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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스텔라연방공화국은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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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영국과 미국의 문화를 강하게 받았으며 [[올리비안 왕국]]과 다르게 포르투갈 등의 유럽 문화의 영향이 없었기 때문에 왕국과는 대조적이다. 다만 오이리 족의 문화는 모두 남아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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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19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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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어 !! 영어 !! 오이리어 !! 기타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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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포르투갈어 사용자 !! 순영어 사용자 !! 동시언어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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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연방공화국은 포르투갈어 사용자가 거의 없으며 영국인의 유입과 영국 문화의 대대적인 영향으로 영어 사용자가 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현재 스텔리아 시의 포르투갈어 사용자의 비율은 전체 시민의 40%를 넘어섰다. 이는 두 언어에 대한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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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19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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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교 !! 개신교 !! 무교 !! 기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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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올리비안 왕국]]에 편입되기 전까지 영국의 국교였던 개신교를 신봉했으나 왕국의 영향으로 가톨릭교가 유입되면서 종교비율이 즉흥적으로 변화하였다. 1900년에는 압도적으로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슬람교 등의 기타 종교인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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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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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스텔라연방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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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MCAC에서 '연강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가상국가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재 국명은 '스텔리아 시/(구)스텔라연방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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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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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리 제도에서의 전염병의 발생으로 오이리 제도에 주둔하던 포르투갈군은 긴급히 본국으로 철수했고 1711년, 전염병이 가고 '''영국군이 들어오면서 원주민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인과 다르게 영국인은 오이리제도의 원주민들에 적대적이었다. 영국군은 포르투갈군이 건설해놓았던 군사기지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강제로 노동시켰고 오이리제도의 이점을 잘 알고 있던 영국은 급기야 원주민들을 기존의 마을에서 해안가로 몰아내 원주민보호라는 명목으로 수용소와 다름없는 곳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많은 영국인들이 섬으로 들어오면서 점차 섬은 쓰레기로 넘쳐났고 해안가에 부족한 식수로 인해 매년 평균 50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사망했다. 이는 2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자체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배워온 군사기술과 문물을 활용하여 오이리 독립군을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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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현재 스텔리아 시의 위치에서 영국인은 북쪽과 서쪽으로는 산맥, 동쪽으로는 호수와 강, 남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언덕으로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천혜의 자연군사요새로 판단하여 이곳에 '''사우스조지아 마을'''을 건설했다. 영국군의 군사기지도 건설되었지만 포르투갈이 남겨둔 요새를 보수하여 이용하면서 실질적으로 사우스조지아의 군사기지를 이용하는 일은 적었고 이 곳을 중심으로 영국인의 마을이 점차 넓게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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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5월, 영국군의 일부가 해적소탕을 위해 카르보니아 제도로 출발했을때 당시 독립군의 대장이던 ''''알 포테데르''''는 영국군을 기습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독립군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더군다나 군사기지 안으로 들어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포르투갈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했고 포르투갈은 그들에게 몰래 대포와 포탄을 지원했다. 대포 앞에 성벽은 무용지물이었다. 영국군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카르보니아 출격으로 절반정도가 자리에 없는 상태에서 독립군의 강렬한 공격으로 영국군은 항복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항복 이후로도 영국군만 축출되었을 뿐 이 곳에 살던 영국인들은 독립군이 내쫓지 않았는데 이는 후에 영국이 이를 빌미로 또는 영국인의 보호 명목으로 군사를 제도에 주둔시킬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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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조지아 혁명'''(18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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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리 공화국이 입헌군주국 체제로 다시 변화하면서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은 이에 매우 불만적이었다. 당시 시장이었던 '''화이트필드(Whitefield)'''는 공화정을 추구했는데 '''영국의 군주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오이리 왕국의 새로운 왕을 섬길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를 매우 불쾌했기 때문'''이다. 시장은 즉각 반대하고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1872년 3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를 '사우스조지아 혁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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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은 사우스조지아를 지원했고 영국도 사우스조지아를 지원하기에 이르면서 오이리 왕국은 재빨리 사우스조지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브라질이 이를 계기로 군사를 상륙시킬까봐 두려워했고 사우스조지아에 영국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약간의 이질감이 작용했기도 했다. 사우스조지아 사람들은 6일만에 끝난 혁명에 당혹하기도 했지만 오이리 왕국의 독립승인아래 정부를 부랴부랴 꾸리고 '''1872년 6월, 스텔라공화국을 선포'''한다. 이때 '''벤타나 시민의 일부와 북메레니치 구가 스텔라공화국에 참여하면서 스텔라연방공화국이 결성'''되었다. (국명이 본래 사우스 잉글랜드 공화국이었으나 미국이 이를 대놓고 불편해하면서 의회에서 스텔라공화국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또한 당시 영국의 영향을 받았기에 영국과 동일한 의원내각제로 정부를 구성하려 했으나 미국의 반발로 대통령 중심제로 변화할뻔까지 했다. 이를 두고 미국이 소국을 심하게 간섭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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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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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오이리 왕국의 내륙지역에 있어 발전이 어려웠다. 외국으로부터 물자를 받기도 어려웠고 기술을 배워오기도 힘들었다. 따라서 스텔라연방공화국의 총리인 '화이트필드'는 오이리 왕국의 당시 코스타 하파시 국왕과 오이리 시를 관통하여 오이리 만, 남대서양으로 즉각 연결되는 아랑 리버(Arang River)를 무기한 이용하되 벤타나 시 일부와 북쪽의 모뷔뭰토 군, 사살라 군 영토 일부를 오이리 왕국에 반환하기로 최종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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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오이리 왕국과 스텔라연방공화국

2019년 5월 29일 (수) 11:50 판


< 스텔라연방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Stella
스텔라기.png
국기
국호스텔라 연방 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Stella
상징국가
국화라일락
국조
표어대서양의 중심, 평화의 상징
자연환경면적(영토)3,488km²
인문환경인구1,115,000명 (1940년 추정)
인구밀도320명/km2
공용 언어영어
정치국체공화제
정부형태의원내각제
총리화필
의회장데니 존
경제GDP$14,281(백만)
1인당 GDP$12,808
GDP(PPP)$0000
1인당 GDP(PPP)$0000
공식 화폐파운드 스털링
단위
법정연호---
시간대UTC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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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소개 및 상징

* 스텔라연방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Stella 은 서아프리카로부터 대서양 쪽으로 700여km 떨어진 오이리제도(가상의 섬)에 위치해있었으며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에 가까우나 그 외 모든 면에서 유럽과 가까우므로 특이하게 유럽국가로 분류되는 국가였다.


과거, 공화제를 바탕으로 총리대신을 선출하는 의원내각제를 시행했다.
스텔라연방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일반 총리를 선출하는 민주공화국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본래 영국의 여왕을 섬겼지만 점차 영국을 배격하고 미국을 신봉하면서 더 이상 섬기지 않게 되었다.

국기스텔라연방기라는 명을, 국장페데럴 리퍼블리카라는 명을 붙였다.]

국가 위치 및 지역도

다음은 스텔리연방공화국의 위치와 간략지역도이다.

  • 사라데네 구 : 사라데네 구는 산악지형으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안 왕국의 문화지구가 들어설 곳이라서 인구가 최근 증가하고 있다.
  • 노스메레니치 구 : 노스메레니치 구는 올리비안 왕국의 메레니치 군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역 이름이다. 이 곳에 주택단지가 대규모로 들어서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햇빛이 잘 드는 평야에 있다고 해서 '선라이즈 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스텔리아 구 : 스텔리아 구는 올리비안 왕국의 스텔리아 신도시의 행정, 사무, 금융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옛날 영국의 군사기지가 있었고 영국인들이 형성했던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유럽인들이 꾸준히 유입되면서 점차 규모가 증가했고 남쪽의 런던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영국이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안-영국 전쟁 참고) 도시는 꾸준히 성장해 올리비안 왕국의 제 2 도시로 발전했으나 수도의 발전으로 수도로 인구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이후 신도시 건설계획이 발표되기까지 현대화가 더뎌지게 되었다.

세 구역은 이후 통합되여 스텔라연방공화국을 구성한다.

행정구역

아래는 자세한 행정구역도이다.

올리비안왕국.png

수도 (Capital city)
오이리 (Oiri)
시 (City)
스텔리아 (Stellia)모뷔뭰토 (Movimiento)벤타나 (Ventana)
군 (County)
하빌리다드 (Habilidad)메레니치 (Merenichi)사살라 (Sasalla)그라나 (Grana)

문화

스텔라연방공화국은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영국과 미국의 문화를 강하게 받았으며 올리비안 왕국과 다르게 포르투갈 등의 유럽 문화의 영향이 없었기 때문에 왕국과는 대조적이다. 다만 오이리 족의 문화는 모두 남아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인식되었다.

언어(1940년)

포르투갈어 영어 오이리어 기타 언어
1% 95% 5% 0%
순포르투갈어 사용자 순영어 사용자 동시언어 사용자
0% 94% 1%

England Flag.jpg

스텔라연방공화국은 포르투갈어 사용자가 거의 없으며 영국인의 유입과 영국 문화의 대대적인 영향으로 영어 사용자가 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현재 스텔리아 시의 포르투갈어 사용자의 비율은 전체 시민의 40%를 넘어섰다. 이는 두 언어에 대한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1940년)

가톨릭교 개신교 무교 기타종교
27% 62% 9% 2%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올리비안 왕국에 편입되기 전까지 영국의 국교였던 개신교를 신봉했으나 왕국의 영향으로 가톨릭교가 유입되면서 종교비율이 즉흥적으로 변화하였다. 1900년에는 압도적으로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슬람교 등의 기타 종교인은 전혀 없었다.

역사

ㅁ 스텔라연방공화국

2018년 12월, MCAC에서 '연강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가상국가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재 국명은 '스텔리아 시/(구)스텔라연방공화국'으로 개칭되었다.

1711년 ~

오이리 제도에서의 전염병의 발생으로 오이리 제도에 주둔하던 포르투갈군은 긴급히 본국으로 철수했고 1711년, 전염병이 가고 영국군이 들어오면서 원주민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인과 다르게 영국인은 오이리제도의 원주민들에 적대적이었다. 영국군은 포르투갈군이 건설해놓았던 군사기지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강제로 노동시켰고 오이리제도의 이점을 잘 알고 있던 영국은 급기야 원주민들을 기존의 마을에서 해안가로 몰아내 원주민보호라는 명목으로 수용소와 다름없는 곳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많은 영국인들이 섬으로 들어오면서 점차 섬은 쓰레기로 넘쳐났고 해안가에 부족한 식수로 인해 매년 평균 50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사망했다. 이는 2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자체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배워온 군사기술과 문물을 활용하여 오이리 독립군을 조직했다.

한편 현재 스텔리아 시의 위치에서 영국인은 북쪽과 서쪽으로는 산맥, 동쪽으로는 호수와 강, 남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언덕으로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천혜의 자연군사요새로 판단하여 이곳에 사우스조지아 마을을 건설했다. 영국군의 군사기지도 건설되었지만 포르투갈이 남겨둔 요새를 보수하여 이용하면서 실질적으로 사우스조지아의 군사기지를 이용하는 일은 적었고 이 곳을 중심으로 영국인의 마을이 점차 넓게 형성되었다.

1714년 5월, 영국군의 일부가 해적소탕을 위해 카르보니아 제도로 출발했을때 당시 독립군의 대장이던 '알 포테데르'는 영국군을 기습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독립군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더군다나 군사기지 안으로 들어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포르투갈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했고 포르투갈은 그들에게 몰래 대포와 포탄을 지원했다. 대포 앞에 성벽은 무용지물이었다. 영국군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카르보니아 출격으로 절반정도가 자리에 없는 상태에서 독립군의 강렬한 공격으로 영국군은 항복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항복 이후로도 영국군만 축출되었을 뿐 이 곳에 살던 영국인들은 독립군이 내쫓지 않았는데 이는 후에 영국이 이를 빌미로 또는 영국인의 보호 명목으로 군사를 제도에 주둔시킬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사우스조지아 혁명(1872년)

오이리 공화국이 입헌군주국 체제로 다시 변화하면서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은 이에 매우 불만적이었다. 당시 시장이었던 화이트필드(Whitefield)는 공화정을 추구했는데 영국의 군주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오이리 왕국의 새로운 왕을 섬길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를 매우 불쾌했기 때문이다. 시장은 즉각 반대하고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1872년 3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를 '사우스조지아 혁명'이라고 한다.

당시 미국은 사우스조지아를 지원했고 영국도 사우스조지아를 지원하기에 이르면서 오이리 왕국은 재빨리 사우스조지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브라질이 이를 계기로 군사를 상륙시킬까봐 두려워했고 사우스조지아에 영국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약간의 이질감이 작용했기도 했다. 사우스조지아 사람들은 6일만에 끝난 혁명에 당혹하기도 했지만 오이리 왕국의 독립승인아래 정부를 부랴부랴 꾸리고 1872년 6월, 스텔라공화국을 선포한다. 이때 벤타나 시민의 일부와 북메레니치 구가 스텔라공화국에 참여하면서 스텔라연방공화국이 결성되었다. (국명이 본래 사우스 잉글랜드 공화국이었으나 미국이 이를 대놓고 불편해하면서 의회에서 스텔라공화국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또한 당시 영국의 영향을 받았기에 영국과 동일한 의원내각제로 정부를 구성하려 했으나 미국의 반발로 대통령 중심제로 변화할뻔까지 했다. 이를 두고 미국이 소국을 심하게 간섭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1873년

스텔라연방공화국은 오이리 왕국의 내륙지역에 있어 발전이 어려웠다. 외국으로부터 물자를 받기도 어려웠고 기술을 배워오기도 힘들었다. 따라서 스텔라연방공화국의 총리인 '화이트필드'는 오이리 왕국의 당시 코스타 하파시 국왕과 오이리 시를 관통하여 오이리 만, 남대서양으로 즉각 연결되는 아랑 리버(Arang River)를 무기한 이용하되 벤타나 시 일부와 북쪽의 모뷔뭰토 군, 사살라 군 영토 일부를 오이리 왕국에 반환하기로 최종합의했다.

이후 오이리 왕국과 스텔라연방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