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키타이

카라키타이 울루스
Qara-Khitai
Хар_хятан_улс
大契丹
1800px-Flag of Kara Khitai.png 848px-Coat of arms of the Kara Khitai.png
카라키타이 국기 카라키타이 국장
국가언덕 위에 핀 철쭉
World blank map.png
영토
수도알마티
역사
소비에트 연방으로 부터 독립1991년 8월 31일
 • 카라키타이 성립1993년 8월 31일
지리
면적약 794,633㎢
시간대KGT (UTC+5~+6)
인문
공용어거란어
지역어러시아어, 키르기즈어,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인구
2019년 조사18,897,247명
인구 밀도약 23.78명/㎢
경제
GDP(PPP)2019년 어림값
 • 전체$약 1,571억 (101위)
 • 일인당$8,318
GDP(명목)2019년 어림값
HDI0.754
통화카라키타이 솜 (QKS)
기타
ISO 3166-1417, QK, QKT
도메인.qk
국제 전화+996

카라키타이(거란어:Хар_хятан_улс)는 8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는 국가이며, 수도는 알마티이고, 공용어는 거란어이다. 중앙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다민족국가이다.

지리

카라키타이는 내륙국으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중국과 국경을 접경하고 있다.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카라키타이의 국토는 지역별로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가지고 있다. 타지키스탄, 중국과 접하는 카라 키타이의 동남 지역은 해발 3000m가 넘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물이 많고, 온화한 평원 지역에 동남권 인구가 집중되어 있으며, 이 지역은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 지중해성 기후에 속해 있다. 중국과의 국경에는 천산 산맥이 펼쳐져 있고,남쪽의 타지키스탄과의 국경에는 파미르 고원이 위치한다. 고산 기후의 동부 산지에는 7,439m의 포베티산과 6,995m의 칸·텡리 봉 등 거친 고산이 존재한다. 시르다리야 강이 국토를 지나 아랄 해로 흘러들며, 이식쿨 호수와 발하슈 호수 등 거대한 호수들이 자리잡고 있다.

오트라르에서 발하슈 호수 일대까지 펼쳐져있는 카라키타이 중부는 광활한 평원으로 이뤄져 있으며, 옛날부터 대초원을 중심으로 한 유목이 발달했던 지역이다. 초원지대는 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지며, 총 면적이 804,500㎢로 세계에서 가장 큰 초원지대이다. 초원지대는 대륙성 기후에 속하며, 겨울에 춥고, 여름에는 더운 날씨가 일년 내내 이어진다. 연평균 강수량이 250㎜,산악지대는 450㎜에 이르며, 서부의 사막은 비가 적게 내린다.

카라 키타이 서부는 키질 쿰 사막과 아랄 쿰 사막 등 사막 지대로 이뤄져 있다. 아랄쿰 사막은 비교적 근래에 형성되었다. 한 때 세계 4위의 면적을 가진 호수였던 아랄 해는 1960년대부터 대규모 면화 재배를 위해 아랄 해로 들어오는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의 물을 중간에 차단하고, 관개용수로 사용한 이후부터 강물의 유입이 해마다 줄어들면서 급격히 작아져버렸다. 호수로 들어오는 물이 줄자 염도가 3배 이상 높아지고 수량이 70% 이상 감소해 작아지면서 철갑상어와 잉어 등 토착 어종이 멸종했으며, 어업으로 번성하던 주변 어민들은 생계를 잃게 되었다. 아랄쿰 사막 일대는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이가 극심하며, 비도 적게 내려 인근의 농토도 황폐화되었다. 현재는 카라키타이 정부가 우즈베키스탄과 제휴하여 아랄 해를 복구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2019년 현재는 아랄 해가 더 이상 감소하는 것을 막고, 해수도 많이 늘려놓은 상태이다.

문화

카라키타이는 다수민족인 거란족이 전체 인구의 65%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을 정도로 복합민족적인 국가이다. 키르기즈인들이 12%로 소수민족 중에서는 두번째로 많으며, 카자흐, 러시아, 우즈베크, 후이족, 위구르족, 여진족, 고려인 등의 소수민족들이 전국에 고루 분포한다.

거란족은 과거 동아시아의 요하 강 유역에 거주하던 민족으로, 요나라가 여진족에게 멸망한 12세기부터 몽골제국 치하인 14세기까지 대대적으로 중앙아시아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거란어는 몽골과 일맥상통하는 동호어 계열의 한 갈래로 몽골어와 근원이 같다. 거란족이 통일하여 요를 세우기 전까지 거란족들은 문자가 없었다. 920년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창제한 거란 문자는 대자와 소자로 이뤄져 있었고, 현재에는 몽골 문자와 키릴문자에 밀려 사용되지 않는다.

거란족은 역사적으로 몽골족, 퉁구스족, 한족 등과 어우러져 지내왔기에 이들과의 관계가 밀접하며, 생활 및 문화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거란족 남자는 여름에 흰색의 천으로 된 마고자를 입고 겨울에는 솜이 든 옷 또는 가죽 도포 등을 입는다. 보통 말 타기에 편리하도록 아래 부분에 트임이 있는 델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옷깃과 모든 가장자리에는 팔보문으로 선 장식을 한다. 남자들은 여름철 밀짚모자를 쓰거나 이마 부분에 흰 천 조각을 수수하게 묶어 장식한다. 겨울철에는 귀 덮개가 달린 가죽 모자를 쓴다.

여성들은 오른쪽으로 여미는 델 위에 조끼를 착용하는데 축제에는 여러 색으로 수놓은 명주, 비단으로 만든 큰 옷 위에 조끼를 입는다. 머리는 틀어올려 꽃으로 장식하며, 꽃문양을 수놓은 비단신을 신는다.

거란족은 전통적으로 일부일처제의 혼인습속을 이어왔는데, 전근대에는 자식이 없을 경우 첩을 두기도 했지만 모든 권한은 본부인이 가지고 있었다. 결혼결정은 부모에 의해 결정되었고, 특히 부계가 같은 친족과는 결혼하지 않는 족외혼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거란족은 다른 민족과의 통혼율도 59.3%로 높아 점차 민족간의 구분도 허물어지고 있다.

거란족 사회는 노인을 공경하고, 서로 도우며 손님을 환대한다. 장례는 토장 풍습을 지켜왔는데 화장이나 풍장을 하는 비중이 늘고 있다. 망자는 씨족 묘지 또는 가족 묘지에 묻으며, 북에서 남으로 먼저 선대를 묻고 그 다음 세대를 묻으며 같은 항렬에서는 형이 왼쪽, 동생이 오른쪽으로 배열된다. 거란족은 과거 중국을 지배하던 시대의 영향으로 전통명절도 중국을 닮아있다. 원소절, 단오절, 중원절, 중추절, 제석 등이 있다. 다만 중국의 춘절은 아열절로 독자적으로 발전했는데 거란족이 중시하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종교

고대에 거란족은 유목민들의 원시적 다신교였던 샤머니즘을 신봉하였다. 다만 요나라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거란 지역에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918년에는 상경임황부에 사찰들이 지어지면서 불교가 거란족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요 성종 이후부터는 요나라 황제들도 불교를 숭상하면서 불교는 거란인 다수가 신봉하는 종교가 되었다.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요를 멸망하면서 거란족 유이민들이 중앙아시아에 서요 정권을 세운 이후,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거란인들은 한동안 불교를 숭상하였다. 하지만 당시 서요 인구의 다수는 이슬람을 숭상하는 투르크인들이 다수였고, 지배계층인 거란족에게도 이슬람 교도가 늘어났다. 몽골 제국이 서요까지 세력을 넓히면서 서요의 왕실이 차가타이 왕조로 대체되었다. 거란족이 믿던 불교는 본디 화엄종이 우세했으나 몽골의 영향으로 점차 티베트 불교로 대체되었다. 또한 중원에 거주하던 거란족 및 기타 여러 종교를 숭상하는 민족들이 원나라의 내분을 피해 이주해오면서 중앙아시아는 종교 구성이 매우 다채롭게 변모했다.

현재 카라키타이의 주요 종교로는 티베트 불교와 이슬람교, 러시아 정교회, 탱그리 샤머니즘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다. 만호와 소수민족마다 신봉하는 종교도 다르며, 다수라고 할 만한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카라키타이의 공업은 채광과 야금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주요 천연자원은 원유와 천연가스, 우라늄 등이며, 동부의 산악지대에는 물이 풍부해 물이 부족한 인근 국가들에 수출하고 있다. 중부의 대초원에서는 1950년대 이래 많은 토지들이 개간되어 밀, 보리, 옥수수 등의 곡식을 생산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실크로드의 중심에 있었던 역사성에 기인해모직과 견직 산업, 세라믹 타일 제조기술이 발달했다. 또한 유목 문화에서 기인한 목축업 및 유제품 생산도 꾸준히 이뤄져 왔다. 최근부터는 정부의 육성책에 힘입어 화학공업과 기계공업의 발달도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카라키타이는 지난 몇 년 동안 연간 3~4%씩의 성장세를 보여 왔으며, 이는 40년 동안 발견된 유전과 가스 및 광업 산업의 발전에 기인한 것이다. 동시에 카라키타이 정부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를 포함하여 경제 협력 개발기구(OECD) 국민들에게 비자 면제를 제공했다. 관세제도를 살펴보면 2018년 1월부로 카라키타이 관세법이 개정되면서 카라키타이의 통관 시스템은 전자통관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복잡한 서류 행정절차가 폐지되었고, 서면으로 진행하던 통관 과정들이 모두 온라인으로 바뀌었다. 신관세법의 효과로 통관에 소요되는 시간이 4시간 가량 단축되었으며, 수입업체가 관세를 바로 납부할 수 없는 경우 분할 납부가 허용되거나 6개월을 초과할시 이자를 내는 조건으로 완납을 미룰 수 있는 제도도 시행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자본 유입과 경제 성장이 증가하여 카라키타이는 2018년 7개월동안 약 67억 달러의 해외 직접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으며, 작년과 비교해서 지표는 244% 증가했다.

'순금'을 뜻하는 솜은 카라키타이의 화폐단위이다. 1993년 5월 10일, 카라키타이 중앙은행은 10, 100, 500, 1000 솜 동전을 발행했고, 1000, 2000, 3000, 5000, 8000솜 지폐를 발행했다. 2014년 초 러시아 루블 가치 하락의 영향을 받아 평가절하되었다. 2019년 상반기 연금 및 임금 인상에 따라 민간 소비가 확대되었으나 카라키타이 솜화 가치 하락에 따라 저출 및 인플레이션율이 소폭 증가했다. 카라키타이의 1인당 GDP는 2019년 8,318$로 집계되었다. 이는 2017년 7,924$라는 수치에 비해 상승한 것이며, 이러한 실질GDP 성장은 2차 산업 부분에서 견인된 것으로 알려진다.

행정구역

거란 행정구역.png
카라 키타이의 행정단위로 8개의 주가 존재하며, 하위개념으로 도시 및 만호 단위로 지방자치단체가 구성되어 있다. 8개의 주는 다음과 같다.

-알마티 주
-이식쿨 주
-추이 주
-탈라스 주
-오시 주
-잠빌 주
-오트라르 주
-키질-오르다 주

역사

거란의 기원

MongolHuntersSong.jpg

거란에 관한 언급은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거란의 기원으로는 훙노 기원설과 동호 기원설이 존재하며, <위서>에서는 흉노인 우문부에서 분기되었다고 기술되어있고, <구오대사>에서는 거란이 옛 흉노의 종족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반면 원나라 대에 저술된 <요사>에서는 거란이 동호에서 기원했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거란이라는 명칭은 거란인 스스로가 부른 명칭이었다. 우문부에서 기원한 고막해에 복속되어있던 거란은 388년 북위의 정벌로 고막해가 멸망하자 분리되었고, 반세기가 지나면서 안정화하여 북위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378년 거란이 고구려를 공격해 8개의 부락을 빼앗았다고 한다. 6세기 중엽까지 거란은 고팔부의 연맹 단계로 존재하고 있었다. 고팔부는 외적의 침략을 공동으로 막기 위해 조직된 느슨한 부족 연맹이었다. 당시의 거란은 이웃 세력들에 비해 매우 약소했다. 동쪽에는 일찍이 봉건화를 이뤄 경제와 문화가 발전한 고구려가 있었고, 서쪽에는 초원을 통일한 유연이 있었다. 북부에는 거란과 비슷한 계통의 실위, 해 등의 세력이 존재했다. 479년 고구려가 유연과 연합해 세력을 넓히자 위협을 느낀 거란인들은 북위 효문제에 귀순하였고 다링강 유역으로 이주했다. 553년 돌궐이 유연을 멸망시킨 뒤 거란을 공격하자 거란은 돌궐에 복속되었으며, 나머지 1만 호는 고구려에 귀순했다. 돌궐이 동서로 분할된 584년에 거란은 돌궐로부터 독립하였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던 거란인들도 돌아왔다.

수말당초에 거란은 대하 씨족을 중심으로 연맹을 재조직했다. 당나라는 대하 씨족 부락에는 송막도독부를 설치하였고, 나머지부락을 영주도독부와 유주도독부에 예속시켜 거란을 통치했다. 당나라는 거란을 이용해 돌궐을 견제했는데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되면서도 때때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평정되는 일을 반복하면서 민족성을 지켜내었다. 730년 대하 씨족이 요련 씨족에게 밀려나 거란 연맹이 재편성되면서 거란과 당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요련씨 연맹은 연맹의 수장을 가한이라고 칭했다. 각 부의 수장은 이르건이라고 불렸다. 745년 거란은 당에 항복하였으나 평로절도사 안록산이 거란을 약탈하면서 거란은 다시금 반란을 일으켜 위구르에 의탁했다. 100년간 거란은 위구르에 특산품을 공납하고, 변방을 정찰하면서 연명하였다. 위구르에 복속된 기간 동안 위구르의 문화와 제도가 거란에 전파되어 사회 발전을 촉진시켰다. 유목 생활을 하던 거란은 원시적인 농업을 시작했으며, 철기주조기술도 발전하여 경제와 군사력도 커지기 시작했다. 씨족 연맹이 공고화하면서 부락 귀족이 형성되었고 노예가 등장했다. 840년 위구르 제국이 키르기즈에게 멸망하자 거란은 독립하게 되었다.

요나라의 성립

1000년경 요나라 영토

907년 거란 질랄부의 야율아보기는 요련씨를 대신해서 거란 연맹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실위, 해, 습, 토혼 등 이웃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난세에 개입하여 이극용, 유인공 등 세력과 동맹 또는 전쟁을 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912년부터 벌어진 거란 내부의 반란을 914년까지 완전히 제압한 야율아보기는 915년 부족장들을 숙청하면서 거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야율아보기는 왕족이었던 대하씨족과 요련씨족을 야율씨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씨족들은 소씨로 편성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916년 야율아보기는 정식으로 칭제하면서 국호를 거란으로 정하고 신책이라고 건원했다. 한족이었던 강묵기를 시켜 상경임황부를 건설해 수도로 삼았으며, 한자를 토대로 거란족 고유의 문자인 거란 문자를 창제했다. 돌궐, 당항, 사타, 나이만 등 몽골 고원의 부족들을 친정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켰고, 여진 부족들을 복속시켜가면서 동북 지역의 패권도 차지하였다. 936년 후당의 하동절도사 석경당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거란에 지원을 요청했다. 석경당은 칭신과 칭자를 청했을 뿐 아니라 연운 지역의 16개 주를 할양할 것을 약속했다. 936년 9월 야율아보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던 야율덕광은 중원으로 친정하여 후당군을 패퇴시켰다. 11월에 석경당이 제위에 오르자 거란은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매년 비단 30만 필을 공납받았다.

이로써 거란은 유주와 운중 일대의 넓은 농업 지역을 점유함으로써 국력을 발전시켰으며, 발해인과 한인을 국가의 주요 구성원으로써 부리게 되었다. 새로 얻어낸 16주의 통치제도는 바뀌지 않았고, 그대로 과거제도를 실시하면서 통치했다. 942년 후진의 석경당이 죽고 석중귀가 제위에 오르자 후진은 더 이상 거란에 칭신하지 않았고, 항거할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에 야율덕광은 군대를 일으켜 개봉을 점령했고, 석중귀의 항복을 받아 후진을 멸망시켰다.

947년 야율덕광이 직접 개봉에 입성해 중국식 의관을 착용하고, 중국식 예법에 따라 문무백관을 접견하는 등 중원을 통치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국호는 대요로 정해졌다. 하지만 당시 거란 군대는 군량과 마초를 보급한다는 명분으로 화북을 약탈하고 다녔는데 화북 전역에서 거란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결국 중원은 요나라의 통제를 벗어났다. 요태종 야율덕광은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체감했다. 이듬해 2월에는 하동절도사 유지원이 태원에서 칭제하고, 후한을 건립하였다. 이에 중국 각지의 절도사들이 거란 관리를 죽이고 후한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태종은 개봉에 입성한 지 3개월만에 북으로 철수했다. 거란 군대가 연운16주로 철군하자 후한은 과거 후진의 영역을 모두 장악했다.

무분별한 약탈과 학살로 중원 통치를 실패했던 경험을 얻은 태종은 개봉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및 민정과 군정을 체험하면서 중원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초보적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4월에 회군 중 태종 야율덕광이 병사하자 장자 야율완이 제위를 이었다. 요세종 야율완은 948년 유목민족의 세도가 뿌리박혀 있던 막북에 북원추밀사를 설치했고, 후진의 신하들을 연운 지역으로 보내 남면관 계통의 남추밀사로 임명하였다. 950년에는 이어 북면관과 남면관에 정사성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남, 북면관 직무의 담당과 역할이 명확해졌으며, 요나라 북, 남면 관제가 확립되었다.

요나라의 치세와 쇠망

요나라 시대 벽화

951년 반란이 일어나 세종이 피살되었다. 뒤를 이은 목종 야율경은 변덕스럽고, 주색에 빠져 살았으며, 통치기간 내내 가문의 세도를 넓히려는 거란 귀족들의 내분이 빈번해져 요나라의 질서가 불안정하게 되었다. 969년 행궁에서 요목종이 노비에게 살해당하여 그 아들 야율현이 뒤를 이어 경종으로 즉위했다. 경종은 어린 시절부터 겪은 반란과 암투 등으로 평생 정신질환에 시달려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982년에는 경종이 죽고, 그 아들야율융서가 즉위해 성종이 되었다. 즉위할 때 성종의 나이가 열두살에 불과해 귀족과 종실로부터 위협받았지만 성종의 어머니였던 예지태후 소작이 성종을 보좌하여 위기를 넘겼다.

예지태후의 섭정시기를 포함한 요성종의 치세는 거란과 한족 출신의 유능한 신료들이 기용되어 황권이 공고히 서고,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던 남북면관 통치제도와 전장 제도가 완비되어 생산력의 발전으로 이어진 요나라의 전성기였다. 경종 시기에는 과거제가 완비되었고, 한인 문사들은 물론이고, 포로나 투항한 자들 중에서도 인재를 망라해 관리에 임용되었다. 한족 한지고의 손자 한덕양은 대승상의 자리에 올라 여러가지 개혁들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는데 부세가 줄어들고, 법률이 정비되어 청탁을 차단함에 따라 요나라의 대내적인 통치 기반이 굳건해졌다. 대외적으로는 송과 화약을 채결해 세폐와 비단을 조공으로 받았으며, 고려, 고창회골, 서하 등을 굴복시켜 장기적인 평화를 이룩하게 하였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덕양은 왕에 책봉되고, 야율씨 성을 하사받았을 뿐 아니라 사후에는 황릉 옆에 배장되는 것까지 허용되었다.

성종 시기에는 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어 여러 차례 법령이 개정되었다. 노비의 범죄에 주인이 함부로 죽일 수 없도록 관부가 죄를 다스렸고, 거란인이 죄를 저질러도 타 민족들과 차별 없이 법률에 따라 처벌되었다. 983년에는 항소 제도가 생겨났으며, 994년에는 관리의 봉급을 백성들에게 거두던 관습을 중지하고, 내탕을 설치했다. 1012년에는 장자 야율종진이 태자가 되어 장자계승제가 확립되었다. 지방에는 5개의 수도가 설치되었고, 전국은 다섯개의 주로 나뉘었다.

1031년 성종이 죽자 장자 야율종진이 즉위해 흥종이 되었다. 흥종은 문예와 법리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높은 문화소양을 지닌 군주였다. 그는 성종에 이어 법률제도를 보완했고, 문치 방면에서도 발전을 이루었으나 불교에 지나치게 몰두하였고, 태후 소누근에게 구속되어 사치와 쾌락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소누근은 성종의 황후였던 인덕황후를 모함하여 제거하고 태후가 되었으며, 친인척을 요직에 등용했다. 1034년에는 황태후 소누근이 흥종을 폐하고 동생인 야율중원을 새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야율중원의 보고로 적발되어 유폐되었다.

야율중원은 정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유로 황태제가 되어 권세를 휘둘렀으나 1055년 흥종의 아들 야율홍기가 즉위하여 도종이 되자 1063년 병권을 쥐고 있던 야율중원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고 자살하였다. 야율중원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득세한 야율을신은 추밀사로 임명되어 황후 소관음을 사통 혐의로 무고하고, 보복이 두려워 태자를 다시 모함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야율을신의 도당이 황태자와 황후를 감옥에서 암살한 뒤 병사했다고 상주하는 지경에 이르자 요도종은 야율을신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7년만에 죄를 물어 야율을신을 처형했다.

요 황실 권력 암투의 격화와 부패한 정치는 요의 통치 역량을 약화시켰다. 여진 오국부와 부아리부에서 요의 통치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으며, 요나라의 남부와 동부에서도 잇따라 반요 투쟁이 벌어졌다. 1092년에는 조복의 추장 마고사가 대규모로 반한을 일으켰으며 요나라 서북부의 유목민들도 이에 고무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1100년 마고사가 사로잡힌 것을 시작으로 피지배 부족들의 반요 투쟁은 하나둘씩 진정되었다. 비록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전군을 동원하고서도 서하에게 원군을 빌려서 8년이나 걸려 반란을 평정했던 요는 각 부족들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모습이 되었으며, 여진과 몽골의 각 부족들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흥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진족의 흥기와 요나라 멸망

금태조 완안아골타

1101년 도종이 죽고, 그의 손자 야율연희가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이다. 천조제가 즉위할 무렵의 요나라는 이미 국운이 쇠하였다. 민족간의 사회 모순이 심각해졌고, 벌족주의와 뇌물정치로 유능한 관료와 장수들은 요직에서 배척되었다. 도종 시기 야율을신이 누명을 씌워 축출한 관료들은 재임용되지 않았고, 조정과 사회의 기강은 문란해졌다. 천조제는 이런 문제의 중요성을 몰랐을 뿐 아니라 대내외 정세에 관한 인식도 부족해 사냥에만 몰두했다.

천조제를 포함한 요 상류층이 사냥에 몰두하자 사냥에 사용하는 송골매의 수요가 높아졌는데 이는 여진족들에게서 충당했다. 요나라 관리들은 여진 부락에 파견되어 임의로 가격을 내리고, 재물을 끝도 없이 요구하면서 여진족을 능멸했다. 여진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은 파견갈때마다 부락을 수색하고, 명을 받들지 않는 부족장들을 매질하거나 죽이기까지 하였다. 관리와 수행원들이 대국의 명을 빙자하여 여진 부락에서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족장의 부인이나 딸, 처녀들을 잡아가 시침녀로 삼는 일도 빈번하였다. 여진족의 인구가 늘어나면 군대가 출동하여 부락을 습격해 아이들을 학살했으며, 여진 각 부족들의 반요 정서는 날이 갈수록 고조되었다.

요 중기 이후에 생여진의 완안부는 점차 강대해져 생여진을 통일하기 시작했다. 도종 시기에 아골타의 조부 오고내가 요를 도와 여진 오국부의 반란을 토벌한 공적으로 절도사에 임명됐다. 요 군대가 약체화된 것이 여러가지 정황상 확실해지자 자신감이 생긴 여진족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1114년 완안부의 추장 완안아골타는 요나라에 망명하던 경쟁 부족장 아소의 인도 요구를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요나라는 초반에 발해 유민들을 내세워 완안부를 방어하려 하였으나 대패하여 영강주가 완안부의 수중에 함락되었다. 천조제는 소사선을 도통으로, 소올납을 부도통으로 삼아 10만 군세를 주어 출하점에 집결하도록 명했으나 공을 세울 욕심이 앞서 여진을 얕보던 소사선은 출하점 전투에서 3,700명의 여진족 기병에게 대패하였다. 다른 요나라 장수들도 여진족 군대에 차례대로 괴멸되어 여진은 동북 변경의 강적이 되었다.

거란에는 여진족이 1만명 모이면 대적해낼 수 없다는 속담이 있었는데 여진이 출하점 전투를 끝냈을 무렵에는 완안부에 충성하는 여진족들이 늘어나 그 병력은 이미 1만명 이상 늘어났다. 여진을 평정하러 출동한 부대들이 전부 패하는 와중에도 천조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여전히 상국을 자처하면서 여진을 복속민으로 보았기 때문에 단지 사신만 파견하면 아골타가 항복할 것이라고 여겼다. 천조제는 아골타의 이름을 직접 들어 책망했고, 사신은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천조제의 믿음은 굳건했다. 아골타는 회신하는 국서에 야율연희라는 이름을 그대로 적어 항복하라고 응수했다.

1115년 완안아골타는 금을 건국하고, 수국으로 건원하여 황제가 되었다. 금나라군이 요나라의 동북 요충지이자 병마사가 있던 황룡부를 함락시켜 요 조정을 충격에 빠뜨렸다. 마침내 천조제는 70만 명의 군사를 모어 친정할 것을 선언했다. 천조제는 단순히 숫자를 앞세워 승전을 거둘 것을 확신할 뿐 내부적인 약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기가 오른 금나라 군대는 날리수에서 천조제의 친정군을 격파했고, 요나라 군대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야율장노 등 장수들이 반기를 들어 군을 이끌고 돌아가 천조제를 폐위할 것을 모의하는 사태마저 벌어졌다.

1116년에는 동경요양부에서 발해인들이 동경유수 소보선을 살해하고, 고영창을 중심으로 자립하는 일이 벌어졌다. 고영창은 스스로 대발해 황제를 칭하고, 융기라고 건원했다. 요의 재상 장림이 2만 군대를 모아 발해인들을 진압하려 움직였다. 고영창은 심주에서 패배해 동경으로 돌아왔는데 곧 금나라 군대가 당도하여 장림의 군대와 고영창의 군대를 격퇴하고, 동경을 함락시켰다.

요양이 금나라의 수중에 들어가자 요동과 요서의 주현들이 일제히 금나라에 항복했다. 그러나 천조제는 여진이 코앞까지 쫓아오면 송나라나 서하로 망명해 계속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생각했다. 1118년과 1119년 사이에 요와 금 양국은 잠시 휴전한 채 강화 협상을 진행했다. 금은 이때만 해도 요를 멸망시키려는 확고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실리를 얻을 목적으로 강화 협상에 임했다. 금은 요 황제가 금 황제를 형으로 부를 것과 금에 세폐를 바치고, 중국식 의례에 따라 금 황제를 책봉할 것을 요구했다. 요는 아골타를 동회국 황제로 책봉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마침 송-금 사이의 해상의 맹약이 채결되었고, 금나라는 요가 보낸 국서에 형으로 섬긴다는 말이 없고 대금황제가 아니라 동회국 황제로 책봉한 점 등을 들어 국서를 돌려보냈다. 9월에 요 사신이 새로 고친 책서를 가지고 다시 왔으나 아골타는 이미 기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전쟁을 재개했다.

이 때 천조제는 야율장노와 야율여도 등 장수들이 잇따라 배반하는 일이 발생하자 더이상 백관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천조제가 무고한 신하들을 사사하는 와중에 금나라 군대는 1120년 요나라 수도 상경임황부를, 1121년에는 중경대정부를 함락시켰다. 천조제는 협산으로 도망쳐 지냈는데 긴박한 상황에서도 사냥을 즐기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인심을 잃고 고립되었다. 1122년에는 야율대석, 소간, 이처온 등 신하들이 남경석진부(현재의 베이징)에서 천조제의 숙부 야율순을 황제로 옹립하고, 천조제를 왕으로 격하시켰다. 역사상 야율순의 정권을 북요라고 일컫는다. 북요가 연주, 운주, 평주, 요서 등을 차지함으로써 요는 둘로 갈라졌으며, 결과적으로 북요의 건국은 금군을 저지할 역량을 분산시키는 일이 되었다. 북요 건립자들은 송에게 화해 국면을 유지할 것을 요청하고, 금에게 휴전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송은 야율순이 즉위한 것은 반역이라면서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고, 북요는 송의 속국이 될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월에 야율순이 죽자 신하들은 그의 아내 소씨를 태후로 옹립해 구심으로 삼았다. 발해인 곽약사가 북요를 배신하고 송에 항복하는 등 열악한 상황에서 북요 정권은 동관이 이끄는 10만의 병력을 패퇴시키는 등 분투하였으나 11월에 아골타가 거용관을 함락시키고, 남경을 공략함으로써 북요 정권은 멸망하게 되었다. 1125년에는 천조제가 서하로 도주하는 길에 금나라 장수 완안누실에게 붙잡힘으로써 요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금나라

금나라 철부도 중갑

1123년 금태조 완안아골타가 죽고 동생 오걸매가 즉위해 금태종이 되었다. 금태종은 서하를 공격하여 서하와 군신관계를 수립했으며, 1125년 요의 천조제를 사로잡아 요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금나라는 연경 일대의 6개 주를 송에 넘겨주고, 천조제를 포획하면 대동 일대의 연운 지역까지 송에 돌려주겠다고 약조했다. 1123년 11월에는 무주와 삭주가 송에 인계되었다. 그러나 요의 천조제를 추격할 때 송나라는 기회를 틈타 이간술을 책동해 금을 배신하고 맹약을 위반했다. 금나라의 완안종망이 송의 밀사를 붙잡아 송이 배반한 물증을 확보하자 1124년 금태종은 조서를 내려 송을 공격했다. 1달이 채 지나지 않아 요나라에서 송으로 귀화한 발해인 장군 곽약사가 금에 항복했고, 1만명의 금나라 군대는 개봉의 코앞까지 다다르기에 이르렀다.

금은 송과 화의를 맺어 백부와 조카의 관계를 맺고, 위로금과 함께 중산과 태원 등의 화북 지역을 양도받아 철군했다. 금군이 철수하자 송군은 다시금 협의를 어기고 반격을 하여 융덕, 택주를 공격하며, 태원과 중산, 하간 세 도시의 할양을 거부했다. 동시해 야율여도 등의 요나라 잔당들을 책동해 금에 반항하도록 했다. 이에 금태종은 1126년에 다시 군사를 일으켰고, 하북 지역을 장악하고, 개봉을 공격했다. 1127년 2월에 송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혔고, 금나라는 송의 재상 장방창을 황제로 세우고, 국호를 초나라로 정하여 괴뢰로 삼음으로써 북송은 멸망했다. 금군은 개봉에서 나와 송의 황제 두 명과 종실, 문무백관등 1,000여 명을 압송해 북으로 돌아갔다.

1127년 송휘종의 아홉번째 아들 조구가 송 왕조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응천에서 송을 재건하였다. 이 국가를 사서에서는 남송이라고 부른다. 초의 황제로 옹립되었던 장방창이 남송으로 도주하여 초나라가 무너지자 금은 1130년 유예를 제나라 황제로 삼아 부용국으로 만들면서 남송을 재차 공격했다. 하북과 하동에서 한족들의 항금 투쟁이 일어났고, 송나라 포로들이 잡혀온 상경회령부에서도 반란을 꾀하는 시도가 벌어졌다. 남송 황제를 추격해 임안까지 진격하던 금군은 악비와 한세충 등 남송의 명장들의 반격으로 주춤하고 결국은 화의를 맺어 회하강 이북의 화북 지역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1115년 건국한 금은 13년만에 요와 송을 멸망시켰으며 황하강 일대의 중원 지역까지 지배하에 넣어 동아시아의 세력구도를 새로이 정비한 왕조가 되었다.

1114년 금태조 아골타는 여진족 300가구를 모극으로 하고, 10모극을 1맹안으로 구성하여 맹안모극제를 확립하고 상설 기구와 관명으로 만들었다. 본래 맹안모극제는 군사적인 편제였으나 곧 행정을 겸해 관리하는 지방 행정 기구가 되었다. 거란인, 한족, 해족, 발해인 등 금에 통치하는 백성들이 빠르게 증가하자 금 왕조는 항복한 관원과 장수를 분별해 맹안과 모극으로 삼고 각자 유이민 무리를 통솔하게 했다. 여진족이 남쪽으로 이주한 뒤에는 맹안모극제가 중원에까지 미쳤다. 1123년 금은 관제를 개혁하며 요와 송의 제도를 흡수해 중원을 노부주현 제도로 통치했다.

금대 초기에는 통치에서 부족정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다. 장자상속제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고, 1135년 금태종이 죽자 아골타의 손자 완안단이 제위에 올라 희종이 되었다. 희종은 관료제를 개혁해 여진의 구제도와 주현제가 병존하는 상황을 개선했다. 새로 언은 영토를 방어하고, 통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여진인들은 화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희종이 점차 의심이 많아져 무고한 신료들을 죽이고, 자혹한 형을 남발하자 1150년 평지정사 완안량이 정변을 일으켜 희종을 살해하고 제위에 올랐다. 완안량은 금세종 때 해릉양왕으로 강봉되었가 다시 해릉서인으로 폄하되었는데 역사에서는 해릉왕이라고 칭한다.

해릉왕은 즉위한 이후 조서를 발표하고, 여진 귀족의 회의체계인 행대상서성을 폐지하고 전국의 정책 강령을 조정에 귀속시켰다. 추밀원이 군사를 담당하고, 상서성의 통제를 받게 했으며, 1156년에는 관제 개혁을 전체적으로 완성해 반포시켰다. 1153년에는 변방에 치우쳐 행정상의 어려움이 컸던 상경회령부를 버리고 연경으로 천도해 중도대흥부로 명명했다. 완안량은 여진 귀족 중 다른 파벌들을 공격하고, 거란과 발해인, 해인, 한족 등 새로운 관료들을 임용했다. 전국의 정치제도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한 해릉왕은 남송을 공격해 중국을 통일할 것을 계획했다. 1159년에는 장인 20만 명을 징발해 개봉의 황궁을 재건하게 했다. 그 후 여러 지방으로 사자를 보내 군사와 말을 징발하게 했다. 한림승지 적영고와 직학사 한여가가 중지할 것을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고, 태후 도단씨와 태의 기재 또한 간언하다 살해되었다. 1161년 9월에 해릉왕은 친히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했다. 그러나 그의 후방은 매우 불안정했다. 산동, 하북, 하동 등에서 여러 피지배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남정에 동원된 병사들은 싸울 의지가 없어 해릉왕이 믿는 바는 오직 5,000명의 정예군밖에 없었다. 10월에는 남정에 참가한 맹안장 완안복수 등이 2만명을 이끌고 요양으로 가서 동경유수 완안옹을 황제로 옹립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해릉왕은 송과 화약을 맺고 군사를 철수하였는데 군사들에게 서둘러 강을 건널 것을 독촉하다가 부관들에게 살해당했다.

완안량의 사촌동생인 완안옹은 과거 부인이었던 오림답씨를 해릉왕에게 빼앗긴 적이 있어 원한이 있었고, 즉위하자마자 해릉왕을 폐서인하여 모래밭에 파묻었다. 그는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았으며, 그가 재위한 27년과 그의 손자 장종 완안경의 치세는 금나라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금세종은 조서를 내려 해릉왕이 파면한 이들을 기용해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했으며, 해릉왕의 남정을 위해 민간에서 징발했던 말을 돌려주고, 전사자에게는 배상해주었다. 1162년에는 반란을 모두 평정했고, 남송과의 전쟁을끝냈다. 세종은 관제를 조정해 평장장사를 둘로 늘리고 상서령과 좌우 승상을 모두 재상으로 두었다. 금대 초기이래로 종실과 완안부 사람만이 정사에 참여하는 상황을 개선하여 거란, 발해인, 한인, 여진 등 여러 출신의 사람들은 통치에 참여시켰고, 해릉왕의 기본 국책을 바꾸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해릉왕이 실패했던 교훈을 받아들였다. 그는 해릉왕의 정치가 가혹하고, 간언을 받지 않아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고, 신료들을 예우하지 않았던 것을 경계했다. 금세종은 역사를 공부하며 한 고조부터 요도종까지 역대 통치자의 경험과 교훈을 얻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금대 초기에 여진인이 남하하면서 파괴되었던 화북의 경제력은 세종 시기에 북송 시기의 수준을 회복했다. 금세종은 급하지 않은 부역을 폐지하고, 나머지 부역에서도 백성을 동원하는 대신 인부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고쳤다. 때로는 상황을 참작해 조세와 잡세를 감면해 주고, 스스로는 검소하며 절약했다.

1189년에 세종의 죽고, 그의 손자인 완안경이 즉위해 장종이 되었다. 장종은 금의 황제들 중 문화적 소양이 가장 높은 황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가 경전을 학습해 한문과 여진문자에 모두 밝았다. 장종은 제형사를 설립해 재난이나 역병 시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장종은 여진인과 한족의 혼인을 합법화했고, 세종 때 시작한 노예 해방 작업을 계속 진행해 과거 전쟁으로 노예가 된 자들과 그 후손들을 해방시켰다. 장종은 경서와 여러가지 서적들을 수집하여 보존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성훈이나 실록, 요사 등의 많은 사서가 편찬되었다.

문치를 제창하면서 여진족들은 중원의 문화와 물질적인 풍요에 감화되어 날로 사치스러워지고, 무예를 숭상하는 풍조가 쇠퇴해 문약해졌다. 1167년에는 남송의 사신이 연회에서 활을 쏘는데 남송의 사신이 쉰 발을 명중시켰지만 호위병 중 다장 활을 잘 쏘는 이가 겨우 일곱 발만을 명중시켜 세종의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남쪽에는 송이 있고, 북쪽으로는 세력을 키우는 몽골의 여러 부락이 있었으므로 세종은 여진인들이 문약해져 금이 쇠약해지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다. 장종도 문치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날로 심각해지는 몽골 각 부족의 위협에 직면새 여진족들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훈계했다. 그는 여진인 가운데 말타기와 활쏘기로 선발된 이들을 승진시키고,조서를 내려 여진의 성씨를 한역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등 여진인의 상무적인 전통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진인들의 순박하고 검소한 풍조는 이미 거의 사라져버렸다. 금 사회에서 사피와 낭비 풍조는 이미 심각해져 관리든 백성이든 다투어 이유없이 돈을 소비하는 것을 숭상하고, 이러한 풍조는 심각해져 고치기 어려워졌다. 이로부터 금의 통치는 점점 전성기에서 쇠약기로 접어들었다.

금나라의 지도(파란색)

금장종은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요절하여 후계자를 세우지 못했다. 장종은 종실을 의심하여 숙부들과의 관계가 원할하지 못했다. 1208년에 장종이 죽고, 원비 이씨 등이 장종의 뜻에 따라 장종의 숙부 완안영제를 황제로 세우니 그가 바로 위소왕이다. 위소왕은 수완과 능력이 부족해 몽골의 침공을 야기했다. 1211년 징기스칸은 서하를 굴복시킨 뒤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해 금을 공격했다. 금 변방의 진지인 오사보와 오월영이 몰골에게 함락되자 위소왕은 완안승유에게 방어를 명했다. 몽골군이 빠르게 기동해 들어와 창주와 무주를 점령하고, 야호령과 회하천에서 금을 대패시켰다. 옹구트족의 협조로 거용관을 넘은 몽골군은 중도의 성에 이르렀다.

당시 대동을 지키던 흘석렬호사호는 대동을 버리고 후퇴하면서 관부의 창고에서 재물을 약탈하고, 현령을 죽이기까지 했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불문에 붙히고, 그를 우부원수 겸 권승서좌승에 임명했다.흘석렬호사호는 2만명의 병력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고, 3,000명만이 주어지자 불만을 가졌으며, 거짓으로 몽골군이 당도했다고 하며 중도로 들어가 지대흥부 도단남평과 좌승상 완안강을 죽이고 위소왕을 폐위했다. 곧 호사호는 위소왕을 죽이고, 세종의 장손인 완안순을 제위에 올렸다.

금선종 완안순은 권원수우도감 술호고기를 이용해 호사호를 죽이고, 몽골군과 화친을 제의했다. 1213년에 선종은 위소왕의 딸 기국공주와 금과 비단, 남녀 어린아이 500명, 말 3000필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달성했다. 금선종은 몽골군이 철수하자 변방 방어를 강화하고, 중도를 지키기 위해 군사를 배치하지 않고, 남쪽의 개봉으로 천도하여 몽골을 피하려고 했다. 그는 5월에 태자 수충과 우승상 겸 도원수인 완안승휘를 중도에 남겨 지키게 해놓고는 종실과 백관을 이끌고 개봉으로 천도했다. 금선종의 남천으로 하북 지방 군민들의 의지는 크게 동요했다. 7월에 태자 완안수충이 중도를 떠나 개봉으로 도망하자 관병들은 한번 더 동요했다. 징기스칸은 선종의 남천을 구실로 삼아 중도를 다시 포위공격했다. 몽골군의 오랜 포위와 보급 부대의 패배로 중도성의 식량은 떨어졌으며, 죽은 사람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중도를 지키던 완안승휘는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하자 독을 먹고 자결했다. 1215년 5월에 중도가 몽골군에 함락되었고, 중도에서는 수개월간 학살과 약탈이 이어졌다.

금이 몽골에게 쫓겨 하남으로 도망치자 남송은 금에 더는 세폐를 보내지 않았고, 몽골에 복속된 서하도 수시로 변경을 침략했다. 요동에서는 야율유가와 포선만노가 자립해 나라를 세웠다. 통치 집단의 사치와 부패는 이전과 마찬가지였고, 정치적, 군사적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다. 산동과 하북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선종은 하북 지방의 군호들을 하남으로 이주시켜 하남 지방은 갑자기 인구가 100만명이나 증가했다. 이에 대한 문제에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고, 하남 지역의 백성들은 가혹하게 착취당해 궁핍해졌다. 영토가 날로 축소되고 비용은 날로 증가하며 백성의 고충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금선종을 위시한 금의 통치자들은 국가를 수습할 생각을 하지 않고, 눈앞의 안일만 탐내며 되는 대로 살아갔다. 부역이 가중되어 백성은 곤궁하고 강적이 변경을 압박하는데 선종의 궁중 연회는 중지 않았고, 의식은 여전히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만을 향수하고자 했다.

1223년에 선종이 죽고, 선종의 삼남인 완안수서가 제위에 올라 애종이 되었다. 한편 1225년 서정을 끝낸 징기스칸은 서하를 멸망시키고, 금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강화했다. 애종은 몽골과 화친을 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방어계책을 논의했는데 동관에 군사를 배치시키고, 낙양과 귀덕의 요새를 강화했다. 1228년에는 충효군제공 완안진화상이 대창원에서 400명의 기병으로 승전하여 사기가 높아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오고타이 칸이 징기스칸의 뒤를 이어 몽골의 칸으로 즉위했고, 금에 대한 전면침공을 개시함으로써 금과 몽골의 전쟁은 최후의 단계로 들어갔다.

1230년에 몽골군이 장안을 포위공격했다. 다음 해 봄에는 봉상을 공격했다. 애종은 군사를 파견해 봉상에 원병을 더하고, 동관의 방비를 강화했다.총대장군 완안합달과 이랄포아는 몽골군의 강한 전투력에 겁을 먹고 동관에서 하남만 지키고 있었다. 조정에서 사자를 파견해 출정을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동관을 나와 적을 맞았지만 밤이 되자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동관으로 돌아왔다. 장안과 봉상은 함락되어 관중 지역은 몽골군에게 넘어갔다.

몽골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툴루이가 5만명을 이끌고 하남으로 남진하였다. 툴루이의 군사는 남송에게 길을 빌려 한수를 건넜는데 금의 여러 장수가 반쯤 강을 건넜을 때 습격하자고 청했으나 총대장 이랄포아가 따르지 않았다. 1232년에 오고타이가 이끄는 군대가 정주에 도착하여 개봉이 직접 위협을 받았다. 애종은 도성 인근의 백성들의 학살을 막고자 60만 명의 백성을 개봉으로 들여보냈다. 이 때 툴루이는 남송을 빠져나와 당주를 함락시킨 뒤 개봉을 향해 진격했으며, 이를 추격하던 금의 주력군 10만 명을 삼봉산에서 전멸시켰다. 툴루이와 오고타이의 부대가 합류해 개봉을 포위하자 개봉은 식량부족에 시달렸고, 고관대작의 자식들도 구걸을 하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 전염병까지 유행해 90여 만 명이 죽었고, 애종은 개봉이 함락되기 전 탈출하여 채주로 도망쳤다.

1233년 11월에 남송의 장수 맹공이 2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30만 석의 식량으로 몽골을 후원하여 몽골과 함께 채주를 포위했다. 몽골군이 연강의 보를 터뜨리고, 남송군이 시담수를 끌어들여 채주를 수공한 뒤 공격해 들어갔다. 1234년 1월에 남송이 남문을 격파하여 들어갔고, 몽골군은 서문으로 들어갔다. 금애종은 왕족이었던 완안승린에게 제위를 양위하고 목을 매어 죽었는데. 완안승린은 탈출하다가 전투 중 전사하고, 금은 멸망했다.

금나라 치하의 거란족

요나라가 금나라에게 멸망한 후 다수의 거란족들은 금나라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야율대석이 이끄는 소수의 유이민 무리는 중앙아시아에 서요를 건국했다. 금나라는 거란인들을 등용하고, 요의 제도를 따라서 지방관을 두고 관리했다. 동북과 서북과 서남로의 거란 등 부족들은 규군으로 편입되어 금나라의 변방을 지키게 되었다. 금나라는 여진족의 숫자가 적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거란인을 적극적으로 회유했는데 거란인의 성씨인 야율씨를 이랄씨로 바꾸었고, 소씨는 석말씨로 바꾸었으며, 국성인 완안씨를 내리는 등 동화를 시도했다. 다만 회유책과 강경책을 반복한 금나라의 거란족 정책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금은 서쪽의 서요 정권을 크게 경계해 거란인들 중 조금이라도 서요와 연락이 닿은 자는 강경하게 처형했다. 거란인들 또한 나라를 잃은 반금감정이 컸기에 때때로 반란을 일으켰다.

야율살팔은 금나라 서북로초토사 번역관을 하고 있던 거란인이었다. 1160년 남송을 공격하던 해릉왕은 사자를 파견해 거란의 장정들을 모두 징발하려 했다. 이에 야율살팔과 패특보 등이 부락을 이끌고 서북로초토사 완안옥측과 사자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책동했다. 거란 반란군은 일부 모극의 호응에 힘입어 한주, 함평, 제주 등을 점령해 세력을 떨쳤다. 해릉왕은 복산홀토와 소회충을 보내 진압하게 시켰으나 실패했다. 야율살팔은 야율대석에게 의탁하고자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복산홀토와 소회충이 이를 추격했지만 놓쳐버리자 해릉왕에게 직접 살해당했다. 그리고는 백언공과 흘석렬지령 등에게 다시 토벌할 것을 명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다만 야율살팔이 이끄는 군중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버리고 서요로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반군 내부의 싸움이 일어나 이랄와알이 야율살팔을 죽이고, 항금 반란을 계속 이어갔다. 1161년에는 이랄와알이 황제를 칭하며, 계속 금나라의 관군을 패배시켰다. 1162년 금세종은 사자를 보내 회유를 시도하면서 군사를 파견해 진압했는데 이랄와알은 해족들의 부락으로 숨어들어 수시로 금군을 기습해 교란시켰다. 마침내 금군이 반군을 완전히 포위하자 반군 중에서 관군에 투항하는 사람들이 계속 발생했다. 마침내 9월에 이랄와알이 체포되어 거란인의 반란은 진압되고 말았다.

야율살팔과 이랄와알의 반란으로 거란인에 대해 경계심이 강해진 금세종은 1163년 거란인의 맹안, 모극을 파하고, 그 호구들을 여진의 맹안, 모극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1174년에는 이랄와알의 잔란에 참여했던 거란인들을 오고리석루부로 옮겼고, 1177년에는 다시 서북로의 거란인들을 상경, 제주, 이주 일대로 이주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여진과 섞여 살고, 서로 통혼하여 교화시킴으로써 거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거란인의 반감을 키웠으며, 여진인과 거란인 사이에 거리감을 조성해 거란인의 반항이 더 심해지는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1196년 11월에 타타르의 침략으로 금나라가 혼란스러웠던 와중에 거란인 덕수와 타쇄가 신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건원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1177년경 강제로 이주했던 거란인들이 합세해 그 무리가 수십만에 달했다. 이때를 틈타 여러 규군들도 반란을 일으켜 금나라의 후방을 일으켰다.

1212년에는 금나라가 몽골의 침략에 계속 패배하자 거란인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야율유가는 1213년 토벌군을 격퇴한 뒤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요라고 정했다. 금선종은 사람을 파견해 항복을 권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무사 포선만노가 40만명을 거느리고 토벌하러 왔으나 패배하고, 달아났으며, 야율유가는 함평과 동경요양부를 점령했다.

1214년에는 선종이 개봉으로 남천할 때 금나라의 규군이 개봉으로 이주하는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규군은 노구하에서 관군을 격퇴시키고, 요동의 야율유가에게 연락했다. 이 때 징기스칸이 내려와 투항한 거란 장수 석말명안을 보내 규군을 투항시키고, 그로 하여금 중도를 포위했다. 1215년에 중도가 함락되고, 야율유가가 징기스칸을 만나러 자리를 비워 요군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포선만노는 함주, 심주, 징주 등을 점령하고 금으로부터 반란을 일으켜 동진을 건국했다. 요동은 금, 몽골, 야율유가, 포선만노의 네개 세력이 쟁탈하는 구조가 되었으며, 1218년에는 몽골의 토벌에 밀린 야율유가가 고려의 경내로 들어갔다가 몽골, 고려, 동진 연합군에게 토벌당했다.

서요의 건국

서요의 지도

요 멸망기에 천조제의 행동은 유능한 관리들을 실망시켰다. 북요 정권의 건립은 이러한 정서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북요의 황제로 옹립된 야율순은 연로하여 즉위한 지 백일도 지나지 않아 죽었다. 이 때 금과 송이 양면에서 북요를 공격했으므로 북요는 위기에 빠졌다. 금군이 북요의 수도 연경에 도착하자 내부에선 분열이 일어났으며, 이에 야율대석은 야율순의 비 소씨와 함께 연경을 탈출했다.

야율대석의 자는 중덕이고, 요태조 야율아보기의 8대손이다. 그는 거란어와 한어에 능통했으며, 진사에 급제해 한림응봉, 안림승지, 태주 및 상주 자사, 요흥군절도사를 역임한 바 있다. 북요 건립 후 야율대석은 서남로도통이 되어 침략해오는 송군을 물리쳤으며, 1123년에 북요가 무너지자 천조제에 의탁했다. 천조제에 의탁한 야율대석은 군사를 재정비하고, 병사를 이끌어 용문에서 서진하는 금군과 싸웠으나 패배하고 생포되었다.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도망친 야율대석은 완안아골타가 죽고, 실위와 모갈실의 병력이 요에 지원한 것을 기회로 연운을 수복하자고 주장하는 천조제에게 출병에 반대하며, 신중할 것을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조제에게 충성하는 것이 더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야율대석은 1124년에 부하 200명을 이끌고 협산을 나와 북쪽으로 향했다. 몽골 평원을 지나가면서 각 부족들의 호응을 얻은 야율대석은 병력 1만여 명과 말 1만필을 얻었고, 왕을 칭하면서 천조제로부터 자립했다. 서하와 연합하고, 남송과 연락하며, 실력을 키우는 야율대석은 금에 항복한 거란족들을 회유하여 금에 위협을 주었다. 1129년 정비를 마친 야율대석은 금의 북쪽 변경을 기습해 수십만 필의 말을 약탈했다. 1130년 금나라가 야율대석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자 야율대석은 서북쪽으로 후퇴하며 예니세이 강을 지나갔다. 현지에 자리잡던 키르기스인들의 저항을 피해 알타이 산을 넘어 이르티시 강가로 간 야율대석은 이밀에 성채를 쌓고, 서쪽으로 도망한 거란인들을 모집하여 4만 호 이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서쪽에 안정된 기반을 만들려던 야율대석은 코초 위구르를 경유해 카라한 왕조로 진군했다. 그는 코초 위구르의 왕 빌게에게 사신을 보내 거란과 위구르는 전대부터 우호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해 서진할 계획을 밝혔다. 빌게는 말 600필과 낙타 100봉, 양 3,000마리를 바쳤을 뿐 아니라 자식들을 인질로 보내 야율대석의 속국이 되겠다고 했다. 또한 사흘 동안 연회를 배출어 야율대석을 호의적으로 전송해 주었다.

카트완 전투

서쪽으로 간 야율대석은 동카라한 왕조가 다스리던 중앙아시아에 당도했다. 동카라한 왕조는 카를룩인과 투르크인을 막기 위해 야율대석을 이용하려 하였으나 동카라한의 수도 발라사군에 도착한 야율대석은 동카라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영역을 신속히 흡수했다. 1132년 야율대석은 정식으로 칭제했고, 투르크의 칸호를 채택해 카간이라 칭했다. 또한 중국식 존호인 천우황제를 사용해 요를 재건했는데 역사상 이를 서요 또는 카라 키타이라고 부른다. 발라사군을 호사알이타로 개명하고 도읍으로 정한 야율대석은 1134년에 강국으로 개원하고, 서 카라한 왕조를 정벌하기 위해 서정했다. 1141년에 서요를 막기 위해 연합한 셀주크 투르크와 서카라한 왕조의 대군이 패배하고, 서요는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인 산자르를 포로로 잡았다. 서요의 군대는 중앙아시아를 재패하며 대적하는 자들은 무찌르고, 항복한 자들은 받아주었는데 항복한 국가들이 여럿 있었고, 노획한 낙타와 말, 소, 양, 금도 많았다. 한편으로는 소알리랄이 병마대원수로 봉해져 7만의 기병을 이끌고 동진을 시도했으나 서요가 금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실패하였다.

서요를 세운 야율대석은 옛 영역의 수복이라는 목표를 사실상 포기했다. 이르티시 강 유역에 대한 야율대석의 통제가 점차 약해지자 나이만 족은 야율대석이 내린 패인을 반납하고, 금의 패인을 받기까지 했다. 서요의 강역은 야율대석의 아들 야율이열과 딸 야율보숙완이 제위할 때 확정되었다. 서요는 동쪽으로 코초 위구르를 통해 서하와 인접했고, 북쪽으로는 이르티시 강 유역과 발하슈 호수를 경계로 나이만과 캉글리와 접했다. 서쪽의 아랄 해에서는 호라즘의 종주국이 되었고, 아무다리야 강 중상류를 경계로 셀주크 투르크와 토번에 인접했다.

서요의 통치제도는 요나라 시대를 답습했다. 서요의 영역은 유목민과 농경민의 주현을 두고 있었으며, 여기에 중앙아시아 사정에 맞게 일부 조정이 있었다. 서요는 군정 사무를 주관하는 추밀원과 황제의 궁장을 관리하는 도부거, 부민을 관리하는 육원사의 변경을 진수하는 초토사, 행군을 지휘하는 도원수 및 도통, 도감 등이 있었다. 서요의 수도인 호사알이타는 황제가 직접 관리했는데 이 지역은 농경과 목축에 모두 적합해 거란인, 한족, 위구르족 및 투르크족의 부락이 있었다. 군대는 황제가 직접 통제하면서 부족의 군대와 귀족의 사병은 모두 철폐했다. 서요의 통치력은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지역 외에 코초 위구르, 카라한, 호라즘, 카를루크 등 속국에 미쳤다. 서요는 이곳에 소수 대표자만을 파견해 상주시키면서 감독하고, 공물을 거두었다. 속국에 서요의 군대가 주둔하진 않았지만 외부로 확장하는 것을 지원하기도 하고 내란 평정을 원조하기도 했다.

서요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분쟁을 종식시켜 사회질서를 안정시켰는데 거란과 한족의 문화 및 요의 제도를 중앙아시아로 이식하여 지역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거란, 한족 및 중앙아시아 각 민족이 중앙아시아의 도시를 공동 개발하여 경제와 문화도 크게 발전했으며, 중국어는 상업 교역에서 공식적인 언어로 쓰이기도 했다.

1143년에 야율대석이 죽고, 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뒤를 이은 인종 야율이열은 나이가 어려 황태후 소탑불연이 국정을 맡아 섭정하였다. 7년 뒤 정권을 이어받은 야율이열은 13년간 서요를 통치하다가 죽었다. 그의 아들도 나이가 어려 야율이열의 누이동생 야율보속완이 승천태후로 칭하며, 제위를 이어받았다. 야율보속완은 권신 소알리랄의 아들인 소타로불과 혼인했는데 그의 동생인 소박고지사리와 사통하고, 남편을 암살했다. 1177년에 소알리랄이 거병하여 야율보속완을 죽였고, 1178년에 야율이열의 차남 야율직로고가 계승했다.

야율직로고는 통치 기간 동안 조부와 부친과는 달리 제멋대로 전횡하며 그가 거두려 한 징세와 공물은 속국이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 12세기 후반부터 호라즘은 세력을 키우며 독립하여 서요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들은 3년 동안 서요에 공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징수하러 온 사자를 죽이기까지 했다. 몽골에서는 징기스칸이 등장해 막북을 통일했고, 이에 밀린 나이만 족의 왕자 쿠치르크가 서요로 도주해 야율직로고의 신임을 받았다. 쿠치르크는 직로고의 신임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적극 확장하면서 정권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211년에 호라즘이 카라한 왕조와 연합하여 서요를 공격하자 야율직로고는 타얀크에게 군사를 주어 막게 했는데 이 틈을 탄 쿠치르크가 서요 본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쿠치르크는 사전에 호라즘과 내통하여 오트라르 서쪽 짱과 파미르 고원 동쪽의 서요 본토를 분할할 것을 합의했다. 황제의 금고가 있던 우즈칸드가 쿠치르크에게 함락되고, 수도가 위협받자 야율직로고는 몽골의 징기스칸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징기스칸은 이에 호응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잠시 미루고 서정을 개시했다. 1218년 몽골군이 쿠치르크를 무찌르고 서요를 복속시켰다. 야율직로고는 자신의 딸 쿵쿠를 징기스칸의 차남인 차가타이와 혼인시켰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야율직로고 1219년 죽자 차가타이가 사위로써 제위를 이어받아 서요를 지배하게 되었다.

키타이 칸국

야율직로고가 후계자 없이 죽자 서요를 복속시켜 통치하던 징기스칸의 아들 차가타이가 서요의 칸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몽골의 부용국이 된 서요는 옛 요나라를 공식적으로 계승했으며, 구성원 또한 거란족이 다수였기에 역사에서는 키타이 칸국이라고 불렸다. 징기스칸은 차가타이에게 위구르 옛 땅과 호라즘을 정벌하여 얻은 중앙아시아를 분봉해주었다. 차가타이는 호사알이타 대신에 일리 강 북부의 알말리크를 수도로 삼았다.

몽골이 유라시아를 재패하고, 요하의 옛 거란 땅에는 옹기예트, 우량카이, 호르친, 튀메드, 골로스 등의 몽골 제부족들이 들어와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했다. 몽골인들에게 밀려 고향을 잃은 거란 유민들은 대대적으로 거란의 칸국이 존재하는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중원에 남아있던 소수의 거란족들은 대부분 여진, 몽골, 한족 등에 융합되어 사라졌으며, 극히 일부가 운남이나 고려로 이주했다.

거란족들의 중앙아시아 이주는 키타이 칸국의 거란화를 더욱 촉진했다. 서요 시절까지만 해도 카를룩 및 투르크계 민족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중앙아시아는 14세기 경에는 거란인들이 과반을 점유하는 땅이 되었고, 거란이가 공용어로싸 사용되었다. 예니세이 강 유역에서 유목을 하던 키르기즈인들도 이 시기에 키타이로 이주해서 키타이 칸국을 구성하는 일부가 되었다.

키타이 칸국은 몽골 제국에 직접 예속되어 있었고, 카라 홀레구, 예수 몽케 등의 칸은 몽골 제국의 카간에서 해임된 바 있다. 그러나 1294년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죽자 오고타이 칸국의 칸 카이투는 키타이 칸 두와와 연합해 원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수시로 몽골 본국을 기습했으며, 위구르 지역까지 관할 구역을 넓히는 등 선전하였으나 카이투가 죽고, 그의 아들 차파르가 갑작스럽게 키타이 칸국의 두와와 영토 분쟁을 일으켰다. 두와는 원을 끌어들였는데 1306년 가을에 차파르가 키타이 군대와 전투하는 중 카이산이 이끄는 원의 군대가 오고타이 칸국의 배후에서 나타났으며, 양면에서 협공을 받은 오고타이 칸국은 항복하고 말았다. 1309년에 차파르가 암살되고, 오고타이 칸국이 원과 키타이 칸국에 분할됨으로써 오고타이 칸국은 멸망하였다.

두와는 죽기 전 작은아들 케벡을 태자로 삼았는데 그가 죽자 장자였던 에센 부카가 반발하고 나섰다. 케벡은 칸위를 에센 부카에게 양도했는데 얼마 뒤에는 측근의 사주로 복위를 선언했고, 도읍을 알말리크에서 사마르칸트로 옮겼다. 결국 키타이 칸국은 동서로 분할되었다. 키타이 칸국의 분열기에 예하에 종속되어있던 각 유목 부족들은 독자적인 권리를 행사하며 자립했고, 1370년에 서키타이 칸국은 튀르크 계통의 티무르에게 멸망했다. 티무르 제국은 동키타이를 종속시키고, 페르시아와 아나톨리아, 인도까지 진출하며, 정복활동을 벌이다 1405년에 티무르가 죽은 뒤 분열로 쇠퇴하여 1500년에는 주치의 아들 샤반의 후예가 이끄는 우크베크인들에게 멸망했다.

알마티 칸국

티무르가 죽고, 티무르 제국의 예속상태로부터 해방된 동키타이 칸국은 15세기경 에센 부카 칸의 통치 하에서 중흥하였다. 하지만 에센 부카가 죽고, 유누스 칸이 제위를 이었을 때 위구르족을 이끄는 도스트 무함마드 칸이 투르판 분지에 위구르스탄 칸국을 세워 분열하자 동키타이 칸국은 한 번 더 분열하게 된다. 1513년 위구르스탄 칸국이 동키타이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거란인들은 위구르인들의 지배에 놓였다가 카자흐인들의 남하로 카자흐와 위구르스탄에게 양분되어 지배받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위구르스탄 칸국에서는 16세기 말부터 이슬람 귀족 가문인 호자 가문이 권력을 잡았는데 1678년, 위구르스탄 칸국의 이스마일 칸이 아팍 호자를 몰아내고,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했다가 아팍 호자가 불러들인 준가르의 칸 갈단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준가르인들은 1680년에 백산당과 흑산당으로 분열된 호자 가문을 완전히 평정하고, 위구르스탄 칸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1732년에 카자흐인들이 통치하고 있던 발하슈 호수 일대에서 거란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립하였다. 요나라 황실과 야율대석의 후예를 자처하는 불리는 야루트 씨족의 야루트 캉가이는 거란인 부락을 회유하여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자립해 알마티를 중심으로 알마티 칸국을 세웠다. 옛 서요의 영광을 재현할 것을 천명한 야루트 캉가이는 독립을 저지하러 출병한 카자흐 칸국의 군대를 1734년 추이 계곡에서 격파하고, 발하슈 호수 남부 일대를 장악했는데 수도를 알마티로 정하고, 칸을 칭하였다. 역사에서는 이 국가를 알마티 칸국으로 부른다.

1739년 캉가이 칸이 죽자 그의 조카인 다얀이 칸에 올랐다. 다얀 칸은 1744년 청에 조공하였으며, 청이 준가르 칸국을 멸망시키는 데 협조하여 이식쿨 호수 일대를 수복하였다. 남쪽으로는 우즈베크 인들이 세운 코칸드 칸국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며, 부하라와 연합하여 카자흐의 침공을 견제하였다.

1790년에 즉위한 코슈트 칸은 카자흐의 쇠퇴를 틈타 1792년 카자흐 칸국을 공격했다. 그는 오트라르와 시르다리야강 하류까지의 넓은 영토를 수복하여 현재의 카타키타이 영토와 비슷한 영토를 확정지었다. 19세기부터는 러시아가 힘을 키우며,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1839년 러시아가 남하하여 히바와 알마티를 공격했는데 최악의 한파와 러시아군의 어설픈 계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의 알마티와 히바는 영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움직임에 따라 운명이 크게 휘둘리는 처지가 되었다.

1873년에 알마티 칸국은 러시아는 다시금 남하하였다. 1868년에 알마티 칸국은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었고, 히바와 부하라, 코칸트 등의 이웃 국가들도 러시아에게 정복되어 보호령이 되었다.

현대사

러시아의 속령이 된 알마티 칸국은 1893년 러시아와의 늑약을 통해 완전히 병합되어 러시아의 주로 편입되었다. 러시아의 지배에 저항하여 무장 투쟁을 벌이는 거란인들이 존재했지만 모두 세력이 극소해 국지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1917년에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볼셰비키들이 러시아의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확장하는 가운데 지방에서 백군들이 일어나 교전하는 등 러시아는 적백내전에 들어갔다.

카라키타이에서 국지적인 투쟁을 벌이던 거란인들의 일부는 적군에 합류하였으며, 오트라르와 키질-오르다에서 봉기한 카라키타이 독립군은 카자흐스탄의 알라쉬 오르다와 연계하여, 키타이스탄을 선포하였다. 알마티와 비슈케크, 토크모크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거란족 파르티잔이 도시를 점거하였으나 1918년 2월경 볼셰비키의 기습으로 빠르게 무너졌다. 1918년부터 백군들의 세력이 커지며, 알마티에서 볼셰비키들이 철수하였다. 이는 1920년경부터 적군이 반격하여,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이 볼셰비키의 수중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면서 키타이스탄은 키타이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재편되어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이 되었다.

1991년 8월 31일에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면서 키타이는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1993년에 헌법이 제정되면서 카라키타이라는 국명과 현재의 국기, 국장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키타이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시절 마지막 서기장이었던 샤오 아루바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즉위 1년 3개월만에 급사하면서 키타이 공산당은 내분이 발생했다. 결국 공산당 우익이 사회민주당을 세우며, 분당하였고, 공산당도 1994년에 당명을 인민당으로 바꾸면서 양당의 대립구도가 고착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