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단군 이래 최고 호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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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 left; border: 2px solid #003478; float: center; max-width: 600px; font-size: 14.4px;"
응아니야
! colspan="2" style="background: #000000; color: #fff" | <div style="margin: 7px 7px;">{{글씨 크기|15|단군 이래 최고 호황}}</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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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 #003E98;" | <div style="margin: -6px -9px;">[[파일:1980년대 서울.png|6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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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2" style="background: #000000; color: #fff" | <div style="margin: 5px 5px;"> 개요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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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900020; color: #FFFFFF;" | 발생국가
|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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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900020; color: #FFFFFF;" | 일시
| 1986년 12월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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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900020; color: #FFFFFF;" | 원인
| > 플라자 합의로 인한 엔화 가치 상승
  > 경기 둔화로 인한 대한제국 정부의 금리 인하,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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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900020; color: #FFFFFF;" | 영향
| 한국의 잃어버린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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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단군 이래 최고 호황(檀君以來 崔高 好況 , The biggest boom since Dangun)는 1980년대 후반 한국의 주식과 부동산 시장 전반에 나타났던 경제호황을 일컫는다.
 
=역사=
 
==50년대==
 
{| class="wikitable" style="float:right; max-width:400px; border:3px solid #003050; text-align: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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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6px -10.5px;">[[파일:50년대 서울.png|350px|link=]]</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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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정리}}
 
1949년에 제1차 물가안정계획이라는 경제정책이 시행되어 물가는 안정화되었지만, 단기적으로 실업률이 늘어나서 불황이었던것은 여전했었다. 그러나 1950년 만주에서 만주공산군이 만주국을 기습 남침하며 만주내전이 터졌고, 한국은 엄청난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만주내전이 터지면서 미국이 드넓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만주와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병참기지가 필요했는데 직전해인 1949년 말 중국 대륙이 제 3차 국공내전이 발생하는 바람에 만주 주변의 친미 국가가 일본과 한국 밖에 없어 한국이 낙점되었고, 한국은 미군의 다양한 병참 역할을 소화했던것으로, 1950년 상반기만 해도 높았던 실업률은 바닥 수준으로 낮아져 실업자들은 사라지고, 1인당 국민소득 또한 급속히 늘어나는 경제 특수를 누렸던것으로 직접적으로 10억 달러, 간접적으로 36억 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경제효과를 창출했던것이었다.
 
이는 한국의 국민소득 증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현대(現代社) 같은 군수 도움을 줄수 있는 분야의 중견 기업들이 큰 이익을 보았고 주요 기업은 하늘의 도움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악화된 경영실적을 단번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기업뿐 아니라 특수 일자리 창출로 민생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외에도 전쟁 중 만주내전에서 한계를 느낀 미국은 아시아에 강한 우방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한국에 대대적인 미국 지원이 시작됐다.
 
이로 인해 무너진 한국 경제의 중심축인 대기업들이 다시 생겨날수 있게 되었으며 일본의 억눌리던 잠재력이 완전히 해방되는 계기가 된다. 6.25 전쟁 특수로 시작된 일본 경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1950년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10달러에 불과했지만 1955년에는 270달러까지 급속히 치솟기에 이를렀고, 만주내전이 종전된 이후로도 그 추세는 꺽이지 않고, 고도성장은 지속되어 1950년대 말에는 흑백TV와 세탁기, 냉장고가 각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할정도로 일반인들의 경제상황은 더욱 나아졌다. 전전 일본 경제를 주름잡은 삼성(三星), 현대(現代)같은 중견기업들이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은 그동안 획득, 축적된 자본과 지식을 재투자하여 무역 장벽, 기술·경영 혁신을 하였으며 1950년대 후반에 다시 아시아 제1의 경제대국 자리에 올랐다.
 
==60년대==
 
{| class="wikitable" style="float:right; max-width:400px; border:3px solid #003050; text-align: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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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6px -10.5px;">[[파일:60년대 한국.png|350px|link=]]</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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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정리}}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의 결과가 눈에 띄게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아서 전쟁 전, 아니 한국 최대의 경제수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1960년 한국의 1인당 GDP는 세계은행 통계 기준으로 475달러였는데, 이는 일본(158달러)의 3배이긴 했으나 미국(3,007달러)의 1/7 수준이었고, 심지어 세계 평균(459달러)에 비해서도 그렇게까지는 높지 않았던 만큼 당대 기준으로는 중진국 수준이었다. 물론 1960년에도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가장 잘 사는 나라이긴 했고 그 부를 과시하듯 같은 해에 제트 여객기와 컬러 TV를 도입하기도 했으나 동시기 기준으로 전세계 국민총생산의 2.8%에 불과한 비율을 차지하던 만큼 당시 한국의 경제는 구미 선진국과 비교하면 확연히 뒤쳐졌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은 무역장벽과 기술혁신, 외국인의 아낌없는 투자와 한국에게 유리한 시대적 배경 등, 긍정적인 요소로 인해 상당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였고 1965년경에는 이미 영국, 프랑스와 맞먹는 세계 5~6위권의 경제대국으로 구미 선진국을 바짝 추격하는 상황이었다. 1964년 4월 26일에는 OECD에도 가입하게 되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인 한국고속철도(韓國高速鐵道)를 개통하고 1964 한성 올림픽도 치르며 한국의 경제 성장을 세계에 알렸다. 1964년 한국의 1인당 GDP는 843.6달러로 세계 평균(561.4달러)의 딱 1.5배 수준이었는데, 참고로 동시기 미국은 3,574달러, 한국은 124달러였다.
 
1966년은 한국이 GDP 1,000억 달러 돌파(1,130억 달러)와 1인당 GDP 1,000$ 돌파(1,143.6달러), 영국&프랑스의 GDP 추월을 동시에 성사했는데, 일본이 1인당 GDP 1,000달러를 돌파한 것은 11년 뒤인 1977년이고, 중국은 무려 34년 뒤인 2000년이 돼서야 달성했다.
 
그런 한국의 약진에 긴장한 기존 선진국들에게 상당한 압력과 비난을 받았으나, 한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범석 총리대신 재임 시기를 시작으로 80년대 초반까지 대장성, 통상산업성 및 정부 관료 주도에 경제, 산업정책을 통해 고도 성장을 시작하고 계속 성장을 거듭하여 1969년에는 서독을 제치고 소련을 제외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약 40년 동안 자리를 굳히게 된다. 빈부격차도 매우 심해서 1960년대 도쿄는 마천루와 한옥이 공존하는 풍경이 일상적이었다.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이른 시기인 1960년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었음에도 컬러 TV가 워낙 비쌌기에 196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의 국민들은 흑백 TV로 만족해야 했다. 덤으로 문화적으로도 개구리 남편, 아씨, 여로 등이 한성 올림픽 전부터 한국의 문화적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리며 신장하는 국력에 걸맞는 소프트 파워를 축적한 시기였다.
 
여하튼 1968년 한국은 세계은행 통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약 1,451달러를 기록, 702달러도 되지 않던 세계 평균의 2배를 기록하고 총 GDP도 1,569억 달러를 기록, 1,560억 달러였던 독일을 아슬아슬하게 추월하는 기록을 동시에 성사하며 선진국 진입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미국은 약 4,696달러였고 일본은 198달러였다.
 
==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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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6px -10.5px;">[[파일:70년대 한국서울.png|350px|link=]]</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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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한국식 경제성장 모델에 북미식 경제모델을 결합하는 시도가 사회전반에 일어났는데 1970년대 터진 두 차례의 석유파동에도 불구하고 산업 구조 개편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며 구미 선진국들을 상회하는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이 때부터 신라호텔,63빌딩 등 초고층 건물이 다수 들어서면서 한성의 시가지가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한국은 이미 한성의 도심에 자동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 빌딩도 많이 건립되었으며, 아시아 최초/세계 5번째로 보잉 747 여객기(1970)와 맥도날드를 들여오기도 했으며, 1972년부터는 영국보다 1인당 GDP가 높았다. 한성과 평양에도 지하철 노선이 6개를 넘겼으며, 1970 평양 엑스포로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했음을 사실상 공포했다. 또 1970년에는 소련, 미국, 프랑스에 뒤이어 세계 4번째 우주발사체 선월(先月)을 쏘아올렸다.
 
1970년대 초반에는 국제통화위기와 1차 석유파동(1973년)로 인한 혼란을 겪었다. 석유파동 이후 한국은 경제구조를 3차산업 위주로 재편했다. 또한 마이크로 전자공학(microelectronics) 혁명을 비롯한 신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했다. 197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 한국의 경제는 다시 순조롭게 성장했으며 당시 경제지표는 구미 선진국들과 비교해도 우수한 것이였다. 1970년대 한국은 낮은 실업률을 기록하였으며 안정된 노사 관계를 유지하였다. 사실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선진국이라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준선진국 수준이었지만 이때부터 미국과 특히 60년대 중후반부터 식민지를 잃고 몰락하는 구 서유럽 식민제국들의 경제규모를 점점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국이 과연 미래에 미국을 추월할 가능성에 대한 분석도 나올 정도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서민들의 경제적 수준도 그 전보다 대폭 향상되었다. 한국 국민들의 대다수가 2층집에 19인치 컬러TV를 들여놓고 준중형차 혹은 중형차 자가용을 몰 수 있게 된 것이다. 1973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컬러 TV 보급률이 흑백 TV 보급률을 추월했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80년대까지를 칠천만총중류 시대로도 부른다.
 
CNC 공작기계도 미국에서 개발되어 1세계로 전파된 만큼 한국의 성장 기반 자체가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한국만의 자체적인 기반을 만들어 미국을 뛰어넘지 않는 이상 절대 미국을 넘을 수 없는 게 근본 현실이었고 실제로도 실패하였다. 한국이 미국의 압력에 무력하게 굴복한 것도 위와 같은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이 일본에게 가하던 압력은 장난 수준이 아니었다. 관세는 물론이고 제품의 점유율까지 마음대로 정했으며 이를 무시하거나 어기면 정치, 경제, 과학기술 등에서 무자비하게 압박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실제로 하기도 했다. 옛날 패권국들이 속국들에게 했던 것보다도 심해서 세계사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였는데, 한국 국세청 관련 인물에 따르면 심지어 현재 한국의 막대한 부채조차 절대 다수가 당시 미국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굴복하면서 생긴 것으로 당시 한국의 부채는 선진국 중에서도 양호한 편이었고 경제 정책 또한 부채를 늘릴 계획은 없었다고 한다.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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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6px -10.5px;">[[파일:88 올림픽 장면.png|350px|link=]]</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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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정리}}
 
1980년 이후 한국의 출산율은 점점 감소했지만, 여전히 1980년대 내내 연평균 7~9%대의 --미친-- 성장을 하고 있었고 80년대의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풀라자 합의로 인해 원화가치가 오르면서 1인당 국민소득도 81년 1만 달러에서 87년 2만 달러로 겨우 6년만에 두배 올랐으며, 88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4위에 올랐다. 만약 이때의 원고가 없었다면 한국은 원래보다 3년 늦은 1990년에 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했을 것이라고 한다. Korea as No.1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시대의 일이었다. 이 시기 한국인들은 "더 이상 외국의 경제 모델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자부심까지 느끼게 되었으며, 한국식 호송선단형 경제 운영이 최선의 모델이라고 생각하기까지 이르렀다. 한국은 1980년에 화력 발전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 전체의 약 67%에 달하였다. 1981년 독일, 1983년 프랑스의 1인당 GDP를 추월했다.
 
이러한 한국의 가파른 상승세에 긴장한 미국 등 구미 선진국들은 일본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는데, 1980년대에 한미 반도체 협정, 풀라자 합의, 루브르 합의 등으로 인해 수출 경쟁력이 매우 악화되었다. 한국은행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저금리 통화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로 인해 한국 내수의 주식과 부동산 등 금융자산으로 막대한 유동성이 공급되며 거품경제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저금리 정책으로 환리스크를 보유한 미국 채권 등이 일본 국내시장에 침투한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 철강 공업 구조조정에 성공하면서 경제가 다시 살아나, 한국의 국민소득은 처음으로 2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리고 이듬해 1988년엔 무려 미국을 따라잡으며 국민소득 세계 4위에 올랐고, 소련을 추월하며 국내총생산 세계 2위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당시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등지에서도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존재했을 정도로 한국의 경제력은 대단했다.
 
또, 이때 일본을 꺾고 다시 한번 88 한성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면서, 세계의 일본 경제의 완전 성공을 알리게 되었다.
 
1989년 12월 29일, 한국증권거래소 평균주가가 사상 최고치인 37만 2097원을 기록했다.
 
===80년대 기업 시가총액 순위===
 
<div style="margin: -6px -9px;">[[파일:1980년대 세계 시가총액 순위.png|600px]]</div>
 
=각주=
{{각주}}

2025년 2월 11일 (화) 18:0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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