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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실제 비교.png|width=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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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구글 지도에 대입한 라리마 전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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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라리마제국 6차 행정구역.png|width=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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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라리마 제국의 행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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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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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서는 가상 국가인 [[라리마 제국]]의 역사를 서술하며''', 과거 존재하였던 [[셀레스틴 공화국]]과 [[광명민국|글로스 독립국]]의 역사에 관해서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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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구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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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중세, 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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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기 || 전체 인구 || 증가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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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0년 || 1,000명 || [[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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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0년 || 1,500명 ||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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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00년 || 1,800명 ||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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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0년 || 4,000명 || 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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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0년 || 32,000명 || 700%[* [[라리마 골드 러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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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0년 || 73,000명 || 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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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0년 || 152,000명 || 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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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년 || 226,000명 || 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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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년 || 465,000명 || 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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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 || 727,000명 || 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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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년 || 1,330,000명 ||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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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년 || 2,274,000명 ||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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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 || 3,866,000명 || 70%[* 러시아 본토에서 넘어온 백군 망명자들을 제외하면 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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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 || 5,853,000명 || 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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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년 || 6,673,000명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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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 4,798,000명 || -28%[*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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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령 아메리카|러시아령 라리마]] 시절에는 [[라리마 골드 러쉬|골드 러쉬]]로 인해 인구 증가율이 700%를 웃도는 등, 엄청난 호황기를 맞았다. 하지만 1863년 이후로 점차 금이 바닥나자, 러시아 정부는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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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1910년부터 인구 증가율이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1950년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무려 '''인구의 28%가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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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리마 대외 확장|확장의 시대]],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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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기 || 전체 인구 || 증가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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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 || 6,559,000명 || 37%[* [[글로스 합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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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 || 7,018,000명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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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 8,071,000명 || 15.0%[* [[셀레스틴 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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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년 || 8,587,554명 || 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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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 9,660,987명 || 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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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 10,182,680명 || 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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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 10,376,151명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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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년 || 10,656,307명 ||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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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년 || 10,922,715명 ||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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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년 6월 || 11,000,266명 || 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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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리마 대외 확장|확장의 시대]]에는 [[글로스 합병|합병]], [[셀레스틴 점령|점령]], [[아니안 복속|복속]]등을 통해 영토를 점차 확장시켜 나갔으며, 인구 역시 점차 증가하였다. 하지만 2010년 이래로 경제 위기 및 정치 혼란으로 인구 증가세가 점차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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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6월 초기에는 인구 11,000,000명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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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척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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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이텔멘인.jpg|width=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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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러시아가 도달하기 전 캄차카, 아니안 섬에서 살았던 이텔멘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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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제국]]과 [[대영제국]]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라리마 제국의 영토에는 별다른 문명이나 문화가 발생하지 못했다. 셀레스틴에는 기원후 1200년, 러스트라스에는 기원후 1600년부터 하와이에서 '''폴리네시아인'''이 당도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캄차카 바로 아래에 있는 아니안 섬에는 오래 전부터 '''이텔멘인'''[* 이들이 라리마어 화자들이다] 들이 살고 있었다. 라리마 섬에는 원주민이 거의 살지 않았다. 퉁구스인이 도달했는지는 가설이 분분하며, 라리마 남부에 미크로네시아인들과 다이어스포어와 라리마 섬 북부에 '''캄차가계 민족'''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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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척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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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라리마 첫 조우.jpg|width=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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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라리마 섬 탐험 당시 원주민들을 그린 그림과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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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리마 지역이 처음 발견된 것은 러시아에 의해서였다. 1728년 비투스 베링의 '''1차 캄차카 탐험''' 당시 아니안 섬이 발견되었다. 당시 아니안 섬의 원주민 언어는 캄차카 반도의 언어와 달랐다고 한다. 비투스 베링은 당시 베링 해협의 옛말인 '''아니안 해협''' 의 이름을 따와 아니안 섬이라고 작명했다. 또한 1741년 베링의 '''대북방 원정'''[*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Northern_Expedition ] 당시 라리마 섬이 발견되었다. 라리마 섬에 베링의 배가 잠시 정박했을 때 한 원주민 아이가 궁금해하며 배에 접근해 지역어로 “안녕” 이라는 뜻의 '''“라리마”''' 라고 말한 것이 현재 라리마의 이름 유래가 되었다. 섬이 발견되자 소수의 러시아 정착민들이 라리마 지역으로 이주했다. 또한 베링이 죽고 난 후 후속 탐험대에 의해 1757년 '''러스트라스 군도'''가 발견되었다. 한편 셀레스틴 섬은 제임스 쿡 선장이 지도하는 '''3차 항해''' 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아니안 섬의 정착지는 북부 평원에 건설되었고, 라리마 섬의 최초 정착지는 1744년 현재의 멀리니아 지역에 처음 건설되었다. 한편 영국은 셀레스틴 섬을 죄수 수용소로 쓰려고 해 실제로 몇 차례 죄수들이 보내지기도 하였으나, 뉴사우스웨일스[* 현재의 오스트레일리아 ]에 밀려 얼마 안 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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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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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1754년 제작 지도.jpg|width=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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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1754년에 제작된 지도. 캄차카와 아메리카 사이에 라리마가 묘사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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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제국은 라리마 섬과 러스트라스 군도가 발견되었을 당시부터 두 곳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미 1800년에는 2000명 가량의 주민이 러시아로부터 넘어와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며, 기후는 캅카스 수준은 아니였지만 따뜻하고 곡물이 자라기 좋아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또한 무엇보다 이곳은 '''부동항'''이었다. 러시아 당국은 1812년 캄차카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함께 '''멀리니아, 포스페이트'''를 도시 지위로 격상시켰다. 또한 당시 멀리니아에 '''러시아령 아메리카 회사'''의 본부가 위치했다. 영국 또한 셀레스틴에 항구와 기지를 건설했다. 또한 1830년대 제정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와 라리마를 분리해 라리마를 개별의 주로 만들었다. 당시 러시아령 라리마의 인구는 4000여명 정도였다.[*이 시기 원주민들은 이미 대부분 쪼겨나거나 죽임당했다 ] 하지만 1834년 라리마 섬 북부 미메타이트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골드 러쉬가 일어나 1940년 라리마의 인구는 무려 700%가 증가해 32,000명이 되었다.[* 이후 라리마의 인구는 잭백내전 전까지 꾸준히 러시아로부터 유입되었다 ] 이 시기에 러스트라스 군도와 셀레스틴를 놓고 영국과 러시아 간의 영유권 분쟁이 일어났지만 몇 차례 군사충돌 끝에 두곳 다 러시아가 점유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전투가 이어졌고, 영국은 셀레스틴에 대한 영유권을 계속 주장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 또한 1850년대쯤이 되면 러시아 당국도 라리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1854년 크림 전쟁의 일부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와 더불어 라리마 또한 영불군의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멀리니아와 포스페이트 지역에서 '''공성전'''이 일어났다. 전투는 약 2시간동안 이어졌고 러시아제국군은 203명, 영불군은 297명의 사상자를 낸 채 러시아가 방어에 성공했다.[* 아니안 섬은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같이 함락되었다 ] 같은 시기 러스트라스 군도에서도 해전이 일어났지만 러시아가 격퇴에 성공했다. 같은 시기 셀레스틴에서도 해전이 일어났는데, 라리마 제도에 병력을 집중했던 러시아는 대영제국에게 상륙을 허용하고 만다. 이후 파리 조약에서 셀레스틴은 영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러시아는 인정하지 않았다. 러스트라스와 라리마제도에서 일어난 1867년 러시아는 아메리카를 미국에게 매각했지만 라리마는 매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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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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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러일전쟁 러시아 태평양 함대.jpg|width=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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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1904년 라리마제도 멀리니아항에서 출항하는 러시아 군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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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라리마 또한 전장이 되었다. 러시아제국의 라리마 함대도 동원되어 1904년 8월 29일 '''수도 도쿄'''를 공격하러 향하고 있었으나 일본 이바라키현 앞바다에서 때마침 라리마를 공격하러온 일본의 함대와 마주쳐 '''이바라키 해전'''이 일어나게 된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으며 라리마 함대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나 일본의 피해 또한 막심하여 라리마 제도를공격하지 못하게 되지만, 1905년 1월 3일 재정비를 마친 일본의 함대와 러시아제국군이 노보이마르마라 해에서 격돌한 '''노보이마르마라 해전'''이 일어난다. 러시아제국이 수적으로는 유리했으나 러시아에게 불리했던 기상 상황 등으로 밀리게 되고 일본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다이어스포어 섬'''을 일주일간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울렉시안 해협[*다이어스포어 섬과 라리마 섬 북부 사이에 있는 해협 ]을 통해 다이어스포어와 마주보고 있던 당시 라리마 제도의 주도 '''멀리니아'''는 직접적인 포격을 받았다.[* 포스페이트에서도 소규모의 해전이 일어났다 ] 그러나 뒤이어 러시아제국에 의해 1월 11일 다이어스포어는 다시 러시아가 점령하게 되었는데, 1월 8일 이 과정에서 다이어스포어 화산의 용암이 흘러내리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다이어스포어 화산은 하와이식 분화 화산이다 ] 전투가 일어나 양측 총 4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전쟁 후에는 일본인을 사이에서 연해주, 캄차카와 함께 라리마 또한 할양받아야한다는 여론이 잠시 생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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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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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러시아제국 라리마 함대의 전함.jpg|width=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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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러시아제국 라리마 함대의 전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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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리마 제도는 1차대전 당시에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먼바다에서 몇차례의 충돌이 있었지만 라리마 제도에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 '''러시아제국 라리마 함대'''는 북대서양에 파견되어 '''독일군'''과 몇 차례의 교전을 벌였고, 뉴기니, 미크로네시아, 마셜과 사모아 점령이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라리마 제도 러시아인들이 유럽 전선에서 싸웠으며, '''라리마의 자원'''은 '''군수품 생산'''에 활용되었다. 또한 영국과 미국 관료들과의 회담 장소로도 간혹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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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내전, 국부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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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백군 망명 노동.jpg|width=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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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수송선에 쓸 연료를 운반하는 포스페이트항의 열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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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에서 온 힘을 다했던 러시아제국이었지만 오랜 전쟁으로 피로와 그동안의 곪아왔던 사회 문제로 인해 반황제주의자들은 1917년 러시아제국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임시정부'''를 세운다. 이에 라리마 제도 또한 임시정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지만, 계속되는 임시정부와 볼셰비키 간의 갈등으로 인해 10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러시아는 '''내전 상태'''[* 러시아 내전 또는 적백내전 ]에 돌입하게 된다. 처음에는 백군이 승기를 잡을 듯 하다가, 1919년 12월을 기준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러시아 백군(러시아 공화국)은 수도를 '''라리마 제도 멀리니아'''로 옮겼으며 러시아 공화국 정부는 이곳에서 가동하게 된다. 극동마저 적군의 손에 넘어갈 기미가 보이자 러시아 백군의 주요 인원들은 1919년 9월 9일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에서 '''대철수'''를 진행했다. 이후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러시아 전역에 퍼진 백군 잔여군들을 컨트롤했다. 캄차카 반도를 차지한 적군은 백군의 점령지였던 아니안 섬에 '''수백 차례''' 공격을 가하지만 러시아 백군은 '''70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아니안 섬을 지켰고 이는 '''17차 아니안 공격'''을 마지막으로 1923년 9월에 종료되었다.[* 아니안이 백군의 진먼이 된 셈 ] 적군은 라리마 제도에도 '''직접적인 공격'''을 시도했으나 당시 해상 전력 체계를 잘 갖추지 못한 탓에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는 못했다. 또한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1922-1923년 '''페펠라예프의 군대'''와 '''연해주의 백군'''을 직접적으로 지휘, 지원했으며 이 두 지역이 함락당할 때 수 차례의 대규모 망명이 이루어졌다. 또 라리마 제도에서도 병력을 파견해 '''마가단, 쿠릴 열도''' 등을 잠시 점령했으나 한달을 가지 못하고 적군의 손에 넘어갔다. 라리마 제도의 백군과 볼셰비키 적군 간의 직접적인 전투는 1925년 '''우랑겔 섬'''을 적군이 점령하게 되면서 끝이 났으며,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소규모 반볼셰비키를 지원했다. 라리마 제도의 백군은 왕정주의자, 공화주의자, 자본주의자, 몐셰비키 등의 혼합체였으나 여러 차례의 회의를 통해 망명해 있던 니콜라이 2세의 사촌,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을 황제로 올려 '''러시아제국'''을 복원시키기로 합의한다.[* 몐셰비키 측에서는 격렬한 반대가 쏟아졌다 ] 1925년 7월 18일 키릴 대공이 '''키릴 1세'''로 즉위함으로써 러시아제국은 '''라리마 제도와 아니안 섬, 러스트라스'''에서 복원되었다. 다만 황제는 실권이 없고 국가는 의원내각제로써 운영되며 철저한 민주주의 체재를 따랐다. 첫 총리는 '''케렌스키'''였고 공산권을 경계하던 많은 서구권 국가들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받았으며 후(後) 러시아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일종의 '''체재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에는 경제력, 정통성, 인지도, 대외 이미지, 군사력은 라리마(러시아제국)이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 또한 1927년 더 좋은 입지를 가진 포스페이트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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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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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1930년대의 포스페이트.jpg|width=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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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포스페이트의 1929년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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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림 러시아제국과 백군'''은 라리마 내 안정을 빠르게 되찾았고, 성장을 이어나갔다. 이는 정책의 성공, 서방국가로부터의 원조, 라리마 지역이 러시아제국 내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이유 때문이었다. 1930년 라리마 러시아제국은 당시 기분으로는 '''선진국''' 중 하나였으며 러스트라스의 태평양 허브 항구 역할과 '''라리마 금광'''과 '''미메타이트'''[* 전간기 라리마의 최대 광업지역 ] 덕분에 호황기를 맞았으며 러시아제국에도 온전히 이루지 못했던 '''산업화'''를 이루게 된다. 호황기에는 '''본토 수복''' 또한 활발히 넌의되었으며, 이는 정치권에서도 진지하게 생각하여 아니안 지역에 몇몇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소련과의 대립''' 또한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미국발 대공황'''을 라리마 러시아제국 또한 피할 수 없었고, 1933년에는 전년대비 '''전체 GDP의 14%'''가 증발할 정도로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대공황 당시 '''공화주의자''' 또한 많은 지지를 받았는데, 하지만 1935년 러시아제국 복원 당시 군주국 건설에 격렬히 반대하던 내전 당시 백군의 편에 섰던 일부 '''멘셰비키'''가 라리마 러시아제국군과 공조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 발각되어 멘셰비키는 '''축출'''되었다. 또한 대공황의 타격으로 소련과의 경제적 격차 또한 매우 적어지게 된다. 대공황기에는 주로 진보파가 지지를 받았다. 라리마 러시아제국은 1937년 대공황의 침체에서 대부분 벗어났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라리마 러시아제국 또한 일본을 경계하게 되었고 미국, 네덜란드, 영국, 중국과 함께 '''ABCD 포위망'''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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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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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일본군 상륙.jpg|width=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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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칼세르 지방에서 진격하는 일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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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이 되어 세계는 다시금 세계대전의 포화 속으로 말려 들어갔고, 1941년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 또한 시작되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석유와 자원이 있었던 동남아시아와 마찬가지로, 라리마 지역 또한 확보해야 했다. 이는 라리마 제도의 미메타이트에서 나오는 광물자원과, 라리마를 잃게 될 경우 일본 본토를 노리는 검이 되지만 라리마를 얻는다면 반대로 미국을 노리는 검이 되기 때문이었다. 라리마 러시아제국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네덜란드, 영국, 중국 등과 함께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태평양전쟁 전까지만 해도 라리마는 독소전 당시 독일을 비밀리에 지지하기도 하였다. 소련 때문에... ] 여전히 상시 경계해야 할 소련이 있었기에 많은 병력이 아니안에 주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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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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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align=center><bgcolor=#ffffff> [[파일:G3M.jpg|width=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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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아니안 지역을 공습하는 미쓰비시 G3M 폭격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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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g><big>아니안 지역</big></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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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6일, 일본 폭격기가 당시 상당수의 항공기와 군인이 주둔하고 있던 아니안 지역의 주도 '''표트르그라드'''를 폭격하여 '''아니안 공습'''이 일어난다. 홋카이도에서 출격한 폭격기는 26일 새벽에 아니안의 공항, 전투기 격납고, 부대와 석유 저장통 등을 폭격했다. 뒤이어 라리마 러시아 국적의 폭격기가 폭격당하지 았았던 아니안 북쪽의 '''21비행장'''에서 이륙해 항공전을 벌여 일본군 폭격기 3대를 격추하고, 더이상의 폭격이 진행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니안 공습으로 인해 아니안 지역의 '''제공권'''을 내줌고 동시에 '''상당량의 항공 전력'''이 손실되었다. 이어서 '''1942년 1월 6일''' 일본군은 아니안 지역에 '''상륙'''을 감행했고 아니안 섬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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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g><big>라리마 제도</big></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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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리마 제도의 상황도 아니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안 공습이 진행된 5시간 후에 일본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비행기가 중추 함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포스페이트항에 폭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라리마 러시아 포스페이트 함대는 이미 일본군의 공습을 감지하고 항공모함이 있는 곳을 역기습해 해전이 일어나게 되지만, 라리마 러시아가 참패한다. 이후에도 멀리니아, 노시안, 플레로보 등에 폭격이 이어지며 일본군의 피해도 많았지만 라리마의 전력을 무력화하게 된다. 일본군의 제공권, 제해권 장악 후 2월 22일 라리마 제도를 점령하는 '''세키가하라 작전''' 이 실행되어 러일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방어가 가장 허술했던 다이어스포어 북부 지역과 칼세르 남부 샬레하르트에 일본군 해병대가 상륙했다. 하지만 러일전쟁 때와는 달리 다디어스포어 방위군은 물론 멀리니아에서 빠르게 4개 전투사단이 도착해 일본군의 진격을 어느정도 저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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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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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제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었지만 피해는 추축국 못지않을 정도로 막심한, 이름뿐인 승리였다. 일본에게 영토가 황폐화되었고, 경제는 추락했다. 하지만 에치슨 라인에 포함되어 미국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고, 자원을 바탕으로 한 성공한 정책 덕에 라리마는 1950년대에 비교적 빨리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소련의 캄차카 반도를 코앞에 겨누기 때문에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이에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지자 라리마에 그리스, 이란, 터키와 함께 소련을 겨눈 미사일을 배치한다. 소련과 갈등이 심했으며, 교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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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리마제국'''과 광명민국 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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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소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라리마제국 뿐 만 아니라 광명민국 역시도 큰 피해를 입었다. 광명 전투와 해전으로 인해 모든 산업 시설들이 전부 파괴되었다고 해도 무방했으며, 사실상 경제를 유지하지 못해 미국과 라리마에 의존했다. 결국 광명 수뇌부는 라리마제국에게 합병 의사를 표출했고, 때마침 경제를 회복한 라리마제국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합병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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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문|1.광명민국을 라리마제국에 영구 합병한다.[br]2.광명민국은 러스트라스 특별주로써 라리마제국에 편입되며, 라리마제국은 단일국가지만 러스트라스 주의 경우에만 예외를 두어 연방의 형식을 갖춘다.[br]3.라리마제국은 러스트라스 특별주에게 자치권을 부여한다.[br]4. 라리마제국은 러스트라스 주민들에게 라리마제국의 시민권을 보장하며, 차별하지 아니한다.[br]5. 라리마제국은 러스트라스 주를 특별주로써 우선시하며 관리, 지원할 의무가 있다. | 라리마제국-광명민국 합병 조약문 간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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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셀레스틴 내전, 라리마 개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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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리마 제국은 [[1963년]], 경제를 완전히 회복하고, 상승세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한다. 이전까지의 1차 산업은 점차 중공업으로 변화하고 있었고, 경제 성장률은 연간 11%에 이를 정도였다. 한편 영국의 식민지였던 셀레스틴 지역은 영국과의 긴 협상 끝에 [[1969년]] 독립하게 된다. 하지만 부패한 지도자와 나라 안정화 실패 등으로 인해 반란이 또다시 일어나고, 셀레스틴 공화국은 내전에 빠지게 된다. 처음 라리마는 이 내전에 관해 별 관심이 없었지만, 내전으로 인한 난민 발생, 범죄자들의 약탈 등으로 라리마 광명의 치안이 크게 나빠지고, 심지어는 셀리스틴의 정부군 조차도 반란군 소탕을 목적으로 광명에 상륙을 시도하자 라리마 제국은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셀레스틴 내전에 개입한다. 라리마 제국군의 셀레스틴 점령은 매우 빨랐다. [[1976년]] 여름에 이루어진 상륙 작전에서부터 [[1977년]] 겨울, 잔존세력을 모두 정벌하고 치안을 안정화하기까지 불과 2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영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판과 제제를 받기도 했으나, 셀레스틴 지역의 강한 자치권과 족비정책을 펼치자 [[1990년대]]에는 대부분 이런 논란이 사라지고 셀레스틴 자치주는 라리마 제국의 영토로써 굳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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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련 붕괴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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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라리마에게 직접적인 안보위협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1992년]], 주라미군이 철수하고, 1998년 러시아와 결국 수교를 맺으면서 라리마 제국에는 평화가 깃들었다. 또한 [[2001년]] OECD의 회원국이 되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인해 경제가 휘청이기도 했지만 탄탄한 기반 사업으로 인해 [[2020년대]] 중반까지 회복하는 데 성공하고, [[2017년]]에 베릴 7세가 즉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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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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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eren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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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라리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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