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식민지배가 남긴 유산들

한국의 성장에 대한 수많은 지론들이 있고, 그 중에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의도치 않게 한국의 경제발전과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필자는 한국의 성공비결중 하나가 일제의 식민통치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한국의 경제발전의 원인중 하나가 일본이 “서울”을 식민지 조선의 수도로 선택한 것이 한국의 경제발전의 원인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수도를 서울로 정하면서, 구 조선왕조의 관료집단과 향촌집단을 흡수하며 조선인이 식민지 경영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 글의 주요 논지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긍정하거나 정당화하는 글이라기보다는, 서울을 식민지 행정의 중심으로 낙점한 일제의 선택이 다른 피식민지배국들과 한국의 운명을 갈라놓은 이유중 하나라고 주장 하는 글입니다. 혹여나 오해가 있을까봐 쓰는 글입니다.

구미 국가들의 식민지 경영 방식

통상적으로 서구 열강등은 구 봉건왕조의 수도보다는, 식민지 경영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본국에서 이주한 사람은 소수인데 비해 지배할 민족이 많았으며 이들의 전통적인 경쟁관계와 갈등의 당사자가 되지 않으려 했으며, 본국에서 들어오는 물류를 빠르게 수령하고, 본국 주민들을 이주시켜 식민지 정치의 여론을 장악하며,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하여 근대 행정을 쉽게 도입하기 위해서였죠. 인도든 아프리카든 아메리카든, 서구 열강은 본국에 체제와 똑같은 체계를 가진 근대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도로망을 구축해 가면서, 압도적인 경제의 힘으로 지방들을 개편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인도의 도시인 캘커타(콜카타)인데, 원래는 작은 마을이었던 이 곳을 1690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이곳에 상관을 세우면서 도시로 발전되었으며, 또 1772년에는 영국령 인도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후 영국령 인도의 수도로써 엄청난 발전을 구가했고, 인도 제국이 세워진 후에도 인도 제국의 수도이자 인도 제 1의 도시로 기능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죠

영국 통치 하에서의 인도의 왕족.jpeg

구미 열강들이 길과 인프라를 새로운 신도시를 중심으로 구축해 나가는 것과 별개로, 구미 식민제국은 기존에 존재하던 지방의 봉건 세력들의 지배력과 통치를 일부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대신 협조를 얻는 식의 정치적인 협상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식민지배 초기 영국인들은 인도인의 생활과 종교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인도는 단순히 경제적 이용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중적 구조에서는 피지배 민족이 근대 관료체계에 편입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특히 인도의 봉건 체제는 영국의 식민 행정과 공존했습니다. 영국의 통치 아래에서는 인도 아대륙의 거의 1/3을 구성하는 약 560개의 소왕국들이 분포되어 있었고 그들은 독자적 법과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들의 크기는 상당한 수익을 창출하는 큰 영토부터 작은 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영국의 통치 아래에서 그 왕국들은 위계적으로 배열되었고, 병사들 수가 이들의 위계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게다가 인도라는 거대 시장의 매력을 알아가게 된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통치하고 인도인을 서구화하기 위해 인도 고유의 종교와 문화를 무시하기 시작했을때, 영국 정부는 인도인들의 격렬한 무장투쟁(세포이 항쟁등)에 부딪치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영국은 인도에 대한 서구화 정책을 버리고 인도인의 관습을 존중한다는 명목 하에 내부의 종교라는 차이를 활용해 교묘히 인도인들을 스스로 갈등하고 대립하도록 부추키기까지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서구 식민제국의 대다수는 근대적 사회와 봉건 사회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고, 서로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던 조심스러운 관계였습니다. 개척민 중심의 식민지가 아닌 피지배-지배층이 나누어져있었던 서구 식민제국의 대다수에서는 봉건 세력과, 근대 관료세력은 서로를 포섭하거나 굳이 통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면 오히려 간섭이나 통제, 흡수보다는, 민족과 종교그룹의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이들을 이간하여 분열시켜,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 하기까지 했습니다.

서구와는 달랐던 일제의 식민지 경영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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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처음에는 구미를 본받아 부산에 일본인을 대거 유치시키고, 부산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며 식민지의 중심지로서 염두했던것 같습니다, 아니면 일본 자체의 수도를 조선으로 옮기는것등을 고려한듯 하지만, 이와 같은 시도는 3.1운동 이후에 쏙 들어가게 되었는데, 조선은 향촌 시스템이 500년간 잘 구축된 나라였으며, 인도와 같은 분열된 식민지와 달리, 중앙의 지시가 의외로 산골 구석구석까지 전달되는 사회였던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서울에서 일어난 3.1 운동이 향촌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을 어떻게 뒤집어놓는지 직접 체감하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오죽하면, 조선에 어떠한 정책을 추진할때마다, 3.1 폭동을 잊엊느냐고 일본 내부에서도 반발이 나올 정도로 말입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행정체계를 새로 구축하기보다는 조선의 시스템을 근대식으로 다듬어 쓰는 노선을 확정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제는 서울의 여론을 장악하고, 식민지 경제와 행정을 망라할 도시를 구축해야 했습니다.

일제의 새 노선은 소위 향촌 구슬리기라 부르고 “문화 통치”라는 방식이었는데, 일제의 타깃은, 조선왕조에게 불만을 품고 일제에 협력했던 관료층이었던 중인 계층에 문화 통치라는 이름 아래에, 각종 특혜와 문화 생활등을 보장하며, 서울의 여론을 장악하는 동시에, 향촌을 구슬려 조선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특히 “중앙집권국가”였던 조선의 시스템은 근대적 행정을 막 확립하기 시작했던 일본에게 있어서 상당히 매력적인 통치수단이었다. 특히 일본은 1910년 병합 이후에도 대한제국의 기관등을 축소계승하거나, 자문을 듣는식으로, 대대적으로 행정을 개편하기보다는 보완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조선 8도 시스템이었는데, 일제는 이것을 거의 손대지 않고 고치며 보완을 거쳤다. 3.1운동 이후 구 조선의 관료층과 향촌세력은 식민지 경영을 위해서 반드시 구슬려야 할 계층이 되었죠.

일제는 기어히 1940년 10월 식민지 주민을 총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해 기존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확대·강화하여 발족시키는 것을 계기로 학무국에서 관장하던 국민총동원 업무를 관방으로 이속시킴과 동시에 본부와 각도에 국민총력과를 신설하였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10호를 1개 반으로 구성하는 애국반체제로 전 조선을 재편함으로써 식민권력이 중앙에서 촌락의 개별호에 이르기까지 ‘침투’할 수 있는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하기까지 합니다. 조선의 행정 시스템을 계승한 일제 시대의 사회통제 시스템은 일본 본국과 만주국에 비해서 조선 수탈을 더 효율적으로 악랄하게 했던 비결이기도 하였으며, 국내에서의 저항운동을 빠르게 소멸시킨 비결이 되었습니다.

일제는 향촌과 지주층을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식민지 조선의 든든한 힘이 되었고, 중인계층은 국내 지식인의 여론까지도 바꾸는데 성공하여,1차 대전 전승국인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에서 즉각적인 독립을 획득하는 것을 어렵다고 판단이 되자 독립의 전 단계로 인식되었던 ‘자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일제시대 후기, 국내 지식인들의 대다수 여론이었던 “조선 독립”에 “조선 자치론”이 고개를 들 정도로 상황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관료제도는 근대 국가들 수준으로서는 최고였다

조선인은 식민지 경영의 주요 주체였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경제학자 다런 아세모글루와 하버드대 정치학자 제임스 로빈슨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라는 공저에서,정치적 의사 결정 및 소득 분배 과정에서 사회의 대다수를 배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착취형 정부 구조(extractive institutions)는 국가 실패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주요 행정이 본국인에 의헤 세워진 도시에서 본국인에 의해 돌아갔던, 구미 식민지들이 독립한 후 본국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후, 근대 행정에 편입되지 못하고, 통치행위에 참여하지 못했던 피식민지 사람들은 국가를 경영할 노하우와 제도에 대한 이해, 통제력등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행정적 무능과 국가 운용능력의 부재, 무력의 공백은 내전과 정치적 혼란을 낳았고, 그 결과 그들은 실패국가의 운명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배를 경험한 조선은 달랐습니다. 일제 통치하에서 조선인은 일본인 못지 않게 식민지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조선인은 일본의 식민 경영의 주요 주체였으며, 1943년 당시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의 관리수는 총 8만 966명이었고 일본인 4만 7153명, 조선인 3만 3813명으로, 조선인의 수가 40%에 달했습니다.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던, 지주와 지방 행정을 관할하는 하급 관리를 감안하지 않은 숫자입니다. 이는 상당한 수의 조선인이 일본의 식민 경영에 참여하고 협력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외에도, 지주층과, 관료층이 적극적으로 식민 지배의 협력자와 가해자로서 활동했다는 정황적 증거는 많습니다. 크게로는 북한이든 한국이든 민족반역자 청산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고 그대로 기용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중국 공산당이 도시민들과 애국적 자본가들을 지지층으로 끌어모으려 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김일성과 같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수기와 증언에서 일률적으로 지주층과 자본가층을 일본에 협력하는 적대세력으로 규정하며 적대심을 드러내었던 것, 그리고 이에대한 조선인들의 적지 않은 호응을 보았을때,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지주와 관료층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지배한 36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일제는 조선인이 조선인을 지배한다는 근본적 사회구조를 바꾸지 못했고, 그 이면에는 3.1 운동이라는 민족적 항쟁과 관료 네트워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은 맨손에서 시작한건 아니었습니다. 신생 국가였던 대한민국은 일제가 다듬은 민법이 있었고 형법이 있었고, 상법이 있었으며, 일제의 민법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대한민국은 반일과 용서를 내세워 일제가 계승하고 키워놓은 관료층과 향촌세력을 쉽게 흡수했으며, 미군정의 협조와 국민들의 지지아래 전국을 저항없이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한국인이었고, 조선조의 향촌 계층의 후예였으며, 전국의 여론을 그들이 주도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던것 같습니다. 일제에 의해 주권이 넘어갔을지언정, 조선조가 구축하였던 사회 시스템은 더욱 강화되었고 보완되었던 씁슬한 상황이라 해석해야 할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해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