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크니스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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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전선에 다시 투입된 그들은 메죄퇴르, 퇴뢰크센미클로시, 체를레드, 케체메트, 그란 교두보, 글라, 리트라, 바프 성[3], 라 안 데어 타야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보지츠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던 그는 다른 전차의 전차장인 슈코다 상사와 함께 중상을 입고 만다. 슈코디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시신은 후송되어 소헤를에 매장되었다. 크니스펠은 우르바우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무사히 치료와 응급수술을 받고 살아났다. 이때가 1943년의 일이었다.
동부전선에 다시 투입된 그들은 메죄퇴르, 퇴뢰크센미클로시, 체를레드, 케체메트, 그란 교두보, 글라, 리트라, 바프 성[3], 라 안 데어 타야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보지츠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던 그는 다른 전차의 전차장인 슈코다 상사와 함께 중상을 입고 만다. 슈코디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시신은 후송되어 소헤를에 매장되었다. 크니스펠은 우르바우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무사히 치료와 응급수술을 받고 살아났다. 이때가 1943년의 일이었다.
쿠르트 크니스펠은 1944년 건강상의 이유로 전역했고, 1944년 독일 왕당파가 나치 독일에게 반란을 일으켜 나치 독일이 져서 항복 후 전범 재판을 받았으나 나치에 반항적이고 전투에 충실했을 뿐 반인륜적 사항은 없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19년 4월 7일 (일) 10:07 기준 최신판

쿠르트 크니스펠.jpeg
'쿠르트 크니스펠
이름쿠르트 크니스펠
Kurt Knispel
출생년도1921/ 9 / 20
생존중
독일제국'크니스펠가 장남
거주지대영연방제국 소재 런던

|<bgcolor=#8999aa><:>고향||<-2>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텔란트 소재 잘라스펠트 ||

에리카 마를린 크니스펠 쿠르트 본인만 알고있음
요하네스 빌헬름 크니스펠 쿠르트 본인만 알고있음
형제자매3남 장남
신체176cm, 56kg, B형
직업고급공무원
직위경제부 장관
성향중도보수
정당브라질 민주당
경력독일국방군 전차병
소속세계관없음
국가대영연방제국,독일제국(고향이었으나 다른곳으로 이민감), 기타 신국과 중립국
소속없음

쿠르트 크니스펠의 인생 이야기

유년기 시절

쿠르트 크니스펠은 1921년 9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지방의 추크만텔 근처의 작은 마을 잘리스펜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니콜라스도르프에서 보냈고 1940년 자동차 공장에서의 수습 과정을 마치고 독일 육군 기갑부대에 지원한다.

기본 훈련을 위해 크니스펠은 저 질레시아(Lower Silesia)의 자간(Sagan)에 있는 전차 전환 교육대대(Panzer Replacement Training Battalion)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기본 보병 훈련을 거쳐 1호 전차(Panzer I), 2호 전차(Panzer II), 그리고 4호 전차(Panzer IV) 운용 교육을 받았다. 1940년 10월 1일 그는 제12 기갑사단 29 기갑연대 3 중대로 배치되었다. 크니스펠이 훈련받은 분야는 4호 전차 탄약수와 포수였다. 훈련은 1941년 6월 11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자간과 푸틀로스(Putlos)를 오가는 과정도 포함되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그냥 평범한 독일군의 성장과정 이겠지만 이후 그는 뛰어난 전차 에이스로써의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제 2차 세계대전(동부전선)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크니스펠은 헬만 소위가 지휘하는 4호 전차의 포수였다. 헬만 소위의 전차는 당시 아돌프 프리드리히 쿤첸에 의해 지휘되던 제57군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크니스펠의 전차는 야르체보에서 스탈린그라드 입구까진 진격했으며 북쪽으로는 레닌그라드~타흐킨까지 활동하였는데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에베르하르트 폰 마켄젤의 지휘를 받을 당시에는 캅카스까지 갔었다. 이 때부터 전차 에이스의 자질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943년 1월 말에 추가로 12대의 전차를 격파한 그는 푸틀로스로 귀환해 한창 활약하기 시작한 6호 전차 티거를 보급받아 포수로 배속 받게된다.

푸틀로스에 있던 집단원 일부는 파더부른의 지휘를 받는 제 500기갑대대로 재배치된다. 크니스펠은 제 503 중전차 대대로 소속되어 제 7기갑사단의 측면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후 코르순~체르카시 돌출부에서 비비타, 잠폴, 카메네츠, 포돌스크에서 추가적인 전투에 참여하여 아군을 지원하였다. 동부전선에서 탈출한 그들은 이후 중대는 본국으로 귀환하여 티거 2를 지급받아 캉에서 전투를 벌여 노르망디에서 탈출하였다.

동부전선에 다시 투입된 그들은 메죄퇴르, 퇴뢰크센미클로시, 체를레드, 케체메트, 그란 교두보, 글라, 리트라, 바프 성[3], 라 안 데어 타야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보지츠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던 그는 다른 전차의 전차장인 슈코다 상사와 함께 중상을 입고 만다. 슈코디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시신은 후송되어 소헤를에 매장되었다. 크니스펠은 우르바우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무사히 치료와 응급수술을 받고 살아났다. 이때가 1943년의 일이었다.

쿠르트 크니스펠은 1944년 건강상의 이유로 전역했고, 1944년 독일 왕당파가 나치 독일에게 반란을 일으켜 나치 독일이 져서 항복 후 전범 재판을 받았으나 나치에 반항적이고 전투에 충실했을 뿐 반인륜적 사항은 없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