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 쿠데타 (대경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11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대경제국 제1제국~대경제국 내란 목록}}
{{전쟁 정보
{{전쟁 정보
|쿠데타=5.16 군사 쿠데타
|쿠데타=5.16 군사 쿠데타
|그림=5.16_군사_쿠데타.jpg
|그림=5.16_군사_쿠데타.jpg
|날짜=1961년 5월 16일
|날짜=1961년 5월 16일
|장소=[[대경제국 청경 특별자유시]]  
|장소=[[대경제국]] 전역
|결과=[[민주당 내각|장면 내각]] 붕괴<br />제정 폐지
|결과=[[민주당 내각|장면 내각]] 붕괴<br />제정 폐지
|교전국1=[[대경제국 황립육군]]
|교전국1=[[대경제국 황립육군]]
|교전국2=[[군사혁명위원회(대경제국)|군사혁명위원회]]
|교전국2=[[군사혁명위원회(대경제국)|군사혁명위원회]]
|지휘관1=[[의종 대황제]]<br />[[장면(대경제국)|장면]]<br />[[윤보선(대경제국)|윤보선]]<br />[[현석호(대경제국)|현석호]] 국방부 대신<br />이한림 군단 사령부 사령관<br />김중호 육군참모총장<br />서한량 제7군단 군단장<br />등등
|지휘관1=[[의종]] 대황제<br />[[장면(대경제국)|장면]]<br />[[윤보선(대경제국)|윤보선]]<br />[[현석호(대경제국)|현석호]] 국방부 대신<br />이한림 군단 사령부 사령관<br />김중호 육군참모총장<br />서한량 제7군단 군단장<br />등등
|지휘관2=[[박정희(대경제국)|박정희]] 소장<br/>[[김종필]] 제3군단 군단장<br />[[차지철]] 제1공수특전단 대위<br />채명신 준장<br />등등
|지휘관2=[[박정희(대경제국)|박정희]] 소장<br/>[[김종필]] 제3군단 군단장<br />[[차지철]] 제1공수특전단 대위<br />채명신 준장<br />등등
|병력1=[[대경제국 황립군 총참모본부|황립군 총참모본부]]<br />[[대경제국 황립육군 본부|황립육군 본부]]<br />[[대경제국 황립헌병대|황립헌병대]]<br />[[대경제국 수도방위사령부|수도방위사령부]]
|병력1=[[대경제국 황립군 총참모본부|황립군 총참모본부]]<br />[[대경제국 황립육군 본부|황립육군 본부]]<br />[[대경제국 황립헌병대|황립헌병대]]<br />[[대경제국 수도방위사령부|수도방위사령부]]
|병력2=[[대경제국 황립육군 군단 사령부]]<br />제7군단 사령부<br />제9군단 사령부<br />제1사단 사령부}} 
|병력2=[[대경제국 황립육군 군단 사령부]]<br />제7군단 사령부<br />제9군단 사령부<br />제1공수특전단}} 
==개요==
==개요==
{{인용문|상제는 대경제국을 지켜주소서!! 상제는 대경제국을 지켜주소서!! 상제는 대경제국 지ㅋ...|5.16 쿠데타 후 황실의 망명 과정 중 시간을 벌던 황궁 경위국 국장 [[이영휘]]의 마지막 유언}}
{{인용문|상제는 대경제국을 지켜주소서!! 상제는 대경제국을 지켜주소서!! 상제는 대경제국 지ㅋ...|5.16 쿠데타 후 황실의 망명 과정 중 시간을 벌던 황궁 경위국 국장 [[이영휘]]의 마지막 유언}}
16번째 줄: 17번째 줄:
==배경==
==배경==
당시 대경제국은 [[4.19 혁명(대경제국)|4.19 혁명]]으로 이승만 내각이 총사퇴하고 [[60년 체제]]가 개막한 상태였다. 하지만 여당인 [[민주당(대경제국)(1955)|민주당]]은 구파와 신파라는 파벌로 나뉘어 내분을 겪고 있었다. 거기다가 자유당의 이름 바 [[사사오입 개헌]]에 의한 [[사사오입 체제]] 시기 일어난 수많은 요구가 있었고 이를 내각이 수용하라는 데모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다. 대표적인 게 [[명경 노동권 총궐기 사태]]와 [[광주 귀족 연합 시위]]였다. 하지만 내각은 이 모든 요구를 수용하기 어려웠으며 위에서 말했듯 여당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기에 국정운영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하루가 달리 데모가 일어나니 '데모를 하지 말자는' 데모가 일어났다. 또한 외국인 인사들도 "이 나라는 반란이 안 일어나는게 이상하다"라 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청경 주재 외교관인 [[막시밀리안 카를 폰 슈나이더 아를츠]]의 당시 대경제국의 상황에 대해 서술한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대경제국은 [[4.19 혁명(대경제국)|4.19 혁명]]으로 이승만 내각이 총사퇴하고 [[60년 체제]]가 개막한 상태였다. 하지만 여당인 [[민주당(대경제국)(1955)|민주당]]은 구파와 신파라는 파벌로 나뉘어 내분을 겪고 있었다. 거기다가 자유당의 이름 바 [[사사오입 개헌]]에 의한 [[사사오입 체제]] 시기 일어난 수많은 요구가 있었고 이를 내각이 수용하라는 데모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다. 대표적인 게 [[명경 노동권 총궐기 사태]]와 [[광주 귀족 연합 시위]]였다. 하지만 내각은 이 모든 요구를 수용하기 어려웠으며 위에서 말했듯 여당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기에 국정운영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하루가 달리 데모가 일어나니 '데모를 하지 말자는' 데모가 일어났다. 또한 외국인 인사들도 "이 나라는 반란이 안 일어나는게 이상하다"라 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청경 주재 외교관인 [[막시밀리안 카를 폰 슈나이더 아를츠]]의 당시 대경제국의 상황에 대해 서술한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 {{인용문|청경의 시민들은 마치 마스트타리츠에서 일어났던 '마구흐 사태'를 보는 듯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했고 겨우 내각측 인사와의 협상으로 이를 중재했는데 그 와중에 다른 곳에서 데모가 일어났다. 아무리 데모크라시(민주주의)라 할지라도 이러한 일은 장차 대경제국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고 갈 것입니다. 본국은 외교행동에 관한 새로운 지침서를 보내주십시오.}}
* {{인용문|청경의 시민들은 폭도화 되어 내각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데모를 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국에 새로운 외교 정책을 본국은 조치해야 합니다 곧 저의 후임 외교관 추첨에서 저는 제외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박정희 본인의 상황===
===박정희 본인의 상황===
당시 [[박정희(대경제국)|박정희]]의 과거사에 대해 말하자면 [[1948 메이데이 사건]]의 동모자로 사형에 쳐해졌지만 당시 목관주의 군무총독이었던 [[김동호(1899)]]가 "자네의 행정능력을 봐서 이번 만큼은 내가 목관주 군무법원에 말해두겠다."라 말하며 형이 낮춰져 5개월로 감형됐다. 이후 박정희는 1950년 [[6.25 내전]]이 발발하고 [[단동]]으로 발령되어 단동에 있던 잔류 군수품의 처분을 맏게 됐지만 예상외로 빠르게 진군하는 [[대경 인민군]]의 공격으로 근무지인 단동을 이탈하여 청천강으로 이동했고 곧 이어 청천강 향토군으로 입대하여 현장직으로 근무한다. 여러 전선에서 높은 공적을 쌓은 박정희는 훗날 5.16 군사 쿠데타의 기반이 되는 인맥을 구성한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1953년 내전이 끝나자 박정희는 군사 요직인 군무총독에 임명되어 청경에서 근무했고 이후 [[대경제국 황립육군 본부|육본]]의 주요 요직들을 거쳐[* 황립육군 본부 행정고문->황립육군 사무국장 최고자문->황립육군 사무국장->황립육군 인사참모부 부부장->황립육군 총군령 명령실 실장->황립육군 군수사령부 사령관 고문] 쿠데타 이전 마지막 직책인 황립육군 군수사령부 사령관 고문에서 제1사단 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됐다.  
당시 [[박정희(대경제국)|박정희]]의 과거사에 대해 말하자면 [[1948 메이데이 사건]]의 동모자로 사형에 쳐해졌지만 당시 목관주의 군무총독이었던 [[김동호(1899)|김동호]]가 "자네의 행정능력을 봐서 이번 만큼은 내가 목관주 군무법원에 말해두겠다."라 말하며 형이 낮춰져 5개월로 감형됐다. 이후 박정희는 1950년 [[6.25 내전]]이 발발하고 [[단동]]으로 발령되어 단동에 있던 잔류 군수품의 처분을 맏게 됐지만 예상외로 빠르게 진군하는 [[대경 인민군]]의 공격으로 근무지인 단동을 이탈하여 청천강으로 이동했고 곧 이어 청천강 향토군으로 입대하여 현장직으로 근무한다. 여러 전선에서 높은 공적을 쌓은 박정희는 훗날 5.16 군사 쿠데타의 기반이 되는 인맥을 구성한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1953년 내전이 끝나자 박정희는 군사 요직인 군무총독에 임명되어 청경에서 근무했고 이후 [[대경제국 황립육군 본부|육본]]의 주요 요직들을 거쳐[* 황립육군 본부 행정고문->황립육군 사무국 부국장->황립육군 인사참모부 정무관->황립육군 인사참모부 부장->황립육군 총군령 명령실 실장->황립육군 군수사령부 부사령관] 쿠데타 이전 마지막 직책인 황립육군 군수사령부 부사령관에서 제1사단 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됐다.  
[[3.15 부정 선거(대경제국)|3.15 부정 선거]] 이후 박정희는 절호의 찬스라 생각하여 육군 사관학교 정위층과 같이 쿠데타를 공모했지만 곧 이어 [[4.19 혁명(대경제국)|종이 쓰레기 봉투로 삽입됐다.]] 하지만 3.15 부정 선거를 명분으로 친이승만파의 황립육군 [[대경제국 제1제국 원수부|원수부]]에 총사퇴를 요구했으며 박정희의 해임을 통모했던 [[송요찬(대경제국)|송요찬]] 원수와 그 원수부는 실각했다. 하지만 이후 [[60년 체제]]가 성립되고 [[민주당 내각]]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내각은 박정희를 불신임하여 그를 오히려 좌천시켜 원수부 향토군 지휘부 군수참모부 부부장 고문으로 임명한다. 이에 박정희는 마침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이전 황립육군 인사참모부 부부장직에 재직하고 있을 때 만난 [[김종필(대경제국)|김종필]], [[차지철(대경제국)|차지철]]과 통모해 쿠데타를 모의한다.
[[3.15 부정 선거(대경제국)|3.15 부정 선거]] 이후 박정희는 절호의 찬스라 생각하여 육군 사관학교 정위층과 같이 쿠데타를 공모했지만 곧 이어 [[4.19 혁명(대경제국)|종이 쓰레기 봉투로 삽입됐다.]] 하지만 3.15 부정 선거를 명분으로 친이승만파의 황립육군 [[대경제국 제1제국 원수부|원수부]]에 총사퇴를 요구했으며 박정희의 해임을 통모했던 [[송요찬(대경제국)|송요찬]] 원수와 그 원수부는 실각했다. 하지만 이후 [[60년 체제]]가 성립되고 [[민주당 내각]]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내각은 박정희를 불신임하여 그를 오히려 좌천시켜 원수부 향토군 지휘부 군수참모부 부장으로 임명한다. 이에 박정희는 마침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이전 황립육군 인사참모부 부장직에 재직하고 있을 때 만난 [[김종필(대경제국)|김종필]], [[차지철(대경제국)|차지철]]과 통모해 쿠데타를 모의한다.
==주요 인물==
==주요 인물==
* [[의종]] 대황제 이강
* [[의종]] 대황제 이강
- 1961년 황제에 재임하던 이강 황제는 이미 대부분의 행정권을 내각에 위임한 상태였다.
- 1961년 황제에 재임하던 이강 황제는 이미 대부분의 행정권을 내각에 위임한 상태였다.
* [[윤보선(대경제국)|윤보선]]
* [[윤보선(대경제국)|윤보선]]
- 당시 [[역대 대경제국 제1제국기 총리대신|대경제국 총리대신]]에 재직중이었고 명분상 행정수반이었으며 실질적으로는 내각총리대신에게 실권이 있었다.
- 당시 [[대경제국 제1제국기 총리대신|대경제국 총리대신]]에 재직중이었고 명분상 행정수반이었으며 실질적으로는 내각총리대신에게 실권이 있었다.
* [[장면(대경제국)|장면]]
* [[장면(대경제국)|장면]]
- [[대경제국 내각총리대신]]에 있던 장면은 쿠데타 이전 혼란한 제국의 상태를 수습하고자 고도 성장책을 준비중이었다. --그리고 실행도 못하고 사임했다--
- [[대경제국 제1제국 내각총리대신]]에 있던 장면은 쿠데타 이전 혼란한 제국의 상태를 수습하고자 고도 성장책을 준비중이었다. --그리고 실행도 못하고 사임했다--
* [[박정희(대경제국)|박정희]]
* [[박정희(대경제국)|박정희]]
- 육군본부의 한직인 원수부 향토군 지휘부 군수참모부 부부장 고문으로 좌천되었지만 쿠데타를 통해 [[대경민국 대통령|정상]]에 [[쿠데타|올랐다.]]
- 육군본부의 한직인 원수부 향토군 지휘부 군수참모부 부부장 고문으로 좌천되었지만 쿠데타를 통해 [[대경민국 대통령|정상]]에 [[쿠데타|올랐다.]]
34번째 줄: 35번째 줄:
- 박정희의 왼팔로 5.16 군사 쿠데타의 주요 요인이었다.
- 박정희의 왼팔로 5.16 군사 쿠데타의 주요 요인이었다.
==과정==
==과정==
===01:00===
{{본문|5.16 군사 쿠데타 (대경제국)/과정}}
박정희의 비밀 지휘를 받는 수도방위사령부 제2예비사단 예하 포병대대가 청경 군무총독 관저를 점거한다.  청경 군무총독 이희섭은 쿠데타에 동참하는 각서에 날인했고 청경 군무총독의 직속부대인 수도방위사령부 제2~4사단이 쿠데타에 가담한다.
===02:30===
쿠데타를 포착한 오-헝 제국 청경 주재 외교관 기젤라 모니카 폰 하이넬은 내각총리공관에 연락하여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보고했지만 묵살됐다.
===03:00===
김종필이 지휘하는 제3군단이 상부의 명령을 불복하고 강서구에 있던 원수부 별관을 점거하여 원수부 대다수를 포로로 검거한다.
한편 장도영 황립육군 인사참모부 부장겸 수도방위사령부 제1사단 사단장은 기젤라 모니카 폰 하이넬로부터 쿠데타 사실을 알게 되고 곧 이어 현석호 국방부 대신과 서한량 제7군단 군단장에게 쿠데타 사실을 보고하려 했지만 통신 문제로 끝내 전달이 안된다. 그러자 장도영 제1사단장은 직접 총리공관으로 간다.
===03:50===
차지철이 지휘하는 제1공수특전단이 기습적으로 남산의 육본을 공격, 방어선을 무너트리고 육본에 진입한다. 이에 김중호 육군참모총장은 자결을 택한다.
===04:00===
박정희는 수도방위사령부 본부가 있던 강북구를 점거하고 총리공관으로 가려 했던 장도영 장군을 구금, 쿠데타 지휘를 요청했으나 장도영은 끝내 거절한다.
===04:20===
현석호 국방부 대신은 내각총리관저로 향하는 도중 총성이 들리자 길을 돌려 총리공관으로 이동하여 윤보선 총리대신을 부하들로 하여금 피신케 하고 자신은 헌병대를 이끌고 성북구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04:30~05:00===
이즈음 명경, 대구, 영경, 혜경에 있던 쿠데타군이 주둔해있던 도시의 관공서를 장악한다.
===05:05===
이영휘 황궁 경위국장은 현석호 국방부 대신으로부터 쿠데타 사실을 접하고 경복궁에 있던 황실 일가를 오-헝 제국 청경 주재 대사관으로 파천시킬 준비를 한다. 이에 의종 대황제는 "궁을 버릴 수 없다!"라 말하며 버텼으나 결국은 파천에 동의한다.
===05:10===
쿠데타군이 장악한 도심에서 다음과 같은 뉴스가 방영됐다.
* {{인용문|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br/>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내각과 기성 정치인, 사치와 향략에 빠진 황실이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br/>군사 혁명 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안일한 대처만 했던 반공 전선을 다시 활성화 할겁니다.<br/>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고 비열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그 동맹국들에겐 엄중한 외교적 행동을 취하겠습니다.<br/>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br/>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br/>다섯째,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br/>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행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br/>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경공화정부 만세, 궐기군 만세.|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육군 중장 장도영}}
쿠데타 세력은 삐라 10만장을 L-19 5대를 통해 청경에 대대적으로 살포했다.
===06:00===
내각총리대신 장면과 총리대신 윤보선이 중간에 합류하여 정로 수도원으로 피신했으나 얼마 안 가 박정희를 비롯한 제2예비사단에게 발각되어 다시 총리공관으로 압송된다.
===06:10===
박정희는 황실 일가 체포를 명령하고 같은 시간에 장도영 군사혁명위원장에게 제정 폐지를 건의한다.
===06:40===
이영휘 국장은 비밀스럽게 기젤라 청경 주재 외교관에게 황실 도피를 요구했고 기젤라 청경 주재 외교관은 이를 수용하고 본국에 이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06:50===
기젤라 청경 주재 외교관은 개인 소장하고 있던 헬리콥터를 통해 황실 일가를 대피시키기로 하고 경복궁에 공문을 보내 파천을 요구했다.
===07:00===
부산이 쿠데타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동안 황실은 이영휘 국장이 시간을 버는 동안 헬리콥터를 통해 인천으로 대피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행 선박에 몸을 실는다.
===08:00===
당시 쿠데타 세력은 총리대신 윤보선을 죽일지 살릴지에 대한 토론을 했고 결론은 살리기로 했다. 이후 박정희는 윤보선 총리대신에게 계엄령 추인을 요구했지만 윤보선 총리대신은 계속 거절했다.
===09:30===
박정희는 윤보선 총리대신에게 장면 내각총리대신의 해임과 함께 '''제정 폐지'''를 요구했다. 이후 윤보선 총리대신을 이를 수용한다.
이로써 근 2300년간 존재했던 군주정의 명맥이 '''잠시''' 종말을 고했다.
===10:05===
이 소식을 접한 미국은 마셜 그린을 외교관으로 청경에 파견한다.
===10:10===
[[제국 정치-행정 연합]] 사무총장 [[볼프강 막시밀리안 프란츠 오케르트]]는 5.16 군사 쿠데타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12:00~13:00===
윤보선 총리대신은 각료의 자문을 들어 계엄령을 추인하기로 하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계엄군 사령관에 임명했으며 가급적 계엄군의 방대한 활동을 통제하는 '출동 저지 서한'을 작성하여 계엄령 선포와 함께 공포한다.
===15:30===
박정희는 이름바 '공화국 건설 준비 위원회'를 창설하여 군사혁명위원회를 해체시켜 그 권력을 [[국가재건최고회의(대경제국)|국가재건최고회의]]에 위임시켰다.
===16:40===
* {{인용문|우리나라는 지금 중대한 시국에 놓여있습니다. 오늘의 사태를 우리가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것에는 우리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사태를 무사히 수습해야 하고, 공산주의를 막는 힘에 약화를 초래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는 우리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이 나라의 일을 판단해야 하며, 희생없이 최선의 방법으로 이 사태를 수습하는데 우리의 성의와 노력을 다해야 겠습니다. 나는 지금 이 중대한 사태에 처해서 혼란방지와 질서유지에 국민 여러분들이 특별히 노력해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더욱이 정운영 총리 권항대행 이하 모든 각료등은 한시바삐 나와서 이 중대한 사태를 성의있게, 합법적으로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말에 의하면, 각의에 출석하는 각료와 기타 공무원의 신변은 보장된다고 합니다.|윤보선 공화국 건설 준비 위원회 위원장겸 임시총리}}
==결과==
==결과==
==반응==
==반응==
==평가==
==평가==
==기타==
==각주==
{{주석}}
[[분류:킹덤 오브 킹덤 세계관]]
[[분류:킹덤 오브 킹덤 세계관]]

2019년 12월 29일 (일) 01:10 기준 최신판

대경제국.png
 
대경제국 제1제국~대경제국 내란 목록
 
연도최고행정부사건주동 세력
제1제국
1903년박영효 내각김홍륙 독다 사건(실패)입헌민주당 보수세력
(김홍륙 · 권제순 등)
1919년숭원식 내각3.1 경제독립운동(범국민행동 규정 논의 中)상공업 종사자 및 급진반일세력
(이훤성 · 이훤신 등)
1933년안재홍 내각5.29 총리 암살기도 사건(실패)황립육군 소장파
(이성일 · 박창림 등)
1943년김구 내각제2집단군 반란 사건(실패)황립육군 제2집단군 3개 사단
(박면 · 이통정 등)
1945년좌우합작 내각3.19 항명사태(실패)황립육군 제2 방면군
(김주웅 등)
1948년좌우합작 내각1948 메이데이 사건(실패)노동당 목관주당 세력
(이주실 등)
1950년~1953년좌우합작 내각6.25 내전(장기전 돌입)노동당
(김성주 · 박현영 · 김원봉 등)
1961년윤보선 내각5.16 군사 쿠데타(성공)군사혁명위원회
(박정희 · 김종필 · 차지철 등)
제2제국
1992년노태우 내각청명계획(실패)황립육군보안사령부
2013년박근혜 내각제정 폐지 선동 사건(실패)통합진보당 및 공화국 전선 급진파
(이석기 등)
2017년박근혜 내각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실패)황립육군기무사령부
5.16 군사 쿠데타 (대경제국)
5.16 군사 쿠데타.jpg
교전국
대경제국 황립육군 군사혁명위원회
지휘관
의종 대황제
장면
윤보선
현석호 국방부 대신
이한림 군단 사령부 사령관
김중호 육군참모총장
서한량 제7군단 군단장
등등
박정희 소장
김종필 제3군단 군단장
차지철 제1공수특전단 대위
채명신 준장
등등
병력
황립군 총참모본부
황립육군 본부
황립헌병대
수도방위사령부
대경제국 황립육군 군단 사령부
제7군단 사령부
제9군단 사령부
제1공수특전단

 

개요

상제는 대경제국을 지켜주소서!! 상제는 대경제국을 지켜주소서!! 상제는 대경제국 지ㅋ... — 5.16 쿠데타 후 황실의 망명 과정 중 시간을 벌던 황궁 경위국 국장 이영휘의 마지막 유언

대경제국 제1제국을 붕괴시킨 군사 쿠데타다.

배경

당시 대경제국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 내각이 총사퇴하고 60년 체제가 개막한 상태였다. 하지만 여당인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라는 파벌로 나뉘어 내분을 겪고 있었다. 거기다가 자유당의 이름 바 사사오입 개헌에 의한 사사오입 체제 시기 일어난 수많은 요구가 있었고 이를 내각이 수용하라는 데모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다. 대표적인 게 명경 노동권 총궐기 사태광주 귀족 연합 시위였다. 하지만 내각은 이 모든 요구를 수용하기 어려웠으며 위에서 말했듯 여당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기에 국정운영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하루가 달리 데모가 일어나니 '데모를 하지 말자는' 데모가 일어났다. 또한 외국인 인사들도 "이 나라는 반란이 안 일어나는게 이상하다"라 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청경 주재 외교관인 막시밀리안 카를 폰 슈나이더 아를츠의 당시 대경제국의 상황에 대해 서술한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 청경의 시민들은 폭도화 되어 내각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데모를 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국에 새로운 외교 정책을 본국은 조치해야 합니다 곧 저의 후임 외교관 추첨에서 저는 제외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박정희 본인의 상황

당시 박정희의 과거사에 대해 말하자면 1948 메이데이 사건의 동모자로 사형에 쳐해졌지만 당시 목관주의 군무총독이었던 김동호가 "자네의 행정능력을 봐서 이번 만큼은 내가 목관주 군무법원에 말해두겠다."라 말하며 형이 낮춰져 5개월로 감형됐다. 이후 박정희는 1950년 6.25 내전이 발발하고 단동으로 발령되어 단동에 있던 잔류 군수품의 처분을 맏게 됐지만 예상외로 빠르게 진군하는 대경 인민군의 공격으로 근무지인 단동을 이탈하여 청천강으로 이동했고 곧 이어 청천강 향토군으로 입대하여 현장직으로 근무한다. 여러 전선에서 높은 공적을 쌓은 박정희는 훗날 5.16 군사 쿠데타의 기반이 되는 인맥을 구성한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1953년 내전이 끝나자 박정희는 군사 요직인 군무총독에 임명되어 청경에서 근무했고 이후 육본의 주요 요직들을 거쳐 황립육군 본부 행정고문->황립육군 사무국 부국장->황립육군 인사참모부 정무관->황립육군 인사참모부 부장->황립육군 총군령 명령실 실장->황립육군 군수사령부 부사령관 쿠데타 이전 마지막 직책인 황립육군 군수사령부 부사령관에서 제1사단 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됐다. 3.15 부정 선거 이후 박정희는 절호의 찬스라 생각하여 육군 사관학교 정위층과 같이 쿠데타를 공모했지만 곧 이어 종이 쓰레기 봉투로 삽입됐다. 하지만 3.15 부정 선거를 명분으로 친이승만파의 황립육군 원수부에 총사퇴를 요구했으며 박정희의 해임을 통모했던 송요찬 원수와 그 원수부는 실각했다. 하지만 이후 60년 체제가 성립되고 민주당 내각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내각은 박정희를 불신임하여 그를 오히려 좌천시켜 원수부 향토군 지휘부 군수참모부 부장으로 임명한다. 이에 박정희는 마침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이전 황립육군 인사참모부 부장직에 재직하고 있을 때 만난 김종필, 차지철과 통모해 쿠데타를 모의한다.

주요 인물

- 1961년 황제에 재임하던 이강 황제는 이미 대부분의 행정권을 내각에 위임한 상태였다.

- 당시 대경제국 총리대신에 재직중이었고 명분상 행정수반이었으며 실질적으로는 내각총리대신에게 실권이 있었다.

- 대경제국 제1제국 내각총리대신에 있던 장면은 쿠데타 이전 혼란한 제국의 상태를 수습하고자 고도 성장책을 준비중이었다. 그리고 실행도 못하고 사임했다

- 육군본부의 한직인 원수부 향토군 지휘부 군수참모부 부부장 고문으로 좌천되었지만 쿠데타를 통해 정상올랐다.

- 박정희의 오른팔로 5.16 군사 쿠데타의 주요 요인이었다.

- 박정희의 왼팔로 5.16 군사 쿠데타의 주요 요인이었다.

과정

결과

반응

평가

기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