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시위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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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홍콩 시위대는 중국의 모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 중간에는 중국 본토에 대한 문화적 멸시와 인종적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수많은 구호들이 이러한 인종적 편견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중국의 민주주의, 사회합의과정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했으며, 모든 것을 그저 중국이라는 권위주의 체제의 탄압과 발악으로 상정하고 투쟁하고 악마화하는데에 그쳤다. 한국 역시도 민주화운동이라는 성역을 둘러싼 감성팔이에 근거하여 자유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중국이라는 체제를 유신 체제와 같은 시대착오적 권위주의 정권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유신 정권같은 승리집단에 근거한 독재와 계급독재에 기반한 권위주의 정권은 그 운용과 속성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오늘날에 들어와 더욱 달라졌음에도, 한국의 지식인 그룹은 멍청하게도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더욱 불행하게도 이러한 나이브함이 홍콩 시위대의 대부분과 시위대를 지지하는 외국 운동가의 주류 기조였다.

홍콩과 서구 세력이 간과한 것은, 오늘날 중국 모델로 대표되는 중국식 체제는 공산당만의 작품이 아닌 기존의 유학자, 중국 전통 사상가들 그리고 여러 신진 개혁개방을 이끈 서방 경험이 있는 지식인과 마오주의자, 심지어 자본가들의 합의점이었으며, 오늘날 중국의 식자층과 여론주도세력은 이 체제의 공범이자 적극적 동조자이고, 이들이 중국의 여론을 생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홍콩 시위대와 외국 세력의 착각과는 달리, 중국은 자신의 식자층의 입을 더이상 막지 않고, 이들의 눈과 귀를 필요이상으로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홍콩 시위대의 인종차별적 구호와 자신들을 향한 악마화에 가장 분노하는 세력이었다. 그 결과, 홍콩은 중국공산당만을 적으로 돌리지 않았다. 바로 중국 14억 인민을 적으로 두게 되었다.

유신 정권에 반기를 들었던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 지식인들과 달리, 홍콩 시위대는 기존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모델이 중국의 체제보다 어떠한 효율성을 가질 수 있는지 중국 지식인들을 설득할 학문적 역량이 없었다. 오늘날 막대한 번영을 구가하며, 경쟁을 부추키며 하이테크 기업들을 양산하는 무지막지한 중국을 상대로, 기존의 소련과 맞서던 논리와 데이터를 이용해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설파할 수 있었을까?

중국은 서구 사회가 중국을 어떻게 비판하는지에 대한 파악을 너무나 잘 하고 있다. 중국의 행동이 선전을 비롯한 중국 본토의 도시들이 홍콩보다 번영과 안전을 구가하자마자 이루어졌다는 것도, 중국이 홍콩 지식인들과의 학문상의 헤게모니 싸움을 대비하며 수많은 데이터를 축적하여 얻은 확신에 기반한 것이었다.

중국은 우산 혁명처럼 침묵하거나 나름대로 수위를 지켜가며 조심스럽게 반응하며 홍콩 시위를 달래기를 선택하지 않았고, 이들의 비판의 한계와, 자신(중국)의 주장이 시위대보다 확고함을 확신하자마자, 힘싸움, 즉 치킨 게임을 시전했다. 그리고 그 결정 뒤에는 공산당만이 아니라 14억 중국 인민의 분노가 있었다.

홍콩 사태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나는 자유민주주의가 주는 도그마와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자가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질것이라는 당시 소련의 믿음에 가까운 논리적 추측과 같이, 오늘날 자유주의 세계에서는 중국의 권위주의는 자연스럽게 그 비효율성과 체제경직성, 단조로움을 버티지 못하고 쇠퇴하거나 붕괴할거라는 믿음이 근거없이 만연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생산성과 효율성, 이를 통한 인권 보장 측면에서 빠른 속도로 권위주의 국가에 따라잡히고 있다. 홍콩 사태는 자유민주주의가 생성하는 도그마를 광신하고, 자유민주주의만이 선이고, 번영을 약속하는 것이며 상대방은 악의에 찬 악마이자 자신을 위해 타인을 압제하려는 세력이라는 믿음은 버릴때가 되었다고, 세계 지식인들에게 경고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중국의 권위주의 정권은 권위주의가 어쩔수 없이 생산하는 딜레마와 비생산성을 그 문화적 토양으로 최소화하고 있으며, 기술의 발전으로 빠르게 생산성을 개조해 나가고 있다. 자유주의가 기술의 발전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이용해 마르크스가 예측한 모순(자본주의의 자가붕괴)을 극복하고 승리했듯이, 권위주의 역시도 그러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