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그룹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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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2년여간의 개발 끝에 ‘W2형 승용차’가 먼저 세상에 등장한다. 전작인 ‘W1형 승용차’보다 성능과 연비가 대폭 개선되면서 국내에서 크게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8천만달러를 투입하여 연간 30,000대 생산규모의 자동차 공장 건설에 들어간다.
1969년, 2년여간의 개발 끝에 ‘W2형 승용차’가 먼저 세상에 등장한다. 전작인 ‘W1형 승용차’보다 성능과 연비가 대폭 개선되면서 국내에서 크게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8천만달러를 투입하여 연간 30,000대 생산규모의 자동차 공장 건설에 들어간다.
=== 1970년대 ===


1970년, 이 공장에서 생산된 ‘W2형 승용차’는 1년동안 국내에서 9,000대가 넘게 팔리며 출시 2년째인 1971년에는 연간 4만대, 출시 4년째인 1974년에는 연간 9만대를 돌파한다.
1970년, 이 공장에서 생산된 ‘W2형 승용차’는 1년동안 국내에서 9,000대가 넘게 팔리며 출시 2년째인 1971년에는 연간 4만대, 출시 4년째인 1974년에는 연간 9만대를 돌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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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독일 자동차 회사의 임원인 ‘호프만’을 끈질긴 설득 끝에 영입한다. 윤성철과 정영석 박사는 수없이 독일에 방문하여 한번이라도 회사를 소개할 기회를 달라 요청하였고, 몇 개월간의 설득 끝에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의 기술개발 현황과 사업목표, 생산시설 등을 보여주면서 5년뒤 세계를 뒤흔들 이 회사에 단 6개월이라도 함께 해달라며 기술총괄 부사장직을 제안했다. 이 둘의 깊은 진정성을 느낀 호프만은 본인과 함께 일하던 기술자 3명을 데리고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에 합류하게 된다.  
1971년,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독일 자동차 회사의 임원인 ‘호프만’을 끈질긴 설득 끝에 영입한다. 윤성철과 정영석 박사는 수없이 독일에 방문하여 한번이라도 회사를 소개할 기회를 달라 요청하였고, 몇 개월간의 설득 끝에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의 기술개발 현황과 사업목표, 생산시설 등을 보여주면서 5년뒤 세계를 뒤흔들 이 회사에 단 6개월이라도 함께 해달라며 기술총괄 부사장직을 제안했다. 이 둘의 깊은 진정성을 느낀 호프만은 본인과 함께 일하던 기술자 3명을 데리고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에 합류하게 된다.  


호프만의 영입이후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사명을 ‘현성자동차’로 변경한다. 본격적인 자동차기업의 시작이었다. 호프만은 ‘W2형 승용차’를 직접 시승해보고 상당히 놀라 물었다. 그는 “도대체 몇 명이서 개발을 얼마나 한 것이냐?”라고 물었고, 윤성철은 “현성자동차의 전 임직원이 2년간 개발한 작품”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생각했던 것보다 성능과 주행감이 좋아 속으로 ‘언젠가 전세계를 놀라게 할 회사’라고 생각한 호프만은 본격적으로 ‘V2형 상용차’의 개발을 주도한다.
호프만의 영입이후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사명을 ‘현성자동차’로 변경한다. 본격적인 자동차기업의 시작이었다. 호프만은 ‘W2형 승용차’를 직접 시승해보고 상당히 놀라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개발기간과 인력은 어떻게 되느냐?”라고 물었고, 윤성철은 “현성자동차의 전 임직원이 2년간 개발한 작품”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생각했던 것보다 성능과 주행감이 좋아 속으로 ‘언젠가 전세계를 놀라게 할 회사’라고 생각한 호프만은 본격적으로 ‘V2형 상용차’의 개발을 주도한다.
 
처음에는 6개월만 있다가 독일로 복귀하려고 했던 호프만과 기술자들은 현성자동차 전 임직원의 열정과 더 좋은 자동차를 만들고자 하는 열정을 보면서 아시아에서 큰 일을 한번 내보자는 생각으로 2년 더 현성자동차 개발총괄을 맡는다.
 
1975년, 현성자동차는 자동차 본고장인 유럽, 그중 글로벌 톱 자동차 기업이 존재하는 독일에 ‘W2형 승용차’ 5대 수출을 도전한다. 독일에 수출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호프만이 독일에 있을 시절 알고있던 자동차 업계 선배에게 한번 타보라며 시승차로 1대 보내주었다. 아시아의 신생 자동차 회사가 생각보다 잘 만들었다는 것에 놀란 선배는 독일 자동차 업계에 조금씩 소문을 내기 시작했고, 한 자동차 잡지에 현성자동차에 대한 소개가 실리게 되면서 수출에 대한 길이 열리게 된다.
 
1976년, 독일시장에 ‘W2형 승용차’가 진출하면서, 현성자동차는 유럽 시장의 본격적인 진입을 위해 ‘유럽전략본부’를 설립한다. 호프만은 유럽 시장에서 요구하는 안전 기준과 디자인 트렌드에 맞춘 모델 개발을 제안하고, 이에 따라 ‘E1 유럽형 승용차’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이 모델은 작고 민첩하며 연비가 뛰어난 유럽 소형차 시장에 특화된 모델이었다.
 
1977년, ‘E1’ 프로젝트에 유럽 유학파 디자이너 출신 ‘김세훈’이 합류하면서 현성자동차는 디자인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김세훈은 유럽의 감성과 독일, 프랑스의 실용성을 결합한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E1’의 컨셉트카를 완성시킨다. 이 컨셉트카는 이후 독일 모터쇼에 첫 출품되어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게 된다.


처음에 6개월만 있다가 독일로 복귀하려고 했던 호프만과 기술자들은 현성자동차 전 임직원의 열정과 더 좋은 자동차를 만들고자 하는 욕심을 보며 아시아에서 큰 일을 한번 내보자는 생각으로 2년이나 더 월본에 머물게 된다.
1978년, E1이 유럽에서 2천 대 이상 판매되며, 현성자동차 내부에서는 수출형 전략 모델 개발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현성자동차 연구소는 전자제어식 연료분사 시스템에 대한 내재화 연구에 착수한다.

2025년 4월 2일 (수) 03:06 판

각주

1940년대

1941년 5월 1일, 윤성철은 현성그룹의 모태인 서호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창립 후 작은 철물점으로 시작한 서호공업사는 신식 물품의 수리와 일부 부품의 생산기술을 미국에서 습득하여 빠르게 들여왔으며, 미국 자동차 제조사들의 외제차를 구입한 후 분해하여 구조와 조립 방식 등을 분석해 나갔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국의 자동차 조립생산 방식을 습득한 월본인 개척자 2명을 영입한 윤성철은 작은 창고를 벗어나 더 확장된 곳에서 당시 월본에 있던 미군의 군수품과 자동차를 수리해 주면서 노하우와 인지도를 쌓아갔다.

1950년대

윤성철과 최현식, 구재학은 미군의 자동차만 수리하는 것이 아닌 직접 개발과 생산하는 일에도뛰어들면 어떻겠냐는 윤성철의 제안에 월본에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수입하려는 미국 자동차제조사와 만남을 갖게되고, 월본의 환경에 맞는 부품제작과 디자인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러나 월본에는 그 누구도 자동차 관련업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나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눈길을 주지도 않았고, 반년간의 설득과 수십차례의 아이디어 제안서를 낸 윤성철과 최현식, 구재학은 미국 제조사가 주도하는 월본 최초의 승용차인 ‘W1형 승용차’ 개발에 합류하게 된다. 이때 자동차 엔진을 비롯하여 핵심기술 몇 가지를 제휴차원으로 습득하게 된다. ‘W1형 승용차’는 미국에서 인기 있는 사양과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된 차량으로, 1952년 7월 미국 기업과 합작으로 지은 서호주식회사 최초의 소규모 조립공장에서 1호차와 2호차를 동시에 생산해 낸다. 1953년부터 3명의 청년이 월본 최초의 자동차를 만든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인지도가 점점 늘어났고, 1954년에는 연 500대, 1955년에는 연 1,000대, 1956년에는 연 2,500대, 1957년에는 연 4,000대를 판매하면서 말 그대로 초대박이 터지게 된다. 당시 윤성철과 최현식, 구재학은 이렇게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갖고 팔릴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1960년대

1960년 2월, W1형 승용차 플랫폼을 기반으로 소상공인을 위한 V1형 상용차를 만들어낸 서호주식회사는 본격적으로 차세대 모델인 W2형 승용차와 V2형 상용차를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1000만달러를 마련하여 기존 조립공장의 크기를 넘어서 종합 자동차 공장과 그 안에 개발연구소를 설립했다. W1형 승용차’ 개발과 생산을 함께 했던 미국 기업이 차세대 모델 개발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이번엔 유럽권에서 기술제휴 또는 합작으로 신차를 개발할 회사를 찾아나선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기술제휴를 하러 나서지 않자, 윤성철은 자동차 엔진의 독자개발을 계획하게 된다. 그러나 최현식과 구재학은 그 누구도 기술제휴의 손길을 내밀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독자개발을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윤성철의 독자개발 계획을 무시하거나 반대했으며, 끝내 셋은 각기 다른 뜻을 펼치며 동업자로서의 관계를 끝맺게 된다. 1961년, 윤성철은 본격적인 자동차 엔진 독자개발에 착수하기 위해 해외 자동차기업에서 근무중인 월본인 기술자들에게 러브콜을 보내어 고향인 월본에서 함께 엔진 자체 개발 연구에 함께하자는 설득에 나선다. 수십여명에게 다양한 방법을 통해 연락을 취했으나, 그 중 단 2명만이 러브콜에 응하여 월본으로 귀국했으며 윤성철은 러브콜에 응해준 두 사람에게 개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때 독자개발을 함께했던 두 사람은 바로 현성자동차 제1대 기술연구소장인 정영석 박사와 현성자동차 제1대 엔진연구소장인 박주일 박사이다.

1962년, 정영석 박사와 박주일 박사는 윤성철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독자 엔진 개발 프로젝트에 착수했고, 엔진의 기본 구조와 설계를 시작하면서 3명은 매일 밤늦게까지 연구개발에 몰두하게 된다. 연구 초기 단계에서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점차 개선점을 찾아나가게 된다.

1963년, 미국과 유럽의 최신 엔진 기술을 참고하며, 독자적인 설계와 기술 개발을 병행한다. 첫번째 엔진 시제품의 제작이 완료되었고, 다양한 환경에서 테스트를 거치며 성능과 내구성 검증을 진행한다. 그러나 첫번째 시험에서부터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이들은 엔진을 모두 분해하였으며, 테스트하면서 문제가 생긴 부분이 어디인지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원인 분석에만 수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1964년, 첫번째 엔진 시제품의 테스트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오면서, 2번째 엔진 시제품 제작을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이때, 월본 최초의 엔진 독자개발 소식이 퍼지게 되고 전세계의 신문에 소식이 전해지게 된다. 이후 해외 자동차 부품 제조사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협력을 통해 부품 조달 및 기술적 지원을 강화하자는 연락을 받게 된다.

1965년, 최초의 독자엔진 ‘S1’의 본격적인 주행 테스트를 계획하였고, ‘W1형 승용차’에 독자엔진을 장착하여 주행 테스트를 진행한다. 윤성철과 정영석, 박주일은 각자 3일씩 매일 10시간을 주행하면서 엔진 테스트를 진행한다. 주행을 하면서 중간에 시동이 꺼지거나, 연기가 나거나, 오일이 새는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들은 멈춰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손수 뜯어고치며 밤낮없이 일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어느 날에는 윤성철이 운전을 하다가 졸게 되면서 전봇대에 박을 뻔했던 일화가 있다.

1967년, 최초의 독자엔진 ‘S1’의 양산을 결정하면서 엔진의 다량 생산을 위해 설비와 인프라 구축을 진행하게 되고, ‘S1’ 엔진을 장착한 차세대 ‘W2형 승용차’와 ‘V2형 상용차’ 개발에 착수한다. 'W2형 승용차'와 'V2형 상용차'는 기존 모델보다 향상된 성능과 연비를 자랑하며, 최신 기술을 반영한 디자인과 기능을 갖추게 됩니다. 본격적인 차세대 모델을 개발하면서, 윤성철은 회사의 사명을 ‘서호공업주식회사’에서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한다.

1969년, 2년여간의 개발 끝에 ‘W2형 승용차’가 먼저 세상에 등장한다. 전작인 ‘W1형 승용차’보다 성능과 연비가 대폭 개선되면서 국내에서 크게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8천만달러를 투입하여 연간 30,000대 생산규모의 자동차 공장 건설에 들어간다.

1970년, 이 공장에서 생산된 ‘W2형 승용차’는 1년동안 국내에서 9,000대가 넘게 팔리며 출시 2년째인 1971년에는 연간 4만대, 출시 4년째인 1974년에는 연간 9만대를 돌파한다.

1971년,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독일 자동차 회사의 임원인 ‘호프만’을 끈질긴 설득 끝에 영입한다. 윤성철과 정영석 박사는 수없이 독일에 방문하여 한번이라도 회사를 소개할 기회를 달라 요청하였고, 몇 개월간의 설득 끝에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의 기술개발 현황과 사업목표, 생산시설 등을 보여주면서 5년뒤 세계를 뒤흔들 이 회사에 단 6개월이라도 함께 해달라며 기술총괄 부사장직을 제안했다. 이 둘의 깊은 진정성을 느낀 호프만은 본인과 함께 일하던 기술자 3명을 데리고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에 합류하게 된다.

호프만의 영입이후 현성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사명을 ‘현성자동차’로 변경한다. 본격적인 자동차기업의 시작이었다. 호프만은 ‘W2형 승용차’를 직접 시승해보고 상당히 놀라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개발기간과 인력은 어떻게 되느냐?”라고 물었고, 윤성철은 “현성자동차의 전 임직원이 2년간 개발한 작품”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생각했던 것보다 성능과 주행감이 좋아 속으로 ‘언젠가 전세계를 놀라게 할 회사’라고 생각한 호프만은 본격적으로 ‘V2형 상용차’의 개발을 주도한다.

처음에는 6개월만 있다가 독일로 복귀하려고 했던 호프만과 기술자들은 현성자동차 전 임직원의 열정과 더 좋은 자동차를 만들고자 하는 열정을 보면서 아시아에서 큰 일을 한번 내보자는 생각으로 2년 더 현성자동차 개발총괄을 맡는다.

1975년, 현성자동차는 자동차 본고장인 유럽, 그중 글로벌 톱 자동차 기업이 존재하는 독일에 ‘W2형 승용차’ 5대 수출을 도전한다. 독일에 수출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호프만이 독일에 있을 시절 알고있던 자동차 업계 선배에게 한번 타보라며 시승차로 1대 보내주었다. 아시아의 신생 자동차 회사가 생각보다 잘 만들었다는 것에 놀란 선배는 독일 자동차 업계에 조금씩 소문을 내기 시작했고, 한 자동차 잡지에 현성자동차에 대한 소개가 실리게 되면서 수출에 대한 길이 열리게 된다.

1976년, 독일시장에 ‘W2형 승용차’가 진출하면서, 현성자동차는 유럽 시장의 본격적인 진입을 위해 ‘유럽전략본부’를 설립한다. 호프만은 유럽 시장에서 요구하는 안전 기준과 디자인 트렌드에 맞춘 모델 개발을 제안하고, 이에 따라 ‘E1 유럽형 승용차’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이 모델은 작고 민첩하며 연비가 뛰어난 유럽 소형차 시장에 특화된 모델이었다.

1977년, ‘E1’ 프로젝트에 유럽 유학파 디자이너 출신 ‘김세훈’이 합류하면서 현성자동차는 디자인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김세훈은 유럽의 감성과 독일, 프랑스의 실용성을 결합한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E1’의 컨셉트카를 완성시킨다. 이 컨셉트카는 이후 독일 모터쇼에 첫 출품되어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게 된다.

1978년, E1이 유럽에서 2천 대 이상 판매되며, 현성자동차 내부에서는 수출형 전략 모델 개발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현성자동차 연구소는 전자제어식 연료분사 시스템에 대한 내재화 연구에 착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