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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기원== | ==거란의 기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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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에 관한 언급은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거란의 기원으로는 훙노 기원설과 동호 기원설이 존재하며, <위서>에서는 흉노인 우문부에서 분기되었다고 기술되어있고, <구오대사>에서는 거란이 옛 흉노의 종족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반면 원나라 대에 저술된 <요사>에서는 거란이 동호에서 기원했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 거란에 관한 언급은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거란의 기원으로는 훙노 기원설과 동호 기원설이 존재하며, <위서>에서는 흉노인 우문부에서 분기되었다고 기술되어있고, <구오대사>에서는 거란이 옛 흉노의 종족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반면 원나라 대에 저술된 <요사>에서는 거란이 동호에서 기원했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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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련씨 연맹은 연맹의 수장을 가한이라고 칭했다. 각 부의 수장은 이르건이라고 불렸다. 745년 거란은 당에 항복하였으나 평로절도사 안록산이 거란을 약탈하면서 거란은 다시금 반란을 일으켜 위구르에 의탁했다. 100년간 거란은 위구르에 특산품을 공납하고, 변방을 정찰하면서 연명하였다. 위구르에 복속된 기간 동안 위구르의 문화와 제도가 거란에 전파되어 사회 발전을 촉진시켰다. 유목 생활을 하던 거란은 원시적인 농업을 시작했으며, 철기주조기술도 발전하여 경제와 군사력도 커지기 시작했다. 씨족 연맹이 공고화하면서 부락 귀족이 형성되었고 노예가 등장했다. 840년 위구르 제국이 키르기즈에게 멸망하자 거란은 독립하게 되었다. | 요련씨 연맹은 연맹의 수장을 가한이라고 칭했다. 각 부의 수장은 이르건이라고 불렸다. 745년 거란은 당에 항복하였으나 평로절도사 안록산이 거란을 약탈하면서 거란은 다시금 반란을 일으켜 위구르에 의탁했다. 100년간 거란은 위구르에 특산품을 공납하고, 변방을 정찰하면서 연명하였다. 위구르에 복속된 기간 동안 위구르의 문화와 제도가 거란에 전파되어 사회 발전을 촉진시켰다. 유목 생활을 하던 거란은 원시적인 농업을 시작했으며, 철기주조기술도 발전하여 경제와 군사력도 커지기 시작했다. 씨족 연맹이 공고화하면서 부락 귀족이 형성되었고 노예가 등장했다. 840년 위구르 제국이 키르기즈에게 멸망하자 거란은 독립하게 되었다. | ||
==요나라의 성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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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7년 거란 질랄부의 야율아보기는 요련씨를 대신해서 거란 연맹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실위, 해, 습, 토혼 등 이웃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난세에 개입하여 이극용, 유인공 등 세력과 동맹 또는 전쟁을 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912년부터 벌어진 거란 내부의 반란을 914년까지 완전히 제압한 야율아보기는 915년 부족장들을 숙청하면서 거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야율아보기는 왕족이었던 대하씨족과 요련씨족을 야율씨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씨족들은 소씨로 편성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 |||
916년 야율아보기는 정식으로 칭제하면서 국호를 거란으로 정하고 신책이라고 건원했다. 한족이었던 강묵기를 시켜 상경임황부를 건설해 수도로 삼았으며, 한자를 토대로 거란족 고유의 문자인 거란 문자를 창제했다. 돌궐, 당항, 사타, 나이만 등 몽골 고원의 부족들을 친정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켰고, 여진 부족들을 복속시켜가면서 동북 지역의 패권도 차지하였다. 936년 후당의 하동절도사 석경당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거란에 지원을 요청했다. 석경당은 칭신과 칭자를 청했을 뿐 아니라 연운 지역의 16개 주를 할양할 것을 약속했다. 936년 9월 야율아보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던 야율덕광은 중원으로 친정하여 후당군을 패퇴시켰다. 11월에 석경당이 제위에 오르자 거란은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매년 비단 30만 필을 공납받았다. | |||
이로써 거란은 유주와 운중 일대의 넓은 농업 지역을 점유함으로써 국력을 발전시켰으며, 발해인과 한인을 국가의 주요 구성원으로써 부리게 되었다. 새로 얻어낸 16주의 통치제도는 바뀌지 않았고, 그대로 과거제도를 실시하면서 통치했다. 942년 후진의 석경당이 죽고 석중귀가 제위에 오르자 후진은 더 이상 거란에 칭신하지 않았고, 항거할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에 야율덕광은 군대를 일으켜 개봉을 점령했고, 석중귀의 항복을 받아 후진을 멸망시켰다. | |||
947년 야율덕광이 직접 개봉에 입성해 중국식 의관을 착용하고, 중국식 예법에 따라 문무백관을 접견하는 등 중원을 통치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국호는 대요로 정해졌다. 하지만 당시 거란 군대는 군량과 마초를 보급한다는 명분으로 화북을 약탈하고 다녔는데 화북 전역에서 거란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결국 중원은 요나라의 통제를 벗어났다. 요태종 야율덕광은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체감했다. 이듬해 2월에는 하동절도사 유지원이 태원에서 칭제하고, 후한을 건립하였다. 이에 중국 각지의 절도사들이 거란 관리를 죽이고 후한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태종은 개봉에 입성한 지 3개월만에 북으로 철수했다. 거란 군대가 연운16주로 철군하자 후한은 과거 후진의 영역을 모두 장악했다. | |||
무분별한 약탈과 학살로 중원 통치를 실패했던 경험을 얻은 태종은 개봉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및 민정과 군정을 체험하면서 중원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초보적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4월에 회군 중 태종 야율덕광이 병사하자 장자 야율완이 제위를 이었다. 요세종 야율완은 948년 유목민족의 세도가 뿌리박혀 있던 막북에 북원추밀사를 설치했고, 후진의 신하들을 연운 지역으로 보내 남면관 계통의 남추밀사로 임명하였다. 950년에는 이어 북면관과 남면관에 정사성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남, 북면관 직무의 담당과 역할이 명확해졌으며, 요나라 북, 남면 관제가 확립되었다. |
2019년 3월 10일 (일) 16:02 판
카라키타이 울루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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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ra-Khitai Хар_хятан_улс 大契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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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언덕 위에 핀 철쭉 | ||||
![]() 영토 | |||||
수도 | 알마티 | ||||
역사 | |||||
소비에트 연방으로 부터 독립 | 1991년 8월 31일 | ||||
• 카라키타이 성립 | 1993년 8월 31일 | ||||
지리 | |||||
면적 | 약 794,633㎢ | ||||
시간대 | KGT (UTC+5~+6) | ||||
인문 | |||||
공용어 | 거란어 | ||||
지역어 | 러시아어, 키르기즈어,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등 | ||||
인구 | |||||
2019년 조사 | 18,897,247명 | ||||
인구 밀도 | 약 23.78명/㎢ | ||||
경제 | |||||
GDP(PPP) | 2019년 어림값 | ||||
• 전체 | $약 1,571억 (101위) | ||||
• 일인당 | $8,318 | ||||
GDP(명목) | 2019년 어림값 | ||||
HDI | 0.754 | ||||
통화 | 카라키타이 솜 (QKS) | ||||
기타 | |||||
ISO 3166-1 | 417, QK, QKT | ||||
도메인 | .qk | ||||
국제 전화 | +996 |
개요
카라키타이(거란어:Хар_хятан_улс)는 8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는 국가이며, 수도는 알마티이고, 공용어는 거란어이다. 중앙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다민족국가이다.
- 전자정부 주소 : https://cafe.naver.com/khitan
지리
카라키타이는 내륙국으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중국과 국경을 접경하고 있다.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카라키타이의 국토는 지역별로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가지고 있다. 타지키스탄, 중국과 접하는 카라 키타이의 동남 지역은 해발 3000m가 넘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물이 많고, 온화한 평원 지역에 동남권 인구가 집중되어 있으며, 이 지역은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 지중해성 기후에 속해 있다. 중국과의 국경에는 천산 산맥이 펼쳐져 있고,남쪽의 타지키스탄과의 국경에는 파미르 고원이 위치한다. 고산 기후의 동부 산지에는 7,439m의 포베티산과 6,995m의 칸·텡리 봉 등 거친 고산이 존재한다. 시르다리야 강이 국토를 지나 아랄 해로 흘러들며, 이식쿨 호수와 발하슈 호수 등 거대한 호수들이 자리잡고 있다.
오트라르에서 발하슈 호수 일대까지 펼쳐져있는 카라키타이 중부는 광활한 평원으로 이뤄져 있으며, 옛날부터 대초원을 중심으로 한 유목이 발달했던 지역이다. 초원지대는 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지며, 총 면적이 804,500㎢로 세계에서 가장 큰 초원지대이다. 초원지대는 대륙성 기후에 속하며, 겨울에 춥고, 여름에는 더운 날씨가 일년 내내 이어진다. 연평균 강수량이 250㎜,산악지대는 450㎜에 이르며, 서부의 사막은 비가 적게 내린다.
카라 키타이 서부는 키질 쿰 사막과 아랄 쿰 사막 등 사막 지대로 이뤄져 있다. 아랄쿰 사막은 비교적 근래에 형성되었다. 한 때 세계 4위의 면적을 가진 호수였던 아랄 해는 1960년대부터 대규모 면화 재배를 위해 아랄 해로 들어오는 아무다리야 강과 시르다리야 강의 물을 중간에 차단하고, 관개용수로 사용한 이후부터 강물의 유입이 해마다 줄어들면서 급격히 작아져버렸다. 호수로 들어오는 물이 줄자 염도가 3배 이상 높아지고 수량이 70% 이상 감소해 작아지면서 철갑상어와 잉어 등 토착 어종이 멸종했으며, 어업으로 번성하던 주변 어민들은 생계를 잃게 되었다. 아랄쿰 사막 일대는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이가 극심하며, 비도 적게 내려 인근의 농토도 황폐화되었다. 현재는 카라키타이 정부가 우즈베키스탄과 제휴하여 아랄 해를 복구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2019년 현재는 아랄 해가 더 이상 감소하는 것을 막고, 해수도 많이 늘려놓은 상태이다.
문화
카라키타이는 다수민족인 거란족이 전체 인구의 65%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을 정도로 복합민족적인 국가이다. 키르기즈인들이 12%로 소수민족 중에서는 두번째로 많으며, 카자흐, 러시아, 우즈베크, 후이족, 위구르족, 여진족, 고려인 등의 소수민족들이 전국에 고루 분포한다.
거란족은 과거 동아시아의 요하 강 유역에 거주하던 민족으로, 요나라가 여진족에게 멸망한 12세기부터 몽골제국 치하인 14세기까지 대대적으로 중앙아시아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거란어는 몽골과 일맥상통하는 동호어 계열의 한 갈래로 몽골어와 근원이 같다. 거란족이 통일하여 요를 세우기 전까지 거란족들은 문자가 없었다. 920년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창제한 거란 문자는 대자와 소자로 이뤄져 있었고, 현재에는 몽골 문자와 키릴문자에 밀려 사용되지 않는다.
거란족은 역사적으로 몽골족, 퉁구스족, 한족 등과 어우러져 지내왔기에 이들과의 관계가 밀접하며, 생활 및 문화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거란족 남자는 여름에 흰색의 천으로 된 마고자를 입고 겨울에는 솜이 든 옷 또는 가죽 도포 등을 입는다. 보통 말 타기에 편리하도록 아래 부분에 트임이 있는 델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옷깃과 모든 가장자리에는 팔보문으로 선 장식을 한다. 남자들은 여름철 밀짚모자를 쓰거나 이마 부분에 흰 천 조각을 수수하게 묶어 장식한다. 겨울철에는 귀 덮개가 달린 가죽 모자를 쓴다.
여성들은 오른쪽으로 여미는 델 위에 조끼를 착용하는데 축제에는 여러 색으로 수놓은 명주, 비단으로 만든 큰 옷 위에 조끼를 입는다. 머리는 틀어올려 꽃으로 장식하며, 꽃문양을 수놓은 비단신을 신는다.
거란족은 전통적으로 일부일처제의 혼인습속을 이어왔는데, 전근대에는 자식이 없을 경우 첩을 두기도 했지만 모든 권한은 본부인이 가지고 있었다. 결혼결정은 부모에 의해 결정되었고, 특히 부계가 같은 친족과는 결혼하지 않는 족외혼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거란족은 다른 민족과의 통혼율도 59.3%로 높아 점차 민족간의 구분도 허물어지고 있다.
거란족 사회는 노인을 공경하고, 서로 도우며 손님을 환대한다. 장례는 토장 풍습을 지켜왔는데 화장이나 풍장을 하는 비중이 늘고 있다. 망자는 씨족 묘지 또는 가족 묘지에 묻으며, 북에서 남으로 먼저 선대를 묻고 그 다음 세대를 묻으며 같은 항렬에서는 형이 왼쪽, 동생이 오른쪽으로 배열된다. 거란족은 과거 중국을 지배하던 시대의 영향으로 전통명절도 중국을 닮아있다. 원소절, 단오절, 중원절, 중추절, 제석 등이 있다. 다만 중국의 춘절은 아열절로 독자적으로 발전했는데 거란족이 중시하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종교
고대에 거란족은 유목민들의 원시적 다신교였던 샤머니즘을 신봉하였다. 다만 요나라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거란 지역에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918년에는 상경임황부에 사찰들이 지어지면서 불교가 거란족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요 성종 이후부터는 요나라 황제들도 불교를 숭상하면서 불교는 거란인 다수가 신봉하는 종교가 되었다.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요를 멸망하면서 거란족 유이민들이 중앙아시아에 서요 정권을 세운 이후,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거란인들은 한동안 불교를 숭상하였다. 하지만 당시 서요 인구의 다수는 이슬람을 숭상하는 투르크인들이 다수였고, 지배계층인 거란족에게도 이슬람 교도가 늘어났다. 몽골 제국이 서요까지 세력을 넓히면서 서요의 왕실이 차가타이 왕조로 대체되었다. 거란족이 믿던 불교는 본디 화엄종이 우세했으나 몽골의 영향으로 점차 티베트 불교로 대체되었다. 또한 중원에 거주하던 거란족 및 기타 여러 종교를 숭상하는 민족들이 원나라의 내분을 피해 이주해오면서 중앙아시아는 종교 구성이 매우 다채롭게 변모했다.
현재 카라키타이의 주요 종교로는 티베트 불교와 이슬람교, 러시아 정교회, 탱그리 샤머니즘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다. 만호와 소수민족마다 신봉하는 종교도 다르며, 다수라고 할 만한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카라키타이의 공업은 채광과 야금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주요 천연자원은 원유와 천연가스, 우라늄 등이며, 동부의 산악지대에는 물이 풍부해 물이 부족한 인근 국가들에 수출하고 있다. 중부의 대초원에서는 1950년대 이래 많은 토지들이 개간되어 밀, 보리, 옥수수 등의 곡식을 생산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실크로드의 중심에 있었던 역사성에 기인해모직과 견직 산업, 세라믹 타일 제조기술이 발달했다. 또한 유목 문화에서 기인한 목축업 및 유제품 생산도 꾸준히 이뤄져 왔다. 최근부터는 정부의 육성책에 힘입어 화학공업과 기계공업의 발달도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카라키타이는 지난 몇 년 동안 연간 3~4%씩의 성장세를 보여 왔으며, 이는 40년 동안 발견된 유전과 가스 및 광업 산업의 발전에 기인한 것이다. 동시에 카라키타이 정부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를 포함하여 경제 협력 개발기구(OECD) 국민들에게 비자 면제를 제공했다. 관세제도를 살펴보면 2018년 1월부로 카라키타이 관세법이 개정되면서 카라키타이의 통관 시스템은 전자통관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복잡한 서류 행정절차가 폐지되었고, 서면으로 진행하던 통관 과정들이 모두 온라인으로 바뀌었다. 신관세법의 효과로 통관에 소요되는 시간이 4시간 가량 단축되었으며, 수입업체가 관세를 바로 납부할 수 없는 경우 분할 납부가 허용되거나 6개월을 초과할시 이자를 내는 조건으로 완납을 미룰 수 있는 제도도 시행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자본 유입과 경제 성장이 증가하여 카라키타이는 2018년 7개월동안 약 67억 달러의 해외 직접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으며, 작년과 비교해서 지표는 244% 증가했다.
'순금'을 뜻하는 솜은 카라키타이의 화폐단위이다. 1993년 5월 10일, 카라키타이 중앙은행은 10, 100, 500, 1000 솜 동전을 발행했고, 1000, 2000, 3000, 5000, 8000솜 지폐를 발행했다. 2014년 초 러시아 루블 가치 하락의 영향을 받아 평가절하되었다. 2019년 상반기 연금 및 임금 인상에 따라 민간 소비가 확대되었으나 카라키타이 솜화 가치 하락에 따라 저출 및 인플레이션율이 소폭 증가했다. 카라키타이의 1인당 GDP는 2019년 8,318$로 집계되었다. 이는 2017년 7,924$라는 수치에 비해 상승한 것이며, 이러한 실질GDP 성장은 2차 산업 부분에서 견인된 것으로 알려진다.
행정구역
카라 키타이의 행정단위로 8개의 주가 존재하며, 하위개념으로 도시 및 만호 단위로 지방자치단체가 구성되어 있다. 8개의 주는 다음과 같다.
-알마티 주 -이식쿨 주 -추이 주 -탈라스 주 -오시 주 -잠빌 주 -오트라르 주 -키질-오르다 주
역사
거란의 기원
거란에 관한 언급은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거란의 기원으로는 훙노 기원설과 동호 기원설이 존재하며, <위서>에서는 흉노인 우문부에서 분기되었다고 기술되어있고, <구오대사>에서는 거란이 옛 흉노의 종족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반면 원나라 대에 저술된 <요사>에서는 거란이 동호에서 기원했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거란이라는 명칭은 거란인 스스로가 부른 명칭이었다. 우문부에서 기원한 고막해에 복속되어있던 거란은 388년 북위의 정벌로 고막해가 멸망하자 분리되었고, 반세기가 지나면서 안정화하여 북위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378년 거란이 고구려를 공격해 8개의 부락을 빼앗았다고 한다. 6세기 중엽까지 거란은 고팔부의 연맹 단계로 존재하고 있었다. 고팔부는 외적의 침략을 공동으로 막기 위해 조직된 느슨한 부족 연맹이었다. 당시의 거란은 이웃 세력들에 비해 매우 약소했다. 동쪽에는 일찍이 봉건화를 이뤄 경제와 문화가 발전한 고구려가 있었고, 서쪽에는 초원을 통일한 유연이 있었다. 북부에는 거란과 비슷한 계통의 실위, 해 등의 세력이 존재했다. 479년 고구려가 유연과 연합해 세력을 넓히자 위협을 느낀 거란인들은 북위 효문제에 귀순하였고 다링강 유역으로 이주했다. 553년 돌궐이 유연을 멸망시킨 뒤 거란을 공격하자 거란은 돌궐에 복속되었으며, 나머지 1만 호는 고구려에 귀순했다. 돌궐이 동서로 분할된 584년에 거란은 돌궐로부터 독립하였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던 거란인들도 돌아왔다.
수말당초에 거란은 대하 씨족을 중심으로 연맹을 재조직했다. 당나라는 대하 씨족 부락에는 송막도독부를 설치하였고, 나머지부락을 영주도독부와 유주도독부에 예속시켜 거란을 통치했다. 당나라는 거란을 이용해 돌궐을 견제했는데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되면서도 때때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평정되는 일을 반복하면서 민족성을 지켜내었다. 730년 대하 씨족이 요련 씨족에게 밀려나 거란 연맹이 재편성되면서 거란과 당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요련씨 연맹은 연맹의 수장을 가한이라고 칭했다. 각 부의 수장은 이르건이라고 불렸다. 745년 거란은 당에 항복하였으나 평로절도사 안록산이 거란을 약탈하면서 거란은 다시금 반란을 일으켜 위구르에 의탁했다. 100년간 거란은 위구르에 특산품을 공납하고, 변방을 정찰하면서 연명하였다. 위구르에 복속된 기간 동안 위구르의 문화와 제도가 거란에 전파되어 사회 발전을 촉진시켰다. 유목 생활을 하던 거란은 원시적인 농업을 시작했으며, 철기주조기술도 발전하여 경제와 군사력도 커지기 시작했다. 씨족 연맹이 공고화하면서 부락 귀족이 형성되었고 노예가 등장했다. 840년 위구르 제국이 키르기즈에게 멸망하자 거란은 독립하게 되었다.
요나라의 성립
907년 거란 질랄부의 야율아보기는 요련씨를 대신해서 거란 연맹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실위, 해, 습, 토혼 등 이웃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난세에 개입하여 이극용, 유인공 등 세력과 동맹 또는 전쟁을 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912년부터 벌어진 거란 내부의 반란을 914년까지 완전히 제압한 야율아보기는 915년 부족장들을 숙청하면서 거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야율아보기는 왕족이었던 대하씨족과 요련씨족을 야율씨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씨족들은 소씨로 편성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916년 야율아보기는 정식으로 칭제하면서 국호를 거란으로 정하고 신책이라고 건원했다. 한족이었던 강묵기를 시켜 상경임황부를 건설해 수도로 삼았으며, 한자를 토대로 거란족 고유의 문자인 거란 문자를 창제했다. 돌궐, 당항, 사타, 나이만 등 몽골 고원의 부족들을 친정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켰고, 여진 부족들을 복속시켜가면서 동북 지역의 패권도 차지하였다. 936년 후당의 하동절도사 석경당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거란에 지원을 요청했다. 석경당은 칭신과 칭자를 청했을 뿐 아니라 연운 지역의 16개 주를 할양할 것을 약속했다. 936년 9월 야율아보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던 야율덕광은 중원으로 친정하여 후당군을 패퇴시켰다. 11월에 석경당이 제위에 오르자 거란은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매년 비단 30만 필을 공납받았다.
이로써 거란은 유주와 운중 일대의 넓은 농업 지역을 점유함으로써 국력을 발전시켰으며, 발해인과 한인을 국가의 주요 구성원으로써 부리게 되었다. 새로 얻어낸 16주의 통치제도는 바뀌지 않았고, 그대로 과거제도를 실시하면서 통치했다. 942년 후진의 석경당이 죽고 석중귀가 제위에 오르자 후진은 더 이상 거란에 칭신하지 않았고, 항거할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에 야율덕광은 군대를 일으켜 개봉을 점령했고, 석중귀의 항복을 받아 후진을 멸망시켰다.
947년 야율덕광이 직접 개봉에 입성해 중국식 의관을 착용하고, 중국식 예법에 따라 문무백관을 접견하는 등 중원을 통치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국호는 대요로 정해졌다. 하지만 당시 거란 군대는 군량과 마초를 보급한다는 명분으로 화북을 약탈하고 다녔는데 화북 전역에서 거란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란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결국 중원은 요나라의 통제를 벗어났다. 요태종 야율덕광은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체감했다. 이듬해 2월에는 하동절도사 유지원이 태원에서 칭제하고, 후한을 건립하였다. 이에 중국 각지의 절도사들이 거란 관리를 죽이고 후한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태종은 개봉에 입성한 지 3개월만에 북으로 철수했다. 거란 군대가 연운16주로 철군하자 후한은 과거 후진의 영역을 모두 장악했다.
무분별한 약탈과 학살로 중원 통치를 실패했던 경험을 얻은 태종은 개봉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및 민정과 군정을 체험하면서 중원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초보적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4월에 회군 중 태종 야율덕광이 병사하자 장자 야율완이 제위를 이었다. 요세종 야율완은 948년 유목민족의 세도가 뿌리박혀 있던 막북에 북원추밀사를 설치했고, 후진의 신하들을 연운 지역으로 보내 남면관 계통의 남추밀사로 임명하였다. 950년에는 이어 북면관과 남면관에 정사성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남, 북면관 직무의 담당과 역할이 명확해졌으며, 요나라 북, 남면 관제가 확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