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위엔 의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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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모사일본 제국
언어별 공식 명칭
정식명칭타오위엔 의정서
일본어桃園の議定書

개요

배경

청·일 간의 전운이 급박함을 알게 된 미토국은 1893년 12월 3일 국외중립을 선언, 양국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중립문제를 두고 붕당정치가 벌어지자 일본 당국은 이 해 12월 12일 오후 5시, 타오위엔(桃園)항에서 처음 포성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12월 12일 6시 30분, 일본군타오위엔에 상륙하여 그날로 타오위엔에 들어왔고, 12월 13일에는 점령선포를 하였다. 이렇듯 순식간에 국토가 무서운 전쟁터로 변하여, 미토국 정부로서는 국외중립을 견지할 방도가 거의 없게 되었다.
한편, 일본군의 타오위엔 입성과 동시에 주미토국일본공사 가쓰라 다로(桂太郎)는 외무대신 양제이궈(楊潔國)를 통해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전쟁의 불가피성과 일본에 협력할 것을 강요하면서 중립선언을 송두리째 무시하여 버렸다.
미토국의 답변이 늦자 일본공사 가쓰라 다로는 일본군 제12사단장 이노우에(井上)와 함께 공수(攻守)·조일(助日)을 앞세운 한일 간의 의정서 체결을 강압하여 왔다. 그러는 한편 반일, 친청파였던 탁지부대신 겸 내장원경 리후위안(梨湖園)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했다.
이리하여 일제의 강박 아래 드디어 12월 31일 군사통행권과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타오위엔 의정서」가 이지용과 하야시 사이에 체결되어 조인된다.

에르모사의 국권피탈 과정
1892년 1월淸 연호 사용 이외, 중립국 선언
1893년타오위엔 의정서 체결
1894년 3월 12일니혼마치 늑약 체결
1894년 5월 16일친일 세력
급진개화파 독립협회 설립
1894년 7월 31일독립협회의 광서정변 발발 후 실패
1894년 8월 1일일본 주도 정변회복위 개최, 전시 상태가 아니어도
외교권 日에 흡수
1894년 8월 2일정변 이후 치안
불안정, 일본군 계엄령 후 공포정치 실현
1894년 9월 3일한족 사회 댜오위타이 공화국 건국
1895년 4월 17일청일전쟁 종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병합

내용

전문

미토국 국왕전하의 외무대신 양제이궈대일본제국 황제폐하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각자 상당한 위임을 받아 아래의 조항을 협정함.

제1관

양국은 동아시아의 안녕항구불역(恒久不易)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미토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과 중립 재확인을 천명할 것.

제2관

대일본제국은 미토국 왕실안녕과 국토보전의 수호를 할 필요가 있으며, 미토국의 친의(親誼)로써 황실과 백성을 안전ㆍ강녕할 것.

제3관

미토국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후 양국은 화친의 실상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종전의 교제의 정을 막을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혁파하여 없애고 너그럽고 융통성 있는 법을 열고 넓히는 데 힘써 영구히 서로 편안하기를 기약한다.

제4관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미토국의왕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임기응변필요한 조치를 행할 것이며, 그리고 미토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군사통행권, 전시작전권, 외교권 등의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수용할 수 있을 것.

광서(光緖) 19년 12월 31일
외무대신 양제이궈 (인)

메이지(明治) 26년 12월 23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인)

결과

이후 한족 계열의 정치 계열에 유입된 본성인들은 오스트로네시아인의 친일 정치에 반대했으며, 그 중에서도 국성양궁내부대신(대통령 비서실장급)이었던 장소영(張素英)은 시무 5조국성양에 상소하며 자신스스로 사약을 마시며 자결했다.

미토국의 건국 이래의 크나큰 광영(光榮)이 미천한 외부대신광서살적(光緖殺狄)의 과오로 오늘에 이어 미토국이 왜국에 머리를 조아리는 작금의 시태(時態)가 참으로 안타깝다는 것 밖에 드릴 말씀이 있지 아니합니다.

외부대신 양제이궈(楊潔國)는 우리의 국권군권 또한, 왜구의 침략에 무릎을 굽혔으며, 타오위엔에 흐르는 화염왜적 오랑캐들의 총성과 백성을 살해해 핏자국과 바람이 아직도 항구에 선합니다. 전하가 수여하신 관직과 벼슬은 모두 왕실과 백성에 쓰려 했건 만, 오늘날을 타오위엔의 굴욕이라 생각하며 소인의 뜻은 이제 끝났사오니 이제 저의 마지막 투쟁을 아뢰옵니다. - 시무 5조 中 발췌

이후 독립협회에 반발한 한족 출신들의 본성인들이 국왕이 인준한 바 없으니 원천 무효임을 강조하며 의정서를 백지화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일제는 양제이궈를 앞세워 국성양을 협박하여 퇴위시키고 국양중을 즉위시켜 천천히 미토국을 멸망의 길로 몰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