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민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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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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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냥|''' 그물이 들리면 눈이 열리듯이 대체가 바로 서매 세절(細節)이 따라 잡히어, 예(禮)가 일어나고 악(樂)갖추어져 깊은 인애와 두터운 은택이 민심에 흡족하게 젖어들었고, 융성(隆盛)한 공렬(功烈)은 사책(史冊)에 넘치어, 승평(昇平)의 극치(極致)를 이룸이 옛적에는 없었나니, 그러한 지 이에 21년이 되었다. 그런데 근자에 오랜 병환으로 말미암아 청정(聽政)하시기에 가쁘셔서 나에게 명하여 왕위를 계승케 하시었다. 나는 학문이 얕고 거칠며 나이 어리어 일에 경력이 없으므로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윤허를 얻지 못하여 마지못해 대위(大位)에 올랐다. '''|단종 전위교서 일부}}
{{이냥|''' 한밤 중에 태상왕, 주상이 갑작스럽게 시해당하는 큰 일이 발생하였다. 이번 일로 옥좌가 공백이 되어 종묘사직이 뒤흔들렸으며 조정에서 수사한 결과 범인은 왕대비 민씨로 밝혀졌다. 왕대비 민씨가 직접 태상왕과 주상을 처분하였고 시부모와 아들에게 같은 행위를 한건 패륜이자 왕권에 대한 도전, 또 왕실의 위엄을 깎아내린 행위이다. 이에 왕대비 민씨의 어보를 불태우고, 존호를 회수하고, 왕대비의 직첩을 거두어 폐위(廢位)한다. 폐서인 민씨를 궁 밖으로 내쳐 사가에 위리안치하여 머물게 하도록 하라. '''|영종의 폐비 전교}}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는 단종(端宗), 휘는 융(㦕)
'''조선의 제2대 국왕인 영종의 왕비로, 제3대 국왕인 단종의 모후이다.'''
 
즉위 후에는 재상들에게 주로 국정을 맡기는 재상 정치를 지향하였다. 또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한 학문 연구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모습과 단종의 국정운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모후 폐비 민씨가 단종을 시해하며 끔찍하게 승하한 군주이다.''기울인 글씨''

2025년 4월 8일 (화) 17:57 판


조선왕조44.png
조선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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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 단종 태종 세종
폐비 민씨 소혜왕후 선의왕후 -
연산군 -
- -
조선 영종의 폐비
폐비 민씨ㅣ廢妃 閔氏
민씨.png
출생 1365년 8월 6일
개경 철동 사저
사망 1426년 8월 27일 (향년 61세)
한성부 사저
능묘 폐비민씨묘 (廢妃閔氏墓)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392년 8월 13일 ~ 1402년 10월 22일
조선 왕비
1402년 10월 22일 ~ 1423년 8월 5일
조선 왕대비
1423년 8월 5일 ~ 1426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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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여흥 민씨
배우자 영종
자녀 1남
종교 유교 (성리학)

개요

한밤 중에 태상왕, 주상이 갑작스럽게 시해당하는 큰 일이 발생하였다. 이번 일로 옥좌가 공백이 되어 종묘사직이 뒤흔들렸으며 조정에서 수사한 결과 범인은 왕대비 민씨로 밝혀졌다. 왕대비 민씨가 직접 태상왕과 주상을 처분하였고 시부모와 아들에게 이 같은 행위를 한건 패륜이자 왕권에 대한 도전, 또 왕실의 위엄을 깎아내린 행위이다. 이에 왕대비 민씨의 어보를 불태우고, 존호를 회수하고, 왕대비의 직첩을 거두어 폐위(廢位)한다. 폐서인 민씨를 궁 밖으로 내쳐 사가에 위리안치하여 머물게 하도록 하라.
영종의 폐비 전교

조선의 제2대 국왕인 영종의 왕비로, 제3대 국왕인 단종의 모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