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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년부터 여왕국에서 국호를 바꾼 [[야마타이 (나루히토)|야마타이국]]의 영향권은 야마타이 왕권으로 이행되고 야마타이 왕권은 동쪽으로 끝임없이 팽창해 야마토까지 이르게 되는데 후일 야마토국은 지리적 이점과 상공업의 발달, 군사력 확충으로 국력을 비축해서 야마타이 왕권의 주도권을 야마타이국으로부터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어 야마토국이 야마타이국을 합병함으로써 야마타이국의 헤게모니는 완전히 와해되버리고 본격적인 [[야마토 (나루히토)|야마토]]의 야마토 왕권이 일본을 섭렵하게 된다. 이때가 기원후 268년으로 뒤이어 야마토국은 야마타이국의 헤게모니를 해체시키는데 도움을 준 구노국까지 정벌하여 확고한 통제권을 야마토 왕권에서 구사하기 시작한다. 곧 이는 왕권의 강화로 이어져 훗날 중앙집권국가 성립에 기틀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준다. 한편 제정일치사회도 붕괴되었는데 제정일치사회였던 야마타이국이 몰락하면서 시작된 신권의 약화와 야마토 왕권의 성장이 주요 원인이었으며 야요이 시대 말기에는 제정분리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행된다. 또한 야마타이국은 야요이 문화의 중심지이었던 곳으로 그들의 몰락은 곧 야요이 문화의 쇠퇴를 의미했다. 반면 야마토국은 야요이 문화를 수용하기는 했으나 야요이 문화를 전파받는 데에 있어서는 기타규슈보다 더딘 감과 전파량의 차이가 있었고 이는 야요이 문화에서 필요한 것만 받아들여 독창적인 일본 만의 문화를 형성하는 요건을 충족시키게 되는 결과로 직결되어 야요이 문화가 몰락하면서 남긴 공백을 야마토국의 독자적인 문화인 화풍 문화로 채우게 된다. 따라서 야마토 왕권의 확립은 고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야요이 문화의 쇠락과 화풍 문화의 부상, 그리고 이전보다 강해진 중앙정부와 왕의 권한, 제정분리사회의 시작은 야요이 시대의 문을 닫게 하고 야마토국의 세기인 [[고훈 시대 (나루히토)|고훈 시대]]를 일본 열도에 개막시키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일본 열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를 기타규슈에서 긴키로 옮기게 된다.
 
기원전 6년부터 여왕국에서 국호를 바꾼 [[야마타이 (나루히토)|야마타이국]]의 영향권은 야마타이 왕권으로 이행되고 야마타이 왕권은 동쪽으로 끝임없이 팽창해 야마토까지 이르게 되는데 후일 야마토국은 지리적 이점과 상공업의 발달, 군사력 확충으로 국력을 비축해서 야마타이 왕권의 주도권을 야마타이국으로부터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어 야마토국이 야마타이국을 합병함으로써 야마타이국의 헤게모니는 완전히 와해되버리고 본격적인 [[야마토 (나루히토)|야마토]]의 야마토 왕권이 일본을 섭렵하게 된다. 이때가 기원후 268년으로 뒤이어 야마토국은 야마타이국의 헤게모니를 해체시키는데 도움을 준 구노국까지 정벌하여 확고한 통제권을 야마토 왕권에서 구사하기 시작한다. 곧 이는 왕권의 강화로 이어져 훗날 중앙집권국가 성립에 기틀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준다. 한편 제정일치사회도 붕괴되었는데 제정일치사회였던 야마타이국이 몰락하면서 시작된 신권의 약화와 야마토 왕권의 성장이 주요 원인이었으며 야요이 시대 말기에는 제정분리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행된다. 또한 야마타이국은 야요이 문화의 중심지이었던 곳으로 그들의 몰락은 곧 야요이 문화의 쇠퇴를 의미했다. 반면 야마토국은 야요이 문화를 수용하기는 했으나 야요이 문화를 전파받는 데에 있어서는 기타규슈보다 더딘 감과 전파량의 차이가 있었고 이는 야요이 문화에서 필요한 것만 받아들여 독창적인 일본 만의 문화를 형성하는 요건을 충족시키게 되는 결과로 직결되어 야요이 문화가 몰락하면서 남긴 공백을 야마토국의 독자적인 문화인 화풍 문화로 채우게 된다. 따라서 야마토 왕권의 확립은 고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야요이 문화의 쇠락과 화풍 문화의 부상, 그리고 이전보다 강해진 중앙정부와 왕의 권한, 제정분리사회의 시작은 야요이 시대의 문을 닫게 하고 야마토국의 세기인 [[고훈 시대 (나루히토)|고훈 시대]]를 일본 열도에 개막시키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일본 열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를 기타규슈에서 긴키로 옮기게 된다.
 
==야요이 문화==
 
==야요이 문화==
===계급 사회===
+
===계급===
야요이 시대에는 나라의 꼴을 갖춘 국가들이 늘어나면서 국가 간 민간교류도 같이 늘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간 매매차익을 교묘하게 이용해 부를 챙기는 '상인'들도 야요이 시대에 등장했다. 또한 야요이 시대에는 전쟁이 일상화되면서 '군인'들도 사회에 있어 큰 작용을 하게 되는 세력으로 발돋움한다. 그리고 기존 농업 종사자들은 자신의 농작지에서 농사를 하는 자영농과 다른 사람의 농작지를 빌려 경작을 행하는 소작농으로 분화됐다. 자영농, 소작농, 상인, 군인과 같은 계층 위에 군림하는 지배계급들도 야요이 시대에 등장했다. 그들은 부락의 촌장이나 나라의 왕 및 그 일가·측근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나라를 통치 함에 있어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는 신관 세력들과 결탁하여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통치정당성을 확립하는 길이었다. 지배계급에게 정당성을 부여한 신관 세력들이 얻은 대가는 지배계급의 비호였는데 이를 통해 그들은 사회 속 강력한 이권을 손에 넣는다. 야요이 시대의 계급 사회는 이렇게 점차 성립되어 간 것이었다.
 
 
===농업===
 
===농업===
 
===상공업===
 
===상공업===

2020년 10월 2일 (금) 21:33 판

개요

아요이 시대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268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청동기 시대이자 철기 시대다.

역사

야요이 시대 당간, 쌀을 수확하는 사람들의 모습

기원전 5세기, 조선 반도에서 건너 온 야요이인들이 선진적인 농경술과 금속 도구, 청동기 제구, 등의 선진 문물을 규슈에 전파하고 또 대다수의 야요이인들이 규슈에 정착함으로서 야요이 시대가 시작된다. 이후 규슈에 전파된 선진문물들은 이어서 일본 곧곧으로 확산됐으며 이때 비로소 일본 열도 전역이 철기 시대에 입성한다. 철기 시대에 오며, 조몬 시대에 형성됐던 부락들은 개개의 농경지를 소유하기 시작하는데 이시기 더 많은 농작지를 얻기 위해 시작된 부락 간 충돌은 곧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으로 성격이 변화했으며 따라서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야요이 시대에 일어났다. 부락은 전쟁 과정에서 통합되었고 부락의 족장들은 군장으로써 통합된 부락으로 수립된 성읍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직후 야요이 문화에 의해 성립된 100여개의 국가들은 야요이 시대 동안 진행된 수많은 전쟁들로 인해서 30여개의 나라들로 통합되게 된다.

야마타이국의 모습에 관한 추정화(畵)

100여개의 국가들이 통합되는 순간들 속에서 수많은 전쟁 끝에 다른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규슈 북부의 여왕국(女王國)이 기타규슈 지역에서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들이 여러 국가들 중 가장 빠른 발전을 이룩한 까닭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군주 그 자체가 신녀임으로써 나라가 제정일치사회였음을 보여주었고 제정일치의 강력한 통치 정당성은 여왕국이 기타규슈를 평정하는데에 있어 큰 구심점이 돼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발전의 힘은 나라의 배경과 철제무기의 적극적인 사용이었다. 본디 기타규슈는 조선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도래인들이 많이 이주해온 곳이었고 이를 배경으로 기타규슈는 야요이 문화의 영향을 그것도 직접적으로 받은 미나미규슈를 비롯한 다른 지역 중에서도 가장 성대한 번영을 구가한다. 여왕국은 바로 이 고도의 영화를 누리던 기타규슈에 자리 잡은 나라였으며 게다가 철제무기 생산의 중심지인 '고가'와 '후쿠쓰'를 선제적으로 복속하여 수많은 철제무기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던 환경까지 갖춤에 따라 국가 운영에 있어서는 다른 국가보다 우월한 원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탄탄한 구심점과 높은 원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국력으로 기타규슈를 완전히 장악한 여왕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또한 외교로도 여왕국은 성과를 보여 기원전 104년에 한나라로부터 '동위왜왕'이라는 직위를 하사받으며 조공 관계를 맺음으로써 중화 질서에 합류한다. 이후 향상된 국력으로 실시된 여왕국의 정복 전쟁은 여왕국의 영토를 기타규슈 너머까지 확장시켰고 기원전 13년까지 오늘날의 야마구치현 일대까지 여왕국은 영토를 넓힌다.

야요이 시대에 진행된 전쟁의 모습

기원전 6년부터 여왕국에서 국호를 바꾼 야마타이국의 영향권은 야마타이 왕권으로 이행되고 야마타이 왕권은 동쪽으로 끝임없이 팽창해 야마토까지 이르게 되는데 후일 야마토국은 지리적 이점과 상공업의 발달, 군사력 확충으로 국력을 비축해서 야마타이 왕권의 주도권을 야마타이국으로부터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어 야마토국이 야마타이국을 합병함으로써 야마타이국의 헤게모니는 완전히 와해되버리고 본격적인 야마토의 야마토 왕권이 일본을 섭렵하게 된다. 이때가 기원후 268년으로 뒤이어 야마토국은 야마타이국의 헤게모니를 해체시키는데 도움을 준 구노국까지 정벌하여 확고한 통제권을 야마토 왕권에서 구사하기 시작한다. 곧 이는 왕권의 강화로 이어져 훗날 중앙집권국가 성립에 기틀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준다. 한편 제정일치사회도 붕괴되었는데 제정일치사회였던 야마타이국이 몰락하면서 시작된 신권의 약화와 야마토 왕권의 성장이 주요 원인이었으며 야요이 시대 말기에는 제정분리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행된다. 또한 야마타이국은 야요이 문화의 중심지이었던 곳으로 그들의 몰락은 곧 야요이 문화의 쇠퇴를 의미했다. 반면 야마토국은 야요이 문화를 수용하기는 했으나 야요이 문화를 전파받는 데에 있어서는 기타규슈보다 더딘 감과 전파량의 차이가 있었고 이는 야요이 문화에서 필요한 것만 받아들여 독창적인 일본 만의 문화를 형성하는 요건을 충족시키게 되는 결과로 직결되어 야요이 문화가 몰락하면서 남긴 공백을 야마토국의 독자적인 문화인 화풍 문화로 채우게 된다. 따라서 야마토 왕권의 확립은 고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야요이 문화의 쇠락과 화풍 문화의 부상, 그리고 이전보다 강해진 중앙정부와 왕의 권한, 제정분리사회의 시작은 야요이 시대의 문을 닫게 하고 야마토국의 세기인 고훈 시대를 일본 열도에 개막시키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일본 열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를 기타규슈에서 긴키로 옮기게 된다.

야요이 문화

계급

농업

상공업

수렵·채집

어획

도구

석기 도구

금속 도구

야요이 시대의 제구와 청동기의 모습

야요이 시대는 청동기와 철기가 혼용되던 시대로 야요이인들에 의해 전파된 금속 기술이 배경으로써 작용했다. 야요이 문화의 초반에 통용되던 청동기는 주로 무기보다는 제구의 쓰임새를 가지었고 청동 거울인 '동탁'이 대표적인 청동 제구다. 한편 철기가 발달하기 이전, 즉 야요이 시대 초반에는 무기로도 청동기는 쓰이기도 하여 야요이 시대 초반에 청동을 통해 만든 무기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기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된 야요이 시대 중반부터는 청동보다 더 강력한 강철을 사용한 검, 창, 도끼가 전쟁 수단으로 사용됐으며 이런 철제무기를 일부 국가들이 적극 사용해 다른 국가들을 효과적으로 무너트렸는데 이런 나라들 중 대표적인 나라가 야마타이국과 야마토국이었다. 특히 야마타이국은 국내에 질 좋은 철광석을 풍부하게 지닌 철광산이 많았고 철기 제조에 박학했던 야요이인들이 지리상 가장 많이 이주했던 지역으로써 일본의 철제 수공업을 선도하였다. 가히 일본 철기 주조의 종주국으로 불리우게 된 야마타이는 과연 야요이인들로부터 전수받은 철기 주조 기술을 응용해서 기존 철기 도구보다 더욱 뛰어난 여러 철제 무기와 철제 농기구들을 개발하였고 분명히 이는 다른 나라들보다 앞선 발전이었다. 그러나 야요이 시대 중반까지 성장만 거듭했던 야마타이의 철기 주조 능력이 점차 태보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야마타이 왕권이 출범하면서 찾아온 평화가 야마타이국의 철제 무기 수요의 감소를 일으키자 야마타이 철제 수공업의 종사자들이 평화에 젖어 수익성이 낮아진 야마타이를 대신해 에미시의 지속적인 침공으로 평화라는 단어는 찾기 힘들었던 야마토국으로 이동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야마타이국의 철제 무기는 도태되는데 야마토국은 나날히 새롭고 향상된 철제 무기를 사용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야마타이국이 야마토국과의 향후 전쟁에서 패망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아무튼 야마타이에서 야마토까지 이르는데 있어 철제 무기는 지속해서 새롭고 향상되어가며 야요이 시대 중반 시절에 사용되던 강철검의 칼날이 날카롭지 않고 쉽게 부려졌던 점에 비하여 야요이 시대 후기 시절의 강철검은 이보다 훨씬 날카롭고 강해졌다. 후대인 오늘의 역사학자들은 야요이 시대 중반의 강철검을 '(고안중)'라 명명하고 야요이 시대 후반의 강철검을 '(고안중2)'이라 명명하였으며 '(고안중2)'의 강철검은 훗날 고훈 시대 강철검의 모태가 될 정도로 성능이 강했으리라 추정돼 오고 있다. (고안중 2)으로 대표되는 야요이 문화 때 생성된 금속 도구들은 시간이 좀 지나 고훈 시대에 입성하며 2세대 도래인들이 가지고 온 기술들과 융합하여 야요이 시절 금속 도구와는 성능부터 외형까지 판이하게 달라지게 되고 이로써 야요이 문화 시기 만들어진 야요이 세대의 금속 도구들은 대부분 맥이 끊긴다.

매장 풍습

야마토 민족

관련 문서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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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일본의 역사 (나루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