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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 === | === 근현대 === | ||
에티오피아의 근현대사는 테오드로스 2세에 의해서 시작된다. 대대적인 개혁이 이 시대때에 이루어졌다.그는 에티오피아를 부족국가에서 어였한 중앙집권국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테오드로스 2세의 근대화 작업은 그가 원했던만큼의 결실을 내지 못했다. 테오드로스 2세는 군사 공장을 설치하고 지방 군벌들을 억눌렀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막대한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려 하자 교회의 반발을 겪으며 통제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또한 점차 에티오피아 지방에 마수를 뻗쳐오는 영국 역시 테오드로스 2세의 골치를 썩였다. | |||
이미 테오드로스 2세는 당시 빅토리아 여왕과 편지를 주고받는 등 서구 열강 세력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여왕에게 근대화를 위한 기술 인력 파견을 요청했는데, 영국이 기술 인력은 보내지 않고 쓸데없는 선교사 등만을 보내자 분노해 영국 사절단을 가두었다. 에티오피아를 집어삼키거나 영토를 빼앗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영국은 이 기회를 틈타 로버트 네이피어 경이 이끄는 3만 명이 넘는 대군을 파견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평소 테오드로스 2세의 중앙집권적인 정책에 불만이 많던 지방 토후들과 교회들은 영국군에 협력했고, 테오드로스 2세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했다. 테오드로스 2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영국 군대를 내쫓으려 나갔으나 마그달라 지방에서 대패하고야 말았다. 테오드로스 2세는 수중에 4천도 안되는 병력 밖에 남지 않자 실의에 빠져 1868년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황제가 죽은 이후 영국군은 에티오피아의 수도 곤다르를 함락, 약탈했고 이 재물들을 운송하기 위해 15마리의 코끼리와 300마리가 넘는 당나귀들이 필요했을 정도라고 한다. 영국은 수단 남부를 차지하였고 이탈리아, 프랑스와 소말릴란드를 분할하였다. 그나마 영국이 에티오피아를 완전히 식민화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 |||
이후 에티오피아 황위는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를 거쳐 요한네스 4세에게 넘어갔다. 요한네스 4세는 서구 열강들의 잠식에 맞서 에티오피아를 단결시키는 데에 총력을 다했으며,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집트와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두고 에리트레아 지역을 병합하는 등 여러 업적들을 남겼다. 그러나 이렇게 팽창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던 요한네스 4세는 수단의 무슬림 군대와 싸우던 중 갈라바트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뒤를 이어 1889년 즉위한 사람이 바로 메넬리크 2세였다. |
2023년 2월 18일 (토) 00:19 판
에티오피아 제국 የኢትዮጵያ ንጉሠ ነገሥት መንግሥ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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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ኢትዮጵያ ፡ ታበጽ ፡ እደዊሃ ፡ ሃበ ፡ እግዚአብሔር 에티오피아는 하나님을 향해 그 손을 들리로다 | |||||||||||||||||||||||||||||
상징 | |||||||||||||||||||||||||||||
국가 | 에티오피아여 행복하라 | ||||||||||||||||||||||||||||
국화 | 칼라디움 | ||||||||||||||||||||||||||||
국조 | 사자 | ||||||||||||||||||||||||||||
국목 | 없음 | ||||||||||||||||||||||||||||
위치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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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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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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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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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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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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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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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코드 | |||||||||||||||||||||||||||||
SC | |||||||||||||||||||||||||||||
국제전화코드 | |||||||||||||||||||||||||||||
+7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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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에티오피아 제국 혹은 에티오피아는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반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역사
역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
에티오피아는 자기들 스스로가 인류 문명의 시작이라 여겼을 정도로 고도의 역사 문명을 갖춘 국가였다. 예쿠노 암라크 황제가 집권하여 솔로몬 왕조가 성립하고, 에티오피아 땅에서는 수없이도 많은 국가가 망하고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고대
에티오피아 제국 건국 이전, 혹은 예쿠노 암라크 황제 등장 이전의 시대에는 "다못"이란 국가가 처음으로 세워졌고, 그 외에도 여러 국가들이 세워지고 멸망하는 역사가 이어졌다. 많은 국가가 세워졌으니, 많은 종교가 뒤섞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이슬람, 토착신앙등을 주류로 하는 국가들이 전쟁을 벌였다.
이슬람과의 대립
현 에티오피아 내에서는 33.9%를 차지하는 종교가 이슬람이지만, 에티오피아는 고대, 중세에 거쳐 이슬람권 국가들과 분쟁, 혹은 전쟁을 이어나갔다. 특히 이웃한 국가인 소말리아와 싸움이 잦았는데, 소말리아는 현대에 이슬람이 국교로 지정되어있는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이들과 싸움은 불가피했다.
중세
1270년, 예쿠노 암라크 황제가 자그웨 왕조를 쇼아 술탄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전복시키고 에티오피아 제국을 성립 시켰다. 하지만 이도 잠시, 쇼아 술탄국을 멸망시킨 이파트 술탄국과의 전쟁을 치루고 이파트 술탄국을 몰아내었다.
이파트 술탄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권과의 유화책과 동맹은 산산조각나게 되었으며, 에티오피아의 이슬람과의 대립이 시작되게 된다.
근현대
에티오피아의 근현대사는 테오드로스 2세에 의해서 시작된다. 대대적인 개혁이 이 시대때에 이루어졌다.그는 에티오피아를 부족국가에서 어였한 중앙집권국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테오드로스 2세의 근대화 작업은 그가 원했던만큼의 결실을 내지 못했다. 테오드로스 2세는 군사 공장을 설치하고 지방 군벌들을 억눌렀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막대한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려 하자 교회의 반발을 겪으며 통제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또한 점차 에티오피아 지방에 마수를 뻗쳐오는 영국 역시 테오드로스 2세의 골치를 썩였다.
이미 테오드로스 2세는 당시 빅토리아 여왕과 편지를 주고받는 등 서구 열강 세력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여왕에게 근대화를 위한 기술 인력 파견을 요청했는데, 영국이 기술 인력은 보내지 않고 쓸데없는 선교사 등만을 보내자 분노해 영국 사절단을 가두었다. 에티오피아를 집어삼키거나 영토를 빼앗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영국은 이 기회를 틈타 로버트 네이피어 경이 이끄는 3만 명이 넘는 대군을 파견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평소 테오드로스 2세의 중앙집권적인 정책에 불만이 많던 지방 토후들과 교회들은 영국군에 협력했고, 테오드로스 2세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했다. 테오드로스 2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영국 군대를 내쫓으려 나갔으나 마그달라 지방에서 대패하고야 말았다. 테오드로스 2세는 수중에 4천도 안되는 병력 밖에 남지 않자 실의에 빠져 1868년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황제가 죽은 이후 영국군은 에티오피아의 수도 곤다르를 함락, 약탈했고 이 재물들을 운송하기 위해 15마리의 코끼리와 300마리가 넘는 당나귀들이 필요했을 정도라고 한다. 영국은 수단 남부를 차지하였고 이탈리아, 프랑스와 소말릴란드를 분할하였다. 그나마 영국이 에티오피아를 완전히 식민화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이후 에티오피아 황위는 테클레 기요르기스 2세를 거쳐 요한네스 4세에게 넘어갔다. 요한네스 4세는 서구 열강들의 잠식에 맞서 에티오피아를 단결시키는 데에 총력을 다했으며,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집트와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두고 에리트레아 지역을 병합하는 등 여러 업적들을 남겼다. 그러나 이렇게 팽창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던 요한네스 4세는 수단의 무슬림 군대와 싸우던 중 갈라바트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의 뒤를 이어 1889년 즉위한 사람이 바로 메넬리크 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