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문서: {| class="wikitable" style="float: right; border:2px solid #003893; text-align: left" |- ! colspan="5" style="font-size: 10.5pt; color: #FFF; background: margin: -5px -10px; padding:...) |
편집 요약 없음 |
||
50번째 줄: | 50번째 줄: | ||
|} | |} | ||
|} | |} | ||
{{목차}} | |||
=개요= | |||
[[페타르 1세(식혜)|페타르 1세]]의 조카이자 [[유고슬라비아 왕국(식혜)|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국왕(식혜)|국왕]] [[페타르 2세(식혜)|페타르 2세]]의 당숙으로, 페타르 2세 재위 기간 동안 섭정 자격으로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었다. | |||
=생애= | |||
==출생과 성장과정== | |||
||<table align=center><width=400px><tablebordercolor=#003893> <div style="margin: -5px -9px">[[파일:0591.jpg]] || | |||
파블레 왕자는 1893년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페타르 1세의 남동생 아르센 왕자와 러시아 데미도프 가문의 오로라 파블로브나 데미도바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식혜)|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은 오브레노비치 가문과의 경쟁에서 패해 망명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파블레는 세르비아가 아닌 제네바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 |||
1817년부터 시작된 카라조르제비치 가문과 오브레노비치 가문의 길고 긴 피비린내 나는 경쟁이 1903년 쿠데타로 알렉산다르 왕이 사망하면서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세르비아 국회의 추대를 받아 페타르 1세는 세르비아 국왕으로 즉위했고, 파블레는 그런 삼촌을 따라 1903년 처음으로 세르비아에 발을 딛었다. | |||
1912년 성인이 된 파블레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세르비아 엘리트들이 주로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을 간 것을 보면 이는 굉장히 특이했다고 볼 수 있다. 파블레는 옥스포드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교육받았고,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시끌벅적하기로 유명했던 다이닝 클럽인 '불링던 클럽'의 회원이었다. 파블레는 켄트 공작 조지 왕자와 헨리 채넌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들의 영향 탓인지 종종 "내가 영국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채넌은 파블레를 향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라고 말했다. | |||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선전포고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파블레는 11월이 되어서야 세르비아군에 입대하여 6개월 간 복무한 후, 1915년 5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1917년 1월 세르비아군에 재입대했으나 그해 4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두 번의 복무를 거치며 파블레는 자신과 군대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 |||
||<table align=center><width=500px> <div style="margin: -5px -9px">[[파일:11v71jr1.jpg]] || | |||
||<width=500px><tablebordercolor=#003893><#003893><:> {{{#ffffff '''파블레 왕자와 올가 공주의 결혼'''}}} || | |||
파블레는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런던에 살았으며 베오그라드에는 자주 방문하지 않았다. 런던에 있는 동안 그는 영국 귀족층과 사교를 즐겼다. 1923년에는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공주와 자매인 [[올가 카라조르제비치(식헤)|올가 공주]]와 혼인했다. 훗날 조지 6세가 된 요크 공작이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결혼식의 주례를 맡았다. | |||
1924년 1월 파블레는 마침내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왔다. 사촌 [[알렉산다르 1세(식혜)|알렉산다르 1세]]는 크로아티아인을 통치하기 위해 파블레를 부왕으로 앉힐 생각이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알렉산다르는 파블레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는데, 그와 대화하면서 알렉산다르는 파블레가 재치있는 지성인임을 느꼈다. 그러나 알렉산다르는 파블레가 1921년 헌법에 의해 새롭게 출범한 '단일국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크로아티아인의 불만에 너무 동정적이라 판단하고 그에게 지위를 주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파블레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 |||
||<table align=center><width=400px> <div style="margin: -5px -9px">[[파일:Kpavdeca1.jpg]] || | |||
||<width=400px><tablebordercolor=#003893><#003893><:> {{{#ffffff '''파블레 왕자와 그의 아들 알렉산다르와 니콜라'''}}} || | |||
헌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선에서 파블레는 유고슬라비아를 연방 체제로 되돌리려는 크로아티아인의 요구에 공감했으며, 시간이 지나면 크로아티아인의 불만이 사그라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르비아 정치인들을 못마땅해 했다. 파블레는 왕궁에서 지내면서 우울감에 시달렸고, 슬로베니아에 별장을 구입하고는 그곳으로 이사를 갔다. 슬로베니아에서 파블레는 예술품을 수집하고 자식들을 돌보는 데 시간을 보냈다. 런던, 파리, 뮌헨, 피렌체, 로마, 빈 등에서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파블레는 항상 아내와 함께 전시회에 가 예술품을 구입하곤 했다. | |||
==섭정자 파블레== | |||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이후 갑작스레 즉위한 페타르 2세는 11살에 불과했기에 파블레 왕자가 섭정을 맡았다. | |||
파블레는 스스로를 유고슬라브인이라고 칭할 정도로 유고슬라비아에 애착이 깊었기에 불안정한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시키려 했고, 1939년 8월에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었던 크로아티아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로아티아 농민당과의 협의로 자치주 '크로아티아 바노비나(Бановина Хрватска , Banovina Hrvatska)'를 만들었다. | |||
1941년 3월 25일, 한참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파블레는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막기 위해 전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추축국에 가입시켰다. 사실 말이 추축국 가입이지 '독일의 전쟁을 돕지 않아도 된다'고 명시되어 있는, 사실상의 중립 조약이었다. 그런데 사흘도 안 돼 파블레의 독단과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페타르 2세가 친연합 장교들과 결탁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파블레는 유고슬라비아를 떠나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망명하려다 영국령 케냐에서 억류되었다. 물론 페타르 2세 역시 삼국 동맹 조약을 물릴 생각은 없었지만 독일이 결코 원치 않았던 친연합 쿠데타에 더해서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들이 독일의 외교관과 국기를 모욕하는 일이 벌어지자 결국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게 된다. | |||
==망명생활과 귀국== | |||
남은 전쟁 기간 동안 파블레는 그의 가족과 함께 영국군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영국 언론은 파블레를 나치 동조자로 묘사하여 비난했다. | |||
그의 처제 켄트 공장부인과 그 남편 켄트 공작은 윈스턴 처칠에게 파블레와 그의 아내 올가가 영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호소했으나 처칠은 파블레는 나치 독일에 동조한 전범이라며 켄트 공작 내외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1942년 켄트 공작이 사망한 후 처칠은 조지 6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파블레 일가의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파블레는 1949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다가 이후 파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오랜 친구이자 미국의 부유한 미술사학자인 버나드 베렌슨과 만나 자신의 컬렉션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 |||
||<table align=center><width=400px> <div style="margin: -5px -9px">[[파일:2e5s8dt1.jpg]] || | |||
||<width=400px><tablebordercolor=#003893><#003893><:> {{{#ffffff '''프랑스 망명생활 중의 파블레 왕자와 올가'''}}} || | |||
한편 전후 들어선 [[요시프 브로즈 티토(식혜)|요시프 브로즈 티토]] 정부는 파블레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 가족의 입국을 금지했으나, 왕실의 기나긴 설득 끝에 입국 금지조치를 풀었다. 그러나 1970년까지 귀국하지 않다가 페타르 2세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자 그제서야 파블레는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왔다. | |||
파블레는 가족과 함께 베오그라드 [[신궁(식혜)|신궁]]에 이주했고, 페타르 1세의 대관식 경험을 살려 [[알렉산다르 2세(식혜)|알렉산다르 2세]]의 대관식 기획을 도왔다. 이후 신궁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파블렌는 1976년 9월 14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
[[분류:유고슬라비아 왕국(식혜)]] |
2023년 9월 24일 (일) 19:43 기준 최신판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 | ||||||||||||||||||||||||||||||||||||||||
---|---|---|---|---|---|---|---|---|---|---|---|---|---|---|---|---|---|---|---|---|---|---|---|---|---|---|---|---|---|---|---|---|---|---|---|---|---|---|---|---|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 Павле Карађорђевић | ||||||||||||||||||||||||||||||||||||||||
1893년 4월 27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1976년 9월 14일 (83세) | ||||||||||||||||||||||||||||||||||||||||
베오그라드 신궁 | ||||||||||||||||||||||||||||||||||||||||
다뉴브 토폴라 오플레나츠 | ||||||||||||||||||||||||||||||||||||||||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섭정 | ||||||||||||||||||||||||||||||||||||||||
1934년 10월 9일 ~ 1941년 3월 27일 | ||||||||||||||||||||||||||||||||||||||||
|
개요
페타르 1세의 조카이자 유고슬라비아 국왕 페타르 2세의 당숙으로, 페타르 2세 재위 기간 동안 섭정 자격으로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었다.
생애
출생과 성장과정
파블레 왕자는 1893년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페타르 1세의 남동생 아르센 왕자와 러시아 데미도프 가문의 오로라 파블로브나 데미도바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은 오브레노비치 가문과의 경쟁에서 패해 망명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파블레는 세르비아가 아닌 제네바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817년부터 시작된 카라조르제비치 가문과 오브레노비치 가문의 길고 긴 피비린내 나는 경쟁이 1903년 쿠데타로 알렉산다르 왕이 사망하면서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세르비아 국회의 추대를 받아 페타르 1세는 세르비아 국왕으로 즉위했고, 파블레는 그런 삼촌을 따라 1903년 처음으로 세르비아에 발을 딛었다.
1912년 성인이 된 파블레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세르비아 엘리트들이 주로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을 간 것을 보면 이는 굉장히 특이했다고 볼 수 있다. 파블레는 옥스포드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교육받았고,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시끌벅적하기로 유명했던 다이닝 클럽인 '불링던 클럽'의 회원이었다. 파블레는 켄트 공작 조지 왕자와 헨리 채넌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들의 영향 탓인지 종종 "내가 영국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채넌은 파블레를 향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라고 말했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선전포고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파블레는 11월이 되어서야 세르비아군에 입대하여 6개월 간 복무한 후, 1915년 5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1917년 1월 세르비아군에 재입대했으나 그해 4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두 번의 복무를 거치며 파블레는 자신과 군대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블레 왕자와 올가 공주의 결혼 |
파블레는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런던에 살았으며 베오그라드에는 자주 방문하지 않았다. 런던에 있는 동안 그는 영국 귀족층과 사교를 즐겼다. 1923년에는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공주와 자매인 올가 공주와 혼인했다. 훗날 조지 6세가 된 요크 공작이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결혼식의 주례를 맡았다.
1924년 1월 파블레는 마침내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왔다. 사촌 알렉산다르 1세는 크로아티아인을 통치하기 위해 파블레를 부왕으로 앉힐 생각이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알렉산다르는 파블레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는데, 그와 대화하면서 알렉산다르는 파블레가 재치있는 지성인임을 느꼈다. 그러나 알렉산다르는 파블레가 1921년 헌법에 의해 새롭게 출범한 '단일국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크로아티아인의 불만에 너무 동정적이라 판단하고 그에게 지위를 주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파블레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파블레 왕자와 그의 아들 알렉산다르와 니콜라 |
헌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선에서 파블레는 유고슬라비아를 연방 체제로 되돌리려는 크로아티아인의 요구에 공감했으며, 시간이 지나면 크로아티아인의 불만이 사그라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르비아 정치인들을 못마땅해 했다. 파블레는 왕궁에서 지내면서 우울감에 시달렸고, 슬로베니아에 별장을 구입하고는 그곳으로 이사를 갔다. 슬로베니아에서 파블레는 예술품을 수집하고 자식들을 돌보는 데 시간을 보냈다. 런던, 파리, 뮌헨, 피렌체, 로마, 빈 등에서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파블레는 항상 아내와 함께 전시회에 가 예술품을 구입하곤 했다.
섭정자 파블레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이후 갑작스레 즉위한 페타르 2세는 11살에 불과했기에 파블레 왕자가 섭정을 맡았다.
파블레는 스스로를 유고슬라브인이라고 칭할 정도로 유고슬라비아에 애착이 깊었기에 불안정한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시키려 했고, 1939년 8월에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었던 크로아티아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로아티아 농민당과의 협의로 자치주 '크로아티아 바노비나(Бановина Хрватска , Banovina Hrvatska)'를 만들었다.
1941년 3월 25일, 한참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파블레는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막기 위해 전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추축국에 가입시켰다. 사실 말이 추축국 가입이지 '독일의 전쟁을 돕지 않아도 된다'고 명시되어 있는, 사실상의 중립 조약이었다. 그런데 사흘도 안 돼 파블레의 독단과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페타르 2세가 친연합 장교들과 결탁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파블레는 유고슬라비아를 떠나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망명하려다 영국령 케냐에서 억류되었다. 물론 페타르 2세 역시 삼국 동맹 조약을 물릴 생각은 없었지만 독일이 결코 원치 않았던 친연합 쿠데타에 더해서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들이 독일의 외교관과 국기를 모욕하는 일이 벌어지자 결국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게 된다.
망명생활과 귀국
남은 전쟁 기간 동안 파블레는 그의 가족과 함께 영국군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영국 언론은 파블레를 나치 동조자로 묘사하여 비난했다.
그의 처제 켄트 공장부인과 그 남편 켄트 공작은 윈스턴 처칠에게 파블레와 그의 아내 올가가 영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호소했으나 처칠은 파블레는 나치 독일에 동조한 전범이라며 켄트 공작 내외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1942년 켄트 공작이 사망한 후 처칠은 조지 6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파블레 일가의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파블레는 1949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다가 이후 파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오랜 친구이자 미국의 부유한 미술사학자인 버나드 베렌슨과 만나 자신의 컬렉션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망명생활 중의 파블레 왕자와 올가 |
한편 전후 들어선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정부는 파블레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 가족의 입국을 금지했으나, 왕실의 기나긴 설득 끝에 입국 금지조치를 풀었다. 그러나 1970년까지 귀국하지 않다가 페타르 2세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자 그제서야 파블레는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왔다.
파블레는 가족과 함께 베오그라드 신궁에 이주했고, 페타르 1세의 대관식 경험을 살려 알렉산다르 2세의 대관식 기획을 도왔다. 이후 신궁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파블렌는 1976년 9월 14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