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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아버지 토그가 도박으로 인해 재산을 탕진하는 '''가문의 참사'''가 일어나, 원경왕후는 사실상 가문과 연을 끊고 독립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1월 16일, 막 조선의 왕세손으로 책봉된 [[대조선국 성종|성종]]의 부인인 세손빈 간택이 열리고 있었고 원경왕후는 간택에 도전하였다. 세손빈 간택에 나선 원경왕후는 삼간택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다 아버지 토그가 도박으로 인해 재산을 탕진하는 '''가문의 참사'''가 일어나, 원경왕후는 사실상 가문과 연을 끊고 독립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1월 16일, 막 조선의 왕세손으로 책봉된 [[대조선국 성종|성종]]의 부인인 세손빈 간택이 열리고 있었고 원경왕후는 간택에 도전하였다. 세손빈 간택에 나선 원경왕후는 삼간택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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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지원한 이유는 세손(世孫) 각하를 보필(輔弼)하고 세손빈(世孫嬪)으로써 책무(責務)를 다하기 위해서입니다. 되면 해보고싶은건 딱히 없습니다. 장차 왕비(王妃)에 오름으로써 소임(所任)은 성품(性品)과 인품(人品)을 다스려서 세손(世孫) 각하가 주상전하가 되시면 왕비(王妃)로써의 책무(責務)를 다할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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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 왕비던 [[신덕왕후]]는 원경왕후를 조선의 왕세손빈으로 책봉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11세'''였다. 왕가의 법칙에 따라 개인 재산을 보유할 수 없었기에 원경왕후는 11년간 일해 얻은 여러 기와집, 동물, 농장등을 부친 도그에게 넘겼다. 그로 인해 한양 토씨 가문은 위기를 극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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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합궁(合宮)이 자정(子正)에 진행될려 했으나 세손각하가 혼자 주무시며 세손빈마마를 모욕(侮辱)하였고, 세손빈마마는 기구를 구입해 차마 말할수없는 행위 (行爲)를 하셨다. 이에 백내관과 박제조상궁이 말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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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식이 근정전에서 치루어졌고 원칙에 따라 합궁할 시간이 되었는데 세손이던 [[대조선국 성종|성종]]이 합궁을 거부하고 먼저 자러갔다.
  
 
당일 [[대조선국 태조|태조]]가 훙서하고 2월 11일 왕의 후궁인 숙원으로 봉작되었다. 왕이던 [[대조선국 인종|인종]]이나 자신이나 이제 고령에 진입했기 때문에 아이를 볼수 없어 현덕왕후는 숙원 품계에서 더 승진하지 않았다. 그러던 2월 23일 [[정안왕후]]가 정신 질환을 견디지 못하고 훙서하며 [[선덕왕후]]의 사례때처럼 후궁이던 현덕왕후가 24일, '''조선의 왕비'''로 책봉된다. 고령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된 그는 내명부를 안정스럽게 다스렸다.
 
당일 [[대조선국 태조|태조]]가 훙서하고 2월 11일 왕의 후궁인 숙원으로 봉작되었다. 왕이던 [[대조선국 인종|인종]]이나 자신이나 이제 고령에 진입했기 때문에 아이를 볼수 없어 현덕왕후는 숙원 품계에서 더 승진하지 않았다. 그러던 2월 23일 [[정안왕후]]가 정신 질환을 견디지 못하고 훙서하며 [[선덕왕후]]의 사례때처럼 후궁이던 현덕왕후가 24일, '''조선의 왕비'''로 책봉된다. 고령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된 그는 내명부를 안정스럽게 다스렸다.

2023년 7월 26일 (수) 22:42 판

조선왕조.png
대조선국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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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비
왕후 홍씨
조선 성종의 왕비
원경왕후 | 元敬王后
어기.png
출생2022년 12월 30일
대조선국 한양 사저
사망2023년 4월 19일 (향년 67세)
대조선국 한양 경복궁 교태전
헌릉(獻陵)
재위기간2023년 3월 10일 ~ 2023년 4월 19일 (41일)
본관한양 토씨
부모부 토그, 모 디보
형제자매여동생 토별
배우자성종
자녀장남 이호
종교유교
시호원경왕후(元敬王后)

현재2.png 개요

조선 제3대 국왕 성종의 왕비이며 본관은 한양 토씨.

현재2.png 왕세자빈 간택

2022년 12월 30일, 한양 토씨 가문에서 부친 도그와 모친 디보 사이에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당하관이였으며 어머니는 잘 나가는 어부였기 때문이다. 며칠 후 여동생 토별이 태어났으나 별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10대가 되기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부유하게 자란 원경왕후는 자신도 농사, 어업, 동물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으며 재산이 매우 많아졌다. 소유 재산이 3000문이라 기록되어있는데당시 이 정도 돈은 초가집 수십개를 살 수 있는 정도의 돈이였다. 원경왕후는 실제로 본가에서 나와 기와집 여러개를 한양에 샀으며 동물 또한 많이 샀다.

그러다 아버지 토그가 도박으로 인해 재산을 탕진하는 가문의 참사가 일어나, 원경왕후는 사실상 가문과 연을 끊고 독립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1월 16일, 막 조선의 왕세손으로 책봉된 성종의 부인인 세손빈 간택이 열리고 있었고 원경왕후는 간택에 도전하였다. 세손빈 간택에 나선 원경왕후는 삼간택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원한 이유는 세손(世孫) 각하를 보필(輔弼)하고 세손빈(世孫嬪)으로써 책무(責務)를 다하기 위해서입니다. 되면 해보고싶은건 딱히 없습니다. 장차 왕비(王妃)에 오름으로써 소임(所任)은 성품(性品)과 인품(人品)을 다스려서 세손(世孫) 각하가 주상전하가 되시면 왕비(王妃)로써의 책무(責務)를 다할것입니다.

1월 16일, 왕비던 신덕왕후는 원경왕후를 조선의 왕세손빈으로 책봉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11세였다. 왕가의 법칙에 따라 개인 재산을 보유할 수 없었기에 원경왕후는 11년간 일해 얻은 여러 기와집, 동물, 농장등을 부친 도그에게 넘겼다. 그로 인해 한양 토씨 가문은 위기를 극복한다.

합궁(合宮)이 자정(子正)에 진행될려 했으나 세손각하가 혼자 주무시며 세손빈마마를 모욕(侮辱)하였고, 세손빈마마는 기구를 구입해 차마 말할수없는 행위 (行爲)를 하셨다. 이에 백내관과 박제조상궁이 말렸다.

혼례식이 근정전에서 치루어졌고 원칙에 따라 합궁할 시간이 되었는데 세손이던 성종이 합궁을 거부하고 먼저 자러갔다.

당일 태조가 훙서하고 2월 11일 왕의 후궁인 숙원으로 봉작되었다. 왕이던 인종이나 자신이나 이제 고령에 진입했기 때문에 아이를 볼수 없어 현덕왕후는 숙원 품계에서 더 승진하지 않았다. 그러던 2월 23일 정안왕후가 정신 질환을 견디지 못하고 훙서하며 선덕왕후의 사례때처럼 후궁이던 현덕왕후가 24일, 조선의 왕비로 책봉된다. 고령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된 그는 내명부를 안정스럽게 다스렸다.

현재2.png 왕비 시절

왕비로 재위한지 2주 정도 되던 2023년 3월 10일, 남편 인종이 훙서하고 왕대비가 되었다. 대왕대비던 신덕왕후와 조용히 자경전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4월 11일 자경전에서 향년 85세로 훙서하였다.

현덕왕후는 내명부 품계를 대부분 해본 인물이다. 최하위인 견습나인부터 시작하여 지밀상궁까지 올랐고, 왕세자의 후궁, 왕의 후궁, 왕비, 왕대비까지 올랐다. 하지만 세자빈은 해보지 않았다.

현재2.png 가족 관계


자녀이름출생배우자/자녀
1남주상 이호2023년 2월 10일왕후 송씨
정순 공주, 세자 이행, 경원대군

현재2.png 평가

・원경왕후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으며, 실패로 돌아갔지만 스포츠업의 원동력을 일으킨 왕후이다. 또한 안정스럽게 내명부를 다스려 궁중은 매우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