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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르 2세(식혜)|페타르 2세]]가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추축국의 분노를 사 침공이 앞당겨졌다고도 볼 수 있다. 국가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외국으로 망명을 간 왕실을 좋게 보지 않는 국민들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알렉산다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렉산다르가 국왕으로서 지켜야 하는 것들 중 첫 번째로 삼은 것은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였다.
 
[[페타르 2세(식혜)|페타르 2세]]가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추축국의 분노를 사 침공이 앞당겨졌다고도 볼 수 있다. 국가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외국으로 망명을 간 왕실을 좋게 보지 않는 국민들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알렉산다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렉산다르가 국왕으로서 지켜야 하는 것들 중 첫 번째로 삼은 것은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였다.
  
물론 입헌군주제가 이미 확립된 상황에서, 정치적 권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즉위했지만, 정치에 관해서는 발언을 일절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유고슬라비아 왕국 총리(식혜)|총리]]들의 장례식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참가하지 않는 등 정치적 행동 또한 벌이지 않았다. 이러한 알렉산다르의 모습에 왕실 지지율은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카타리나 카라조르제비치(식혜)|카라리나 왕비]]가 장애 아동을 돕기 위해 설립한 재단의 활동에도 부지런히 참여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인들의 평가가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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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입헌군주제가 이미 확립된 상황에서, 정치적 권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즉위했지만, 정치에 관해서는 발언을 일절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유고슬라비아 왕국 총리(식혜)|총리]]들의 장례식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참가하지 않는 등 정치적 행동 또한 벌이지 않았다. 이러한 알렉산다르의 모습에 왕실 지지율은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카타리나 카라조르제비치(식혜)|카타리나 왕비]]가 장애 아동을 돕기 위해 설립한 재단의 활동에도 부지런히 참여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인들의 평가가 좋은 편이다.
  
 
== 두 번의 결혼 ==
 
== 두 번의 결혼 ==

2023년 2월 26일 (일) 20:40 판

유고슬라비아 국왕 휘장.png
유고슬라비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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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왕국 제4대 국왕
알렉산다르 2세
Александар II

HRH-Crown-Prince-Alexander-Prestolonaslednik-Aleksandar-11.jpg
왕호
알렉산다르 2세
Александар II
출생
1945년 7월 17일
영국 런던 메이페어 클라리지스 호텔
재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국왕
1970년 11월 29일 ~
이름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Александар Карађорђевић
가문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배우자
마리아 다 글로리아 오를레앙-브라간사 (1972년 결혼 / 1985년 이혼)
카타리나 카라조르제비치[1] (1985년 결혼)
자녀
페타르, 필리프, 알렉산다르
아버지
페타르 2세
어머니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종교
세르비아 정교회

개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제4대 국왕. 최초로 유고슬라비아가 아닌 외국에서 태어난 국왕이다.[2]

작위

Kingdom of Yugoslavia coat of arms.pngRoyal Monogram of King Aleksandar II of Yugoslavia.png
문장모노그램
  •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왕세자 전하 Његово Краљевско Височанство Престолонаследник Александар Карађорђевић од Југославије (1945년 7월 17일 ~ 1970년 11월 3일)
  •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 2세 국왕 폐하 Његово Величанство краљ Александар II Карађорђевић од Југославије (1970년 11월 3일 ~ 현재)

생애

출생과 성장 과정

79048871.jpgPa-and-grandmother.jpg
알렉산다르와 페타르 2세, 알렉산드라 왕비어린 알렉산다르와 마리야 당시 왕대비

1945년 7월 17일, 왕실이 추축국의 침공을 피해 영국 런던으로 망명해 있을 때 페타르 2세알렉산드라 왕비 사이에서 알렉산다르 2세가 태어났다.

알렉산다르가 태어난 곳은 런던 메이페어의 클라리지스 호텔로, 원래라면 외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야 하지만, 영국 정부의 배려로 알렉산다르가 태어나는 동안 212호실을 유고슬라비아에 양도하여, 알렉산다르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난 것이 되었다. 알렉산다르는 출생 직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알렉산다르의 부계와 모계 모두 왕족 혈통이었다. 알렉산다르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알렉산다르 1세와 외할아버지인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1세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한편 알렉산다르의 외할머니인 마리야는 루마니아의 페르디난드 1세와 영국의 마리 알렉산드리아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마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였다. 때문에 알렉산다르는 빅토리아의 직계 후손이며, 영국 왕위계승 순위에도 포함되어 있다.

알렉산다르의 세례는 1945년 10월 2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세르비아 총대주교 가브릴로 5세의 주관 하에 거행되었다. 대부모는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공주였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추후 영국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왕실은 다시 고국으로 올 수 있게 되었다. 알렉산다르는 스위스, 미국, 영국 등지에서 유학생활을 한 후 왕립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유고슬라비아 육군에서 대위로 복무했다. 그러나 알렉산다르의 군생활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군주로서의 삶

Aleksandar II coronation.jpg
1971년 10월, 알렉산다르 2세의 대관식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아버지는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매우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해야 했다.
- 2000년, 즉위 30주년 인터뷰 중

페타르 2세가 1970년 11월 3일 간경변으로 사망해 법정추정상속인이었던 알렉산다르가 육군으로 복무하고 있는 상태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왕세자 신분로 입대했던 그는 국왕 신분으로 제대하게 되었다.

페타르 1세의 대관식 이후 여러 사정으로 대관식을 진행하지 않고 있던 유고슬라비아였지만, 예외적으로 대관식을 치르기로 결정하면서 국왕은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1971년 10월 13일, 성 사바 대성당에서 11개월 간 준비해 온 대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양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약 70년 만에 치러지는 대관식에 많은 국민들은 알렉산다르를 지지하고 축복했다. 유럽 왕실 최초로 생중계 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의 영향으로 알렉산다르의 대관식 역시 TV로 중계되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내각과 왕실에서 많은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왕실이 언제까지고 국민들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알렉산드라 왕대비의 주장으로 TV 중계는 성사되었다.

페타르 2세가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추축국의 분노를 사 침공이 앞당겨졌다고도 볼 수 있다. 국가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외국으로 망명을 간 왕실을 좋게 보지 않는 국민들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은 알렉산다르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렉산다르가 국왕으로서 지켜야 하는 것들 중 첫 번째로 삼은 것은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였다.

물론 입헌군주제가 이미 확립된 상황에서, 정치적 권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즉위했지만, 정치에 관해서는 발언을 일절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총리들의 장례식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참가하지 않는 등 정치적 행동 또한 벌이지 않았다. 이러한 알렉산다르의 모습에 왕실 지지율은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카타리나 왕비가 장애 아동을 돕기 위해 설립한 재단의 활동에도 부지런히 참여하면서 유고슬라비아인들의 평가가 좋은 편이다.

두 번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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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당시의 알렉산다르 2세와 카타리나 왕비현재의 알렉산다르 2세와 카타리나 왕비

알렉산다르의 두 결혼 모두 국왕 신분에서 이루어졌다. 첫 결혼 상대는 브라질 황실의 마리아 다 글로리아 오를레앙-브라간사 공주였다. 마리아와는 1972년 7월 1일부터 1985년 2월 19일까지 지냈으며, 이 때 페타르와 필리프, 알렉산다르 세 아들을 보았다.

모종의 이유로 1985년 마리아와 이혼하고, 같은 해 9월 20일 캐서린 클레어리 베이티스와 결혼했다. 황실의 혈족이던 마리아와는 달리 카타리나는 어떠한 배경도 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라 왕대비가 알렉산다르를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1. 캐서린 클레어리 베이티스(Katherine Clairy Batis)
  2. 다만, 영국 정부의 배려로 알렉산다르가 태어나는 동안 호텔방을 유고슬라비아에 양도하여 알렉산다르는 명목상으로나마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난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