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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서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모여 교리, 의식, 규범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교회]] 회의. [[불교]]에서는 [[결집]]이 공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 [[그리스도교]]에서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모여 교리, 의식, 규범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교회]] 회의. [[불교]]에서는 [[결집]]이 공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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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에서 공의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안티오키아]] 지방에서 일어난 [[할례]], 율법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성 바르나바와 [[사도 바오로|성 바오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자신들이 하던 일에 대해 보고하고 할례와 율법 문제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여기서 [[베드로]]와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주장으로 인해 할례를 하지 않고 다만 우상과 피를 멀리하자고 결의한다. | |||
다만 이 사도회의는 엄밀한 의미의 보편공의회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현대의 보편공의회 넘버링에서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1대로 헤아리며, (사도행전 저자의 관점에 의하면 사도조차 아닌[* 루가복음서-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로{{{-2 (광의의 사도 개념 선호. 바울로 자신 포함.)}}}와는 달리 '사도'라는 말을 최협의의 의미{{{-2 (오직 12사도. 바울로 제외.)}}}로 사용한다. 예외적으로 사도행전 14장 4절 및 14절에선 바울로를 apostolos(사도)라고 부르지만, 여기선 말 그대로 '파견된 자(apostolos)'라는 의미일 뿐, 본격적인 직무명으로서의 사도(apostolos)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울로가 루가에게는 여느 사도들처럼 진짜배기 사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는 열둘이니,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부터 예수 부활까지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들이다(1,21-22 참조). 루가는 사도 칭호를 이 열두 사람에게 국한하기 때문에, 바울로에게는 사도 칭호 부여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루가가 바울로와 바르나바를 사도로 칭하는 경우가 한 번 있는데(14,4.14), 사도 칭호를 좀 헐값에 내주었다고 하겠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사도들, 즉 교회가 선교 과업을 위해 가려내어 파견한 "사자들"(13,2-3),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들의 사자들이다.』'''{{{-2 (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467-468p)}}}])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회의 결과를 발표하는 등 후대의 보편공의회와는 이질적이다. | |||
아돌프 폰 하르낙, 베르너 큄멜, 레온하르트 고펠트, 귄터 보른캄, 한스 콘첼만, 위르겐 롤로프, 라이너 리스너는 사도회의가 기원후 48년에 일어났다고 보았다 (Harnack,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2''; Kümmel, 신약정경개론; Goppelt, ''Die Apostolische Und Nachapostolische Zeit''; Bornkamm, 바울; Conzelmann, 초대기독교역사; Roloff, ''Neues Testament''). 반면에 페르디난트 한, 알프레드 줄, 필리프 필하우어, 빌리 마르크센, 빌헬름 슈네멜허는 사도회의가 기원후 43-44년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Hahn, ''Das Verständnis der Mission im Neuen Testament''; Suhl, ''Paulus und seine Briefe''; Vielhauer, ''Geschichte der urchristlichen Literatur''; Marxen,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Schneemelcher, ''Das Urchristentum''). 43-44년 지지자들의 근거로는 마르코 10:38-39과 행전 12:2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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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6일 (수) 23:03 판
개요
그리스도교에서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모여 교리, 의식, 규범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교회 회의. 불교에서는 결집이 공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사도회의
사도행전 15장에서 공의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안티오키아 지방에서 일어난 할례, 율법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성 바르나바와 성 바오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자신들이 하던 일에 대해 보고하고 할례와 율법 문제에 대해 논의하게 된다. 여기서 베드로와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주장으로 인해 할례를 하지 않고 다만 우상과 피를 멀리하자고 결의한다.
다만 이 사도회의는 엄밀한 의미의 보편공의회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현대의 보편공의회 넘버링에서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1대로 헤아리며, (사도행전 저자의 관점에 의하면 사도조차 아닌 루가복음서-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로(광의의 사도 개념 선호. 바울로 자신 포함.)와는 달리 '사도'라는 말을 최협의의 의미(오직 12사도. 바울로 제외.)로 사용한다. 예외적으로 사도행전 14장 4절 및 14절에선 바울로를 apostolos(사도)라고 부르지만, 여기선 말 그대로 '파견된 자(apostolos)'라는 의미일 뿐, 본격적인 직무명으로서의 사도(apostolos)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울로가 루가에게는 여느 사도들처럼 진짜배기 사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는 열둘이니,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부터 예수 부활까지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들이다(1,21-22 참조). 루가는 사도 칭호를 이 열두 사람에게 국한하기 때문에, 바울로에게는 사도 칭호 부여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루가가 바울로와 바르나바를 사도로 칭하는 경우가 한 번 있는데(14,4.14), 사도 칭호를 좀 헐값에 내주었다고 하겠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사도들, 즉 교회가 선교 과업을 위해 가려내어 파견한 "사자들"(13,2-3),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들의 사자들이다.』(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467-468p))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회의 결과를 발표하는 등 후대의 보편공의회와는 이질적이다.
아돌프 폰 하르낙, 베르너 큄멜, 레온하르트 고펠트, 귄터 보른캄, 한스 콘첼만, 위르겐 롤로프, 라이너 리스너는 사도회의가 기원후 48년에 일어났다고 보았다 (Harnack,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2; Kümmel, 신약정경개론; Goppelt, Die Apostolische Und Nachapostolische Zeit; Bornkamm, 바울; Conzelmann, 초대기독교역사; Roloff, Neues Testament). 반면에 페르디난트 한, 알프레드 줄, 필리프 필하우어, 빌리 마르크센, 빌헬름 슈네멜허는 사도회의가 기원후 43-44년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Hahn, Das Verständnis der Mission im Neuen Testament; Suhl, Paulus und seine Briefe; Vielhauer, Geschichte der urchristlichen Literatur; Marxen,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 Schneemelcher, Das Urchristentum). 43-44년 지지자들의 근거로는 마르코 10:38-39과 행전 12: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