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쉬/역사

< 페쉬

페쉬의 역사.

고대~유럽인들의 발견 전

페쉬 원주민들은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표류 중 발견해 정착했던 것의 후손이라는 설과 고대 유럽인들이 발견해 정착했던 것의 후손이라는 설, 아니면 두 민족들의 혼혈로 성장한 것이 페쉬 원주민이라는 3가지 설이 있다. 아직 확실히 밝혀지진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첫 원주민은 5000년 전쯤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기원전 2700년경에 페쉬 원주민들은 고립된 문명이었음에도 상당한 번영을 이뤘었고, 그때의 건축물, 유물 등이 상당히 남아 있다. 그러나 기원전 2450년경 다른 섬들과의 전투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이고, 그때 몰락했다고 전해진다.

유럽인들의 발견

이상하게도 유럽인들에게 잘 발견되지 않던 이 땅이 유럽인들에게 발견된 것은 1510년, 콜롬버스를 벤치마킹해 신대륙을 찾으려 했던 포르투갈인 아바키 당 다고요가 무모한 항해 중 풍랑으로 이 섬에 충돌한 것이었다. 그를 포함해 2명의 선원만 살아남았었지만 몇몇 배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아 쓸만했고, 그들은 섬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뒤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그들은 콜롬버스처럼 포르투갈 왕실에게 큰 후원을 받게 되었고 1519년 2차 항해를 시작했었다. 2차 항해로 60명 정도가 섬에 정착했고 그들은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식민지 시절

1525년 3차 항해가 있은 뒤 70명이 추가로 섬에 정착했고 이후에도 많은 유럽인들이 이곳에 정착했다. 1527년 포르투갈은 이곳을 식민지로 삼았었으나 이 섬의 경제적 잠재성을 눈여겨본 영국에 의해 침략을 받고 1532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된 지 5년 만에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은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다루고 노예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섬 자체는 무역항으로 번영하였었다. 물론 그것으로 얻은 재정들은 유럽인들에게만 돌아갔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독립운동이 있었지만 이들도 크게 탄압되었다. 여러 번 큰 독립운동 관련 사건이 있었으나 대영제국의 강한 국력으로 인해 대부분 실패했었다.

독립

원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은 1787년 일어난 바비기 스멜 사건이다. 영국의 부유층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였던 바비기 스멜이 노예로 삼던 3명이 자신을 비판한 것을 알게 되자 살인 청부업자를 보내 모두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영국에선 아예 재판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었다. 청부업자가 국왕에게서 총애를 받았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더 커졌었다. 게다가 미국 독립전쟁의 여파로 독립운동이 격렬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러 독립운동 조직들이 대규모 혁명을 일으켰다. 엄청난 인력이었고 그들은 영국 무기들을 대량으로 탈취해 무시가 어려운 힘을 가지게 되었고, 토벌군이 보내졌으나 우연으로 큰 풍랑이 불며 영국은 제대로 토벌하지 못했다. 결국 페쉬는 사실상 독립 상태가 되었다가 1802년 놀라이 협정으로 영국의 보호국 자격으로 독립했다. 그 이후에 페쉬는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방가 돔부를 1대 대통령으로 하고 공화국이 되었었다.

제1공화국~제9공화국

이 시대엔 제3공화국을 제외하고 모두 원주민들이 대통령이었다.

제1공화국

1등 독립유공자인 방가 돔부는 각각 69%, 70%로 당선되고 1803년부터 1809년까지, 1809년부터 1815년까지 집권했다. 그는 1~2대 대통령이다. 이때 부패가 상당히 증가하자, 그는 부패를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래도 무역업, 어업 등을 기반으로 경제 성장률은 4~4.5%로 안정적이었다.

제2공화국

이번에도 독립유공자인 비비보 알이 59%로 당선되었었다. 그러나 병으로 인해 임기를 마치지 못한 1821년 초반에 사망했다.

제3공화국

전쟁을 거치며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 협상국의 기지로 쓰이며 피폐해졌었다. 영국과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전투력이 약했던 이 나라에서 여러 유명 전투들이 일어났고 심지어 무사라도프 학살 등 학살들도 일어나며 순식간에 최빈국으로 굴러떨어지게 되었었다. 전쟁이 끝나고 1919년엔 군부 쿠데타까지 벌어져 최악의 독재자로 불리는 킹고릴라 제임스가 대통령이 되어서 그에 대항하는 잔존하는 과거 정부 세력들의 충돌로 원래 수도였던 아브라비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결국 군부가 정권을 잡게 되었었다. 군부는 심각한 부패, 경기침체, 인권 탄압, 검열 등의 악행을 저지르며 나라를 더 퇴화시켰다. 이후 1938년 9.7 민주화 혁명으로 민주정부가 들어서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으로 또다시 피해를 입었고, 1941년엔 아예 국토의 대부분이 나치에 점령되기도 했다. 정부는 수도 아브라비를 버리고 항구도시인 놀라이로 가 정부를 옮겼다. 1944년에 임기가 종료되어 그의 후계자 방 고지가 놀라이에 가게 된 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1945년 추축국의 패전으로 다시 페쉬는 해방되었다.

현대

그래도 수도는 폐허가 되었던 아브라비에서 놀라이로 바뀌었다. 방 고지는 여러 검열과 반대파 숙청, 불법 연임 등으로 독재자라는 비판을 들었으나, 여러 급진적인 금융업 중심의 경제 정책으로 경제 성장률을 79%까지 올리며 페쉬를 대서양의 금융 중심지로 만드는 데 일조했으며, 현대엔 페쉬의 박정희 같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들과 다른 점은 큰 무력 행위는 별로 없었으며 1959년 스스로 퇴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유태인으로, 히틀러의 학살로 가족을 잃었기 때문에 과도한 살상을 자제했던 것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도 페쉬는 지속적인 성장을 거두며 경제적으로 손꼽히는 선진국이 되었다. 다만 2000년대 들어서며 경제 성장률이 -1%에서 0% 정도로 낮고, 빈부격차도 점점 심해진다는 점이 문제이다. 금융위기 때는 큰 타격을 입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