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조르제비치 왕조(식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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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조르제비치 왕조는 1804년 [[조르제 페트로비치(식혜)|조르제 페트로비치]]가 제1차 세르비아 봉기의 대수장(Veliki Vožd)으로 추대되면서 시작되었다. [[오브레노비치 왕조(식혜)|오브레노비치 왕조]]와 경쟁에서 패하여 1858년부터 망명 신세를 지게 되었으나,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왕의 실책으로 오브레노비치 왕조가 몰락하면서 1904년 세르비아 국회는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조르제의 손자 [[페타르 1세(식혜)|페타르 1세]]를 세르비아의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는 현재까지 128년 간 [[유고슬라비아 왕국(식혜)|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군주로 군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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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와 제1차 세계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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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르 1세가 노령으로 인해 쇠약해짐에 따라 임시 퇴위를 결정하고 왕권을 자신의 아들 [[알렉산다르 1세(식혜)|알렉산다르 1세]]에게 양위했다. 그 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세르비아는 알바니아 지역을 거쳐 그리스의 코르푸로 후퇴를 해야만 했다. 1차 대전 동안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에게 점령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남슬라브 민족주의가 고조되었고, 남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남슬라브 국가들을 합쳐 단일 국가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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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슬라브 민족주의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한 크로아티아 출신 안테 트룸비치는 연합국이 남슬라브 통일 국가의 건국을 지지하게 하도록 유고슬라비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유고슬라비아 위원회는 28명의 위원을 선발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남슬라브 통일 국가 건국에 대해 협상하게 했고, 몇몇은 대표단을 꾸려 알렉산다르 1세와 직접 협상을 진행했다. 그렇게 1917년 7월 20일 알렉산다르 1세가 코르푸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남슬라브 통일 국가 건국과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옹립이 성사되었고, 1918년 12월 1일 남슬라브 통일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왕국(식혜)|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이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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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는 세르비아 왕조에서 전 유고슬라비아 지역 국민들의 왕조가 되었다. 또한 당시 헝가리의 영토에 속했던 보이보디나 지역을 세르비아가 병합함으로써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영토는 이전에 비해 몇 배나 더 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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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와 제2차 세계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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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다르 1세가 회담을 위해 프랑스 마르세유로 떠났다가 암살당하자 [[페타르 2세(식혜)|페타르 2세]]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 페타르 2세는 11세로 어렸기 때문에 알렉산다르 1세가 미리 작성해 둔 유언장에 따라 섭정단이 구성되어 페타르 2세를 대신해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다.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식혜)|파블레 왕자]]를 주축으로 한 섭정단은 페타르 2세와 [[마리야 카라조르제비치(식혜)|마리야 왕대비]]를 배제하고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고, 심지어는 페타르 2세를 폐위시키고 직접 왕위에 오르려는 방향으로 정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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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이탈리아의 공세에 왕실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은 망명한 페타르 2세를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를 구한 영웅'이라며 환영했다. 왕실이 망명해 있는 동안 국내에는 크게 [[요시프 브로즈 티토(식혜)|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성향의 [[파르티잔(식혜)|파르티잔]]과 [[드라가 미하일로비치(식혜)|드라가 미하일로비치]]를 주축으로 한 근왕주의 성향의 [[체트니크(식혜)|체트니크]]가 추축국에 맞서 항전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왕실은 체트니크를 지원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체트니크가 추축국과도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이자 왕실은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거두고 파르티잔과 기타 민병대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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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도중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가 비하치에서 소집되었다. 이후 1943년 11월 29일 야이체에서 다시 소집된 반파시스트 평의회는 전후 국가 조직에 대해 논의했는데, 왕실이 전쟁에서 쌓은 공로를 인정하여 왕실을 존속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전쟁이 끝나고 페타르 2세는 다시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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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쟁이 끝나기 바로 직전, 알렉산다르 2세가 영국 런던의 클라리지 호텔 212호실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는 동안 영국 정부가 212호실을 유고슬라비아에 양도하여 알렉산다르 2세는 명목상으로나마 유고슬라비아의 땅에서 태어난 것이 되었다. 알렉산다르 2세는 1945년 10월 2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대부모는 당시 국왕 조지 6세와 추후 왕위에 오르게 된 엘리자베스 공주였다.
  
 
[[분류:유고슬라비아 왕국(식혜)]]
 
[[분류:유고슬라비아 왕국(식혜)]]

2023년 9월 23일 (토) 18:19 판

유고슬라비아 국왕 휘장.png
유고슬라비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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Династија Карађорђевић
유고슬라비아 왕실 휘장.png
창립일
1804년 2월 14일
창립자
조르제 페트로비치
現 수장
알렉산다르 2세
국가
유고슬라비아 왕국

개요

19세기 초 제1차 세르비아인 봉기의 지도자인 조르제 페트로비치를 시조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왕실 가문이다. 오브레노비치 왕조와 경쟁하다 패해서 1858년부터 망명 신세로 있었으나,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왕의 실정으로 오브레노비치 왕조가 몰락하면서 카라조르제의 손자인 페타르 1세가 1903년 세르비아 국회의 추대로 왕위에 복귀한 이래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30년 현재 알렉산다르 2세유고슬라비아 국왕으로 재위 중이다.

역사

배경

Ece3d2fe8d7f284c9bec35dd8a457a8e.jpg
조르제 페트로비치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는 1804년 조르제 페트로비치가 제1차 세르비아 봉기의 대수장(Veliki Vožd)으로 추대되면서 시작되었다. 오브레노비치 왕조와 경쟁에서 패하여 1858년부터 망명 신세를 지게 되었으나,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왕의 실책으로 오브레노비치 왕조가 몰락하면서 1904년 세르비아 국회는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조르제의 손자 페타르 1세를 세르비아의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는 현재까지 128년 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군주로 군림하고 있다.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와 제1차 세계대전

페타르 1세가 노령으로 인해 쇠약해짐에 따라 임시 퇴위를 결정하고 왕권을 자신의 아들 알렉산다르 1세에게 양위했다. 그 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세르비아는 알바니아 지역을 거쳐 그리스의 코르푸로 후퇴를 해야만 했다. 1차 대전 동안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에게 점령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남슬라브 민족주의가 고조되었고, 남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남슬라브 국가들을 합쳐 단일 국가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르푸 선언.jpg
코르푸 선언

남슬라브 민족주의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한 크로아티아 출신 안테 트룸비치는 연합국이 남슬라브 통일 국가의 건국을 지지하게 하도록 유고슬라비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유고슬라비아 위원회는 28명의 위원을 선발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남슬라브 통일 국가 건국에 대해 협상하게 했고, 몇몇은 대표단을 꾸려 알렉산다르 1세와 직접 협상을 진행했다. 그렇게 1917년 7월 20일 알렉산다르 1세가 코르푸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남슬라브 통일 국가 건국과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옹립이 성사되었고, 1918년 12월 1일 남슬라브 통일 국가인 '슬로벤-크로아트-세르브 왕국'이 건국되었다.

이로써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는 세르비아 왕조에서 전 유고슬라비아 지역 국민들의 왕조가 되었다. 또한 당시 헝가리의 영토에 속했던 보이보디나 지역을 세르비아가 병합함으로써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영토는 이전에 비해 몇 배나 더 커지게 되었다.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와 제2차 세계대전

알렉산다르 1세가 회담을 위해 프랑스 마르세유로 떠났다가 암살당하자 페타르 2세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 페타르 2세는 11세로 어렸기 때문에 알렉산다르 1세가 미리 작성해 둔 유언장에 따라 섭정단이 구성되어 페타르 2세를 대신해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다. 파블레 왕자를 주축으로 한 섭정단은 페타르 2세와 마리야 왕대비를 배제하고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고, 심지어는 페타르 2세를 폐위시키고 직접 왕위에 오르려는 방향으로 정치를 했다.

PetarII-59.jpg
복귀한 페타르 2세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세에 왕실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영국은 망명한 페타르 2세를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를 구한 영웅'이라며 환영했다. 왕실이 망명해 있는 동안 국내에는 크게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성향의 파르티잔드라가 미하일로비치를 주축으로 한 근왕주의 성향의 체트니크가 추축국에 맞서 항전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왕실은 체트니크를 지원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체트니크가 추축국과도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이자 왕실은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거두고 파르티잔과 기타 민병대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전쟁 도중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평의회가 비하치에서 소집되었다. 이후 1943년 11월 29일 야이체에서 다시 소집된 반파시스트 평의회는 전후 국가 조직에 대해 논의했는데, 왕실이 전쟁에서 쌓은 공로를 인정하여 왕실을 존속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전쟁이 끝나고 페타르 2세는 다시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조지 6세와 페타르 2세.jpg
세례식에서, 조지 6세와 페타르 2세

한편 전쟁이 끝나기 바로 직전, 알렉산다르 2세가 영국 런던의 클라리지 호텔 212호실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는 동안 영국 정부가 212호실을 유고슬라비아에 양도하여 알렉산다르 2세는 명목상으로나마 유고슬라비아의 땅에서 태어난 것이 되었다. 알렉산다르 2세는 1945년 10월 2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대부모는 당시 국왕 조지 6세와 추후 왕위에 오르게 된 엘리자베스 공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