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 공화국/역사

개요

프로이센 공화국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고대

프로이센은 (옛 말로는 Prūsa) 중부 유럽에 위치한 역사적 지역으로서, 발트해의 동남쪽에 위치한 해안으로부터 마주리아의 호수 지역까지 영토가 걸쳐있다. 이 지역은 현재 프로이센 공화국과 제 2 에르체이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프로이센의 일부였던 옛 독일은 해당 지역으로부터 독일이라는 이름이 파생되었다.

선사시대

발트 지역의 일부인 넓은 황무지 지역들이 다른 유럽의 지역보다 더 오랜기간 유지되었다. 선사시대, 이 지역의 동쪽에는 동부 발트인들이 거주한 반면, 서부 발트인들은 삼비아 반도와 서쪽의 지역에 거주했다. 시간이 흐르며, 서부 발트인들은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바로 프로이센의 조상들이 된다. 발트 지역의 동부에서는, 크로이나 인들을 포함해서 라트비아인들 그리고 리투아니아 민족들로서 통합되어져갔다.

중세

프로이센의 바이킹

바이킹들은 7~8세기에 발트 해의 동쪽 해변가에서 유입되기 시작했다. 트루소나 카우프 지역과 같이 프로이센의 거대한 무역 중심지들에서 이들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예상된다.


프로이센인들은 발트해를 무역로로 이용했으며, 자주 트루소에서 버카(현재의 스웨덴)로 항해하곤 했다.

바이킹 시대가 끝나갈 즈음에는 덴마크의 왕 해롤드 블루투스의 아들들과 카뉴트 대왕이 프로이센을 상대로 원정을 나섰다.

그들은 프로이센의 많은 지역들을 황폐화시켰으며 그 지역들의 일부에는 트루소와 카우프 지역도 포함되어있었으나, 프로이센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실패했다. 프로이센 내에서 바이킹들은 프로이센에 대한 지배력이 약했고, 제국을 건설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존재였다.

프로이센의 조상

전설에 의하면, 6세기에 존재했던 전설적인 왕 위데우토의 형제이자 프로이센 사제들의 대표였던 프러테노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부터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이 파생되었다고 시몬 그루나우가 기록했다. 프로이센의 지역들과 해당 부족들은 위데우토의 아들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수도비아라는 이름은 위데우토의 아들인 수도에서 따오게된다. 13세기 초에는, 프로이센의 기독교 주교가 프로이센 이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브레멘의 아담이 프로이센인들을 1072년에 언급했다.

프로이센의 조상들은 다양한 언어를 구사했는데, 구 프로이센어를 포함하여 서부 발트 지역의 여러 언어들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언어들이 서로 관계는 있었지만 서로 간의 소통은 불가능했으며, 이 언어들이 현재 발트 지역 언어들의 대표격이 된다. (제 2 에르체이 공화국의 두 언어인 라트비아어, 리투아니아어는 모두 동부 발트계의 언어이다.)

타시투스를 포함해서 로마의 역사가들은 프로이센의 부족들을 Eastemers로 기록했으며, 타시투스는 그들을 Aesti라고 불렀다. 프로이센 조상들의 영토는 8세기 바이에른 출신의 지리학자의 지도에서 확인될 수 있다.

프로이센을 정복하려는 움직임

10세기에 폴란드인들이 왕국을 성립(Western Polans)하면서 프로이센을 정복하려 했다. 997년, 폴란드 왕인 볼레슬라우 1세(Bolesław I Chrobry)는 아달베르트(Adalbert of Prague)를 군사적 목적과, 프로이센 지역의 기독교화를 목적으로 파견하게 된다. 지령을 받은 아달베르트는 기독교 특사로서 무장한 호위병들과 함께 프로이센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프로이센으로 갔고, 997년 프로이센 토속 신앙의 사제들에게 죽게 된다.

그러나, 1015년에 볼레슬라우가 또 다시 파병을 하여 승리하자, 잠시나마 프로이센 국경 지역의 사람들에게 조공을 정기적으로 받았지만,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다, 폴란드의 지배자들은 1147년과 1161년, 1166년 그리고 13세기 초에 끊임없이 프로이센을 침략해왔으나, 매번 프로이센인들에 의해 패배했지만, 쿨메르 지역은 지속적으로 약탈당했다.

튜튼 기사단

13세기, 마조비아의 콘라드는 십자군을 결성하여 수 년에 걸쳐 프로이센을 정복하려 하지만 실패했고. 결국 교황이 더 많은 십자군을 결성하게 된다. 결국 그는 헤움노 지역(Chełmno Land)을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튜튼 기사단을 끌어들여 프로이센 거주민들과 싸울 것을 요청한다.

프로이센 십자 원정 중 프로이센은 튜튼 기사단들에게 정복당하고 튜튼 기사단의 통치 아래에 놓이게 된다. 포메라니아 지역의 습득으로, 1308~1310년에 서부 비스튤라 지역이 프로이센에 편입되어진다.

1466년 Second Peace of Thorn 이후 프로이센은 동,서로 나뉘어지게 된다. 서부는 자치 프로이센 왕국으로서 폴란드 왕국의 속령이 된 반면 수도원들이 위치했던 동부는 폴란드의 영지가 되었다.

1492년에는 마리엔부르크(Marienburg, 현재의 말보크)에서 출판된 도로시아 몬타우의 삶(a life of Dorothea of Montau)은 프로이센 최초의 출판물이 되었다.

근대

프로이센 공국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도중 고질적인 종교 정변들과 전쟁들이 일어나면서 1525년, 튜튼 기사단장이자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이였던 알브레히트(Albrecht of Brandenburg)가 루터교로 개종하고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절연함으로써, 그는 프로이센 공작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이후, 프로이센 공국은 세속화하여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지역이 되었다. 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544년 알버티나 대학이 설립되면서 교육과 인쇄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튜튼 기사단장은 1466년 포메른 지방과 단치히를 뺏긴 이래로 폴란드의 신하로 전락하였으므로 새로이 탄생한 프로이센 공국도 폴란드의 봉신국으로서 인정받았는데, 이때 프로이센 공국의 상속은 알브레히트의 후손만이 계승할 수 있도록 조약되었었다.

1618년, 프로이센계 호엔촐레른의 대가 끊기게 되면서 프로이센 공국은 본래 폴란드가 회수했어야 하나, 스웨덴을 놓고 구교도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와 신교도 쇠데르만란트공 칼 (이후 칼 9세) 사이의 계승 전쟁이 터지고, 이 와중에 러시아 제국의 차르 자리를 놓고 발발한 내전에도 폴란드가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등 깊게 간섭하게 되면서 힘에 부치게 되자

브란덴부르크계 호엔촐레른 선제후(選帝侯) 요한 지기스문트가 알브레히트 2세 프리드리히의 사위 자격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프로이센 공작으로서 폴란드의 봉신으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허용해주었다.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가의 통치 하에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동군연합)이 되었다.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선제후의 1657년 웰라우(Wehlau) 조약에 의해 프로이센 공국을 폴란드와 스웨덴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눈 앞으로 다가온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을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1세를 위해 군사 8000명을 원군으로 파견해 지원하는 것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영역 밖인 프로이센에 대해 왕이라는 호칭을 얻었던 것이다.

프로이센 왕국

1701년 1월 18일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가 되었으며, 프로이센 왕국을 성립한다.이후, 프로이센 공국의 영토들은 동 프로이센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뒤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전체가 프로이센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루이 14세를 모방하여 화려한 생활과 사치를 즐겼고, 항상 국고를 압박했지만, 동시에 교양인이기도 했기에 프로이센 대학교를 세우고, 예술 아카데미와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수도 베를린을 고대 아테네에 버금가는 문화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군사강국으로서 발전

프리드리히 1세가 1713년에 서거하고,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즉위하였다. ‘군인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는 부왕과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그는 군사력을 한층 더 강화하는 한편, 관료제도를 정비했으며, 그 바탕 위에서 절대 왕정을 확립하여 프로이센을 군사강국으로 키웠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국가의 번영과 영토 확장은 무엇보다도 군사력이 강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에 따라 병력면으로는 유럽에서 4위였지만, 실제적인 군사력은 유럽 최강을 자랑했다. 이렇게 하여 프로이센은 군국주의 국가이자 고도의 능률성을 가진 관료주의 국가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아들로 부왕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2세는 강인한 정신과 예리한 지성을 갖춘 계몽군주였다. 그는 부왕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병력을 20만으로 증강하는 등 군비를 더욱 강화하고,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해갔다. 1740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를 계승한, 오스트리아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두 차례 전쟁(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7년 전쟁)을 통해 오데르 강 유역의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음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지위를 이어받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를 크게 위협했다. 또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더불어 폴란드 분할에도 끼어들어, 동프로이센을 브란덴부르크 공국으로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유럽의 군사대국으로 성장시켜, 1772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가담하여 서프로이센을 합병한 뒤로도 계속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는 학문과 예술의 애호가였으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와 달랑베르 등을 가까이 하면서 계몽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근대적인 법전을 편찬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프리드리히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위기와 개혁의 시대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때에 들어서면서 프로이센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왕은 어리석었으며 군대는 나약해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으며, 예나 전투와 아우어슈테트 전투 등 싸우는 족족 패한 뒤, 1807년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의 반을 잃고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대륙 봉쇄령에 따른 대영무역금지와 프랑스군 주둔 등의 경제적 압박을 당하여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샤른호르스트나 클라우제비츠, 슈타인, 하르덴베르크 등에 의한 근대화를 위해 실시한 개혁에 의해서 농민 해방과 행정 기구의 쇄신을 실시했다. 프랑스에 의한 지배는 독일인들에게 민족으로서의 자각심을 불어넣어,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자로서의 역할을 프로이센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같은 열광적인 애국자들이 나타나 내셔널리즘을 고취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프로이센은 아직 그러한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대 개혁을 단행한 프로이센은 대(對)나폴레옹 해방전쟁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여 1815년의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면서 다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815년의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은 폴란드 분할로 획득한 영토의 일부를 사실상 러시아에게 양보하게 되었지만, 그 대신 베스트팔렌 등을 획득하여 인구가 1000만 명에 이르렀다. 동년에는 독일 연방에도 가맹하여 맹주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세력을 양등분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는 프로이센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정체를 부르는 반동의 시대였다.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 신성동맹을 체결한 프로이센은 자유주의적 독일 통일 운동을 억압하면서 개혁은 정체되었고 관료절대주의가 난입하게 되었다. 1848년 3월 혁명으로 한때 캄프하우젠, 한제만 등 라인란트 시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주 지배체제가 다시 강화되었다.

독일제국의 맹주

1862년에 내각 총리 대신으로 취임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당시 존재했던 의회와 언론사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독일의 통일은 오직 철과 피로써 결정된다."고 주장하여, 철혈 정책을 내세우게 된다. 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여, 1871년 독일 제국의 선언을 이끌었고, 빌헬름 1세를 황위에 앉혔다(이때 부터는 프로이센 왕이 독일제국 황제를 겸함)

비스마르크는 1888년에 즉위한 빌헬름 2세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결국 사임하였고, 빌헬름 2세는 식민지 확장 정책을 취하기 위해 프랑스와 벨기에, 영국과 네덜란드와 다투는 경우가 잦았다. 프랑스와 스페인과는 2차례의 모로코 문제 때문에 다투었고, 영국과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경쟁적인 관계였으며 벨기에와는 국경 문제로 다투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어 독일을 패전국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다.

현대

제 1차 세계대전

1차대전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선이 고착화되어 연합국과 동맹국은 총력전을 벌이지만 양측 모두 전세를 역전시킬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한 채, 서로 막대한 인적, 물적피해를 입었다. 전쟁에 필요한 보급품을 조달하는데 지친 국민들은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반전여론을 조성하였고, 휴전을 요구하였다. 이 무렵 해상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연이은 패배로 인한 수상함(水上艦)의 수적 불리함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제국은 잠수함을 적극 활용하였고, 비록 수상함(水上艦)의 부족으로 영국, 프랑스 영해 및 북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지는 못하였지만, 잠수함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고, 전선을 북해로 한정하여, 연합국의 함대가 독일 영해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전쟁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한편, 해외 식민지가 연합국에 의해 공격 당하고, 식민지와의 교역로가 차단되면서 원료 공급이 어려워졌고 보급품 조달에 차질이 생기면서, 국민들의 배급량이 줄어들자 반전여론이 극에 달하였다. 전쟁지속을 주장하던 군부 내각 역시 전쟁이 보다 장기화 될 경우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워졌음을 깨닫고 정부에 휴전을 제안하면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채 연합국과의 평화협상 및 휴전 제의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때마침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 정권이 타도되고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1918년 3월 러시아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휴전협정에 조인하였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를 포함한 당시 독일이 점령했던 동유럽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다. 동부전선이 사라지고 독일의 마지막 총공세였던 루덴도르프 공세가 성공하면서 다급해진 연합국측도 평화협상에 나서기 시작했고, 영국, 프랑스와는 4월, 미국과는 7월에 각각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러시아를 뒤 이어 독일도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되었다. 독일이 이탈하자 동맹국은 총 붕괴되어 9월 30일 불가리아, 10월 27일 오스트리아, 30일에는 오스만투르크로 항복이 잇따랐다. 이리하여 5년에 걸쳐 전례없는 인적, 물적 피해를 남긴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후 독일 내부에서는 1918년 4월 당시 평화협상에 동의하지 않았던 해군지도부에서 단독으로 실패할 것이 분명한 공격 명령을 하달하자, 그에 반발하여 킬 군항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에 노동자들이 호응하면서 11월 혁명이 일어나자, 당시 총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황제 빌헬름2세는 황제의 전제적인 권력을 포기하고 입헌군주국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수립된 입헌군주 체제하의 독일 제국을 헌법이 작성된 도시의 이름을 따 바이마르제국이라고 부른다.

1차대전 후반에 가까스로 전쟁에서 발을 뺀 독일은 간신히 패전은 면했지만, 동맹국들의 패전으로 인해 막대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 연합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무효로 하진 않았지만 휴전협정과 베르사유에서의 종전협정 과정을 거치며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를 상실하고, 점령했던 모든 지역에서 철수하였으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베르사유에서 식민지 분할 문제 뿐아니라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 프랑스 국경지방에 비무장지대 설치, 폴란드의 독립, 일부 영토 벨기에에 양도와 같은 본토지역에 대한 분할에 관한 논의도 있었지만 알자스-로렌 반환과, 라인 강 비무장지대 설치, 일부 영토의 벨기에 양도만이 통과되어 독일은 전쟁 이전의 본토지역만을 비교적 온전히 보장 받게 되었다. 파리강화회의 이후 다른 동맹국들의 전쟁배상과 더불어 독일에도 배상책임이 부여되어 358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군비도 대폭 축소하여 신무기 개발이 금지되었으며, 군사력은 전쟁 전의 1/4 수준으로 고정되었다.

한편 독일의 괴뢰국이었던 폴란드 섭정왕국도 문제였다. 폴란드 섭정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항복하면서 맺은 생제르맹조약과 트라이농조약에 따라 추가적인 영토를 획득하였으나 1919년 폴란드의 민족주의자 피우수트스키가 반란을 일으킨다. 독일은 남아있던 모든 군사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반란을 제압하는데 성공하지만, 반란진압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고 폴란드 섭정왕국을 제외한 모든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잃게 된다. 반란이 제압된 후 빌헬름 2세가 폴란드 왕국의 왕으로 오르고 폴란드를 정식으로 독일제국에 편입함으로서 바이마르제국은 폴란드를 합병하기에 이른다.

폴란드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독일 군대가 철수한 동유럽 지역은 보수 반동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이 지역 민족주의자들의 격렬한 내전 무대로 바뀌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다시 손에 넣었지만, 핀란드와 발트 3국은 러시아로부터 불안한 독립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바이마르 제국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되고 입헌군주정 체제 하에서 시작된 바이마르 제국은 선거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는 등 민주주의가 발전하였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 지불과 해외 식민지 상실 등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혼란이 계속되었으나 배상금을 모두 지불하고 미국의 차관을 도입하면서 잠시나마 안정기를 가졌다. 1925년 공산주의가 대두하고 경기가 악화됨에 따라 독일 내부의 우익적 정치성향이 점차 우세하게 된다. 이 시기 동안 외국자본을 유입하여 공장이 재정비되었고, 생산에 주력하여 경기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과학과 학문, 예술 등의 측면에서도 발전을 보였고 1925년에는 국제연맹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선정, 1926년에 가입하기도 한다.

1929년 증권시장의 붕괴로 인해 세계공황이 찾아오고 바이마르 제국에 대한 자본 회수로 인해 독일 내부는 다시금 혼란스러워진다. 실업자가 증가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당시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사회민주당은 국민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1930년에 내각을 해체하기에 이른다. 총선거가 실시되고 가까스로 보수주의 정치인인 브뤼닝이 총리에 당선되었지만 독일 내부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정국이 분열되고 나치당과 공산당은 높은 지지율을 달성한다.

선거에서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브뤼닝은 자신의 개혁안을 실시하기 위해 당시 재상인 힌덴부르크에 의존했고 힌덴부르크는 재상직권을 남용해 정국을 주물렀다. 애초부터 반(反)의회적이었던 힌덴부르크는 극우적인 사상을 가진 파펜, 슐라이허 같은 정치인들과 어울리며 바이마르제국은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브뤼닝은 힌덴부르크의 내각에 대한 개입을 버티지 못하고 사퇴를 하게 되자 그의 후임으로 극우적이고 무능한 정치인들이 임명된다.

동시에 나치당 역시 높은 지지율을 보이며 나치스를 중심으로 한 결속이 굳어지는데 반해 좌익은 계속해서 정치적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분열했기 때문에 독일 내의 많은 사람들이 점차 나치당을 지지지게 된다. 그러자 극우적인 정치인들은 지지율 확보를 위해 히틀러와 나치당에게 손을 뻗었고 1933년 힌덴부르크가 재상직권을 활용해 히틀러를 부수상에 임명하자 나치스는 이후 즉각적으로 좌익 정당들을 탄압하고 선거를 통해 다수의석을 차지했다. 1934년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와 나치당이 정권을 완전 장악하였고, 왕가(王家)의 존재가 히틀러의 총통 취임과 나치스 일당독재에 방해가 되자, 왕가를 쾨니히스베르크에 유폐시키고, 입헌군주정을 폐지하였다. 히틀러는 총통 취임 이후 독일 제3제국을 선포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히틀러는 1935년 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1936년 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11월에 독일과 일본은 방공협정(防共協定)을 체결하였고, 1937년 11월 이탈리아가 이에 가입하여 3국은 반소(反蘇)를 공공연히 외쳤으며, 이것을 구실로 하여 국내에서의 파시즘화와 대외침략을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똑같이 공산주의를 겁내는 미 ·영 ·프의 지배층으로부터 그 침략을 용인받으려고 하였다. 이 같은 전략이 먹혀들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유화정책을 펼쳤고,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스 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은 동 ·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한편 국제연맹 또는 집단안전보장 체제는 붕괴되어 갔다.

뮌헨 협정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끝없는 히틀러의 요구에 영 ·프에서도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양국은 나치 독일을 주시하고 체코슬로바키아에 원조를 약속하기에 이른다. 독일은 동유럽에서의 독일&소련 세력권을 획정하기 위해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독일·체코슬로바키아 간의 긴장 격화 끝에 소련의 중립을 확보한 독일은 1939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가 헝가리 등 적대국에 영토를 할양하는 중재안을 강요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가 이를 거절하고, 연이어 히틀러의 사주로 슬로바키아의 분리독립을 추진하던 티소를 해임하는 등 반(反) 독일 정책을 추구하자 나치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해체하기 위한 침공을 개시한다.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으로 인해 영·프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1940년 4월 독일은 덴마크를 점령함과 동시에 노르웨이에 침입하여 영·프군을 격퇴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며 프랑스와 휴전을 맺는다. 이로 인해 프랑스 영토의 3/2를 점령하였고, 남프랑스에는 비시 정권이 들어섰다. 프랑스를 꺾은 히틀러는 계속하여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단행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이에 불가결한 영국 해협의 제공권(制空權)을 둘러싼 전투, 즉 ‘브리튼의 싸움(Battle of Britain)’에서 영국 공군을 제압하지 못하였다. 1940년 9월에는 이 작전을 무기연기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며 이탈리아, 일본과 3국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나치 정권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따라 독일군 내의 유대계 장교들이 숙청당하고, 군대의 요직을 히틀러 측근들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군부 내에서 반(反)나치 세력이 나타났고, 국방군 고위 장교와 독일 정부 고급공무원 다수로 이루어진 검은 관현악단은 독일이 영국과의 전투에서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한 채, 히틀러가 소련 침공 계획을 준비하자 히틀러를 암살하고 혼란을 틈타, 쿠데타를 일으켜 히틀러의 측근들과 나치 정권의 수뇌부를 체포한 뒤, 계엄령을 선포하여 행정을 장악하였다. 히틀러를 대체할 인물로 독일군에서 정신적인 지주였던 독일 육군 총사령부 참모장을 지낸 루트비히 베크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쿠데타 지도자들로 새롭게 구성된 군부 내각이 들어섰다. 신군부 내각은 나치 청산을 통한 정권 안정을 위해 연합국과 휴전협상에 나섰지만 거절 당하였다.

또한, 히틀러의 암살과 군부 쿠데타 소식이 전해지자 국외 점령지에서는 레지스탕스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연합국이 은밀히 레지스탕스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였지만 남프랑스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점령군에 의해 진압되어 완전한 해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938년 강제병합 이후 오스트리아 나치당 정권이 들어섰지만, 반대파 숙청이 독일의 경우처럼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병합기간 중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전통을 부정하는 등, 오스트리아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었기에 1941년 3월 독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내전으로까지 사태가 악화되었다. 연합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국의 자금&장비지원(참전X)을 받아 프랑스 본토에 대한 상륙시도를 하였으나 1940년 됭케르크에서 큰 피해를 입었던 영국군만으로 이루어졌던 상륙작전은 실패하였다.

신군부 내각은 연합국과의 계속된 전투와 오스트리아 내전으로 인해 나치 청산에 집중할 수 없었고, 히틀러 사후 지속된 혼란으로 인해 민심마저 흔들리자, 애국심 조장을 통한 국민결집과 나치 청산, 신군부 내각의 정당성 확보를 위하여 나치 집권으로 쾨니히스베르크에 유폐되어있던 호엔촐레른 프로이센 왕가(王家)로 관심을 돌렸고, 독일 제2제국의 황태자였던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를 복위시켜 황제로 추대하고 신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새로운 황제는 바이마르 제국을 붕괴시키고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유폐시킨 나치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하였고, 이에 신군부 내각은 나치 이전의 입헌 군주정 체제로의 복귀를 추진하면서 정권 안정을 위해 연합국과의 휴전협정을 계속 시도하였다.

한편 군부 쿠데타로 체포되었던 나치 정권의 수뇌부들은 혼란을 틈타, 추종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로 탈출하여 무솔리니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의 내전을 진압하고, 1941년 6월 아직 나치에 우호적이던 남부 독일지역에 바이에른 국가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파시스트 정권을 세워 신 프로이센 왕국과 충돌하며 새로운 내전이 발생하였다. 나치 세력이 무솔리니의 지원 아래, 국외 점령지의 독일점령군을 빠르게 흡수하며 세력을 확대시켜 나가자, 연합국 측에서도 소모적이고 부진한 전투보다, 반나치 세력이었던 신 프로이센 왕국을 이용해 전쟁을 마무리 짓고자, 연합국에 협력과 프랑스에서의 전면철수를 조건으로 신군부 내각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였다.

신 프로이센 왕국 측의 영향이 미치던 프랑스 서부와 북부해안 일대 지역에서 독일 점령군이 철수하자 노르망디를 통해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였고 1941년 8월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하였다. 그와 동시에 남프랑스 각지에서는 레지스탕스가 일어나 비시 괴뢰정권과 파시스트 군대를 몰아냈고, 같은 해 11월 프랑스가 완전히 해방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1942년에는 미국이 연합국으로 참전하였고, 같은 해 5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을 완전히 소탕한 뒤, 미·영·프 3국은 이탈리아 진공작전을 실행해 각각 6월과 7월에 북서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섬을 점령하였다.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하자 이탈리아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와 보수파가 무솔리니를 감금하고 바돌리오 내각을 성립시켰다(7월 25일). 바돌리오는 즉각 영 ·미와 교섭을 개시하여 9월 3일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소련도 이탈리아 진공 작전이 시작되자, 이탈리아와 남독일의 파시스트 정권 및 대일본제국에 선전포고하며 연합국에 가담하였고, 1942년 8월 발칸 반도에서 이탈리아군을 몰아냈으며, 같은 해 10월 영국군과 함께 노르웨이의 친 나치 정권과 독일점령군을 소탕하였다. 11월 비엔나에 소련군이 입성하며 오스트리아를 나치 치하에서 해방시켰다.

유럽 전역에서 추축국이 패퇴하고 연합군이 진격해오자, 중부독일까지 진출하였던 남독일의 파시스트 정권의 세력은 점차 축소되기 시작하였으며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붕괴되고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더욱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신 프로이센 왕국도 연합국에 호응하여 프랑스에서 철군한 병력을 활용하여,총력을 다해 남독일과 싸워 소련군이 오스트리아를 해방시킬 쯔음하여 남독일 파시스트 정권이 수도로 삼았던 뮌헨을 점령하고 내전을 종식하였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국이 승리하고 나치 정권이 붕괴되자, 전후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연합국과 신 프로이센 왕국 사이의 휴전협정이 부분적으로 효력을 인정받아, 신 프로이센 왕국의 치하에 있던 북독일 및 동부 지역을 영토로 하여 군부 내각을 해산하고, 유엔의 감독 하에 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주정부로 권력을 이양한다는 조건으로 독립이 인정되었지만, 파시스트 정권이 유지되었던 남독일 지역은 나치즘 청산을 위해 미·영·프 3국에 각각 분할되어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남부 독일에서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연합군에 붙잡힌 괴링, 괴벨스 등 나치 수뇌부는 무솔리니 등 파시스트 수뇌부와 함께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고, 신군부 내각은 해산되었으며,1949년 유엔 감독하에 치뤄진 총선거에서 독일기독교민주연합(CDU)이 승리하여 군부로 부터 정권을 이양받아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준비하였다.

냉전과 프로이센 연합왕국의 성립

정부수립 과정에서,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제와 호엔촐레른 가문은 군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좌익 계열이었던 사회민주당보다 기민련(CDU)을 지원하였고, 총선 당시 기민련 측에서도, 공산주의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의 경쟁을 하던 사민당이 연합국 중에서 소련의 비호를 받고있다는 식의 적색공포를 활용하면서, 독일인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국민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으므로, 신군부 내각이 애국심 조장을 통한 국민 결집의 용도로 활용하였던 황제가 자신들을 지지하는 상황을 적극 활용하였다. 이때 형성된 기민련 내각과 황제 사이의 협력관계는, 새로운 정부의 형태에도 영향을 주어 공화정이 아닌 입헌군주정 체제로 나아 갈 수 있었다.

전후 동유럽이 공산화되고,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격화되자 독일을 서방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1947년 미·영·프 3국이 각각 신탁통치하던 남부독일 지역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1949년 신군부 내각이 관리하던 지역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와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던 남부독일 지역을 통일시켰다. 통일된 독일의 새로운 국명은 프로이센 연합왕국이었으며, 입헌군주정 체제로 왕권과 정치가 분리되었으며, 프로이센식의 독자적인 민주주의가 발달하였다.

1947년 6월 마셜플랜에 의해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아 1948년 6월 그 원조를 뒷받침으로 하여 통화개혁이 실시되었는데, 그 개혁은 경제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센은 1949년 10월에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1951년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에 가맹하였고, 1955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서유럽연합(WEU)에 가입하였다. 1969년 브란트 총리는 ‘동방정책(Ostpolitik)’을 제시, 평화공존을 모색하여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였으며, 1973년 UN(국제연합)에 가입하였다.

헬무트 콜 총리는 유럽경제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마르크를 포기하고, 유럽경제·화폐 통합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국제평화유지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98년 9월 총선거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선거를 통한 최초의 여·야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새 총리 슈뢰더는 신중도 이념으로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2005년 11월 프로이센 하원은 앙겔라 메르켈(Angela D. Merkel) 기민당 당수를 최초의 여성 총리로 선출했다. 메르켈 총리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7년 동안 이끌어온 사민-녹색당 연정을 넘겨받고 기민당(CDU)-기사당(CSU) 연합과 사민당(SPD)의 대연정을 공식 출범시켰다. 프로이센의 대연정은 1966년 첫 번째 이후 39년 만으로, 하원 의석 614석 중 448석을 차지하여 국정운영의 안정성을 확보하였다. 프로이센은 2007년 1월부터 유럽연합(EU) 및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 의장국을 맡아 세계사의 중심에 재등장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UN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2년 1월 호엔촐레른家의 수장이었던 다쉬헝 알브레히트 폰 프리드리히는 평소 공화정을 동경하였으며 결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 입헌군주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국호도 프로이센 공화국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화정 전환과 함께 폴란드 주(州)도 자치권을 인정받아, 폴란드 특별 자치주로 승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