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안 왕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6번째 줄: 6번째 줄:
 
||<-4><:><#04B431>'''{{{#white 국장}}}''' ||
 
||<-4><:><#04B431>'''{{{#white 국장}}}''' ||
 
||||<width=35%><bgcolor=#01DF3A><:>{{{#white '''국호'''}}}||<-2><width=65%> 올 리 비 안 왕 국 [br] O reino de Olivian ||
 
||||<width=35%><bgcolor=#01DF3A><:>{{{#white '''국호'''}}}||<-2><width=65%> 올 리 비 안 왕 국 [br] O reino de Olivian ||
||<bgcolor=#01DF3A><|4><:>{{{#white '''상징'''}}}||<width=25%><bgcolor=#01DF3A><:>{{{#white '''국가'''}}}||<-2> 올리비안에 자유를! ||
+
||<bgcolor=#01DF3A><|4><:>{{{#white '''상징'''}}}||<width=25%><bgcolor=#01DF3A><:>{{{#white '''국가'''}}}||<-2> 올리비안에 자유와 평화를! ||
 
||<bgcolor=#01DF3A><:>{{{#white '''국화'''}}}||<-2> 라일락 ||
 
||<bgcolor=#01DF3A><:>{{{#white '''국화'''}}}||<-2> 라일락 ||
 
||<bgcolor=#01DF3A><:>{{{#white '''국조'''}}}||<-2> 홍부리황새 ||
 
||<bgcolor=#01DF3A><:>{{{#white '''국조'''}}}||<-2> 홍부리황새 ||
43번째 줄: 43번째 줄:
 
올리비안 대왕국 만세!
 
올리비안 대왕국 만세!
 
올리비안 대왕전하 만세!
 
올리비안 대왕전하 만세!
 
  
 
2절  
 
2절  
59번째 줄: 58번째 줄:
 
올리비안 대왕국 만세!
 
올리비안 대왕국 만세!
 
올리비안 대왕전하 만세!
 
올리비안 대왕전하 만세!
 +
 +
 +
 +
 +
 +
 +
----------------------------------------------------
 +
 +
ㅁ 올리비안 왕국
 +
 +
2018년 8월, MCAC에서 '오이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가상국가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재 국명은 '올리비안'으로 개칭되었다.
 +
 +
 +
 +
||<bgcolor=#04B431><:>{{{#white '''역 사'''}}}||<-2>
 +
 +
AC 1502년, 원주민들이 살던 *오이리 제도에 포르투갈인들이 발을 들이면서 오이리제도는 180도로 달라졌다. 농경사회가 주를 이루던 부족 소국가는 유럽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동시에 연결하는 남대서양 가운데에 위치한 오이리제도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포르투갈군의 군사적 요충지로 발전했고 원주민들과 포르투갈인들은 서로 협력하며 200년간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다. 원주민들은 신문물과 새로운 포르투갈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들은 포르투갈로부터 생필품 및 여러 도서들을 얻는대신 포르투갈군에게 군량을 지급했다.
 +
 +
그러나 전염병의 발생으로 포르투갈군은 긴급히 본국으로 철수했고 1711년, 전염병이 가고 영국군이 들어오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인과 다르게 영국인은 오이리제도의 원주민들에 적대적이었다. 영국군은 포르투갈군이 건설해놓았던 군사기지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강제로 노동시켰고 오이리제도의 이점을 잘 알고 있던 영국은 급기야 원주민들을 기존의 마을에서 해안가로 몰아내 원주민보호라는 명목으로 수용소와 다름없는 곳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많은 영국인들이 섬으로 들어오면서 점차 섬은 쓰레기로 넘쳐났고 해안가에 부족한 식수로 인해 매년 평균 50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사망했다. 이는 2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자체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배워온 군사기술과 문물을 활용하여 오이리 독립군을 조직했다.
 +
 +
이때 포르투갈은 영국이 무단으로 자국의 땅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이 불만을 품고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이에 포르투갈은 몰래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을 지원하게 되는데 포르투갈인에 우호적이던 오이리 제도 사람들이 영국군을 성공적으로 몰아낼 경우 포르투갈군을 다시 환영하고 포르투갈에 충성을 다할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714년 5월, 영국군의 일부가 해적소탕을 위해 카르보니아 제도로 출발했을때 당시 독립군의 대장이던 '알 포테데르'는 영국군을 기습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독립군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더군다나 군사기지 안으로 들어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포르투갈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했고 포르투갈은 그들에게 몰래 대포와 포탄을 지원했다. 대포 앞에 성벽은 무용지물이었다. 영국군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카르보니아 출격으로 절반정도가 자리에 없는 상태에서 독립군의 강렬한 공격으로 영국군은 항복했다.
 +
 +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은 강한 분노를 느끼고 프리깃함 6척을 출격시켰으나 앤 여왕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작전은 취소되었다. 이후 포르투갈군이 다시 상륙했는데 독립군으로부터 환영받았지만 오히려 일반 오이리 사람들은 포르투갈을 환영하지 않았다. 포르투갈도 영국과 다름없는 유럽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15년, 포르투갈은 결국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군량도 받지 않기로 했다. 대신 포르투갈은 군사기지가 해당하는 땅은 포르투갈땅임을 분명히 했다.
 +
 +
이후로 146년간 오이리 제도는 사실상 유럽과 다른 지역 국가들로부터 포르투갈 땅임을 인정받았다. 독립군은 경비대로 바뀌어 치안을 담당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원주민이 아닌 포르투갈에 속한 오이리 자치시민으로써 살게 된다. 오이리 제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포르투갈풍 주택이 즐비했고 길은 깨끗한 조약돌길로 깔렸으며 2개의 항구가 새로 들어서면서 남대서양 인근 국가들 중에서 가장 발전했다.
 +
 +
그러던 1861년, 유럽의 정세가 복잡한 가운데 브라질이 독립을 앞두고 미국이 남북전쟁을 시작하면서 오이리 제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포르투갈군의 보호를 받던 오이리 제도의 시민들은 포르투갈이 철수하게 될때 민족의 존속이 위태해질 것을 염려하여 당시 오이리 민족의 전통을 고수하는 동시에 신문물을 꾸준히 받아들이면서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세력 (온건적 근대화파)의 지도자인 '엘니치 하파시'의 주도 아래 오이리 의회 설립을 추진했으며 포르투갈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결성하고자 하는 독립의 열망, 의지가 넘쳐났다. 포르투갈은 1862년, 오이리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4월 14일, 오이리 의회가 개원, 헌법이 동시에 제정, 의회가 '엘니치 하파시'를 1대 총리로 선출하면서 오이리 공화국이 선포된다.
 +
 +
그러나 1868년, 왕정파가 힘을 받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합병 제국을 선포,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등 제국주의가 만연하자 자국내에서 우리도 세계적으로 지위를 높이기 위해 유럽과 같이 왕정을 선포해야 하지 않느냐하는 의견이 등장했고 의회에 입헌군주제안을 상정, 통과되면서 오이리공화국에 1대 국왕이 등장하는데 총리가 국왕으로 즉위, 새로운 총리가 재선출되어 왕과 총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지금으로 보면 영국과 일본 등과 같은 입헌군주국으로 발전한다. 당시 국왕은 행정부 수장, 총리는 입법부 수장으로써 서로 견제하면서 통치하는 형태였다.
 +
 +
그러던 1901년, 미국과 브라질, 영국이 다시끔 오이리 제도의 전략적, 교통적 요충지로써의 이점을 알아보고 군사적 동원을 통해 자국으로 무력으로라도 편입시키기 위한 준비를 각자 가하고 있던 와중 3대 국왕 '코스타 하파시'는 포르투갈과의 왕실결혼을 발표한다. 200년간 우정을 서로 쌓아온 포르투갈과의  ( 작 성 중 )

2019년 5월 18일 (토) 00:17 판

||

<bgcolor=#01A9DB><-4><:>{{{#white < 올리비안 왕국 >{{{+2
오이 왕국.jpg
국기
제목 없는 디자인 (6).jpg
국장
국호올 리 비 안 왕 국
O reino de Olivian
상징국가올리비안에 자유와 평화를!
국화라일락
국조홍부리황새
표어조국을 지키는 기쁨
자연환경면적(영토)24,528km²
인문환경인구5,982,194명
인구밀도244명/km2
공용 언어포르투갈어, 영어
정치국체입헌군주제
정부형태의원내각제
국왕오이리
총리천호역
경제GDP$154,496(백만)
1인당 GDP$25,826
GDP(PPP)$0000
1인당 GDP(PPP)$0000
공식 화폐올리비안 달러(OVD)
단위
법정연호오이리 342년
시간대UTC -2
국가내용

1절

희망의 대지를 찾아
자유와 평화를 찾아
드넓은 대양 한가운데
우리의 깃발을 꽃았도다

독립을 향한 열망과
평화를 위한 쟁투로
아름다운 이 대지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도다

올리비안 대왕국 만세!
올리비안 대왕전하 만세!

2절

침략자들을 무찔러
우리의 자유를 쟁취하자
드넓은 대양 한가운데
우리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선조들의 훌륭한 지혜와
강인한 우리들의 힘으로
아름다운 이 대지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도다

올리비안 대왕국 만세!
올리비안 대왕전하 만세!


ㅁ 올리비안 왕국

2018년 8월, MCAC에서 '오이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가상국가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재 국명은 '올리비안'으로 개칭되었다.

역 사

AC 1502년, 원주민들이 살던 *오이리 제도에 포르투갈인들이 발을 들이면서 오이리제도는 180도로 달라졌다. 농경사회가 주를 이루던 부족 소국가는 유럽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동시에 연결하는 남대서양 가운데에 위치한 오이리제도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포르투갈군의 군사적 요충지로 발전했고 원주민들과 포르투갈인들은 서로 협력하며 200년간 비교적 평화롭게 살았다. 원주민들은 신문물과 새로운 포르투갈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그들은 포르투갈로부터 생필품 및 여러 도서들을 얻는대신 포르투갈군에게 군량을 지급했다.

그러나 전염병의 발생으로 포르투갈군은 긴급히 본국으로 철수했고 1711년, 전염병이 가고 영국군이 들어오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인과 다르게 영국인은 오이리제도의 원주민들에 적대적이었다. 영국군은 포르투갈군이 건설해놓았던 군사기지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강제로 노동시켰고 오이리제도의 이점을 잘 알고 있던 영국은 급기야 원주민들을 기존의 마을에서 해안가로 몰아내 원주민보호라는 명목으로 수용소와 다름없는 곳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많은 영국인들이 섬으로 들어오면서 점차 섬은 쓰레기로 넘쳐났고 해안가에 부족한 식수로 인해 매년 평균 50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사망했다. 이는 2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자체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배워온 군사기술과 문물을 활용하여 오이리 독립군을 조직했다.

이때 포르투갈은 영국이 무단으로 자국의 땅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이 불만을 품고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이에 포르투갈은 몰래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을 지원하게 되는데 포르투갈인에 우호적이던 오이리 제도 사람들이 영국군을 성공적으로 몰아낼 경우 포르투갈군을 다시 환영하고 포르투갈에 충성을 다할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714년 5월, 영국군의 일부가 해적소탕을 위해 카르보니아 제도로 출발했을때 당시 독립군의 대장이던 '알 포테데르'는 영국군을 기습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독립군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더군다나 군사기지 안으로 들어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포르투갈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했고 포르투갈은 그들에게 몰래 대포와 포탄을 지원했다. 대포 앞에 성벽은 무용지물이었다. 영국군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카르보니아 출격으로 절반정도가 자리에 없는 상태에서 독립군의 강렬한 공격으로 영국군은 항복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은 강한 분노를 느끼고 프리깃함 6척을 출격시켰으나 앤 여왕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작전은 취소되었다. 이후 포르투갈군이 다시 상륙했는데 독립군으로부터 환영받았지만 오히려 일반 오이리 사람들은 포르투갈을 환영하지 않았다. 포르투갈도 영국과 다름없는 유럽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15년, 포르투갈은 결국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군량도 받지 않기로 했다. 대신 포르투갈은 군사기지가 해당하는 땅은 포르투갈땅임을 분명히 했다.

이후로 146년간 오이리 제도는 사실상 유럽과 다른 지역 국가들로부터 포르투갈 땅임을 인정받았다. 독립군은 경비대로 바뀌어 치안을 담당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원주민이 아닌 포르투갈에 속한 오이리 자치시민으로써 살게 된다. 오이리 제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포르투갈풍 주택이 즐비했고 길은 깨끗한 조약돌길로 깔렸으며 2개의 항구가 새로 들어서면서 남대서양 인근 국가들 중에서 가장 발전했다.

그러던 1861년, 유럽의 정세가 복잡한 가운데 브라질이 독립을 앞두고 미국이 남북전쟁을 시작하면서 오이리 제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포르투갈군의 보호를 받던 오이리 제도의 시민들은 포르투갈이 철수하게 될때 민족의 존속이 위태해질 것을 염려하여 당시 오이리 민족의 전통을 고수하는 동시에 신문물을 꾸준히 받아들이면서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세력 (온건적 근대화파)의 지도자인 '엘니치 하파시'의 주도 아래 오이리 의회 설립을 추진했으며 포르투갈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결성하고자 하는 독립의 열망, 의지가 넘쳐났다. 포르투갈은 1862년, 오이리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4월 14일, 오이리 의회가 개원, 헌법이 동시에 제정, 의회가 '엘니치 하파시'를 1대 총리로 선출하면서 오이리 공화국이 선포된다.

그러나 1868년, 왕정파가 힘을 받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합병 제국을 선포,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등 제국주의가 만연하자 자국내에서 우리도 세계적으로 지위를 높이기 위해 유럽과 같이 왕정을 선포해야 하지 않느냐하는 의견이 등장했고 의회에 입헌군주제안을 상정, 통과되면서 오이리공화국에 1대 국왕이 등장하는데 총리가 국왕으로 즉위, 새로운 총리가 재선출되어 왕과 총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지금으로 보면 영국과 일본 등과 같은 입헌군주국으로 발전한다. 당시 국왕은 행정부 수장, 총리는 입법부 수장으로써 서로 견제하면서 통치하는 형태였다.

그러던 1901년, 미국과 브라질, 영국이 다시끔 오이리 제도의 전략적, 교통적 요충지로써의 이점을 알아보고 군사적 동원을 통해 자국으로 무력으로라도 편입시키기 위한 준비를 각자 가하고 있던 와중 3대 국왕 '코스타 하파시'는 포르투갈과의 왕실결혼을 발표한다. 200년간 우정을 서로 쌓아온 포르투갈과의 ( 작 성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