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 (밴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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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칠란트 연방의 역사=
=도이칠란트 연방의 역사=
==2차세계대전의 종전==
<small>{{{#!wiki style="border:1px solid gray;border-top:5px solid #FF0000;padding:12px"
<small>{{{#!wiki style="border:1px solid gray;border-top:5px solid #FF0000;padding:12px"
{{{+2 '''주의!'''}}}[br]본 단락에서 서술하는 대 도이칠란트 국의 수립, 2차세계대전의 발발과 종전의 내용은 2차세계대전과 T-4프로그램등의 나치당의 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해 유태인, 집시, 장애인등을 학살한 주범인 대 독일국(나치 독일)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설정을 정치적 중립성을 가지고 읽기를 바라며, 본 문서를 주관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객관적으로 나온 자료를 토대로 해석하시길 바라며, 만약 해당 단락이 문제가 되는 경우, 추후 요청에 따라 삭제, 수정될수 있음을 알립니다}}}</small>
{{{+2 '''주의!'''}}}[br]본 단락에서 서술 하는 내용은 가상의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실제로 일어난다면 우연임을 알리고 고증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립니다. }}}</small>
==대 도이칠란트 국의 수립==
2차세계대전이 개전되고 1940년대에 들어서는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제공권이 밀려나나 상태였다. 또한 1941년 6월 개전된 도이칠란트-소비에트 연방 전쟁(독일어 : Deutschland- sowjet union krieg, 러시아어 :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대 조국 전쟁)으로 인해 육,,공군에 걸쳐 수많은 전력의 공백을 보게되었고, 게다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등의 여파로 자유프랑스가 상륙한 달인 6월에서 1달만인 7월에 함락당하면서 라인강의 국경에서 밀고오고 있었고, 소련군은 이미 폴란드 등을 재 점령 해오며 오데르- 나이세 강까지 밀고 온 상태였다. 그리고 지속된 전쟁으로 전력상의 공백이 너무 많은 도이칠란트 국방군 수뇌부는 사실상 불가능한 무기 개발 계획과 작전등을 사용하며 아등바등 버티고 있었다. 그 중에는 발터 울브리히트 장군과 클라우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등이 이끄는 반란군들이 있었고, 이들은 히틀러를 암살해 새로운 독일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7월 25일 제 1차 작전을 시행하려 하였으나, 통신병의 보고로 인해 7월 20일로 앞당겨 진다. 그리고 운명의 날인 7월 20일에 폭탄이 터졌다. 그러나 그들은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미 늑대굴을 지키던 헌병들은 발터 울브리히트 장군이 총통 권한으로 휴가증을 내어줘 전부 반란군 소속의 헌병들이었기 때문에 만약 폭탄이 터진다 하더라도 벙커를 탈출하기 전에 사살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서류가방으로 위장한 폭탄이 터졌고, 좀 더 히틀러에 가까운 쪽에 폭탄을 두고 나온 덕분에 수월하게 작전이 진행되었다. 그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를 포함한 폭탄 근처에 있던 장군들이 사망하게 되고, 나머지 폭발에서 살아남은 장교들은 사살당하거나 탈출에 실패하였다. 그 덕분에 반란군은 전쟁범죄의 명목으로 알베르트 슈페어, 괴벨스, 헤르만 괴링등의 수많은 장군과 장관들을 체포 하였고, 발터 울브리히트 장군을 대통령으로, 에르빈 롬멜을 수상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1944년 8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8월 5일, 연합군에 8월 6일, 소련군에 항복하였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속에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사회상을 보자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시위가 빈번하였으며, , 경찰의 감축과 무리한 경제압박등으로 도이치 인들은 어두운 미래만을 내다보며 망연자실 하였다. 심지어는 자살하는 참전용사나 노동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1920년,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재재가 어느정도 풀리면서 그나마 해결되는줄 알았으나 프랑스가 주요 공업지대를 무단으로 침탈하였다. 심지어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3000 계획'을 세워 주요 자원으로 꼽히던 구리 1천톤, 철 1천톤, 석탄 1천톤을 캐라는 무리한 지시까지 내리며 노동력을 떨어 트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1921년 도이치 제 1 혁명을 불러 일으키며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불신 여론이 커졌다. 심지어 자살률도 상당히 증가 하였으며, 이는 1930년, 국가 사회주의 도이치 당에 대한 성장을 야기한다. 이후 1932년 도이치 총선에서 승리하였던 국가 사회주의 도이치 당은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물론 지지율도 급격히 상승하며 당시 지지자들 사이에선 새로운 도이치의 부활을 알리고 있다고 환호했다. 그러나 1933년 어느날, 베를린에 위치한 제국 국회의사당에 위치한 의장실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화재가 발생해 의장실이 전소되고 몇개 동이 타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 힌덴 부르크 대통령의 재난 컨트롤 타워는 부실하기 그지 없는 수준인지라 빠른 화재 진압이 불가능하였고, 결국 발화 시작후 30분정도가 지나서야 화재를 발견한 한 나치 당원이 소방서에 이를 알리고 안에 있던 진화장비로 진화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난뒤 소방대원들이 도착해 다 진화하였고 그 안에서 한 손에는 라이터와 기름병을 들고 있던 한 청년을 체포한다. 그 청년은 마리누스 판 데어 루베로, 조사결과 도이치 연방 제국태생이었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로 망명해 그의 친구에게서 볼셰비즘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등을 배운뒤 네덜란드 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들과 제국의사당을 방화할 계획을 가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돌아와 제국 국회의사당의 몇몇 경비인사들을 포섭해 방화를 저질렀다고 진술하였다. 다행히도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대 화재로도 번질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재난 컨트롤 타워가 부실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로 인해 나치당에서는 소방서에 이를 신고하고 진화를 시도한 당원에게 표창장과 우수 당원 마크를 지급하였다. 결국 범인은 사형판결을 받았고, 결국 사형이 집행되어 그는 형장의 이슬로 인해 사라졌다. 그덕분에 1당 독재체제를 확립한 대 도이치 국은 국경을 폐쇄하고 총통의 명령에 따라 라인란트 재무장과 경제체제 재정비, 산업력 기반확보등을 골자로 하는 대 도이치국 개혁 1.0이 실행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종전==
==도이칠란트 국의 수립과 냉전의 전개==
1936년 시작된 라인란트 재무장, 대 도이치 국 대 개혁 1.0 에서는 주요 군편제에 대한 개편과 신 무기에 대한 연구와 경제체제를 다시 재정비 하였다. 그리고 해당 사업들은 탄력을 받아 1938년에 왠만한 국가의 기초 경제와 군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라인란트 재무장이 시작될 당시 전쟁을 염두에두고 지속적으로 평화정책을 추진중이었고 그 결과로 대 도이치국의 주데덴란트 점령을 막을수 있었던것처럼 보였지만 얼마안가 도이치 국방군은 체코의 나머지 지역을 일체 접수하였고, 체코-도이치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뒤에는 오스트리아 점령으로 외스터라이히-도이치 괴뢰정부마저 수립되었고 결국에는 두 정부는 전쟁기간 동안 도이치 국방군의 군수공장 노릇을 해야하였다. 그리고 1939년 부터는 폴란드와 갈등을 겪게된다. 그이유는 1차세계대전 기간동안 점령하고 있었던 단치히 시를 폴란드가 무단 점령하려 하였단 사실이 알려졌다. 그리고 두 정부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대 도이치 국은 "단치히 시도 프로이센의 일부이며 프로이센은 우리의 선조이다"였고, 폴란드는 "단치히 시는 이전부터 폴란드의 일부 였고, 오데르-나이세 선을 이미 넘어간 상태의 위치이므로 우리가 점령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1939년 9월, 지속적으로 일어난 갈등에 화가난 대 도이치 국은 결국 폴란드를 약 150만명의 보병들과 몇십개의 기갑사단등을 앞세워 침공한다. 그리고 전격전의 효과로 1달도 안되어 폴란드는 완전히 점령되어 도이치-폴란드 괴뢰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후 도이치 국방군은 발길을 돌려 덴마크와 노르웨이등의 북유럽을 노리고 침공하여 1주일도 안되는 기간에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점령하였고, 이들은 북유럽-도이치 괴뢰정부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1940년 4월 이전까지 위장 평화 상태가 지속되었고, 전투도 얼마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속에서 내정과 결속력을 다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프랑스의 국경에 마지노 선이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고, 그들은 정면충돌하느냐 우회하느냐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그리고 도이치 국방군은 벨기에로 우회해 침공하는 작전인 황색 작전이 선택 되어 1940년 5월 10일, 프랑스를 침공한다. 당시 아르덴 숲을 통해 수월하게 진격해 빠르게 박살내는 식으로 전투를 치뤘고 그런 소규모 전투들을 통해 Pz.B2나 슈니예트 전차같은 노획병기들도 얻게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점령이 끝나자 그들은 역대급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은 바로 영국 본토항공전과 대 소련전쟁이었다. 1940년 6월이되어서 총리로 취임한 처칠은 결사항전이 중요함을 인식시켰고, 덩게르크 철수나 여러 작전들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본토항공전에서는 도이치 항공군에 상당한 손실을 입혀 항공군을 사실상 불구로 만들어 버렸고, 영국을 포기한 도이치 국방군은 북 아프리카 전투를 시작으로 대 아프리카 전을 전개 하나 싶었더니 선두로 나가는 이탈리아군의 문제가 너무 심각한 나머지 한 몇개 전투에서는 승리하더니 이후에 가서는 대패 하며 사실상 아프리카 전에 나간 부대들도 불구가 되어 버리고 당시 지휘 장군인 에르빈 롬멜은 본토 방어 사령부로 이직된다. 이후 에리히 만슈타인 육군 장군과 리인하르트 게렌 육군 중장은 대 소련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히틀러를 설득하였고,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명명된 작전은 3월부터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6월 21일, 침공을 시작해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 있던 몇몇 연방 자치국들을 점령해 괴뢰정부로 만들고 본토로 진격한다. 그러나 본토 진격은 크나큰 실수였다. 당시 지연전술로 큰 이득을 보던 소련군은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대 승을 거두게 되었고, 노르망디 작전과 함께 대차게 밀리는 참사가 벌어진다. 이후 1944년 7월 20일, 작전명 발키리와 함께 천년 제국을 이루고자한 대 도이치국은 붕괴했다. 또한 종전 이후 카를되니츠, 에르빈 롬멜등의 군 수뇌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전범재판을 받았으며 각각 16, 14년 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1944년 8월초 항복한 도이칠란트는 연합국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미, , , 프 4개국이 공동으로 점령하였다. 물론 이는 오스트리아에도 똑같이 적용되었으며, 1945년에는 긴급 재판이 열려 몇몇 장관들이 심판을 받았고, 1945년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맞고 항복했다. 그 다음 해인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이 개정, 몇몇 나치에 부역한 장군, 장교들이 대거 사형 또는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1948년 2월에는 연합국의 점령이 끝나는 동시에 베를린 봉쇄가 시작되었고, 서쪽에는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이, 동쪽에는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1949년, 냉전의 전개를 우려한 미국은 국무 장관 조지 마셜이 제창한 마셜플랜을 유럽에 적용해 수많은 경제적 지원과 원조등을 하였고, 이 중에는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에도 약 30억 달러(한화 3조원 가량)에 달하는 재정 지원과 타이어, 재봉틀, 미국산 프레스, 밀 등의 수많은 원조도 동시에 들어갔고, 미국이 예상한대로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냉전이 전개된다. 그리고 핵전쟁을 우려한 미국과 소련은 각각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otan)와 바르샤바 조약기구(wto/otw)가 만들어 지며 본격적인 공산주의/신 자본주의의 대립전선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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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과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의 경계]


==도이칠란트 연방의 분할과 베를린 전투==
==도이칠란트 전쟁과 전성기==
당시 도이치 연방은 연합국의 입장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지리적, 경제적 요충지로 인식되었다. 그 이유로 미,,불,영 4국은 도이치 연방을 각각 분할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동부 도이치를 점령하면서 베를린을 봉쇄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OSS는 소련의 새로운 첩보를 입수한다.
<small>{{{#!wiki style="border:1px solid gray;border-top:5px solid #FF0000;padding:12px"
{{인용문|"우리는 1948년 10월경, 서 베를린을 공격할것이며, 그에따라 우리 동부 도이치를 부강하게만들어 사회주의 국가의 하나로 성장 시킬것이다." '소련의 첩보中'}}
{{{+2 '''주의!'''}}}[br]본 단락에서 서술 하는 내용은 가상의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실제로 일어난다면 우연임을 알리고 고증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립니다. }}}</small>
이는 많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도이치 연방에 대규모 기갑사단과 보병사단등을 파병하였으며, 도이치 연방 국경수비대도 2차세계대전에 돌아다니던 무기들을 줍거나 지급받았다. 1948년 10월, 소련군은 3개의 군단을 서베를린 지역으로 급파 하였고, 처음에는 소련군에게 전세가 우월하게 흘러가는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착각은 소련군을 후퇴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다. 왜냐하면 당시 서 베를린에 있던 시민들을 전부 전쟁 직전 수송기로 대피시키고 작전지역을 손상시켜 이미 전의를 상실한것 처럼 위장시켜두었다. 그리고 소련군이 진격하려는 그때, 소련군 장교 한명이 쓰러지고 그 옆에 있던 장교가 돌격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중무장 상태로 낚시를 하듯 대기하고 있었고, 소련군이 돌격해오자마자 공격을 개시하였고, 1개 소대당 3개 중대를 격파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달성하였다. 이후 전의를 상실한 소련군은 동 베를린과 점령지역에서 후퇴한다. 이후 몇몇 스탈린 주의자는 도이치 연방 내에서 더이상의 가망이 없다 판단, 폴란드와 체코지역으로 도피해 임시 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체코 임시 정부는 1968년 체코 민주화 운동으로 시위대에 의해 붕괴되었고, 폴란드 임시 정부는 1990년대 까지 존재하였지만, 바웬사 정부의 민주화정책에 따라 해산 명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냉전이 전개되며 마셜플랜의 수혜국으로서 미국에게 재정지원을 받고 이 기반으로 공업력을 성장시키고 공산국가의 침공에 대비해 군사력을 증강시키던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과는 정 반대로 코메콘의 경제지원은 받았으나 자금의 상황이나 공업력 등은 생각도 하지 않고 군사력에 대부분의 예산을 쏟아 부은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은 사실상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군사력 만큼은 동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손꼽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두 국가의 경제력 차이가 확고하게 난 것은 1965년대부터 였는데, 당시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의 GDP만 해도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의 GDP의 몇배는 뛰어 넘었고, 결국 1968년대, 동유럽에서 확산된 민주화 운동은 점점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을 몰락의 길로 밀어 넣고 있었다. 게다가 발터 울브리히트 당시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축출하려는 세력의 쿠데타(당시 지지 기반도 약했을 뿐 아니라 동유럽 민주화 운동의 여파였다.)까지 일어나며 거의 몰락에 다다른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쿠데타를 잔혹하게 진압했고, 이를 아무 잘못도 없는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이 사회주의 사상을 엎어버리기 위해 일으킨 수작이라며 침공 명분을 만들었으며, 1973년까지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은 대대적인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그로 인해 당시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의 국방예산의 2배가 훌쩍넘는 국방예산을 사용해 파산직전에 이르렀다. 그리고 1970년 8월, 독일의 정보기관과 CIA는 소련의 암호를 해독하던 중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인용문|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 군사작전 명령 제 33호
||<-30> 베를린 전투 당시 사용된 보병장비 ||
레오니프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 각하와 발터 울브리히트 서기장과의 이전 회담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국가의 확대와 대 자본주의 전쟁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리고 병력 요청을 하시어 보병 약 10개 사단과 기갑 5개사단 등을 지원 받았으며, 이전에 개최된 장성회의에서도 다음 내용이 언급되었음. 그에따라 1973년 중, 소련의 지원병력과 도이칠란트 국가 인민군 전군을 동원해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을 침공하는 ‘붉은 경보’ 작전을 실행할 것임을 밝힘. 또한 전투 암호는 ‘위대한 서기장 각하를 위하여!’임을 알림.
||<-30> 도이치 연방 ||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
|| M1 개런드 |||| M2카빈 |||| M3 기관 단총 |||| 리-엔필드 소총 |||| 스텐 기관단총 ||
당시 이 암호를 해독한 CIA는 대통령께 긴급보고를 올렸고, 이를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 대통령과 총리에게 전달해 긴급하게 전쟁준비에 돌입하고, 재무장을 실시한다. 그리고 전쟁이 있기 1달전인 3월 8일, 미국은 비밀리에 M16A1 75,000 정과 M60패튼 전차 2,000대 그리고 10개 보병사단, 3개 기갑사단등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1달 후인 1973년 4월 8일, 새벽 6시에 그들은 일제히 전투 암호에 따라 포문을 개방하고 진격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서 베를린을 2일만에 점령한다. 당시 게릴라 전투에 특화된 국가 인민군은 지속적으로 시가전과 엄폐와 엄호 등을 활용한 전투 등을 지속하며 속전속결로 점령하고 후에 사상교육, 숙청을 진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내부적 안정보다는 빠른 점령이 급하였고, 이는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 점령지 내 레지스탕스를 생성해내는 주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베를린을 점령하고 지속적으로 진격하였고 수 많은 사상자를 무릎쓰고 전투에 지속적으로 임한 군인이 있었으나, 인해전술에는 역 부족이었고, 전쟁 시작 2주일 만에 서부지역도시 10여개가 점령당한다. 그리고 3달째 되는 때에는 절반이 넘는 도시가 점령당했고, 3달 그리고 2주일이 넘는 때, 그들은 75%에 달하는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은 전쟁을 지속적으로 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후퇴를 결정했고, 네덜란드, 벨기에 등으로 후퇴한다. 물론 일부 병력은 오스트리아 방면으로도 후퇴하기도 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평화상태가 지속되었는데, 왜냐하면 7월 29일, 갑작스러운 군사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보급로가 전쟁을 위한 병력들이 아닌 쿠데타 병력들을 중점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들은 고스란히 굶거나 보급을 받지 못해 싸우지 못하는 군인들도 자연스레 많아졌다. 그리고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을 도우기 위해 UN 안보리가 열리고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의 침공을 묵인한 공산권 국가들을 제외하고 회의를 결과 대규모 연합군을 결성해 도이칠란트 국가 인민군을 격파하기로 결정했고, 그에따라 프랑스,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 정부, 오스트리아 연방 공화국, 벨기에 왕국,네덜란드 왕국, 룩셈부르크 공국 등의 주변국과 이에 합류한 미군들을 중심으로 당시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의 점령지를 수복하는 ‘자유주의 수호’라는 작전을 8월 1일 실행해, 처음에는 전선 근처에 있던 도시를 점령하고 북해 쪽에서는 함대가 지속적인 포격 등을 개시해 빠른 속력으로 진격하였고, 그 결과 대부분의 국가 인민군 병사들을 패잔병으로 만들어 버리고, 남은 곳은 동 베를린 소재 도이칠란트 공산당 당사와 서기장 집무실이었다. 그리고 도이칠란트 연합군은 국가 인민군과 치열하게 싸워 도이칠란트 본토를 전부 수복하였고, 국가인민군과 서기장으로부터 9월 3일에 항복 성명을 받아내면서 도이칠란트 전쟁은 끝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전쟁 이후의 상황은 1944년 패전 당시와 똑같은 상황을 방불케 하였고, 수많은 재산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돌아가던 건 남은 25%의 기반시설이었고, 다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제 2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게 되며 경제대국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직 전쟁이 없었던 오스트리아를 도와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네덜란드를 도와 베네룩스 연방(추후 홀란트 연방으로 바뀜.)을 수립하고 이후에 몇몇 공산주의 국가들이 다양한 이유로(정치, 경제문제가 주력이었음)붕괴하며(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등등)이 주변국이었던 도이칠란트 연방에 소속국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으로 도이칠란트 연방이 수립(1975년 2.1)되었고, 안정적인 시기를 보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운이 안 좋게도 테러리즘의 시대였고, 거의 테러리스트들이 유럽등지에서 날뛰었고, 도이칠란트 연방은 이를 강력하게 응징하였다. (주요 일화로는 도이칠란트 연방 소재 이란 대사관 테러사건이 있다)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 전성기가 시작되고 그에 따라 이전 대 도이칠란트 국의 전범 행위를 사죄하고자 하는 일이 많아 졌고, 이의 여파로 경제 성장, 외교 안정이 이어졌고,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도 이번 전성기는 경제 버블이 아닌 제 2의 라인강의 기적의 영향으로 나타났다고 말하였다.
|| STG-44 |||| Mg42 |||| Bren 경기관총 |||| 발터 PPK |||| M1911 ||
||<-30> 인민 방위군 ||
||<-3> 모신나강 ||||<-3> 시모노프 기병소총 ||<-4> 데그탸로프 경기관총 ||
||<-3> Obrez ||||<-3> PPsh-41, PPs-43 기관단총 ||||<-4> TT-33 ||
 
||<-30> 베를린 전투 당시 사용된 기갑장비 ||
||<-30> 도이치 연방 ||
|| m4셔먼 |||| M48 패튼 |||| M47 |||| M3lee |||| M18 헬캣 ||
|| 5호전차 |||| 6호전차 |||| 유니버설 캐리어 |||| 그레이 하운드 |||| Sd.kfz 251 ||
||<-30> 인민 방위군 ||
||<-3> T-34-76 ||||<-3> T-34-85 ||<-4> BM-13 카츄샤 ||
||<-3> T-28 ||||<-3> KV-1 ||||<-4> BT-7 ||


==도이칠란트 연방의 수립과 전성기, 그리고 현재==
==1990년대와 지금==
베를린 전투가 일어나기도 전인 1947년 10월 9일, 도이칠란트 연방의 국회의사당에서 아침 8시가 되자마자 율리우스 얀 당시 도이칠란트 연방 초대 대통령은 도이칠란트 연방의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고, 1948년, 베를린 전투 이후 패배한 소련점령 도이칠란트 지역에 거주하던 스탈린 주의자들은 폴란드와 체코로 각각 도주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는데, 체코는 1968년 체코 민주화 운동과 1971년 도이칠란트 연방의 가입으로 인해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 임시정부는 해체당하고, 폴란드에 있었던 임시정부는 1989년까지 건재하였고, 그들은 자본주의자들이 우리의 권력을 강탈하였다 라고 주장하며 폴란드 인민 공화국과 함께 반 자본주의 성향을 가지고 도이칠란트 연방에 저항하였다.(실제로는 그들에게 자주적 국가임을 증명할 증거도 없었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 임시 정부를 대신해 국제 재판소에 미군의 강제 영토 침탈로 제소 하였으나, 그들이 소련의 괴뢰국이며, 선전포고를 일으키는데 동조한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 임시정부의 죄가 크다 판결해 패소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방어한 죄밖에 없는 도이칠란트 연방은 그들로 부터 배상금도 받아낼수 없었고, 오히려 침공위협을 받아야하였다.)
1980년대 나타난 전성기는 1989년도에 들어서 끝이 났고, 1990년도에는 소련이 붕괴하며 냉전도 막을 내린다. 하지만 신 냉전이 발생하는데, 당시 중동의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가 도이칠란트 연방과 미국 등을 습격하면서 도이칠란트 연방에 6월 테러가, 미국에는 9.11 테러가 발생하는데 도이칠란트 연방에서는 6월테러로 불리는 이유가 6월에 2차례로 공항, 학교 등을 습격해 총기난사를 저질렀는데, 이미 대 테러 훈련에 적응되어 있었던 대부분의 소속국의 특공대가 1차로 알 카에다 도이칠란트 지부를 습격해 거의 먼지를 만들어 버렸고, 이로 인해 공항테러에서는 민간인 15명이 사망하고 테러범은 전원 진압, 특공대원 및 경찰이 2명 사살 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또한 대학교 테러는 더 잔혹 하였는데, 이전 테러와는 다르게 화재를 일으켜 탈출하는 학생들을 사살하고 폭탄을 터트린다는 인질극을 벌여 이전보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정부 집계 학생 50명 부상/사망, 교수 또는 교사 12명 부상/사망, 테러범 전원 진압, 특공대원 8명 사살 등으로 나오게 되었고, 이를 통해 알 카에다 도이칠란트 지부와 주요 테러단체, , 마피아, 불법 조직 등을 국가 차원에서 소탕하기 시작하였고, 늦은 밤에 일어나는 보복 사살 등을 막기 위해 대통령 령으로 야간 외출 금지 등이 내려 졌고, 불 필요한 폭동을 막기위해 전투 경찰의 부활과 특수 형사의 부활 등이 이루어 졌다. 이를 통해 더 나은 치안 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고, 복지 등을 더 확대해 복지 국가의 이룩과 안정적인 국방 태세 유지를 위해 군비도 유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UN의 상임이사국 직위에도 오르고, 안정적인 치안과 국방을 유지하고 세계 경제 순위 3위에도 드는 등의 여러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1950년이 되어 산업력은 복구가 되었지만 자본은 부족한 상태가 되었다. 그들은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생계를 꾸려 나갈수는 있었으나, 1959년만 되면 원조 경제도 끝나기 때문에 빨리 경제 성장 정책을 마련해야 하였고, 그들은 저축정책, 경제 개발 3개년 계획 등을 계획하였고, 어느정도의 자본도 모이게 되었으나, 막상 생계는 팍팍해 경제 상태가 위험하였다.
그리고 공산권이 지속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자, 미국은 유럽에 대규모 경제원조를 하는 이른바 마셜플랜을 계획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도이칠란트 연방은 약 20억 3천 8백만 달러(약 2조원)을 지원받게 되었다. 그리고 도이칠란트 연방은 이를 통해 중공업 육성과 방위산업 육성등으로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으며 현대에 와서 이 경제성장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도이칠란트 연방은 지속적으로 주변 공산국가들의 침공위협을 받자 빠르게 군수산업을 육성하였고, 이 결과로 레오파르트 1 전차, G3, MP5 등의 수 많은 기술력을 바탕으로한 산물이 창출되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이 전자산업을 독점하자 아예 국영으로 전자기업을 만들어버리는 기적을 보여주는 바람에 도이칠란트 연방은 전자산업 부문에서 상위권으로 올라가는 영광을 달성한다. 이후 기계공업, 화학공업등에서도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줘 미국,일본 다음으로 상위권에 올랐다.
그리고 1970년, 도이칠란트 연방은 건국 이래 가장 빠르고, 강성하게 성장하게되는 전성기를 맞게되는데 그들은 당시 벨기에를 주축으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을 통일한 베네룩스 연방과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등을 도이칠란트 연방의 자치국으로 받아 들인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진영의 힘을 보여줌으로서 그 국가들을 공산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고, 대규모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그리고 전성기와 함께 테러와의 전쟁이 벌어진다. 당시 그들은 공산주의 단체들과 극단적 종교주의 단체들 등이 결합해 도이칠란트 연방을 포함한 서유럽을 공격하였고, 결국 그들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고 말았다. 바로 베를린 대학교 참사와 뮌헨 올림픽 참사 인데, 당시 바더 마인호프가 주축이 되어 검은 9월단, 인민 해방단 등을 이끌고 3월에는 베를린 대학교에 침입해 총장실에 화재를 내고 부 총장을 인질로 잡아 장장 24시간이 넘게 억류하였다. 그리고 2천만원을 준비하라는 바더 마인호프의 요구에 도이칠란트 연방 정부가 불응하고 오히려 그들을 저격하려 하자 부총장을 살해하는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검은 9월단은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기습해 약 3천 5백 만원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또 묵살하자 이번에는 생존선수 3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몰살하게 된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도이칠란트 연방의 국민들은 반 테러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고, 군을 파병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도이칠란트 연방군은 이를 행동에 옮긴다. 그리하여 테러에서의 해방작전을 세워 단체를 법적으로 기소해 강제 해체하고, 테러리스트 전원을 사살한다. 이 덕분에 당시 임기중이던 엥겔 스테판 대통령의 지지율은 정점을 찍는다(81.35%)이후 83년이 되자, 전성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종전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사과방송을 송출하고 배상금을 지급하는등의 과거사 반성에 대한 태도를 취하였고, 드디어 전범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유럽 연합에 가입(1983년 4월 5일)하였고, 초 고도성장을 이룩하였고, 현재는 지속적으로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고 세계평화에도 기여하고 있으며, 상임이사국 자리에도 등극하는 등의 강성한 국가가 되었다.


=상징=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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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기==
국기에 관련한 내용은 오른쪽 표에있는 국기를 참조하는것이 좋다. 이 국기의 정식 명칭은 연방기로, 흑색, 적색, 황색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삼색기의 의미는 흑색(어둠의 시대에서 출발해) 적색(끊임없는 살육과 전쟁들을 지나) 황색(번영과 자유를 누릴수 있는 황금의 시대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국장은 독수리 국장내 사성(四星)이 들어가 있는 국장을 사용하며 이는 도이치 연방의 근면, 성실, 부강, 평화를 염원하는 뜻으로 해석된다.
도이칠란트 연방의 국기는 연방기/독일기로 불리는데, 독일기/연방기의 바탕이 되는 흑,,금의 삼색기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검정은 인권 억압 및 탄압에 대한 분노와 어둠을, 빨강은 자유를 동경하는 정신을, 금색은 진리와 지혜를 뜻한다. 그리고 국장의 독수리는 국가의 자유와 용맹함을 뜻하고, 독수리 몸통에 있는 별 2개는 2차례에 걸친 경제 기적과 성장을 의미한다.  


==국가==
==국가==
도이치 연방의 국가는 '도이치 연방의 노래'이다. 당시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던 베토벤 교향곡 9번(유럽찬가)는 처음에는 도이치 찬가로 불리었으나, 후에는 '도이치 연방의 노래'라는 새로운 곡명을 얻어 불리고 있으며, 주로 국가 공식행사나, 제식 행사등에 사용되는 국가이기도 하며, 몇몇 경우에서는 도이치의 수비도 사용되지만 이는 전투가로 사용되고 있기에 사실상 제 2의 국가이자 군가로 해석되고 있다.
도이칠란트 연방의 국가는 '도이칠란트 연방의 노래'인데, 원곡은 한스 퍼디난트 마스만이 작곡한 Ich hab` mich ergeben으로, 연합군 군정기 도이칠란트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도이칠란트 연방 정부에서 공식 국가로 지정하며 불려지게 된다. 물론 종종 도이칠란트의 노래가 불려지긴 하지만 이는 성 문제를 부각시키고 이전 나치문제를 부각시킬 수도 있다는 의견으로 인해 바뀌게 되었다.  


=인문 환경=
=인문 환경=

2019년 5월 7일 (화) 18: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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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칠란트 연방
Bundes Staat Deutschland
Federal Of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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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호도이칠란트 연방
Bundes Staat Deutschland
상징국가 ich hab' mich ergeben
(도이칠란트 연방의 노래)
국화참나무
국조독수리
표어die Seele des Volkes zur Freiheit
(자유를 향한 국민들의 영혼)
자연환경면적(영토)면적 1,000,130km²
인문환경인구인구 수 165,165,876명
인구밀도인구밀도 1459명/km²
공용 언어독일어, 폴란드어, 체코어, 헝가리어, 슬로바키아어, 홀란트어
정치국체의원 내각제
정부형태내각 책임제
대통령프레드리히 아인하르트
국무총리공석
경제GDP$8,134,000,000
1인당 GDP$73752(연방 전체)
공식 화폐Bundes Mark(분데스 마르크)
단위
법정연호서력기원 2019년
시간대UTC +1
ISO-3166-1276, DE, DEU, GE
도메인DE
국제전화+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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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칠란트 연방의 역사

2차세계대전의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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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이 개전되고 1940년대에 들어서는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제공권이 밀려나나 상태였다. 또한 1941년 6월 개전된 도이칠란트-소비에트 연방 전쟁(독일어 : Deutschland- sowjet union krieg, 러시아어 :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대 조국 전쟁)으로 인해 육,해,공군에 걸쳐 수많은 전력의 공백을 보게되었고, 게다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등의 여파로 자유프랑스가 상륙한 달인 6월에서 1달만인 7월에 함락당하면서 라인강의 국경에서 밀고오고 있었고, 소련군은 이미 폴란드 등을 재 점령 해오며 오데르- 나이세 강까지 밀고 온 상태였다. 그리고 지속된 전쟁으로 전력상의 공백이 너무 많은 도이칠란트 국방군 수뇌부는 사실상 불가능한 무기 개발 계획과 작전등을 사용하며 아등바등 버티고 있었다. 그 중에는 발터 울브리히트 장군과 클라우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등이 이끄는 반란군들이 있었고, 이들은 히틀러를 암살해 새로운 독일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7월 25일 제 1차 작전을 시행하려 하였으나, 통신병의 보고로 인해 7월 20일로 앞당겨 진다. 그리고 운명의 날인 7월 20일에 폭탄이 터졌다. 그러나 그들은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미 늑대굴을 지키던 헌병들은 발터 울브리히트 장군이 총통 권한으로 휴가증을 내어줘 전부 반란군 소속의 헌병들이었기 때문에 만약 폭탄이 터진다 하더라도 벙커를 탈출하기 전에 사살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서류가방으로 위장한 폭탄이 터졌고, 좀 더 히틀러에 가까운 쪽에 폭탄을 두고 나온 덕분에 수월하게 작전이 진행되었다. 그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를 포함한 폭탄 근처에 있던 장군들이 사망하게 되고, 나머지 폭발에서 살아남은 장교들은 사살당하거나 탈출에 실패하였다. 그 덕분에 반란군은 전쟁범죄의 명목으로 알베르트 슈페어, 괴벨스, 헤르만 괴링등의 수많은 장군과 장관들을 체포 하였고, 발터 울브리히트 장군을 대통령으로, 에르빈 롬멜을 수상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1944년 8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8월 5일, 연합군에 8월 6일, 소련군에 항복하였다.

도이칠란트 국의 수립과 냉전의 전개

1944년 8월초 항복한 도이칠란트는 연합국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미, 소, 영, 프 4개국이 공동으로 점령하였다. 물론 이는 오스트리아에도 똑같이 적용되었으며, 1945년에는 긴급 재판이 열려 몇몇 장관들이 심판을 받았고, 1945년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맞고 항복했다. 그 다음 해인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이 개정, 몇몇 나치에 부역한 장군, 장교들이 대거 사형 또는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1948년 2월에는 연합국의 점령이 끝나는 동시에 베를린 봉쇄가 시작되었고, 서쪽에는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이, 동쪽에는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1949년, 냉전의 전개를 우려한 미국은 국무 장관 조지 마셜이 제창한 마셜플랜을 유럽에 적용해 수많은 경제적 지원과 원조등을 하였고, 이 중에는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에도 약 30억 달러(한화 3조원 가량)에 달하는 재정 지원과 타이어, 재봉틀, 미국산 프레스, 밀 등의 수많은 원조도 동시에 들어갔고, 미국이 예상한대로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냉전이 전개된다. 그리고 핵전쟁을 우려한 미국과 소련은 각각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otan)와 바르샤바 조약기구(wto/otw)가 만들어 지며 본격적인 공산주의/신 자본주의의 대립전선이 만들어진다. 대치.jpg [당시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과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의 경계]

도이칠란트 전쟁과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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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전개되며 마셜플랜의 수혜국으로서 미국에게 재정지원을 받고 이 기반으로 공업력을 성장시키고 공산국가의 침공에 대비해 군사력을 증강시키던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과는 정 반대로 코메콘의 경제지원은 받았으나 자금의 상황이나 공업력 등은 생각도 하지 않고 군사력에 대부분의 예산을 쏟아 부은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은 사실상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군사력 만큼은 동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손꼽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두 국가의 경제력 차이가 확고하게 난 것은 1965년대부터 였는데, 당시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의 GDP만 해도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의 GDP의 몇배는 뛰어 넘었고, 결국 1968년대, 동유럽에서 확산된 민주화 운동은 점점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을 몰락의 길로 밀어 넣고 있었다. 게다가 발터 울브리히트 당시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축출하려는 세력의 쿠데타(당시 지지 기반도 약했을 뿐 아니라 동유럽 민주화 운동의 여파였다.)까지 일어나며 거의 몰락에 다다른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쿠데타를 잔혹하게 진압했고, 이를 아무 잘못도 없는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이 사회주의 사상을 엎어버리기 위해 일으킨 수작이라며 침공 명분을 만들었으며, 1973년까지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은 대대적인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그로 인해 당시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의 국방예산의 2배가 훌쩍넘는 국방예산을 사용해 파산직전에 이르렀다. 그리고 1970년 8월, 독일의 정보기관과 CIA는 소련의 암호를 해독하던 중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 군사작전 명령 제 33호

레오니프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 각하와 발터 울브리히트 서기장과의 이전 회담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국가의 확대와 대 자본주의 전쟁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리고 병력 요청을 하시어 보병 약 10개 사단과 기갑 5개사단 등을 지원 받았으며, 이전에 개최된 장성회의에서도 다음 내용이 언급되었음. 그에따라 1973년 중, 소련의 지원병력과 도이칠란트 국가 인민군 전군을 동원해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을 침공하는 ‘붉은 경보’ 작전을 실행할 것임을 밝힘. 또한 전투 암호는 ‘위대한 서기장 각하를 위하여!’임을 알림.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

당시 이 암호를 해독한 CIA는 대통령께 긴급보고를 올렸고, 이를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 대통령과 총리에게 전달해 긴급하게 전쟁준비에 돌입하고, 재무장을 실시한다. 그리고 전쟁이 있기 1달전인 3월 8일, 미국은 비밀리에 M16A1 75,000 정과 M60패튼 전차 2,000대 그리고 10개 보병사단, 3개 기갑사단등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1달 후인 1973년 4월 8일, 새벽 6시에 그들은 일제히 전투 암호에 따라 포문을 개방하고 진격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서 베를린을 2일만에 점령한다. 당시 게릴라 전투에 특화된 국가 인민군은 지속적으로 시가전과 엄폐와 엄호 등을 활용한 전투 등을 지속하며 속전속결로 점령하고 후에 사상교육, 숙청을 진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내부적 안정보다는 빠른 점령이 급하였고, 이는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 점령지 내 레지스탕스를 생성해내는 주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서 베를린을 점령하고 지속적으로 진격하였고 수 많은 사상자를 무릎쓰고 전투에 지속적으로 임한 군인이 있었으나, 인해전술에는 역 부족이었고, 전쟁 시작 2주일 만에 서부지역도시 10여개가 점령당한다. 그리고 3달째 되는 때에는 절반이 넘는 도시가 점령당했고, 3달 그리고 2주일이 넘는 때, 그들은 75%에 달하는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은 전쟁을 지속적으로 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후퇴를 결정했고, 네덜란드, 벨기에 등으로 후퇴한다. 물론 일부 병력은 오스트리아 방면으로도 후퇴하기도 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평화상태가 지속되었는데, 왜냐하면 7월 29일, 갑작스러운 군사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보급로가 전쟁을 위한 병력들이 아닌 쿠데타 병력들을 중점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들은 고스란히 굶거나 보급을 받지 못해 싸우지 못하는 군인들도 자연스레 많아졌다. 그리고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을 도우기 위해 UN 안보리가 열리고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의 침공을 묵인한 공산권 국가들을 제외하고 회의를 한 결과 대규모 연합군을 결성해 도이칠란트 국가 인민군을 격파하기로 결정했고, 그에따라 프랑스, 도이칠란트 연방 공화국 정부, 오스트리아 연방 공화국, 벨기에 왕국,네덜란드 왕국, 룩셈부르크 공국 등의 주변국과 이에 합류한 미군들을 중심으로 당시 도이칠란트 인민 공화국의 점령지를 수복하는 ‘자유주의 수호’라는 작전을 8월 1일 실행해, 처음에는 전선 근처에 있던 도시를 점령하고 북해 쪽에서는 함대가 지속적인 포격 등을 개시해 빠른 속력으로 진격하였고, 그 결과 대부분의 국가 인민군 병사들을 패잔병으로 만들어 버리고, 남은 곳은 동 베를린 소재 도이칠란트 공산당 당사와 서기장 집무실이었다. 그리고 도이칠란트 연합군은 국가 인민군과 치열하게 싸워 도이칠란트 본토를 전부 수복하였고, 국가인민군과 서기장으로부터 9월 3일에 항복 성명을 받아내면서 도이칠란트 전쟁은 끝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전쟁 이후의 상황은 1944년 패전 당시와 똑같은 상황을 방불케 하였고, 수많은 재산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돌아가던 건 남은 25%의 기반시설이었고, 다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제 2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게 되며 경제대국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아직 전쟁이 없었던 오스트리아를 도와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네덜란드를 도와 베네룩스 연방(추후 홀란트 연방으로 바뀜.)을 수립하고 이후에 몇몇 공산주의 국가들이 다양한 이유로(정치, 경제문제가 주력이었음)붕괴하며(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등등)이 주변국이었던 도이칠란트 연방에 소속국으로 가입하며 본격적으로 도이칠란트 연방이 수립(1975년 2.1)되었고, 안정적인 시기를 보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운이 안 좋게도 테러리즘의 시대였고, 거의 테러리스트들이 유럽등지에서 날뛰었고, 도이칠란트 연방은 이를 강력하게 응징하였다. (주요 일화로는 도이칠란트 연방 소재 이란 대사관 테러사건이 있다)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 전성기가 시작되고 그에 따라 이전 대 도이칠란트 국의 전범 행위를 사죄하고자 하는 일이 많아 졌고, 이의 여파로 경제 성장, 외교 안정이 이어졌고,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도 이번 전성기는 경제 버블이 아닌 제 2의 라인강의 기적의 영향으로 나타났다고 말하였다.

1990년대와 지금

1980년대 나타난 전성기는 1989년도에 들어서 끝이 났고, 1990년도에는 소련이 붕괴하며 냉전도 막을 내린다. 하지만 신 냉전이 발생하는데, 당시 중동의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가 도이칠란트 연방과 미국 등을 습격하면서 도이칠란트 연방에 6월 테러가, 미국에는 9.11 테러가 발생하는데 도이칠란트 연방에서는 6월테러로 불리는 이유가 6월에 2차례로 공항, 학교 등을 습격해 총기난사를 저질렀는데, 이미 대 테러 훈련에 적응되어 있었던 대부분의 소속국의 특공대가 1차로 알 카에다 도이칠란트 지부를 습격해 거의 먼지를 만들어 버렸고, 이로 인해 공항테러에서는 민간인 15명이 사망하고 테러범은 전원 진압, 특공대원 및 경찰이 2명 사살 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또한 대학교 테러는 더 잔혹 하였는데, 이전 테러와는 다르게 화재를 일으켜 탈출하는 학생들을 사살하고 폭탄을 터트린다는 인질극을 벌여 이전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정부 집계 학생 50명 부상/사망, 교수 또는 교사 12명 부상/사망, 테러범 전원 진압, 특공대원 8명 사살 등으로 나오게 되었고, 이를 통해 알 카에다 도이칠란트 지부와 주요 테러단체, 갱, 마피아, 불법 조직 등을 국가 차원에서 소탕하기 시작하였고, 늦은 밤에 일어나는 보복 사살 등을 막기 위해 대통령 령으로 야간 외출 금지 등이 내려 졌고, 불 필요한 폭동을 막기위해 전투 경찰의 부활과 특수 형사의 부활 등이 이루어 졌다. 이를 통해 더 나은 치안 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고, 복지 등을 더 확대해 복지 국가의 이룩과 안정적인 국방 태세 유지를 위해 군비도 유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UN의 상임이사국 직위에도 오르고, 안정적인 치안과 국방을 유지하고 세계 경제 순위 3위에도 드는 등의 여러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상징

국호

자국어로는 도이칠란트(Deutschland, /ˈdɔʏtʃ.lant/)라고 부른다. 이를 풀어서 쓰면 "das deutsche Land", 독일인(Deutsch)의 땅이라는 의미가 된다. 도이치라는 말은 고대 게르만어 diutisc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람, 민족이라는 의미이다. 더치 페이의 더치(Dutch)와도 그 어원이 비슷하다. 다른 언어에서는 유래가 다른 국호를 쓰고 있다. 영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에서는 라틴어 Germania에서 따온 Germany/Germania/Германия(Gyermaniya)를 쓰며,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에서는 독일을 게르만 민족인 알레마니족의 땅이라는 의미의 알마뉴(Allemagne)/알레마니아(Alemania)/알레마니아(Alemanha), 폴란드어에서는 슬라브어 녜메트(němьcь)에서 유래한 '녬치(Niemcy)', 핀란드어에서는 색슨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삭사(Saksa)'로 부르며, 에스토니아어에서도 색슨족의 땅이란 뜻의 삭사마(Saksamaa)라고 부른다. 한편 발트어권인 라트비아어와 리투아니아어에서는 '바치야'와 '보키에티야'라는 이름을 쓰는데 이 이름들의 경우 어원이 불분명하다.

국기

도이칠란트 연방의 국기는 연방기/독일기로 불리는데, 독일기/연방기의 바탕이 되는 흑,적,금의 삼색기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검정은 인권 억압 및 탄압에 대한 분노와 어둠을, 빨강은 자유를 동경하는 정신을, 금색은 진리와 지혜를 뜻한다. 그리고 국장의 독수리는 국가의 자유와 용맹함을 뜻하고, 독수리 몸통에 있는 별 2개는 2차례에 걸친 경제 기적과 성장을 의미한다.

국가

도이칠란트 연방의 국가는 '도이칠란트 연방의 노래'인데, 원곡은 한스 퍼디난트 마스만이 작곡한 Ich hab` mich ergeben으로, 연합군 군정기 도이칠란트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도이칠란트 연방 정부에서 공식 국가로 지정하며 불려지게 된다. 물론 종종 도이칠란트의 노래가 불려지긴 하지만 이는 성 문제를 부각시키고 이전 나치문제를 부각시킬 수도 있다는 의견으로 인해 바뀌게 되었다.

인문 환경

행정구역

도이칠란트 연방 행정도 (3).jpg ↑도이칠란트의 각 주가 표시된 행정도(서기 2010년 기준) 도이칠란트 연방 지도.jpg ↑도이칠란트의 영토가 표시된 행정도(서기 2019년 기준) Sketch-1555575777925.png ↑유럽에서 본 도이칠란트 연방

도이칠란트 연방의 최대 행정 구역은 레지온(Region)이다. 정식 명칭은 (Verwal region)지방 자치구로, 총 34개의 지방 자치구와 170개의 도시가 존재한다. 가장 큰 지방 자치구는 브란덴부르크-안할트 레지온으로, 도이칠란트 연방의 전체인구인 165,165,876명 중 4%가 대 베를린에 밀집하여 있다. 물론 지방 자치구의 종류에는 행정 특별 자치구, 상공 특별 자치구등이 존재하며, 최대 도시는 신 베를린(Neue Berlin)이며, 2005년대에 들어서 구 베를린이 낙후되었다는 의견이 지속되자, 도이칠란트 연방 정부가 새로 지은 특별 자치시로, 브란덴부르크 - 안할트 레지온에 소속되어 있다.

도이칠란트 연방의 레지온 1. 그로닝겐 - 작센 레지온 2. 브뤼셀 - 라인 레지온 3. 리게 - 라인란트 레지온 4. 슐레스비히 - 포어포메른 레지온 5. 브란덴부르크 - 안할트 레지온 6. 헤센 - 튀링겐 레지온 7. 그로스 바이에른 레지온 8.스트레도스키 - 지흐체스키 레지온 9. 트렌시안스키 - 즐린스키 레지온 10. 그로스 빈 레지온 11. 티롤 - 잘츠부르크 레지온 12. 누그라드 - 코시스키 레지온 13. 툴라 - 자라 레지온 14. 그로스 부다페스트 레지온 15. 그로스 포메라니안 레지온 16. 그로스 마소비안 레지온 17. 루 블린 레지온 18. 실레지안 - 오폴 레지온

각 레지온의 코드

GSBRLRSVBAHT
GBSZTZGVTSNK
TJGBUGVMGMSSO

교통

도이치 연방은 수많은 자치국과 연결되어있는 특성으로 인해 상당히 방대한 철도망과 교통체계가 존재한다. 도이치 연방의 시내버스부터 알아보자면 포스트버스, 플릭스버스등이 있으며, 그 이외의 버스사로는 도이치 버스사가 있다. 그리고 도이치 연방의 지하철은 u-bahn, s-bahn과 Ausland-bahn 등이 있다. 항공사로는 국영항공사인 도이치 항공과 그 이외의 항공사인 콘도르 항공, 도이치 윙스, Ausland-Wings, 루프트 한자등이 있다. 그리고 교통망이라면 두가지로 나눌수 있는데 하나는 물류 운송 체계인 LTS와 분데스 아우토 반등의 고속 도로등이 존재하며, 철도망으로는 도이치 철도 등이 존재한다

경제

도이치 연방은 전성기때부터 높은 자본력과 기술력, 교통망, 상당한 노동력 등으로 매우 강성한 국가중 하나이다. 도이치 연방의 본토와 오스트리아는 생산, 물류 특구이고 그 이외 몇몇 국가들은 노동력을 기반으로한 1차 산업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다. 주요적으로 분포된 산업은 공업(경공업,중공업 둘다 수요가 큰편.),건설업(중동지방의 건설지원(한국과 함께)등으로 공업 다음으로 수요가 크다.)이 있다. 또한,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항공기,자동차,군수물자,생활 공산품 등이다. 주요적인 기업으로는 반도체에선 국영기업으로 도이치 일렉트로니시(반도체 제조,전자제품 제조,통신업)이 있고, 항공기는 에어버스(독일 지사),자동차는 알다시피 벤츠,BMW,폴크스바겐 이 있으며, 군수물자는 주로 헤클러 운트 코흐나 크라우스 마파이 베그만, 발터 포이어 바펜즈사 등이 있다. 그리고 생활 공산품은 공구하면 알만한 보쉬사와 색연필이나 사인펜으로 유명한 파버카스텔,스테들러, 세제나 청소제품으로 유명한 헨켈, 제약으로 유명한 바이엘 등이 있다. 무역량은 세계 3위로, 주요 수출품은 경공업을 통한 생활 공산품이나, 석탄,셰일등의 광물이나 중공업을 통한 중(重)공산품이 있다

사회

치안

도이치 연방의 치안은 한국다음으로 우수한 편인데, 그이유는 투철한 신고 정신,준법정신 그리고 애국심이라는 소프트 웨어와 체계적이고 강력한 경찰이라는 하드웨어가 합쳐지며 상당히 좋은 치안력을 자랑하게되었다. 도이치 연방의 치안은 법무부 산하 연방 경찰청에서 관리하는데, 그도 놀라울것이, 대부분의 경찰병력이 정예화되어있다. 왜냐하면 도이치 연방 국경 수비대가 연방 경찰청의 전신이기때문이다. 그 덕분에 역사적으로 많은 경력을 쌓아오며 정예화되었다. 현재 연방 경찰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사법경찰(국민경찰) 통상적인 민주주의국가의 경찰과 권한이 비슷한데 주로 경범죄자에 대한 조사,체포,벌금안 작성등이 주업무이다. 물론 중범죄를 수사하는 경우도 간혹 있긴 하지만 그런경우는 주로 형사들이 맡는다. 2.특수경찰(전투경찰) 주로 시위나 폭동에 대한 제압,체포,해산등이 주 업무이다. 그들은 주로 곤봉으로 무장하며, 때로는 물 스프레이(일시적으로 눈을 따갑게 함)등으로 무장한다. 3.무장경찰 주로 테러나 인질극등의 중(重)범죄자에 대한 사살,체포,인질구출,폭탄해체,조사,사이버 수사 등이 주 업무로 매우 많은 업무량을 지님과 동시에 매우 숙련되어있다. 주로 권총으로 무장하며 때로는 소총이나 기관단총등으로 무장한다.

교육

설정상 교육은 킨더 가르텐에서 시작해 킨더 가르텐 이수기간 말에는 진로 탐색 기간이라하여 어떠한 학교를 진학할것이며, 자신의 진로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일종의 방학과 비슷한 과정을 수료하고, 김나지움은 우리나라로 보면 외국어 중학교라 보면 되고, 상급과정을 수료한후에는 국가 교육능력 표준 시험을 통하여(일종의 수능으로 보면된다)전국의 모든 대학교를 대상으로 진학신청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레알슐레나 하웁트 슐레는 일종의 특성화 중학교로 보면되고, 이후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전문 고등학교나, 직업 고등학교로 진학할수 있으며, 레알슐레나 하웁트 슐레를 수료하고 바로 취업을 하거나, 전문 대학교로 진학할수 있다. 이는 다른 자치국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군사

도이칠란트 연방군은 상당히 크고 과학화, 기갑화되어있다. 주 원인으로는 냉전의 전개로 인한 공산화 위협과 미국의 지원등으로 체계화 되고 잘 갖추어진 전력이 연방군을 강성하게 만들었는데 육군만 봐도 거의 미군을 방불케 하는 수준의 군대이다.

도이칠란트 연방군의 구조는 연방 육군(Bundes Landstreitkräfte), 연방 해군 (Bundes Marine), 연방 항공군 (Bundes Luftstreitkräfte)과 그 이외의 군대로 화력지원군(Deckungsgruppe) ,국경 수비군(Grenztruppen), 특수목적군(Fallschirmjäger) 등이 존재하며 병력만을 따진다면 1개 군당 평군 1,376,382명 정도의 병력이 존재하며 총 8,258,293명이 있다. 사실 3백만명정도는 상비군이고, 실제로는 예비군에 대부분이 몰려있다. 그 덕분에 약 3백만명이 상비군이라면 전쟁 발발시에는 5백만명을 포함해 징집령이 떨어질시 약 몇백만명의 예비군을 징집시킬수있다.

상비군들의 무기만 봐도 상당히 과학화,체계화,기갑화 되어있는데 이들은 미군무기부터 소련무기, 독일제 무기, 체코제 무기, 폴란드제 무기, 오스트리아제 무기등의 다양한 무기들을 제식 또는 실험용으로 채용하였는데 도이칠란트 연방의 본토방위군은 HK416A5를, 오스트리아 방위군은 AUGA3를, 체코와 슬로바키아 방위군은 CZ-805를, 베네룩스 방위군은 F2000/FAL을, 헝가리 방위군은 M16A3를 사용중이다. 그리고 기갑장비를 보자면 대부분이 레오파르트 2A4~2A7전차를 구매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차들이 레오파르트 계열의 전차들이다.(종종 T-72계열의 전차들도 보이는데 이는 일부부대 한정으로 몇대씩이 뽑혀있다. 주로 국경수비나 방어를 위해 사용한다.)그리고 자주포는 좀 애매하게 채용되어있는데 도이칠란트 본토방위군, 오스트리아 방위군 은 PZH2000 자주포를,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폴란드 방위군은 Shm Vz.85 DANA 차륜형 자주포를 채용중이다. 그리고 IFV와 대공포를 보자면 도이칠란트 본토방위군, 오스트리아, 폴란드 방위군은 Spz Puma와 게파드 자주대공포를 채용하고 있고,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방위군은 소련제 쉴카와 BMP-3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점은 이동식 ICBM 발사대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Rheinschild(라인쉴드)라고 한다.

그리고 해군 함정들은 조금 어설픈데, 212급 잠수함과 K130 또는 K131 브라운 슈바이크급 초계함 그리고 F122 브레멘급, F123 브란덴부르크급, F124 작센급, F125 바덴-뷔르템베르크급 으로 이루어진 호위함, LCI, LCM, LCU급 상륙정, 332급, 333급, 342급 소해함, 760 베스터발트급 수송함, 404 엘베급,702 베를린급 군수지원함 423식 오스트급 정찰/연구함 422식 훈련함이 있다

공군의 항공기는 메서슈미트와 신 융커스 사를 주축으로한 훈련기, 전투기등의 구성과 유로버스의 수송헬기, 전투헬기등의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추후 서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