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하파)/역사

근대

이탈리아 통일과 제1차 세계대전

주세페 가리발디(붉은 셔츠단)와 카밀로 카보우르(샤르데냐 왕국), 주세페 마치니의 주도로 전개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오스트리아와 스페인과의 치열한 전투를 거듭한 끝에 베네치아와 교황령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된다. 이후 이탈리아 통일 왕국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프로이센을 지원한 대가로 베네치아를 흡수 통일한데 이어 4년후인 1870년, 보불전쟁이 발발하여 로마에 주둔하였던 프랑스 군대가 재배치된 틈을 타 로마를 습격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로써 완전한 통일을 이룬 이탈리아 왕국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초대 국왕으로 옹립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게 된다.

이탈리아는 통일 초기부터 서양 열강에 합류하기 위해 대대적인 현대화에 착수했다. 북부에서는 1890년대 까지 광범위한 산업화와 인프라 구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알프스에 있는 철도는 이탈리아 반도를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철도 노선을 잇는 중요한 교통시설이었으며 로마, 피렌체, 나폴리 등의 남쪽 해안선을 잇는 노선이 추가로 건설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내 대기업들은 독일, 영국, 프랑스의 적극적인 투자 아래 설립되었다. 이후 이탈리아는 1880년대부터 보호무역을 실시하면서 자동차, 철강, 선박 등의 중공업을 육성하기로 결정한다. 남부에서는 농업의 현대화를 이룩하였고, 협동조합의 강력한 권력이 뒷받침되어 농업 종사자들의 이익은 극대화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농촌에 고세율을 적용하는 바람에 농촌 경제는 후퇴하고 만다.

1848년에 제정된 헌법인 스타튜토 알베르티노(Statuto Albertino)는 이탈리아 왕국을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 국가임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일정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의회가 구성된 이후 이탈리아의 정치는 좌우가 예리하게 나뉘었다. 당시 우파(역사적 우파)는 샤르데냐 왕국 출신 정치인, 지주, 로마 가톨릭, 군부 등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보수파였으며, 좌파(역사적 좌파)는 자유주의와 급진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이었다. 이들 중 어느 한 세력이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교착상태에 빠졌다. 초대 수상이었던 카보우르의 사망 이후에는 우파가 주로 집권하였으나 좌파가 간간히 득세하는 가운데 우파와 좌파가 번갈아가며 수상직을 역임하게 된다.

이와중에 1876년에 탈권위와 반부패를 공약으로 내세운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가 집권하며 이탈리아 정치는 큰 변동을 맞게 된다. 데프레티스는 변화(Trasformismo)를 주장하며 당파성이 적은 중도인사와 유능한 관리를 기용하고자 했다. 이외에도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무상 초등교육을 도입하였으며, 당시 초등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이루어지던 종교 교육을 철폐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때 내무장관이 반기를 들며 데프레티스의 1차 내각이 붕괴하였고 1881년에 2차 내각이 구성되어 선거법 개정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데프레티스 정권은 거대한 국가 채무로 인해 농촌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19세기 말에는 포도의 과잉생산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프랑스의 포도원이 병들어 소비 공백을 매꿀 기회가 찾아왔지만, 이내 프랑스의 포도 생산력이 회복되자 이탈리아산 포도 수출은 다시 침체기를 맞이하고 이로 인해 대량 실업과 은행 도산이 이어진다. 이후 1887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물러난다.

1887년에 수상으로 취임한 프란체스코 크리스피는 1887년에서 1891년까지, 1893년에서 1896년까지 2차례 수상직을 재임하였다. 크리스피는 파시즘 등장 이전까지 가장 팽창주의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군비 확장정책을 펼치고 에티오피아에 군대를 파견해 동아프리카의 식민지화를 추구한 것이 그 이유이다. 크리스피는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경계하여 독일 제국, 오헝 제국과 삼국동맹(동맹국)을 맺었으나 당시 이탈리아는 오헝 제국과 영토분쟁을 겪었기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정부가 대외정책에 치중한 사이 낙후된 농촌은 방치되었고, 이탈리아 정치권은 농산물 증대를 위해 고심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지주들의 경제적 수탈만 지속되었다. 늘어난 지주들의 토지로 인해 하층민들은 막대한 세금을 부담하게 된데 이어,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이 유행해 약 5만 5천여명의 인구가 사망한다.
로마 제국을 재건하고자 했던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요구로 이탈리아는 1890년대부터 강대국들 간 식민지 쟁탈전에 참여하였다. 우선 이탈리아는 다른 강대국들과 식민지 양도에 관한 협상을 진행했고,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선교사들을 파견해 식민지화 되지않은 미개발 토지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나(제1차 에티오피아 침공) 아도와 전투에서 패배해 크리스피는 패전의 책임을 안고 사임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는 점차 제국주의적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를 점령하고, 1911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이었던 페잔과 트리폴리타니아를 확보하고자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 후 리비아를 전격 침공(이탈리아-튀르크 전쟁)한 뒤 이탈리아령 리비아를 선포해 식민지로 삼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탈리아는 동맹국과 거리를 두며 중립을 유지한다. 이는 1차대전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선제적 공격으로 전개되었기에 이를 명분삼아 참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탓이 컸다. 이탈리아 수상이었던 안토니오 살란드라와 외무장관 시드니 손니노는 전쟁을 기회삼아 쥐트티롤, 이스트리아, 달마티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수복할 기회라고 판단했고, 위 주장이 힘을 얻자 1915년 9월에 협상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의 식민지였던 트렌티노, 남티롤,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등을 이탈리아에 양도한다는 런던 조약이 비밀리에 체결된다. 그렇게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며 협상국의 자격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탈리아 사회공화국과 제2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된 후, 1919년 1월에 개최된 파리 강화 회의서 승전국들은 런던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고 배상금 일부와 트렌티노알토아디제, 그리고 이스트리아 반도만을 얻었다. 이탈리아에는 불구의 승리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고 정부를 향한 민중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이탈리아 내 자유주의는 힘을 잃은지 오래였고, 협상국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보통선거를 실시하며 자유주의 세력은 의회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기에 이른다. 해당 공백은 사회당과 공산당, 인민당이 매꾸며 새로운 정치 구도가 나타나게 된다. 한편 1차 대전 후 닥쳐온 극심한 경제침체와 그에 따른 높은 실업률은 정치 불안을 야기하기에 충분했고, 노동자들은 공장과 농장을 점령하여 노동자 자주 경영을 시도했으며 농촌에서는 정부에서 공약한 토지 분배로 인해 미경작지 점유 운동이 일어난다. 결국 이탈리아는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비엔니오 로소(Biennio Rosso)라는 사회적 혼란을 맞이한다.

이와중에 사회당원이었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1차 대전의 참전을 지지한 후로 사회당과 결별했고, 경제난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일 파시 이탈리아니 디 콤바티멘토》(Il 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 일명 전투 파쇼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민족주의적 선동에 돌입한다. 사회주의 혁명이 심화되자 우익을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과 농장주들은 무솔리니의 파쇼 집단으로 결집하여 이를 경계하였다. 1921년에는 국가 파시스트당이 세워져 당해 치러졌던 총선에 출마한다. 당시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던 조반니 줄리티의 자유연합(Unione Liberale)이 무솔리니에게 연정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한다.

결국 1922년 10월,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정부에 정권을 넘기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며 최후통첩을 날린다. 하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그를 불신임한다 선언함에 이어 루이지 파크타 수상이 최후통첩을 묵살하자 무솔리니는 곧바로 30만명으로 이루어진 검은 셔츠단(Camicie Nere)이라는 민병대를 창설해 1922년 12월에 이탈리아 왕국에 선전포고 한다(제1차 이탈리아 내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과 루이지 파크타 수상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왕국군을 소집해 수도 로마를 요새로 삼게된다. 초기 검은 셔츠단은 군사력이 비약해 왕국군에게 밀리는 양상을 보였으나, 게릴라 전술을 활용해 전국 각지의 무기고를 습격해 화력을 보강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을 경계했던 일부 국가들의 공중지원을 바탕으로 볼로냐와 밀라노, 피렌체 등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로마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기존 정권에 불만을 느꼈던 지주와 고용주들이 무솔리니에게 토지와 자금을 마련해주고 파시스트에 동조했던 다수의 중산층들이 검은 셔츠단에 자원하면서 11개월만에 전세는 무솔리니 쪽으로 기울게된다.

이탈리아 정부 내에서는 명확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파시스트에 동조하는 일부 정치 세력이 대거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마침내 검은 셔츠단과 이탈리아 왕국군 간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게 된다(로마 포위전). 약 3개월 동안 이어진 전투는 1924년 5월, 왕국군이 항복을 선언하며 검은 셔츠단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왕실과 정부는 프랑스로 망명하였고 무솔리니를 위시한 파시스트 국가인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epubblica Sociale Italiana)이 수립된다.

무솔리니는 자신을 국가최고원수이자 두체(Duce)라 칭하였다. 또한 기존 의회와 선거제도를 폐지하고 국가파시스트당 중심의 일당제 파시스트 평의회를 조직하였다. 무솔리니는 민족주의, 반공주의, 반자유주의, 반자본주의, 국가주의 등을 혼합한 제3의 대안을 표방하였으나 친파시스트 성향의 자유주의 인사들과 결탁하는 한편, 당내 반대 세력과 혁명주의자들을 숙청 및 진압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무솔리니는 로마 교황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였는데, 아직 이탈리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가톨릭의 위상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사회공화국과 로마 교황청 간 체결된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 무솔리니는 교황청의 이탈리아 내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을 인정하고, 바티칸이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국가임을 인정하였다.

사회공화국 내에서는 공포정치가 성행하였다. 이 중 사회주의 정치인에 대한 암살이 자행되어 무솔리니의 쿠데타를 비난한 사회당 소속 자코모 마테오티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인 아메리고 두미니는 검은 셔츠단 소속이었으며, 당국과의 무관성을 주장하였지만 그가 15년간 무솔리니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솔리니가 이 암살사건에 관여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셈이었다. 또한 사회공화국은 전형적인 독재국가로써, 의회의 동의없이 독자적인 권력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헌법 조항을 모두 파기시키고 국가원수를 최고결정권자로 등극시키며, 국가의제를 통할하는 크리스마스 이브 법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무솔리니 1인 독재체제의 서막이 드리운 것이었다. 파시스트 평의회가 두체의 해임을 건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두체만이 평의회를 소집할 수 있었기에 그를 견제할 기구가 사실상 사라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무솔리니는 사회공화국을 전형적인 경찰국가로 만들었는데, 그는 반파쇼 분자 진압을 위한 조직(Organizzazione per la Vigilanza e la Repressione dell'Antifascismo)이라는 비밀경찰을 창설하여 철권통치를 감행해 반대 세력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남부에 있는 시칠리아 마피아를 견제하기 위해 체사레 모리를 팔레르모 주지사로 임명하였고, 체사레 모리는 마피아를 대대적으로 소탕하기 위해 파시스트군을 동원해 마을을 포위하고, 고문을 자행했으며, 마피아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마피아로 하여금 스스로 자수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마피아들의 세력이 약해지자 팔레르모 주 내에서 발생한 살인 건수가 200건에서 23건으로 대폭 줄어들기도 하였다.

이탈리아는 1919년에 리비아에 아랍어와 베르베르어 교육을 허용하고 리비아인들이 이탈리아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행했으나, 무솔리니 집권 이후 위의 모든 조치가 철회되고 리비아인들의 토지가 몰수되었는데, 이는 오마르 무크타르가 이끄는 리비아 독립운동에 불씨를 지폈고 이후 파시스트 정권은 리비아인들을 강제수용소에 수감시키고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는 방법으로 응수하였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정치인이었으나 승전국 간 연합 전선을 긴밀히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성실히 이행하고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에도 잔류할 것을 천명하는 등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협상국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해외 식민지 문제와 에티오피아 침공을 두고 영국, 프랑스와 대립각을 세웠고, 결국 무솔리니가 제1차 에티오피아의 침공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에티오피아를 재침략하였다. 이로 인해 협상국들이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점령에 대응하지 못하자 영국,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스트레사 전선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으며 이탈리아는 반발의 표시로 국제연맹을 탈퇴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무솔리니는 주변 파시즘 국가들과 관계를 증진시키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국민전선에, 안슐루스 당시에는 독일에 적극 협력면서 본격적으로 침략 노선을 걷게된다. 특히 안슐루스 당시 독일이 쥐트티롤을 이탈리아에 양도한다는 보장 아래 묵인해주었다.

초기에 무솔리니는 독일의 팽창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1934년 당시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의해 오스트리아 연방국의 수상 앵겔베르트 돌푸스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히틀러가 이를 기회로 삼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려 하자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할 시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였다. 오스트리아가 병합될 시, 그토록 경계했던 독일과 국경을 맞대야하는 최악의 수를 감안해야했기 때문이었다. 1935년에는 스트레사 전선 계획에 따라 서방 측과 공조해 독일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추구하는 우생학이나 인종 선별에 의한 아리아인 제국 건설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고, 독일이 이탈리아인을 일종의 몽골 인종으로 취급하려 한다며 비난하였다.1934년에 독일이 자국 여권에 아리아인과 유대인을 명기하기 시작하자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의 프랑스 침공 이후로 확신이 선 무솔리니는 추축국 지위로 참전을 결의하려 하였으나, 당시 장군이었던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이탈리아의 군비와 물자가 마땅치 않다며 적극 만류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내전에서의 복구가 완료되지 않았을 뿐더러,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는데만 수많은 전력을 허비하였고 이탈리아 내에서 본격적으로 파르티지아노(Partigiano), 일명 빨치산이 본격적으로 반정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기에 참전할 여력이 되지 못하였다. 결국 무솔리니는 기존 정책을 번복한 채 친독 정책을 잠시 멈추고 중립국으로 선회한다. 당시 히틀러가 무솔리니에게 유고슬라비아 동시 침공을 제안하였으나 무솔리니는 슬로베니아 전역과 크로아티아의 일부 지역(자다르, 시베니크크닌, 스플리트달마티아)을 이탈리아에 양도해주는 다소 황당한 조건 하에 참전하겠다 말하자 히틀러는 거절한다.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지속적인 회유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고수하자, 줄리아 작전(Operation Giulia)을 수립해 이탈리아 전역을 침공하려 하였으나, 연합군의 독일 본토 폭격으로 독일의 공업력이 쇠퇴하자 미수로 그치게 된다.

독소전쟁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거쳐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무솔리니는 내각의 친독인사들을 모두 경질하고 친연합군 노선으로 돌아섰으며 유대인 보호정책을 펼쳐 독일에서 피난을 온 유대인들에게 퇴로를 제공해주기도 하였다. 이와 동시에 1943년에 이탈리아 왕실의 지원 아래 기독교민주당(인민당의 후신), 공산당, 사회당, 자유당(자유연합의 후신), 행동당, 노동민주당(개혁사회당의 후신)이 합작하여 반파시즘 저항군 단체인 국민해방위원회(Comitato di Liberazione Nazionale)가 조직된다. 이들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고 연합군과 접선하며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편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 측이 이탈리아를 추축국으로 분류하여 독일과 같이 전범혐의를 적용하려 하였으나 미국과 영국의 만류로 이탈리아는 중립국으로 잔류한 채 2차 대전이 종전을 맞이한다.

1944년부터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금본위제인 브레튼우즈 체제가 확립되었고,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국제부흥개발은행이 설립되면서 자유무역 기반의 세계경제체제가 구축된다. 당시 2차 대전의 전후복구를 진행 중이던 서유럽에 비해 이탈리아의 기반시설은 대체로 양호한 축에 속하였으나, 마셜플랜이 시행되었던 탓에 서유럽이 제기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파시스트 체제 하의 패쇄경제는 곧 시장경제의 돌풍이라는 난제를 해결해야만 하였다. 결국 세계 경제의 흐름에서 완전히 대척점에 서게 된 이탈리아의 내부에서는 경제난을 우려해 자본주의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지만 무솔리니는 복잡한 내부 사정과 연합국의 보복을 우려하여 서방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을 뿐이지 파시스트 체제만큼은 유지하고자 하였기에 국가파시스트당의 강령 중 하나인 협동조합주의를 명분으로 서방 주도의 경제체제를 완강히 반대하고 나선다.

현대

내전과 국민해방위원회

이탈리아 국민들은 이러한 무솔리니 체제에 피로도와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이를 인식한 국민해방위원회는 무솔리니 정권을 전복시킬 목적으로 기독교민주당, 사회당, 공산당, 행동당 등, 각 정당이 점유하고 있던 별개의 준군사조직들을 일원화하여 레시스텐자(Resistenza)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중산층과 노동자, 빈농, 패잔병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으며,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지원 아래 지하활동을 전개해나간다. 레시스텐자는 국가파시스트당의 주요 인물인 알레산드로 파볼리니를 밀라노에서 암살하는데 성공하고 무솔리니의 심복이자 이탈리아 전 공산당원이었던 니콜라 봄바치를 생포하여 무솔리니의 은신처를 알아내게 된다. 그가 로마에 거주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레시스텐자는 1946년 2월, 당시 국민해방위원회 의장이었던 이바노에 보노미가 이탈리아 수복(Restauro Italiano) 선언문을 낭독한 뒤 사회공화국에 선전포고를 단행하며 내전이 발발한다(제2차 이탈리아 내전).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평의회를 소집해 '파르티잔 토벌 안건' 을 통과시키며 정면 대응을 시사하였다.

레시스텐자는 왕국군 패잔병들과 카라비니에리(헌병군)가 대거 합류한 덕분에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파시스트군과의 정면대결을 자제하고 게릴라 전술과 시가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파시스트군의 전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영국, 프랑스(인민 사단, 정의와 자유 사단 지원), 미국, 소련(가리발디 사단 지원)의 간접적인 지원 아래 서방제 무기로 무장하며 파시스트군의 기계사단을 여럿 무력화하는 쾌거를 달성한다. 그들은 나폴리에서 대규모 민란을 유도하여 나폴리를 해방시키는데 성공하고(나폴리의 4일), 나폴리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는다. 나폴리에 설치된 레시스텐자 최고사령부는 총사령관으로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을 추대하려 하였으나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퇴위한 탓에 후계자 움베트로 2세 왕세자가 대신 임명된다. 이들은 시칠리아 섬을 포함한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고 점차 로마로 북진하며 무솔리니 정부를 압박해왔다. 한편, 파시스트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파시스트 평의회는 무솔리니 해임안을 상정하였고 당원들은 물론 측근의 신임까지 잃어 심리적 타격을 받은 무솔리니는 결국 두체직을 내려놓고 사임을 선언한다. 그의 후임으로는 국가파시스트당 부총재였던 아킬레 스타라체가 선출된다.

이후 레시스텐자가 무솔리니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자, 그는 스위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망명하기 위해 피난민으로 위장하고 자신의 측근 5명, 부인 클라라 페타치와 아오스타로 향하는 도중 공산당이 이끄는 가리발디 여단의 검문에서 발각된다. 현장에서 체포당한 무솔리니 일당은 가리발디 여단 소속 월터 아우디시오 대령에 의해 즉결 처형이 이루어졌고 그들의 시신은 밀라노로 인도된 후 피아잘레 로테로 광장에 있는 한 주유소에 거꾸로 매달렸다. 성난 군중들은 욕설 세례와 함께 무솔리니 일당의 시신을 몽둥이와 총기를 이용해 훼손시켰다. 이후 시신들은 레시스텐자 측에서 회수하였다.

두체직을 이어받은 아킬레 스타라체는 레시스텐자와 강화 협상에 돌입한다. 그러나 공산당과 사회당의 반발로 인해 대화를 거부한 레시스텐자는 조건없는 항복을 요구한다. 결국 협상을 반려할 수밖에 없었던 스타라체는 1948년 3월, 목숨을 부지하고자 로마를 빠져나와 대기중이던 인민 사단에 홀로 자진해서 항복하기에 이른다. 이를 기점으로 레시스텐자는 파시스트군의 기강이 무너졌다 판단하고 로마에 대한 총공세를 개시한 끝에 1948년 9월 27일, 두체 카를로 스코르자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며 내전은 레시스텐자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왕정 복고와 냉전

내전 이후 이탈리아는 환호와 함성으로 가득찼으나, 사회적 분열이 극심하였고 경제가 붕괴되었으며 소규모의 파시스트 세력이 잔존하여 테러를 일으키는 바람에 혼란스러운 정국을 이끌어나갈 리더십이 필요한 상태였다. 임시정부를 구성한 국민해방위원회는 이를 인식해 정부수반인 의장을 선출하고자 후보를 모집하였으나 극좌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의 분쟁을 우려해 당시 유능한 지휘능력과 합리적인 중도 인사로 주목받던 행동당 대표 페루치오 파리가 유력후보로 점쳐진다. 초당파적인 지지에 힘입어 의장으로 선출된 페루치오 파리는 내전으로 파괴된 기반 시설을 재건하고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마르첼로 솔레리(임기 도중 사망), 에피카르모 코르비노와 함께 추후 일어날 1960년대 경제 호황의 기틀을 닦아놓는다. 시칠리아 마피아를 집중조사하기 위해 반마피아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레시스텐자에 참여해 이탈리아 해방에 공헌한 공화파의 의견을 일부 반영해 개헌을 실시하고자 제헌의회를 소집하였다.

개헌안은 국왕을 명목상 통수권자로 명시하고, 국왕의 법률안 제출권을 폐지하였다. 헌법 제3조는 이탈리아를 노동 친화적 국가임을 명시한 핵심 조항이었고, 이는 추후 이탈리아에 여러 복지제도가 도입되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입법권은 상원과 하원이 공동으로 행사하지만, 상원은 국왕임명제이고 법안을 심의할 권한만을 가지고 있어 하원의 독주를 제지하기 위한 일종의 제동장치로만 취급받는 반면, 선거로 선출된 하원의원들의 입법권 행사 범위가 더 넓은 형태를 띄었기에 영국식 내각제와 비슷하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왕당파의 반대에 부딪혀 해당 개헌안은 제헌의회를 통과하지 못한다.

페루치오 파리가 사퇴한 후, 기독교민주당의 알치데 데 가스페리가 의장으로 선출된다. 그는 내전 당시 연합군의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마셜 플랜 참가에 있어 미국의 신임을 얻어냈다는데 높은 평가를 받아 의원들은 물론 대중들의 지지가 확고하였다. 그는 공산당과 사회당 등을 포함한 연정을 구성했고, 리비아와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식민지들의 독립을 승인하고 유고슬라비아와 동부 영토 햘양에 관한 협상을 시작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탈리아는 이스트리아, 피우메, 트리에스테, 고리슈카를 제외한 점령지역을 모두 유고슬라비아에 반환한다. 가스페리는 이전에 부결되었던 개헌안에 대한 재심의를 제헌의회에 요청하였고, 왕당파를 설득하여 마침내 개헌안이 통과되었다(1951년 개헌). 그러나 왕실의 미온적인 저항운동에 불만이 고조된 사회주의 진영이 공화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자 1952년, 가스페리는 군주제 유지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초강수를 둔다.

초기에는 공화제 여론이 군주제 여론을 근소한 차이로 제쳤으나 움베르토 2세의 격려와 왕실의 반파시스트적 태도가 반전효과를 일으켜 국민투표 결과는 군주제 유지 76%, 공화제 전환 24%로, 일부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을 제외하면 군주제 유지 여론이 우세를 점하였다. 이로써 왕정이 복고되고 움베트로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됨과 동시에 1952년 7월 18일, 이탈리아 왕국이 28년만에 재건국된다.

이후 1952년 총선에서는 체코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쿠데타를 계기로 소련에 대한 경계심을 품은 유권자들의 표심이 작용하여 기독교민주당이 48.5% 득표율을 기록하며 제1당으로 등극하였고, 공산당-사회당의 교섭단체인 인민민주전선이 제2당으로 물러난다. 총리로 선출된 가스페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산당과 사회당을 비롯한 좌익정당과 연정을 구성하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좌익정당을 배제한 채 정부를 재구성하는 대신 미국은 이탈리아에 마셜 플랜에 참가할 권한을 부여하고, 이탈리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전격 승인한다. 가스페리는 마셜 플랜에 참여해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경제 재건에 힘쓰게 된다.

가스페리 정부는 임대료, 사회 주택, 실업 보험 및 연금 등의 사회보장 개혁을 수행하였다. 소작농과 농업 근로자를 위한 건강 보험 제도를 개편하였으며, 국가건강서비스 계획(INAM)을 수립해 정부 차원에서 무상의료, 의약품, 장례 수당을 지원하였다. 그는 주택 재고를 늘리기 위해 '사회주택 7개년 계획' 을 시작하였다. 또한 국립보험연구소(INA)내에 특별주택기금을 설립해 국민들의 주택 보유율을 높였다. 1955년에는 실업자 및 노동 정책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도입하였는데, 실업자를 위해 일자리 알선 및 지원을 위한 중앙위원회를 설립, 노동시장의 상태와 실업률을 모니터링하는 업무를 맡겼다. 그리고 완전 고용을 목표로 노동시장에 관한 규정(Collocamento)을 제정해 지방 소재의 여러 국립사무소를 설립하였다. 특별실업수당(Sussidio straordinario di disoccupazione)을 도입해 농업 근로자의 보험 혜택을 늘렸다.

기독교민주당은 가스페리의 압도적인 입지와 권위를 지지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사회 및 경제 개혁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당을 정부의 하수인으로 종속시킨다는 점을 들어 당내 좌파의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의 리더십이 약화될 무렵, 1957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우파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지 못해 기독교민주당의 득표율이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정부가 제1당에게 추가 의석을 배분하는 과반수 보너스 제도(MBS)를 도입하였기에 기민당은 무난하게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MBS는 야당과 일부 연립정당의 반발을 샀다. 가스페리는 1959년, 임기 중 사임을 선언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가스페리의 후임으로 지목된 주세페 펠라 재무장관이 총리직에 취임하였다. 그는 독실한 경제 자유주의 정치인으로, 가스페리 정부 시절 자유 방임주의적 통화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공산당과 사회당의 비판을 받았다. 또한 재정건전성을 지향해 정부의 복지 지출에 있어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표출하였다. 펠라는 민족주의 선언을 발표하여 트리에스테와 관련해 유고슬라비아와 분쟁을 일으켰을 당시, 요지트 티토가 이스트리아와 트리에스테를 이탈리아가 차지할 시 침공을 개시하겠다 발언하자, 펠라는 동부 국경에 군대를 파견하겠다 맞불을 놓으며 양국 간에 긴장감이 웃돌았지만, 서방국가들의 중재로 사태는 일단락된다.

주세페 펠라의 자유주의적이고 통화주의적인 정책은 이탈리아의 경제 기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경제정책은 기업들의 상품 생산량을 증대시켰고, 고용 요건이 완화되며 직업 종사자가 늘어났다. 그는 내각의 테크노크라트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 비정계 인사들을 기용하여 정책 이행에 있어 효율성을 증대시켰다.

이탈리아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며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이를 이탈리아 경제 기적 또는 경제 호황(il miracolo Economico italiano)이라 불리운다. 인구의 대다수가 물질적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되며 유럽의 빈곤국에서 세계적인 준강대국으로 변모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의 활기찬 분위기에 걸맞게 이탈로 디스코(Italo disco)와 스파게티 웨스턴(Spaghetti western)과 같은 대중문화가 번성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마셜 플랜의 일환으로 15억 달러를 지원받고, 이탈리아가 유럽공동시장의 창립 회원으로 자리잡으면서 수출길이 대폭 늘어난 때를 호황의 구심점이라 보고 있다.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이탈리아 남부 주민들이 북부 도시로 대거 이주하였으며, 특히 밀라노의 제조공장과 제노아의 항구 사이에 위치한 일명 '산업 삼각형' 이라는 공장 지대에 인구가 몰려들었다. 자동차 제조 회사인 람보르기니, 피아트, 포르쉐 등이 위 시대부터 성장세를 걸었다.

경제의 현대화는 운송 및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큰 수요를 창출하게된다. 주요 도시 지역을 연결하기 위한 수천 마일의 철도와 고속도로가 완공되었으며, 이탈리아 전역에 댐과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북부 이주 현상이 맞물려 부동산 시장이 동시에 호황을 맞는다. 하지만 인구밀집 지역에는 심각한 혼잡 문제와 도시 쇠퇴로 이어져 슬럼가 형성에 토대가 되기도 한다. 지속적인 자연 개발로 인해 대기 및 수질오염이 만연하고, 롬바르디아 주의 세베소 화학 공장에서는 다량의 다이옥신이 유출되어 인명피해를 야기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연합(EU)에서는 '세베소 지침' 이라 하여 유해화학물질에 의한 중대사고 위험관리를 위한 지침을 명문화하기도 하였다.

1968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사 습격 사건을 계기로 반체제, 반문화 성격의 68운동이 서유럽을 강타한다. 이탈리아에서도 1969년부터 1970년까지 북부 공장 지대를 중심으로 '뜨거운 가을(Autunno caldo)' 이라 불리는 대규모 파업 사태가 발생했다. 그들은 노동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며 정부에 저항하였으나, 효율성 저하의 이유로 대다수의 파업 노동자들이 해고당한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의 요구가 모두 수용된 것은 아니었으나, 주 40시간 근무제와 임금인상안은 받아들여졌다. 학생 운동 또한 만연하였는데,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학교 점거농성과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며 경찰과 마찰을 빚었다. 특히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에서 벌어진 발레 줄리아 전투(Battaglia di Valle Giulia)에서는 좌익과 우익 계열의 학생들이 연대하여 이탈리아 경찰과 대치하였으나 반정부단체인 극좌와 극우 무장세력이 연계되어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의 발단은 이탈리아 정치계의 부정부패와 이탈리아 노동조합연맹(CISL)의 관료주의적이고 정치화된 체제, 비효율적인 경제 정책으로 생산직 노동자 계급의 분노 촉발 등의 복합적인 요소가 있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적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교육의 현대화로 도입된 신교육체제가 학생들에게 사회적 현상에 대해 다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학생들이 비합리적인 체제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게 된 것 또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민주당 주도의 연립정권의 존립이 위태로워 졌지만, 신좌파 세력이 대두되면서 좌파 진영의 분열 또한 야기하였다. 일례로 공산당에서는 68운동은 물론 프라하의 봄의 여파로 소련 주도의 공산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수정주의 세력과 혁명노선을 고수하자는 반수정주의 세력이 격돌하기도 하였다. 좌파 진영이 분열은 곧 기민당의 정권 연장에 힘을 실어주었고, 1972년 총선에서 기민당과 연립정당들이 지지율 부진에도 불구하고 약 50.1%의 득표율을 얻어 간신히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공산당도 정권 교체에는 실패하였지만 기민당과의 의석이 단 20석 차이였기에(기민당: 225석, 공산당: 205석) 기민당에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현 상황에선 더욱 결단력있는 내각이 필요하다 언급하며 기민당에 연정 구성을 제안하였다. 기민당은 줄어든 의석은 물론 연정 파트너인 사회당, 민주사회당과 정책 노선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탓에 정부 구성에 난항을 겪자 기민당 대표 알도 모로는 당내 우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자회견을 통해 공산당과의 거국내각 결성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면서, 협상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 베를링구에르와 모로는 로마 회담장에서 3차례를 거쳐 연정 구성을 협의한 결과, 1975년 2월에 제3차 회담에서 기민당-공산당-사회당-공화당 4당 연정을 성사시키며 거국내각이 출범한다(역사적 타협).

이렇게 성사된 연립 정부는 베를링구에르를 총리로 선출하며 공산당은 통일 이후 이탈리아에서 집권한 첫 공산주의 정당이 되었다. 베를링구에르는 대중 정치인으로써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었고, 이는 그의 리더십을 표출하기에 더할나위 없는 환경이었다. 그는 오일 쇼크가 닥치면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기 위해 노동조합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 무리한 임금 인상을 유보하도록 설득하고, 사회적 합의를 성사시켜 사용자와 노동자 간 갈등을 최소화시켰다. 그리고 유럽공동체와 함께 중동 산유국들에 지지 성명을 보내면서 5%~10%의 원유 감산유예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그와 동시에 경제적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영 석유공사를 설립해 다량의 석유를 고갈에 대비하여 비축해두었다.

1983년 3월 18일에 움베트로 2세가 심장 질환으로 별세하면서 움베트로 시대가 저물고 나폴리 공작(왕세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4세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에마누엘레 4세는 각종 비행 및 망언으로 구설수에 오른 상태였고, 여론은 그의 즉위에 비호적이었다. 사보이 본가에 대한 우호적 여론이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귀족 내부에서는 사보이의 분가인 아오스타 공작 가문을 지지하는 파벌이 형성되며, 사보이-아오스타 간 권력암투가 심화된다.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잠시 공화정 여론이 빛을 발하는 듯 싶었으나, 에마누엘레 4세의 선언에 따라 남성만을 왕위 계승자로 인정한다는 살리카법이 폐지되고 절대적 맏이 상속법이 도입됨으로써 기존 왕실의 보수적인 태도에 피로감을 느꼈던 국민들의 환심을 산다. 또한 그는 여러 환경 단체와 아동 보호소에 거액의 자산을 기부하면서 친사회적 행보를 이어감으로써 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시칠리아에서 마피아 세력 간 분쟁(제1,2차 마피아 항쟁)으로 인명피해가 늘어나자 베를링구에르 정부는 시칠리아 섬에서 영향력을 넓히던 마피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면서 반마피아법에 의거해 사법부가 마피아의 은행 계좌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유죄판결을 받은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며, 마피아를 국가범죄세력으로 규정한다. 동시에 인터폴과 공조해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의 돈줄이었던 이탈리아-미국 마약 유통노선을 모두 끊어버린다. 이에 코사 노스트라는 반마피아법을 발의한 공산당 의원 피오 라 토레를 팔레르모에서 암살하고, 폭약을 동원해 고속도로에 폭탄 테러를 일으키며 저항하였으나 베를링구에르는 당시 반마피아 성향의 카를로 알베르토 장군을 팔레르모에 파견, 카라비니에리를 동원해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경찰들의 무장을 강화해 마피아들을 탄압하였다.

한편, 사법부 산하 검찰청은 마피아 수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팔레르모 검찰청의 수사 부서에 합류한 지오반니 팔코네 검사는 반마피아 연합을 구성했던 체사레 테라노바 판사를 뒤이어 동료 파올로 보르셀리노와 함께 마피아 수사에 뛰어들었으며, 로코 치니치 판사가 비밀리에 구성한 반마피아 치안판사 그룹에 합세하여 마피아 핵심인물들에 대한 기소장을 준비한다. 이들은 헤로인 밀매와 500여건의 살인 등의 혐의를 적용해 다수의 마피아 조직원들을 막시 재판(Maxiprocesso)에 회부하여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의 존재를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각인시킨다. 재판 이후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 소속 코를레오네시 패밀리의 수장인 살바토레 리나는 팔코네 검사를 폭사시키고 보르셀리노 검사를 팔레르모에서 암살하며 보복을 개시하였다. 팔코네와 보르셀리노의 사망 소식에 국민들은 분노에 휩싸였고, 그들의 장례식 현장에서는 대규모의 반마피아 시위가 발생하였다. 정부의 대대적인 수사 끝에 1980년에 검거된 살바토레 리나는 재판에서 52명의 살해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베를링구에르의 고세율 정책에 반발한 사회당이 연정을 탈퇴하면서 그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기민당과 공화당은 베를링구에르를 실각시키고 알도 모로를 총리로 추대한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코시가 총리를 거쳐 기민당 내 파벌 대립이 극심해졌고, 1982년 총선에서 기민당이 221석, 공산당이 218석을 확보하며 양당 간 의석 차는 더욱 좁혀지게 된다. 기민당에서는 알도 모로를 위시한 좌파 세력이 몰락하고 당내 우파인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대표로 선출되었지만, 거국내각을 번복하지는 않았으며 총리 투표에서 베를링구에르를 신임하기로 결정한다.

2차 베를링구에르 정부의 외교는 서방국과의 관계를 증진하고 소련과 거리를 두는 등의 유럽공산주의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1980년에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발발하자 그는 소련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파리에서 열린 국제공산당대회에도 참가하지 않으며 소련 공산당과의 결별을 예고하는듯 보였다. 베를링구에르는 1981년, 폴란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당시에도 소련 공산당의 야망이 절정에 달했다고 맹비난하였다. 그러나 중국과 쿠바를 방문하여 타 공산국가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겠다 선언하기도 하였으며,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다니엘 오르테가,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차례로 예방하며 민족 운동가들을 지지하는 스탠스를 취하였다. 그는 나토의 주도로 이탈리아에 순항미사일을 배치하는 안건에 반대하였으나 나토 탈퇴에 관해선 절대 부정하였다.

베를링구에르 정부는 토지개혁을 추진하였다. 토지주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해 부정혐의가 발각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이를 국유화하였다. 위 개혁은 주로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미개간지까지 합산하면 5~30 헥타르의 토지가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또한 유아원과 초등학교의 무상급식을 추진하였고, 시청마다 급식납품업체를 감찰하는 부서를 설치하게 만들어 자격 검토를 거친 업체만이 급식을 납품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자동차 제조업체 피아트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24,000명의 직원에게 정리 해고를 통보하자 노조는 회사 출입구를 봉쇄한 채 곧바로 투쟁에 가세하였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파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으며, 베를링구에르도 우려를 표하며 피아트에 해당 조치를 반려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해고 당한 2천여명의 피아트의 임직원들도 초기에는 정리해고에 반발해 투쟁에 동참하였으나 35일 동안의 긴 투쟁에 지쳐버렸고, 아무런 소득도 없는 파업을 수시로 남발하는 노조에 불만을 가져 루이지 아라시오 부장의 주도로 '4만명의 행진' 이라는 반노조 시위를 전개하며 노조가 회사와의 협상에 돌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여론에 당면한 노조도 파업을 철회하고 피아트와의 합의를 시작하였다. 피아트는 해고 절차를 중단하였지만 시급을 현금으로 지급한다는 합의안을 도출해 피아트 측에 상당히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결과를 낳았다. 위 사건은 이탈리아의 노동운동 역사상 중산계층과 노동계층이 분열한 첫 사례로 언급된다.

사건의 여파로 공화당이 연정을 탈퇴하고 기민당은 베를링구에르 정부에 대한 신임을 철회하기에 이른다. 결국 베를링구에르 내각은 1984년 2월에 총사퇴한다. 공산당의 알레산드로 나타 서기장이 총리에 취임하지만 기민당의 사퇴 압박으로 그의 내각은 출범 6개월만에 단명한다. 후임 정권은 기민당의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이어받는다.

1차 안드레오티 내각은 공산당 의원들을 내각에 기용하며 거국내각을 유지시켰으나, 1985년 총선에서 기민당이 대승을 거둔 이후로 안드레오티는 2차 내각에 들어서 거국내각을 해산하고 '펜타파르티토(Pentapartito)' 라 불리는 기민당-사회당-민주사회당-공화당-자유당 5당 연정을 구성한다. 이 연정은 1972년 이후로 가장 거대한 규모의 비공산 연대였으며, 기존 정부의 정책을 대거 수정하고 국가주도의 계획경제를 철저히 배격한다. 대외적으로는 친유럽주의적인 성향을 보여 유럽연합의 대통합을 이끌어내었으며,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촉구해 서방과 중동 간 갈등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외교적 충돌을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드레오티는 신자유주의적 경제공동체의 설립을 대폭 지원하였지만 유럽국가들의 경제 건설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기금(ESF+)과 지역개발기금(ERDF)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후 그는 유럽연합 주도의 단일시장을 제안하였으나 일부 유럽국들, 특히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기도 한다. NATO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증진시킴과 동시에 탈냉전 기류에 발맞춰 이탈리아-소련 간 민간교류를 활성화하는데 성공한다.

안드레오티 내각은 다양한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1986년부터 65세 이상의 시민들이 사회연금을 수령할 수 있도록 하는 건강보험을 확대하였으며, 1987년부터는 이를 공적연금으로 대체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안드레오티는 교황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탈리아-바티칸과의 외교 관계를 재조율하고 교황과의 협의를 이끌어내 이탈리아 공립학교 내에서의 종교교육을 학생 개인의 선택사항으로 만듬과 동시에 교황이 1971년 당시 제정된 이혼법을 수용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또한 주택 계획을 수립해 공공주택을 마련하고자 지역정부에 자금을 제공하고, 민간 주택에는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시간제 농업 근로자에게는 가족 수당을 확대 지급하였고, 위에서 언급한 유럽연합 지역개발기금을 마련해 농촌 중심의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상당한 혜택을 안겨주었다.

안드레오티는 당시 기민당 당권을 쥐고있던 치리아코 데 미타의 권력에 대항하는 CAF(Craxi(베티노 크락시)-Andreotti(줄리오 안드레오티)-Forlani(아르날도 포를라니)) 파벌을 조직하여 기민당과 사회당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으며, 안드레오티가 사퇴한 이후 1989년에는 사회당 당수 조르지오 벤베누토가 총리직에 올라서기도 한다. 벤베누토는 전임 수장이자 얼굴마담이었던 베티노 크락시의 후임으로써 그의 정치노선을 표방한 크락시즘을 내세워 환경주의, 복지국가, 민영화 및 경제 자유화를 제창한다. 그는 방송업계를 대상으로 민영화 작업에 착수하며 이탈리아 내 언론 사업이 확장되는데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마니 풀리테

1992년에는 사회당 경리국장이었던 마리오 키에사가 이탈리아 검찰에 의해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된다. 이에 사회당은 키에사와 거리를 두며 그를 악당이자 기회주의자로 몰아가는데, 배신감을 느낀 키에사가 사건에 연루된 사회당 동료들을 대거 고발하면서 수사 범위가 비대화되자 검찰의 주도로 마니 풀리테(Mani pulite, 깨끗한 손)라 불리는 대대적인 부정부패 수사가 전개된다. 이듬해에는 사회당의 전 당수 베티노 크락시가 뇌물 및 횡령 혐의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기민당의 당수 아르날도 포를라니 또한 동일한 혐의로 인해 징역형을 선고받고 총리직에서 사퇴하자 연립정권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 총리로 선출된 베니아미노 안드레아타는 혐의자들을 모두 당에서 축출하며 쇄신을 단행하였으며, 사회당 또한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을 요직에서 해고한다. 공산당 또한 다수의 밀라노 지부 당원들이 기소당해 지도부가 분열 직전까지 내몰렸다. 하원의원의 2분의 1이 기소당할 정도로 사건의 파급력이 상당한 것을 실감한 정치권은 정부에 하원 해산을 제안하였고, 이를 수용한 안드레아타 총리가 1994년 9월 24일, 의원 과반수의 찬성과 국왕의 서명을 통보하며 하원을 전격 해산한다. 마니 풀리테 이후로 쥐트티롤과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지역주의 정당들이 득세해 분리독립이 벌어질 조짐을 보였으나 중앙 정부가 친소수민족 정책을 펼치면서 큰 세를 얻지는 못한다.

이후

이후 치뤄진 조기총선에서는 마니 풀리테의 여파로 기민당을 위시한 연립정부에 실망감을 표한 대중들의 표심이 대거 야당으로 옮겨간다. 기민당을 제치고 47.9%의 득표율을 기록한 공산당은 제1당으로 등극하며 급진당, 행동당과 함께 좌파 연합(Unione di sinistra)을 구성해 연립정부를 출범시킨다. 총리로 취임한 마시모 D' 알레마 공산당 서기장은 베를링구에르 총리가 신임했던 저명한 정치인이었으며, 그도 베를링구에르의 노선을 따라 적극적인 수정주의적 면모를 보였다. 일례로 그는 공산당을 기존 극좌 정당에서 당 강령에 민주사회주의를 수록함으로써 일반적인 좌파 정당으로 변모시켰다. 당의 우경화를 반대한 일부 계파가 탈당하기도 하였다. 알레마 정부는 정치 세력이 대중매체 사업에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법률안을 마련하고, 그들의 지배 아래 분열되어 있던(RAI 1: 기민당 지원, RAI 2: 사회당 지원, RAI 3: 공산당 지원) 국영방송사 RAI의 채널을 일원화해 정치인들의 사주를 받던 언론재벌들의 득세를 막는데 공헌한다.

알레마 정부는 지방선거에서 기민당에 참패한 책임을 지고 1997년에 정권을 월터 벨트로니에게 승계한다. 벨트로니 정부는 알레마 2차 내각부터 성립된 공산당-급진당-녹색연맹이 연립하여 구성했던 녹색좌파연합을 그대로 신임하며 무난히 총리직을 수행하지만, 공산당 관료들의 뇌물 스캔들이 연달아 밝혀지자 1999년 총선에서 패배하며 기민당에게 정권을 그대로 내주게된다. 기민당은 전후세대를 몰아내고 청·장년층 주도의 새로운 지도체제를 구축하며 유권자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기민당 내에서 우파로 대표되는 오스카 루이지 스칼파로, 피에르 페르디난도 카시니가 실권을 차지한다. 이들은 은행과 보험부문을 시작으로 민영화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으며, 3개의 이탈리아 주요 은행인 Credito Italiano, BCI, BNL과 최대 보험회사 INA를 이탈리아 주식시장에 상장에 민간에 매각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약 700억 달러 규모의 매각이 성사되었으며, 신규상장과 비상장 매각이 실현되었다. 또한 유럽연합의 규제 준수 및 비경쟁적 부문의 자유화를 위해 자연독점적 산업의 민영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2002년에는 Mediocredito Centrale에 대한 지분 100%를 민간에 매각하여 금융권 공기업을 모두 민영화하여 정부는 이탈리아 국민총생산의 2.3%에 해당하는 거액의 수익금을 확보한다.

카시니 정부는 2004년 총선에서 기민당이 공산당에게 근소한 차로 제1당을 빼앗겨 몰락하였고, 피에로 파시노 공산당 서기장을 필두로 연립내각이 구성된다. 그러나 공산당 내부에서는 좌우대립이 극심하여 분당 위기까지 몰렸고, 당시 연립정당인 급진당이 자유주의 돌풍에 힘입어 역대 최다 의석을 확보해 당세가 확장된 만큼(54석) 집권 1년만에 급진당의 프란체스코 루텔리에게 정권을 양도한다. 루텔리는 중도주의를 표방하며 타 정당들과 의견을 조율해가며 정책을 이행하려 하였다. 2006년 코소보 전쟁 당시 NATO군의 세르비아 방송국 폭격에 크게 반대하기도 하였다.

루텔리 총리의 포용정책에 반발하였던 공산당 지도부는 루텔리 정부에 대한 신임을 철회하겠다며 맞불을 놓으며 급진당을 압박하였다. 결국 파시노 서기장이 다시 총리로 복귀하지만,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계기로 대침체가 이탈리아를 강타하자 파시노 정부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도가 크게 하락했고 기민당이 사실상 정권을 찬탈하며 단명한다.

카시니 3차 내각이 들어섰지만 기민당 내 좌익 세력의 수장이었던 주세페 폴리니가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당권을 확보한다. 2011년에 총리로 취임한 폴리니는 사회당을 포함한 다수의 야당 인사들을 내각에 기용하며 중도민주연대(Solidarietà democratica centrale)를 구성한다. 위 연립정부는 세르조 마타렐라 총리가 사퇴할 때인 2018년까지 장수하였으며, 공산당도 신임을 공급하는 형식으로 기민당 내각을 인정하였다. 이후 공화당의 조르지오 라 말파가 총리로 등극함과 동시에 기민당은 공산당에게 정권을 내어줄 위기에 처하지만, 어닝 서프라이즈와 샤이 지지층의 활약으로 지속적으로 제1당 지위를 유지하며 헤게모니를 쥐고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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