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리마 제국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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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width=500><table bordercolor=#0082C8><#0082C8> '''{{{#ffffff △ 1754년에 제작된 지도. 캄차카와 아메리카 사이에 라리마가 묘사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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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은 라리마 섬과 러스트라스 군도가 발견되었을 당시부터 두 곳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미 1800년에는 2000명 가량의 주민이 러시아로부터 넘어와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며, 기후는 캅카스 수준은 아니였지만 따뜻하고 곡물이 자라기 좋아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또한 무엇보다 이곳은 '''부동항'''이었다. 러시아 당국은 1812년 캄차카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함께 '''멀리니아, 포스페이트'''를 도시 지위로 격상시켰다. 또한 당시 멀리니아에 '''러시아령 아메리카 회사'''의 본부가 위치했다. 영국 또한 셀레스틴에 항구와 기지를 건설했다. 또한 1830년대 제정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와 라리마를 분리해 라리마를 개별의 주로 만들었다. 당시 러시아령 라리마의 인구는 4000여명 정도였다. 하지만 1834년 라리마 섬 북부 미메타이트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골드 러쉬가 일어나 1940년 라리마의 인구는 무려 700%가 증가해 32,000명이 되었다.[* 이후 라리마의 인구는 잭백내전 전까지 꾸준히 러시아로부터 유입되었다 ] 이 시기에 러스트라스 군도를 놓고 영국과 러시아 간의 영유권 분쟁이 일어났지만 몇 차례 군사충돌 끝에 러스트라스는 러시아가 점유하게 되었다. 또한 1850년대쯤이 되면 러시아 당국도 라리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1854년 크림 전쟁의 일부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와 더불어 라리마 또한 영불군의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멀리니아와 포스페이트 지역에서 '''공성전'''이 일어났다. 전투는 약 2시간동안 이어졌고 러시아제국군은 203명, 영불군은 297명의 사상자를 낸 채 러시아가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시기 러스트라스 군도에서도 해전이 일어났지만 러시아가 격퇴에 성공했다. 당시 러시아 또한 셀레스틴 지역까지 빼앗으려 해 셀레스틴 지역에 상륙을 시도했지만 저지되었다. 1867년 러시아는 아메리카를 미국에게 매각했지만 라리마는 매각하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은 라리마 섬과 러스트라스 군도가 발견되었을 당시부터 두 곳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미 1800년에는 2000명 가량의 주민이 러시아로부터 넘어와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며, 기후는 캅카스 수준은 아니였지만 따뜻하고 곡물이 자라기 좋아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또한 무엇보다 이곳은 '''부동항'''이었다. 러시아 당국은 1812년 캄차카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함께 '''멀리니아, 포스페이트'''를 도시 지위로 격상시켰다. 또한 당시 멀리니아에 '''러시아령 아메리카 회사'''의 본부가 위치했다. 영국 또한 셀레스틴에 항구와 기지를 건설했다. 또한 1830년대 제정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와 라리마를 분리해 라리마를 개별의 주로 만들었다. 당시 러시아령 라리마의 인구는 4000여명 정도였다.[*이 시기 원주민들은 이미 대부분 쪼겨나거나 죽임당했다 ] 하지만 1834년 라리마 섬 북부 미메타이트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골드 러쉬가 일어나 1940년 라리마의 인구는 무려 700%가 증가해 32,000명이 되었다.[* 이후 라리마의 인구는 잭백내전 전까지 꾸준히 러시아로부터 유입되었다 ] 이 시기에 러스트라스 군도를 놓고 영국과 러시아 간의 영유권 분쟁이 일어났지만 몇 차례 군사충돌 끝에 러스트라스는 러시아가 점유하게 되었다. 또한 1850년대쯤이 되면 러시아 당국도 라리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1854년 크림 전쟁의 일부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와 더불어 라리마 또한 영불군의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멀리니아와 포스페이트 지역에서 '''공성전'''이 일어났다. 전투는 약 2시간동안 이어졌고 러시아제국군은 203명, 영불군은 297명의 사상자를 낸 채 러시아가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시기 러스트라스 군도에서도 해전이 일어났지만 러시아가 격퇴에 성공했다. 당시 러시아 또한 셀레스틴 지역까지 빼앗으려 해 셀레스틴 지역에 상륙을 시도했지만 저지되었다. 1867년 러시아는 아메리카를 미국에게 매각했지만 라리마는 매각하지 않았다.


== 근대 ==
== 근대 ==

2021년 9월 3일 (금) 14:48 판


개요

이 문서는 가상 국가인 라리마 제국의 역사를 서술하며, 과거 존재하였던 셀레스틴 공화국글로스 독립국의 역사에 관해서도 설명합니다.

인구 변화

고대, 중세, 근대
시기전체 인구증가율
1700년1,000명X
1780년1,500명50%
1800년1,800명20%
1830년4,000명122%
1840년32,000명700% 라리마 골드 러쉬
1850년73,000명128%
1860년152,000명108%
1870년226,000명49%
1880년465,000명106%
1890년727,000명56%
1900년1,330,000명83%
1910년2,274,000명71%
1920년3,866,000명70% 러시아 본토에서 넘어온 백군 망명자들을 제외하면 56%
1930년5,853,000명51%
1940년6,673,000명14%
1950년4,798,000명-28%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

러시아령 라리마 시절에는 골드 러쉬로 인해 인구 증가율이 700%를 웃도는 등, 엄청난 호황기를 맞았다. 하지만 1863년 이후로 점차 금이 바닥나자, 러시아 정부는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었다.

결국 1910년부터 인구 증가율이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1950년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무려 인구의 28%가 감소하였다.

확장의 시대, 현대
시기전체 인구증가율
1960년6,559,000명37% 글로스 합병
1970년7,018,000명7%
1980년8,071,000명15.0% 셀레스틴 점령
1990년8,587,554명6.4%
2000년9,660,987명12.5%
2005년10,182,680명5.4%
2010년10,376,151명1.9%
2015년10,656,307명2.7%
2020년10,922,715명2.5%
2021년 6월11,000,266명0.71%

확장의 시대에는 합병, 점령, 복속등을 통해 영토를 점차 확장시켜 나갔으며, 인구 역시 점차 증가하였다. 하지만 2010년 이래로 경제 위기 및 정치 혼란으로 인구 증가세가 점차 줄어들었다.

2021년 6월 초기에는 인구 11,000,000명을 달성하였다.

개척 이전

러시아제국대영제국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라리마 제국의 영토에는 별다른 문명이나 문화가 발생하지 못했다. 셀레스틴에는 기원후 1200년, 러스트라스에는 기원후 1600년부터 하와이에서 폴리네시아인이 당도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캄차카 바로 아래에 있는 아니안 섬에는 오래 전부터 이텔멘인 이들이 라리마어 화자들이다 들이 살고 있었다. 라리마 섬에는 원주민이 거의 살지 않았다. 퉁구스인이 도달했는지는 가설이 분분하며, 라리마 남부에 미크로네시아인들과 다이어스포어와 라리마 섬 북부에 캄차가계 민족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개척기

라리마 첫 조우.jpg
△ 라리마 섬 탐험 당시 원주민들을 그린 그림과 지도

라리마 지역이 처음 발견된 것은 러시아에 의해서였다. 1728년 비투스 베링의 1차 캄차카 탐험 당시 아니안 섬이 발견되었다. 당시 아니안 섬의 원주민 언어는 캄차카 반도의 언어와 달랐다고 한다. 비투스 베링은 당시 베링 해협의 옛말인 아니안 해협 의 이름을 따와 아니안 섬이라고 작명했다. 또한 1741년 베링의 대북방 원정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Northern_Expedition 당시 라리마 섬이 발견되었다. 라리마 섬에 베링의 배가 잠시 정박했을 때 한 원주민 아이가 궁금해하며 배에 접근해 지역어로 “안녕” 이라는 뜻의 “라리마” 라고 말한 것이 현재 라리마의 이름 유래가 되었다. 섬이 발견되자 소수의 러시아 정착민들이 라리마 지역으로 이주했다. 또한 베링이 죽고 난 후 후속 탐험대에 의해 1757년 러스트라스 군도가 발견되었다. 한편 셀레스틴 섬은 제임스 쿡 선장이 지도하는 3차 항해 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아니안 섬의 정착지는 북부 평원에 건설되었고, 라리마 섬의 최초 정착지는 1744년 현재의 멀리니아 지역에 처음 건설되었다. 한편 영국은 셀레스틴 섬을 죄수 수용소로 쓰려고 해 실제로 몇 차례 죄수들이 보내지기도 하였으나, 뉴사우스웨일스 현재의 오스트레일리아 에 밀려 얼마 안 가 끊어졌다.

1800년대

1754년 제작 지도.jpg
△ 1754년에 제작된 지도. 캄차카와 아메리카 사이에 라리마가 묘사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라리마 섬과 러스트라스 군도가 발견되었을 당시부터 두 곳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미 1800년에는 2000명 가량의 주민이 러시아로부터 넘어와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며, 기후는 캅카스 수준은 아니였지만 따뜻하고 곡물이 자라기 좋아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또한 무엇보다 이곳은 부동항이었다. 러시아 당국은 1812년 캄차카의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와 함께 멀리니아, 포스페이트를 도시 지위로 격상시켰다. 또한 당시 멀리니아에 러시아령 아메리카 회사의 본부가 위치했다. 영국 또한 셀레스틴에 항구와 기지를 건설했다. 또한 1830년대 제정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와 라리마를 분리해 라리마를 개별의 주로 만들었다. 당시 러시아령 라리마의 인구는 4000여명 정도였다. 시기 원주민들은 이미 대부분 쪼겨나거나 죽임당했다 하지만 1834년 라리마 섬 북부 미메타이트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골드 러쉬가 일어나 1940년 라리마의 인구는 무려 700%가 증가해 32,000명이 되었다. 이후 라리마의 인구는 잭백내전 전까지 꾸준히 러시아로부터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러스트라스 군도를 놓고 영국과 러시아 간의 영유권 분쟁이 일어났지만 몇 차례 군사충돌 끝에 러스트라스는 러시아가 점유하게 되었다. 또한 1850년대쯤이 되면 러시아 당국도 라리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1854년 크림 전쟁의 일부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와 더불어 라리마 또한 영불군의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멀리니아와 포스페이트 지역에서 공성전이 일어났다. 전투는 약 2시간동안 이어졌고 러시아제국군은 203명, 영불군은 297명의 사상자를 낸 채 러시아가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시기 러스트라스 군도에서도 해전이 일어났지만 러시아가 격퇴에 성공했다. 당시 러시아 또한 셀레스틴 지역까지 빼앗으려 해 셀레스틴 지역에 상륙을 시도했지만 저지되었다. 1867년 러시아는 아메리카를 미국에게 매각했지만 라리마는 매각하지 않았다.

근대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과 적백내전

1904년, 러시아와 일본 간 전쟁이 발발하면서 라리마 내의 긴장도 고조되었다. 징병제가 실시되었으며, 라리마 청년들은 러시아의 해군으로 복무하게 된다. 러시아는 발틱함대가 오기 전까지 라리마의 소규모 군함들로 일본과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일본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할 수는 없었고, 발틱함대가 괴멸당하자 1905년, 러시아의 패배로 끝난다. 이후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 함께 삼국협상을 조직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맞서 싸웠으며, 이때도 인구와 자원이 많은 축에 속하는 라리마에서 많은 인적 자원과 군수품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고 러시아 서부, 남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로 인해 라리마 제도의 사정도 안좋아져, 1914년 후반부터 데모, 폭력 시위의 건수가 증가한다.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라리마 제도도 러시아 임시정부의 손에 들어간다. 하지만 10월 혁명이 터지고 내전이 발발하자 라리마 내에서도 라리마 내전이 벌어지지만 이는 3달 후 백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후에 적군이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자, 적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던 유일한 곳이었던 라리마 제도로 백군의 정부 자체를 옮기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결국 1921년 러시아 임시정부는 핀란드에 도피해 있었던 로마노프 왕조의 유일한 계승자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함께 캄차카에서 라리마로 대피했다. 사실상 러시아판 국부천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많은 백군 망명자들이 라리마로 몰려들었다. 1921년 말부터 레닌의 소비에트는 라리마 제도도 점령하려 공격했지만, 라리마의 지정학적인 이점을 이용해 라리마 섬의 점령은 커녕 러시아 임시정부는 캄차카 코앞의 아니안 섬까지 차지해버린다. 후에 러시아 임시정부와 제정 측의 협의 끝에 절충안으로 입헌군주제의 형식으로 러시아제국을 부활시키기로 협의했으며, 정통성 부문에서 소비에트보다 앞서는 러시아제국이 라리마에 자리잡았다. 1924년 키릴 대공이 키릴 1세로 전러시아 황제로 즉위한다. 이때 백군 측의 공화파 가운데서 라리마가 러시아제국이 되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출하는 일부 세력이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전략가 중 한 명이었던 라이노크 코렌조니 를 중심으로 분리 독립해 라리마 제도의 남부에 있는 러스트라스 제도에 독립 국가 글로스 독립국, 혹은 광명민국을 건국했다. 라리마 당국은 광명민국을 국가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상황이 혼란스러워 군사적 행동을 하기 어려웠다. 이로써 적백내전 이후 러시아가 3개가 존재하게 되었다(..)

2차 대호황

라리마제국 1920년대.png
△ 라리마 제도의 1930년대 모습


라리마는 영미권의 지지를 받아 소련, 일본을 경계할 대상으로써 많은 지원을 받는다. 무엇보다 러시아제국이라는 말이 필요없는 정통성을 지녔기에 대공황 전까지는 라리마가 소련과의 경쟁에서 우세였다. 그동안 자원과 이익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가 국가 자체 개발을 못하고 있었는데, 막대한 자원과 영국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너지 효과를 냈다.정치적으로는 소련과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아니안 섬과 캄차카에서 몇차례 군사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또한 당시 라리마는 전후 유럽과 일본에서의 많은 이민자들이 몰리기도 했다.

대공황

이렇게 쑥쑥 성장하는 신생국가 라리마였지만 끝은 있었다. 당시 라리마는 국가 총생산의 상당 부분을 수출에 의존했는데, 대공황이 찾아오자 라리마의 물건이나 광물을 사는 국가가 없어진 것이다. 대공황이 닥치자 라리마의 경제또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실업률은 30%에 달했고, GDP의 41%이 증발했다. 대공황을 겪은 라리마는 점차 자원 의존도를 줄이게 된다.

태평양 전쟁

라리마제국 태평양전쟁수정.png
△ 1942년 3월 당시의 라리마제도

당시 라리마(러시아제국)는 서방세계와 협력해 일본을 견제하고 있었다. 동남아 지역에 비해서는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졌으나, 라리마(러시아제국)는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와 ABCD 포위망에 참여하여(E로 불리기도 함) 일본에게 석유, 광물과 군수물자 등을 수출하지 않았다. 곧이어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제국은 당시 동남아를 공격했던 자원 문제와 마찬가지로 라리마 제도의 자원 획득, 라리마의 중간기지화를 위해 1942년 1월 라리마를 침략했다. 1941년 1월 4일 새벽 일본제국 소속의 전투기가 노시안의 항구시설, 군사시설을 폭격한다. 몇 차례의 해전이 있은 뒤 일본군은 노시안 지역에 상륙했으며, 뒤이어 사우스 우라니아 지역에도 일본군이 상륙해 섬을 점령했다. 라리마군은 세니딘,노시안,우라니아가 점령당한 와중에서 토리아 지역에는 평원이 계쏙 이어지기 때문에 수가 적은 라리마군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당시 대공황으로 인해 군축을 시행했다), 라리마 고원까지 후퇴한다. 1942년 1월 29일, 라리마 고원에서 일본군과 라리마군이 맞붙는다. 라리마의 지형에 능숙했던 라리마군이 우세를 보이는 듯 했으나, 멸려오는 일본군과 폭격기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낸 채로 수도 포스페이트로 후퇴한다. 일본군은 계속 북진하여 자원 및 석유가 나는 미메타이트 지역을 장악하고, 라리마군은 뒤늦게 도착한 미군과 영국군과 수도 포스페이트에서 함께 남쪽으로는 라리마 강, 북쪽과 동쪽으로는 라리마 고원과 미메타이트 산맥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한다. 또한 다이어스포어 해협이나 라리마의 동해안에서 연합국군과 일본제국군 해군간의 산발적인 해전이 일어났다. 또한 광명민국도 점령당해 광명민국 정부는 대영제국으로 망명한다. 라리마제국 정부는 포스페이트에 남아 참혹한 포스페이트 전투를 치뤘다. 일본제국에게 포위당해 산과 강을 방어선 삼아 벼텨냈으며, 이때 점령당한 남부 포스페이트는 거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고, 미드웨이 해전 후 1942년 8월이 되고 민간인 총합 80만명의 사상자를 낸 후에야 일본군을 몰아내기 시작해 1944년 1월 라리마 제도를 모두 되찾았다. 광명민국에서는 광명 해협전과 서주 쟁탈전으로 인해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태평양전쟁으로 라리마에서 200만명이 죽었다.

현대

비록 제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었지만 피해는 추축국 못지않을 정도로 막심한, 이름뿐인 승리였다. 일본에게 영토가 황폐화되었고, 경제는 추락했다. 하지만 에치슨 라인에 포함되어 미국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고, 자원을 바탕으로 한 성공한 정책 덕에 라리마는 1950년대에 비교적 빨리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다. 소련의 캄차카 반도를 코앞에 겨누기 때문에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이에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지자 라리마에 그리스, 이란, 터키와 함께 소련을 겨눈 미사일을 배치한다. 소련과 갈등이 심했으며, 교류하지 않았다.

라리마제국과 광명민국 합병

나소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라리마제국 뿐 만 아니라 광명민국 역시도 큰 피해를 입었다. 광명 전투와 해전으로 인해 모든 산업 시설들이 전부 파괴되었다고 해도 무방했으며, 사실상 경제를 유지하지 못해 미국과 라리마에 의존했다. 결국 광명 수뇌부는 라리마제국에게 합병 의사를 표출했고, 때마침 경제를 회복한 라리마제국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합병이 진행되었다.

1.광명민국을 라리마제국에 영구 합병한다.
2.광명민국은 러스트라스 특별주로써 라리마제국에 편입되며, 라리마제국은 단일국가지만 러스트라스 주의 경우에만 예외를 두어 연방의 형식을 갖춘다.
3.라리마제국은 러스트라스 특별주에게 자치권을 부여한다.
4. 라리마제국은 러스트라스 주민들에게 라리마제국의 시민권을 보장하며, 차별하지 아니한다.
5. 라리마제국은 러스트라스 주를 특별주로써 우선시하며 관리, 지원할 의무가 있다. —  라리마제국-광명민국 합병 조약문 간략히

셀레스틴 내전, 라리마 개입

라리마 제국은 1963년, 경제를 완전히 회복하고, 상승세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한다. 이전까지의 1차 산업은 점차 중공업으로 변화하고 있었고, 경제 성장률은 연간 11%에 이를 정도였다. 한편 영국의 식민지였던 셀레스틴 지역은 영국과의 긴 협상 끝에 1969년 독립하게 된다. 하지만 부패한 지도자와 나라 안정화 실패 등으로 인해 반란이 또다시 일어나고, 셀레스틴 공화국은 내전에 빠지게 된다. 처음 라리마는 이 내전에 관해 별 관심이 없었지만, 내전으로 인한 난민 발생, 범죄자들의 약탈 등으로 라리마 광명의 치안이 크게 나빠지고, 심지어는 셀리스틴의 정부군 조차도 반란군 소탕을 목적으로 광명에 상륙을 시도하자 라리마 제국은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셀레스틴 내전에 개입한다. 라리마 제국군의 셀레스틴 점령은 매우 빨랐다. 1976년 여름에 이루어진 상륙 작전에서부터 1977년 겨울, 잔존세력을 모두 정벌하고 치안을 안정화하기까지 불과 2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영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판과 제제를 받기도 했으나, 셀레스틴 지역의 강한 자치권과 족비정책을 펼치자 1990년대에는 대부분 이런 논란이 사라지고 셀레스틴 자치주는 라리마 제국의 영토로써 굳혀진다.

소련 붕괴 이후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라리마에게 직접적인 안보위협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1992년, 주라미군이 철수하고, 1998년 러시아와 결국 수교를 맺으면서 라리마 제국에는 평화가 깃들었다. 또한 2001년 OECD의 회원국이 되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인해 경제가 휘청이기도 했지만 탄탄한 기반 사업으로 인해 2020년대 중반까지 회복하는 데 성공하고, 2017년에 베릴 7세가 즉위한다.

실제 역사와의 연관점

라리마 제국의 역사는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각각의 역사, 사건, 국가, 인물은 모두 현실 역사의 특정 부분과 대응된다. 전체적인 흐름도 같으나, 순서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