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티나 연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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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
 
===아르티나 내전 이전===
 
===아르티나 내전 이전===
1560년 이전까지는 원주민이거나 소규모 부족이 대부분이였으나 그후 서양인들과 접촉후 크라시 대왕이 인근섬들을 공격하거나 회유하여 복속시켰다 인근섬을 통일후 스페인과 전쟁에서 스페인을 물러나게하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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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년 이전까지는 원주민이거나 소규모 부족이 대부분이였으나, 그 후 서양인들과 접촉 후 크라시 대왕이 인근 섬들을 공격하거나 회유하여 복속시켰다. 인근섬을 통일후 스페인과 전쟁에서 스페인을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 이후 정식적으로 아르티나 왕국을 선포한다 스페인과의 전쟁이후에도 서양인들과의 교류는 게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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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후 정식적으로 아르티나 왕국을 선포한다. 스페인과의 전쟁이후에도 서양인들과의 교류는 게속되었다.
 
===아르티나 내전===
 
===아르티나 내전===
1936년 수도섬에서 왕궁에 20명에 사람들이 시위하다가 총에맞고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후 왕정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일어났다 수도섬근방에서는 왕정에대해 긍정적인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외 사람들은 그렇지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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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수도섬에서 왕궁에 20명에 사람들이 시위하다가 총에맞고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후 왕정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일어났다 수도섬근방에서는 왕정에대해 긍정적인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후 1936년 11월에 아르티나 국민군과 아르티나 공산당이 일부섬을 장악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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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1936년 11월에 아르티나 국민군과 아르티나 공산당이 일부섬을 장악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초기 왕정을 축출하는게 목표였기 때문에 국민군과 공산당이 협력하는 형태를 취하고있었으나 서로 적극적으로 돕지는않았다 수도섬 인근에서 4년간 진전이없자 국민군과 공산군간에 갈등이 생겼고 결국 3파전 양상을 띄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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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초기 왕정을 축출하는게 목표였기 때문에 국민군과 공산당이 협력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서로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았다. 수도섬 인근에서 4년간 진전이없자 국민군과 공산군간에 갈등이 생겼고 결국 3파전 양상을 띄게된다.
국민군은 추축국에서 공산당은 소련에게서 지원을얻고있는반면에 왕국군은 하베론 루카푸 원수의 지휘아래 버티는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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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군은 추축국에서 공산당은 소련에게서 지원을얻고있는반면에 왕국군은 하베론 루카푸 원수의 지휘아래 버티는중이였다.
 
왕국군이 강력하게 수도섬인근에서 두진영의 군을 방어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군이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공격 밀어붙히고 궁지에 몰리자
 
왕국군이 강력하게 수도섬인근에서 두진영의 군을 방어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군이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공격 밀어붙히고 궁지에 몰리자
 
루카푸장군은 당시여왕인 타나 그로리 크라시(15)에게 공산당에게 평화회의를 제안하는 방안을 제안하였고  
 
루카푸장군은 당시여왕인 타나 그로리 크라시(15)에게 공산당에게 평화회의를 제안하는 방안을 제안하였고  
여왕이 "전쟁을 빨리끝내주세요"라는 답변과 함깨 승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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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이 "전쟁을 빨리끝내주세요"라는 답변과 함깨 승낙되었다.
그들에게는 배신자였으나 공산당이 무너지면 왕국군도 버티다가 결국 망할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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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배신자였으나 공산당이 무너지면 왕국군도 버티다가 결국 망할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당시 공산당 당수 르타 내브다가 이 제안에대해 한달간의 극심한 고민끝에 받아들면서 왕정군과 공산군간의 기묘한 연합전선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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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산당 당수 르타 내브다가 이 제안에대해 한달간의 극심한 고민끝에 받아들면서 왕정군과 공산군간의 기묘한 연합전선이 이루어졌다.
  
 
국민당은 아무리 그래도 왕정이랑 손을잡냐면서 르타 내브다는 공산주의가 아닌 왕정파라면서 맹비난했고
 
국민당은 아무리 그래도 왕정이랑 손을잡냐면서 르타 내브다는 공산주의가 아닌 왕정파라면서 맹비난했고
공산당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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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각해졌다.
내브다는 "왕정에 복속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깡패잡자고 학살귀한태 깡패랑 손잡고 같이죽기 싫기때문에 이 결정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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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브다는 "왕정에 복속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깡패잡자고 학살귀한태 깡패랑 손잡고 같이죽기 싫기때문에 이 결정을내렸다"라고 발언하여 반대 의견을 물리쳤다.
 
그후 왕정,공산 연합군은 국민군에게 함깨 대항하였으나 서로 이렇다할 성과는 없는체 내전을 질질 끌게된다  
 
그후 왕정,공산 연합군은 국민군에게 함깨 대항하였으나 서로 이렇다할 성과는 없는체 내전을 질질 끌게된다  
 
1943년부터 본격적으로 연합군에게 지원을 받기시작하였고 그후 1946년 4월에 국민군이 항전하고있던 무인도를 점령하면서  
 
1943년부터 본격적으로 연합군에게 지원을 받기시작하였고 그후 1946년 4월에 국민군이 항전하고있던 무인도를 점령하면서  
티나 여왕이 공산,왕국연합의 승리선언을하였고 1947년 1월 15일 국민군 지도자 아르베트 요크르가 정식적으로 항복하면서 막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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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여왕이 공산,왕국연합의 승리선언을하였고 1947년 1월 15일 국민군 지도자 아르베트 요크르가 정식적으로 항복하면서 막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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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티나 내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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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월 15일 공식적으로 국민군 항복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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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1일 왕국과 공산국 간의 긴말한 회의가 진행되었다 전후처리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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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측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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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베론 루카푸장군 / 마로 베르크트 외무대신 /왕실일원 에리나 그로리 크라시 /매낸 그로리 루타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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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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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타 내브다 당수 / 하티 세케스 인민군장군 / 라이타이 포트 정치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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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왔다 이 회의는 커피회의(처음에 이 7명에게 나눠준게 커피라) 청백회의 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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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의로 아르티나의 정국이 결정되는것이기 때문에 베르크트 외무대신은 신중하였다 자칫 회의가 잘못되면 아르티나가 분단되는건 고사하고 또 다시 전쟁이 발발할수있기 때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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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측은 왕정폐지와 대통령제,4년대통령중임제를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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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에서는 입헌군주제,내각정부를 구성을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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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토론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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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에서 많은것을 양보하는걸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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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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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제는 표면적으로만 폐지 다만 왕족들은 지금처럼 생활에 별문제가 없게하게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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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집정부제 수립(대통령이 대외 외교,국방 담당 총리는 행정 대내적일 담당)[대통령은 직접선거 총리는 다수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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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국민투표가 진행되었고 대통령은 간발의차로 공산당이 승리하고 총선거에서는 자유보수당이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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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별 탈 없이 내전의 상흔을 딛고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소련붕괴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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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은 애국진보당으로 당명을 변경 하고 국기는 조금 수정되어 현재의 국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2017년 11월 16일 (목) 16:35 판

아르티나 연방기.png
국기
국가우리를 정의롭게 해주소서
아르티나 지도.png
아르티나 연방 전도
수도로티나 크라시 섬
정치
대통령유진 로멜
총리
국왕
상원의장
하원의장
스밀 패란
루드 그로리 크라시
소피나 메네르프
해리 퍼슨
역사
정부수립 
 • 아르티나 내전 종식 및 공산군-왕국군 연합조약1948년
지리
면적251,300km2
인문
공용어아르티나어
인구
2017년 어림95,000,000명
경제
통화아르티나 달러 ($)

틀:공식 설정

아르티나 연방은 북태평양에 있는 국가이다.

역사

아르티나 내전 이전

1560년 이전까지는 원주민이거나 소규모 부족이 대부분이였으나, 그 후 서양인들과 접촉 후 크라시 대왕이 인근 섬들을 공격하거나 회유하여 복속시켰다. 인근섬을 통일후 스페인과 전쟁에서 스페인을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 이후 정식적으로 아르티나 왕국을 선포한다. 스페인과의 전쟁이후에도 서양인들과의 교류는 게속되었다.

아르티나 내전

1936년 수도섬에서 왕궁에 20명에 사람들이 시위하다가 총에맞고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후 왕정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일어났다 수도섬근방에서는 왕정에대해 긍정적인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후 1936년 11월에 아르티나 국민군과 아르티나 공산당이 일부섬을 장악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초기 왕정을 축출하는게 목표였기 때문에 국민군과 공산당이 협력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서로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았다. 수도섬 인근에서 4년간 진전이없자 국민군과 공산군간에 갈등이 생겼고 결국 3파전 양상을 띄게된다.
국민군은 추축국에서 공산당은 소련에게서 지원을얻고있는반면에 왕국군은 하베론 루카푸 원수의 지휘아래 버티는중이였다.
왕국군이 강력하게 수도섬인근에서 두진영의 군을 방어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군이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공격 밀어붙히고 궁지에 몰리자
루카푸장군은 당시여왕인 타나 그로리 크라시(15)에게 공산당에게 평화회의를 제안하는 방안을 제안하였고
여왕이 "전쟁을 빨리끝내주세요"라는 답변과 함깨 승낙되었다.
그들에게는 배신자였으나 공산당이 무너지면 왕국군도 버티다가 결국 망할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당시 공산당 당수 르타 내브다가 이 제안에대해 한달간의 극심한 고민끝에 받아들면서 왕정군과 공산군간의 기묘한 연합전선이 이루어졌다.

국민당은 아무리 그래도 왕정이랑 손을잡냐면서 르타 내브다는 공산주의가 아닌 왕정파라면서 맹비난했고
공산당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각해졌다.
내브다는 "왕정에 복속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깡패잡자고 학살귀한태 깡패랑 손잡고 같이죽기 싫기때문에 이 결정을내렸다"라고 발언하여 반대 의견을 물리쳤다.
그후 왕정,공산 연합군은 국민군에게 함깨 대항하였으나 서로 이렇다할 성과는 없는체 내전을 질질 끌게된다
1943년부터 본격적으로 연합군에게 지원을 받기시작하였고 그후 1946년 4월에 국민군이 항전하고있던 무인도를 점령하면서
티나 여왕이 공산,왕국연합의 승리선언을하였고 1947년 1월 15일 국민군 지도자 아르베트 요크르가 정식적으로 항복하면서 막을내렸다.

아르티나 내전 이후

1947년 1월 15일 공식적으로 국민군 항복직후
1947년 2월 1일 왕국과 공산국 간의 긴말한 회의가 진행되었다 전후처리문제

왕국측에서는
하베론 루카푸장군 / 마로 베르크트 외무대신 /왕실일원 에리나 그로리 크라시 /매낸 그로리 루타 공작
공신당은
르타 내브다 당수 / 하티 세케스 인민군장군 / 라이타이 포트 정치국장
이 나왔다 이 회의는 커피회의(처음에 이 7명에게 나눠준게 커피라) 청백회의 라고도 불린다.

이 회의로 아르티나의 정국이 결정되는것이기 때문에 베르크트 외무대신은 신중하였다 자칫 회의가 잘못되면 아르티나가 분단되는건 고사하고 또 다시 전쟁이 발발할수있기 때문이였다.

공산당측은 왕정폐지와 대통령제,4년대통령중임제를 제안
왕정에서는 입헌군주제,내각정부를 구성을 제안

기나긴 토론끝에
왕궁에서 많은것을 양보하는걸로 결정

민주정부 수립
군주제는 표면적으로만 폐지 다만 왕족들은 지금처럼 생활에 별문제가 없게하게될것
이원집정부제 수립(대통령이 대외 외교,국방 담당 총리는 행정 대내적일 담당)[대통령은 직접선거 총리는 다수당이]

이후 국민투표가 진행되었고 대통령은 간발의차로 공산당이 승리하고 총선거에서는 자유보수당이 승리한다.

이후 별 탈 없이 내전의 상흔을 딛고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소련붕괴이후
공산당은 애국진보당으로 당명을 변경 하고 국기는 조금 수정되어 현재의 국기를 사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