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이올로고스 르네상스와 합리론-경험론 내전 (공동세계관)

미하일 9세는 십자군 전쟁에 대한 종전 협약을 맺은 뒤, 제국을 다시 원 궤도로 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면서 학문과 문화 양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가했다. 그는 제국 전역에 학교를 설립하고, 합리론의 전통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학자가 양성될 수 있도록, 지방에 있던 학자들에게 학교에서 가르치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지방은 다시 경험론의 전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험론적인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들로 이어졌다. 하지만, 몇몇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오류가 있었고, 이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이 치열해졌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옹호하는 중앙은 합리론자들을 이용해서, 경험론적인 전통이 틀림을 논리적으로 입증하게 하였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논쟁이 신학에도 반영되었는데, 하느님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성사나 계시, 기적을 믿지 않는 신학 파벌과 하느님은 경험하는 것이며, 이 경험은 성사라는 신학 파벌로 나뉘게 된다.
합리론의 신학개요는 성사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아서 이단으로 보임에도, 강력한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중앙은 합리론의 전통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 다툼은 중앙과 지방 사이로 나눠지며, 합리론 전통이 강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세계총대주교청과 경험론 전통이 강했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청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십자군 이래로 교류가 적었던 서방 교회는 중앙의 이단스러운 교리를 보고 경악하였으며, 이단이라고 하자, 당시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서방 세력의 제국 출입을 금하였다. 이는 서방에서 대항해시대를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결은 갈릴레온이 나타나면서 더 심해졌다.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논리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였고, 경험과 자연학은 배치되면 아니됨을 주장하였다. 이에 중앙은 경험은 그저 우연적 성질일 뿐이고 이성적 판단이 본질적 성질이라고 하면서 이를 부정했다.
하지만 케플러의 연구 결과가 제국에 공유되고, 점차 제국의 학계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학계 간 논쟁은 중앙과 지방 간의 지역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때, 마누일 4세는 갈릴레오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따라, 중앙의 시민들은 마누일 4세를 탄핵시키고, 요안니스 9세를 즉위시킨다.
그러자 지방의 세력들은 마누일 4세를 중심으로 내전을 벌였으며, 지방이 군사권을 쥔만큼, 마누일 4세는 복위에 성공한다. 제국은 점차 경험을 중시하게 되었고, 실험을 중시하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