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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야요이 문화 (나루히토) 시절, 제구와 청동기의 모습.png|500px|섬네일|가운데|야요이 시대의 제구와 청동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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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4일 (일) 00:22 판

개요

아요이 시대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268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청동기 시대이자 철기 시대다.

역사

야요이 시대 당간, 쌀을 수확하는 사람들의 모습

기원전 10세기, 조선 반도에서 건너 온 도래인인 야요이인들이 선진적인 농경술과 금속 도구, 청동기 제구, 등의 선진 문물을 규슈에 전파하고 또 대다수의 야요이인들이 규슈에 정착함으로서 야요이 시대가 시작된다. 이후 규슈에 전파된 선진문물들은 이어서 세토내해를 통해 나라 분지로 대표되는 긴키를 비롯한 동부 지방으로 꾸준히 전파되다가 일본 곧곧으로 확산됐으며 이때 비로소 일본 열도 전역이 철기 시대에 입성한다. 여기서 일본에 널리 알려진 농경술과 금속구로 대표되는 선진문물을 기반으로 하는 대륙의 문화는 여러 변혁을 일본에 안겨다 준다. 조몬 시대에 형성됐던 부락들은 큰 노동력을 요구하는 농업의 특성상 규모가 확장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커져버린 집단을 통제하기 위하여 확충된 마을의 행정조직은 훗날 등장하는 국가들의 행정력이 된다. 또한 보급된 금속기는 농기구로써, 제구로써, 무기로써 사용되며 산업의 발전을 돕고 신분제 성립에 영향을 미쳤으며 전쟁을 촉진시켰다.

야마타이국의 모습에 관한 추정화(畵)

농경시대가 도래하면서 부락들은 자연스럽게 농경지들을 개간하여 소유하기 시작하는데 이시기 더 많은 농작지와 농업 경제에 있어 아주 중요한 사회기반시설인 관개시설을 얻기 위해 시작된 부락 간 충돌은 소규모 부락들을 통합시켰고 곧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으로 성격이 변화하며 따라서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야요이 시대에 일어났다. 소규모 부락을 합병한 부락은 전쟁 과정에서 또다시 통합되었고 부락의 족장들이나 유력 신앙의 신관들은 군장으로써 통합된 부락으로 수립된 성읍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직후 야요이 문화에 의해 성립된 100여개의 국가들은 야요이 시대 동안 진행된 수많은 전쟁들로 인해서 히노쿠니(火の国), 키비노쿠니(吉備国), 이즈모노쿠니(出雲国), 코니소쿠니(越国), 히타카미노쿠니(日高見国), 등의 30여개에 나라들로 통합되게 된다. 100여개의 국가들이 통합되는 순간들 속에서 수많은 전쟁 끝에 다른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규슈 북부의 여왕국(女王國)이 기타규슈 지역에서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들이 여러 국가들 중 가장 빠른 발전을 이룩한 까닭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군주 그 자체가 신녀임으로써 야요이인들을 군장으로 모신 다른 나라와는 달리 여왕국이 제정일치사회였음을 보여주었고 제정일치의 강력한 통치 정당성은 여왕국이 기타규슈를 평정하는데에 있어 큰 구심점이 돼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발전의 힘은 나라의 배경과 철제무기의 적극적인 사용이었다. 본디 기타규슈는 조선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도래인들이 많이 이주해온 곳이었고 이를 배경으로 기타규슈는 야요이 문화의 영향을 그것도 직접적으로 받은 미나미규슈를 비롯한 다른 지역 중에서도 가장 성대한 번영을 구가한다. 여왕국은 바로 이 고도의 영화를 누리던 기타규슈에 자리 잡은 나라였으며 게다가 철제무기 생산의 중심지인 '고가'와 '후쿠쓰'를 선제적으로 복속하여 수많은 철제무기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던 환경까지 갖춤에 따라 국가 운영에 있어서는 다른 국가보다 우월한 원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탄탄한 구심점과 높은 원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국력으로 기타규슈를 완전히 장악한 여왕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또한 외교로도 여왕국은 성과를 보여 57년에 한나라로부터 '왜노국왕'이라는 직위를 하사받으며 조공 관계를 맺음으로써 중화 질서에 합류한다. 이후 향상된 국력으로 실시된 여왕국의 정복 전쟁은 여왕국의 영토를 기타규슈 너머까지 확장시켰고 xx년까지 오늘날의 야마구치현 일대까지 여왕국은 영토를 넓힌다.

야요이 시대에 진행된 전쟁의 모습

기원전 3년부터 여왕국에서 국호를 바꾼 야마타이국의 영향권은 야마타이 왕권으로 이행되고 야마타이 왕권은 동쪽으로 끝임없이 팽창해 야마토까지 이르게 되는데 후일 야마토국은 지리적 이점과 상공업의 발달, 군사력 확충으로 국력을 비축해서 야마타이 왕권의 주도권을 야마타이국으로부터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이어 야마토국이 야마타이국을 합병함으로써 야마타이국의 헤게모니는 완전히 와해되버리고 본격적인 야마토의 야마토 왕권이 일본을 섭렵하게 된다. 이때가 기원후 268년으로 뒤이어 야마토국은 야마타이국의 헤게모니를 해체시키는데 도움을 준 구노국까지 정벌하여 확고한 통제권을 야마토 왕권에서 구사하기 시작한다. 곧 이는 왕권의 강화로 이어져 훗날 중앙집권국가 성립에 기틀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준다. 한편 제정일치사회도 붕괴되었는데 제정일치사회였던 야마타이국이 몰락하면서 시작된 신권의 약화와 야마토 왕권의 성장이 주요 원인이었으며 야요이 시대 말기에는 제정분리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행된다. 또한 야마타이국은 야요이 문화의 중심지이었던 곳으로 그들의 몰락은 곧 야요이 문화의 쇠퇴를 의미했다. 반면 야마토국은 야요이 문화를 수용하기는 했으나 야요이 문화를 전파받는 데에 있어서는 기타규슈보다 더딘 감과 전파량의 차이가 있었고 이는 야요이 문화에서 필요한 것만 받아들여 독창적인 일본 만의 문화를 형성하는 요건을 충족시키게 되는 결과로 직결되어 야요이 문화가 몰락하면서 남긴 공백을 야마토국의 독자적인 문화인 화풍 문화로 채우게 된다. 따라서 야마토 왕권의 확립은 고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기도 하였다. 대륙 문화와 연관이 짙은 야요이 문화의 쇠락과 독자적인 일본 화풍 문화의 부상, 그리고 이전보다 강해진 중앙정부와 왕의 권한, 제정분리사회의 시작은 야요이 시대의 문을 닫게 하고 야마토국의 세기인 고훈 시대를 일본 열도에 개막시키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일본 열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지를 기타규슈에서 긴키로 옮기게 된다.

야요이 문화

계급

농업

야요이 시대 당간, 쌀을 수확하는 사람들의 모습

상공업

수렵·채집

어획

도구

석기 도구

타제석기
마제석기

금속 도구

야요이 시대의 제구와 청동기의 모습

야요이 시대는 청동기와 철기가 혼용되던 시대로 야요이인들에 의해 전파된 금속 기술이 배경으로써 작용했다. 야요이 문화의 초반에 통용되던 청동기는 주로 무기보다는 제구의 쓰임새를 가지었고 청동 거울인 '동탁'이 대표적인 청동 제구다. 한편 철기가 발달하기 이전, 즉 야요이 시대 초반에는 무기로도 청동기는 쓰이기도 하여 야요이 시대 초반에 청동을 통해 만든 무기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기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된 야요이 시대 중반부터는 청동보다 더 강력한 강철을 사용한 검, 창, 도끼가 전쟁 수단으로 사용됐으며 이런 철제무기를 일부 국가들이 적극 사용해 다른 국가들을 효과적으로 무너트렸는데 이런 나라들 중 대표적인 나라가 야마타이국과 야마토국이었다. 특히 야마타이국은 국내에 질 좋은 철광석을 풍부하게 지닌 철광산이 많았고 철기 제조에 박학했던 야요이인들이 지리상 가장 많이 이주했던 지역으로써 일본의 철제 수공업을 선도하였다. 가히 일본 철기 주조의 종주국으로 불리우게 된 야마타이는 과연 야요이인들로부터 전수받은 철기 주조 기술을 응용해서 기존 철기 도구보다 더욱 뛰어난 여러 철제 무기와 철제 농기구들을 개발하였고 분명히 이는 다른 나라들보다 앞선 발전이었다. 그러나 야요이 시대 중반까지 성장만 거듭했던 야마타이의 철기 주조 능력이 점차 태보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야마타이 왕권이 출범하면서 찾아온 평화가 야마타이국의 철제 무기 수요의 감소를 일으키자 야마타이 철제 수공업의 종사자들이 평화에 젖어 수익성이 낮아진 야마타이를 대신해 에미시의 지속적인 침공으로 평화라는 단어는 찾기 힘들었던 야마토국으로 이동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야마타이국의 철제 무기는 도태되는데 야마토국은 나날히 새롭고 향상된 철제 무기를 사용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야마타이국이 야마토국과의 향후 전쟁에서 패망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아무튼 야마타이에서 야마토까지 이르는데 있어 철제 무기는 지속해서 새롭고 향상되어가며 야요이 시대 중반 시절에 사용되던 강철검의 칼날이 날카롭지 않고 쉽게 부려졌던 점에 비하여 야요이 시대 후기 시절의 강철검은 이보다 훨씬 날카롭고 강해졌다. 후대인 오늘의 역사학자들은 야요이 시대 중반의 강철검을 '(고안중)'라 명명하고 야요이 시대 후반의 강철검을 '(고안중2)'이라 명명하였으며 '(고안중2)'의 강철검은 훗날 고훈 시대 강철검의 모태가 될 정도로 성능이 강했으리라 추정돼 오고 있다. (고안중 2)으로 대표되는 야요이 문화 때 생성된 금속 도구들은 시간이 좀 지나 고훈 시대에 입성하며 2세대 도래인들이 가지고 온 기술들과 융합하여 야요이 시절 금속 도구와는 성능부터 외형까지 판이하게 달라지게 되고 이로써 야요이 문화 시기 만들어진 야요이 세대의 금속 도구들은 대부분 맥이 끊긴다.

야요이 시대 중반의 강철검인 (고안중)은
철제 무기를 사용하기 이전인 야요이 시대 초기의 널리 사용되던 청동제 무기, (작성중)는 / 한편 야요이 시대 중반으로 넘어가며 제구로 성격이 완전히 바뀐 청동기는 그 변화답게 여러 청동제 제구들로 재탄생되었고 야요이 시대 초기보다 더 아름다운 청동 장신구가 나오게 되는데 그중 (작성중)

매장 풍습

민족

시대 구분

교과서에서

대중매채에서

관련 문서

각주

둘러보기

틀:일본의 역사 (나루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