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뤼셀 왕국/과거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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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
== 중세 ==
중세 시대에는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의 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성장하는 동프랑크 왕국에 편입 되었다. 저지대 지역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인 플랑드르, 브라반트, 홀란트 등 여러 공국들이 등장하였으며 교통의 요지로서 사람이 많이 드나들어 상공업 발달에 적합한 위치였기 때문에 저지대 지역은 서유럽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부유한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룩셈부르크 지방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룩셈부르크 가문의 대공에게 통치받고 있었다. 원래 이 땅을 다스리던 룩셈부르크 가문은 한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고, 헝가리와 보헤미아까지도 손에 넣었었지만 결국은 혈통이 끊겨 지금은 지명으로만 남게 되었고, 결국 지속적으로 국력이 약화되어16세기 프뤼셀에 흡수되게 된다.
=== 프뤼셀-스페인 독립 전쟁 ===
== 근대 ==
== 근대 ==
== 현대 ==
== 현대 ==

2018년 11월 17일 (토) 01:51 판

프뤼셀 왕국의 역사

고대

로마 제국의 지배

로메이넨 인 네데를란트는 프뤼셀 왕국의 전인인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을 말한다. 당대 최대의 제국이던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57년, 북갈리아를 정복하고 남부 네덜란드(오늘날의 리에주, 안트베르펜 근방) 지역으로 진군하였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도 지속적인 저지대 정복사업을 벌였다. 당시 로마 장군이었던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는 저지대를 게르만족 침입을 저지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고, 페흐턴 지역에 운하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농업과 목축업으로 생계를 해결하던 저지대인들은 로마의 진출 이후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유목민적 성격을 가졌던 저지대 종족들 사이에 로마인들이 진출하면서 큰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로마의 쇠락과 게르만 족의 침입

2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의 내부로 침입하였다. 저지대 지역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지에 요새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게르만족들로 구성된 군대로 국경을 지키게 될 정도로 로마 제국은 쇠락해졌다. 뒤이어 색슨족과 프랑크족이 로마 제국 내로 침입하자, 로마는 제국을 경영할 힘을 상실하고 말았다. 특히 프랑크족은 340년 로마 제국과 협정을 체결하여 저지대 지역 방위를 맡게 되었다. 395년에는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완전히 나뉘어졌다. 4-5세기 동안 서로마 제국은 고트 족, 반달 족 등 이민족으로부터 이탈리아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북서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철군시키기 시작했다. 406년 로마 군대가 철군하고 주인이 없어진 지역들을 새로이 들어온 이민족들이 차지하면서 로마 제국의 저지대 지역 지배는 사실상 끝이 났다.

암흑시대

중세

중세 시대에는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의 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성장하는 동프랑크 왕국에 편입 되었다. 저지대 지역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인 플랑드르, 브라반트, 홀란트 등 여러 공국들이 등장하였으며 교통의 요지로서 사람이 많이 드나들어 상공업 발달에 적합한 위치였기 때문에 저지대 지역은 서유럽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부유한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룩셈부르크 지방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룩셈부르크 가문의 대공에게 통치받고 있었다. 원래 이 땅을 다스리던 룩셈부르크 가문은 한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고, 헝가리와 보헤미아까지도 손에 넣었었지만 결국은 혈통이 끊겨 지금은 지명으로만 남게 되었고, 결국 지속적으로 국력이 약화되어16세기 프뤼셀에 흡수되게 된다.

프뤼셀-스페인 독립 전쟁

근대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