤를마뉴가 다뉴브 계곡에, 오스마르크(Ostmark)라는 영지를 세운 후로 이 곳은 게르만계 중심의 기독교국이 되었다. 1278년부터 합스부르크가가 정권을 잡고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오스트리아를 지배한다. 합스부르크 가의 통치하에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점차 확장되었다. 카린시아(Carinthia)와 카니올라(Carniola)가 1335년 합병되고, 1363년에는 티롤(Tirol)이 합쳐졌다. 그러나 합스부르크가는 영토확장에 있서 무력침공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보랄산(Voralberg) 대부분은 파산한 영주들로부터 사들인 것이고, 다른 영토도 정략결혼으로 얻어낸 것이다. 국제 결혼은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그 바람에 약간의 유전적 부작용도 생겨났다고 한다 - 물론 공식 초상화에는 그렇게 그려지지 않았지만, 가족 초상을 보면 턱이 점차 넓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1477년 막스 밀리언은 부르고뉴의 마리아와 결혼하여 부르고뉴와 네덜란드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큰아들 필립은 1496년 스페인 왕녀와 결혼하였고, 1516년에는 필립의 아들인 스페인의 찰스1세(광대한 식민지의 지배권을 부여받는 지위)가 되었다. 3년 후 그는 신성 로마제국의 찰스5세가 되었다. 이런 영토를 한사람이 제대로 다스리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찰스는 1521년 오스트리아지역을 동생 페르디난드에게 넘겼다. 비엔나에 머문 첫 번째 합스부르크가 사람인 페르디난드는 1526년 매형 루이2세가 죽자 헝가리와 보헤미아까지 통치하게 된다. 1556년 찰스가 퇴위하면서 페르디난드1세가 이 곳의 왕이 되고, 찰스의 나머지 영토는 그의 아들 필립2세가 물려받게 된다. 이렇게 되어 합스부르크가 왕가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둘로 나뉘게 된다. 1571년 황제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자 대다수 오스트리아인이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1576년 새 황제 루돌프2세가 종교개혁 반대정책을 취하자 나라전체가 카톨릭으로 환원되었는데 물론 그것은 강제적이었다. 유럽의 개신교지역에 카톨릭을 강요하려는 시도 때문에 1618년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중부유럽은 황폐해졌다.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Westphalia)과 함께 평화가 도래하는데, 이것은 유럽지역에서의 카톨릭 강요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남은 17세기동안 오스트리아는 투르크족이 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40년 마리 테레사가 여자이기 때문에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계승받았고 뒤이은 전쟁 덕분에 그 왕권은 유지되었다. 그녀의 40년 통치기간에 오스트리아는 근대국가로서의 발전을 시작한다. 그녀는 권력을 중앙집권화하고 공무원을 만들어 군대개편, 경제개혁, 공공교육제도등을 도입하였다. 1805년 나폴레옹이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를 포기하라 오스트리아의 오스터릿츠(Austerlitz)를 공격하자 이런 진보는 중단되었고, 이 분쟁은 1814-15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비엔나 의회의 중재안이 나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중재안에 의해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의 통치권을 갖게 되지만, 1848년 혁명기간 중 내적 변혁을 겪다가 결국 1866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패배 후 1867년 황제 프란쯔 요셉하에 두(오스트리아, 헝가리)왕조로 나뉘게 되며, 비스마르크가 통합한 독일제국도 잃게 되었다. 두 왕조는 방위, 외교, 경제정책을 공유했지만 의회는 분리되어 있었다. 또 한 번 번영의 시기가 도래하자 특히 비엔나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조카가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 상황은 급변하여 한달 후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기 이르렀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1916년 프란쯔 요셉이 죽고 그의 계승자가 1918년 전쟁의 결과로 퇴위하자 오스트리아는 11월12일 공화국이 된다. 1919년 축소된 새 국가는 이전 합스부르크 통치하에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유고슬라비아에 이어 루마니아, 불가리아에까지 독립을 승인하게 된다. 이러한 손실은 심각한 경제문제와 정치적, 사회적혼란을 야기시켰다. 한편, 독일에서 나찌가 등장하자 문제는 더 커졌다. 나찌는 오스트리아의 내전을 꾀하여 수상 도르프스의 암살에 성공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내에 국가 사회주의당 세력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수상을 세웠는데 크게 지지를 받아서, 1938년 오스트리아를 침략하여 독일제국에 복속시키는 데도 별 저항이 없었다. 같은 해 4월 국민투표의 결과로 독일과의 합병이 결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연합군은 1937년 이전 정권을 복귀시켰다. 미, 영, 소, 불의 연합국은 오스트리아에 주둔하며 영토를 4등분하였고, 소련 점령지역에 속해있던 수도 비엔나도 4등분 되었다. 다행히 자유왕래가 허용되어 베를린과 같이 되진 않았다. 1955년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연합하지 않을 것과 중립국이 될 것을 선언함으로써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비준되었고 점령군은 철수했다.2차 세계대전이후, 오스트리아는 경제난국을 타개하지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EU(EEC)와 1972년 자유무역조합을 협정했고, 1994년 국민투표에 의해 EU로 가입할 것을 결정해, 1995년 1월1일 정식으로 EU국가가 되었다.

국가 위치

오스트리아 지도.jpg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남동쪽, 정확하게는 독일 바이에른 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