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민국/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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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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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신오민국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2020년 12월 5일 기준으로 아직 완전히 합의가 끝난 설정이 아니므로 주의.  
본 문서는 신오민국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2021년 1월 5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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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 시대 =
= 신화 시대 =
일반적으로 신오민국에서 신화 시대라 한다면 12세기 이전의 시기를 이른다. 이 시기에 일본과 에조 등과 같은 직간접적인 교류가 있어 신오에 뿌리를 내리던 토착민족과 융합하여 민족을 구성했다.
신오에서 '신화 시대'라 한다면 보통 12세기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부터 일본, 성화국 등과 직간접적인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러한 교류들이 진행됨에 따라 신오의 토착민족과 결합하여 민족을 구성하였다.


신오는 전체적으로 냉대습윤기후가 나타나고, 산악이 많아 고산기후도 함께 나타나는 등 농사에 그리 적합한 지형이 아니었다. 그나마 평지가 있는 동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농사가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원활히 이루어지진 못했다. 그러나 이후 철기의 보급과 함께 계단식 농사가 성행하면서 일부 해소된 것으로 보여진다.
신오는 냉대습윤의 기후가 나타나는 국가로, 산악이 많고 고산기후도 함께 나타나는 등 농사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동부의 일부 평지에선 농사가 이루어졌지만, 작게 밭을 매어 간단한 작물만 재배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철기의 보급과 함께 계단식 농사가 성행하면서 일부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신화로 전해지는 바로는 천주(天主)가 호노오미카도(炎帝)와 코오리미카도(氷帝)를 천하에 내려보내어 신오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이후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는 천주의 명에 따라 신오에 있으면서 신오를 주관하였다.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가 신오에 있으면서 1남 1녀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맏이인 야스유키(保行)와 여동생 오카야(岡谷)는 텐칸산(天館山)에 올라 천주의 계시를 받는데, 이후 야스유키는 신오를 다스리게 되고, 오카야는 초대 신시(神使, 신의 사자란 뜻으로, 신오 신토의 최고 사제이다.)가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신화적 세계관에 따른 내용이고, 역사학자들이 추론하기로는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는 각각 불과 얼음을 뜻하는 데에서 신오의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신오는 매우 추운 지역인데, 특히 겨울에는 더욱 춥다. 게다가 엄청난 폭설이 내리기도 하여 신오 사람들에게 추위, 그러니까 얼음은 두려움의 존재였다. 이런 추위를 달래주던 불은 신오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치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어머니와도 같은 고마운 존재였다. 이러한 자연환경 탓에 숭상의 대상이었던 불과 얼음이 신으로 묘사되는 것이라 한다.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를 거느리는 최고신으로 묘사되는 천주는 당시의 신오 사람들을 통솔하는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의 자식으로 전해지는 야스유키과 오카야는 천주로 묘사되는 지도자의 자식인 것으로 추정된다.
신오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국가는 '월국'이다.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천주(天主)가 존재했다고 한다. 천주는 혼란스러운 인계를 구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호노오미카도(炎帝)와 코오리미카도(氷帝)를 창조하여 인계로 내려보내었다.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는 세상에 있으면서 각각 불(빛, 태양 등등), 얼음(어둠, 달 등등)을 주관하였고, 혼라스러운 인계는 차츰 안정되어 갔다. 인계를 사랑했던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는 천주에게 빌어 인계에 남길 원했고, 1남 1녀를 낳게 된다. 오빠인 야스유키(保行)와 동생인 오카야(岡谷)는 이후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의 인도를 받으며 천관산(天冠山)에 오르는데, 천관산 정상에서 천주의 계시를 받고 야스유키는 나라를 세우며, 오카야는 신시(神使, 신의 사자란 뜻으로, 신오 신토의 시조가 되는 이다.)가 된다.


여담으로 신오 신토의 신토라 불리지 않는다. 신토는 일본 본토에서 온 말이며, 신오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물론 신토와 신오 신토의 유사점이 있지만, 신오 신토는 샤머니즘과 조상 숭배의 요소가 특히 강하다. 그런데 신오 신토라 불리게 된 이유는 과거 일본 제국 시절의 민속학자들이 신오의 전통 종교에 일본 신토의 요소들이 남아있다고 결론을 지으면서 붙어진 이름이다. 예로부터 일본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신오에 신토가 전파되기도 했으며, 신오 곳곳에 신사들이 세워지기도 했다.
호노오미카도가 불을, 코오리미카도가 얼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월국은 토테미즘의 영향이 강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신오는 날이 춥고 맹수가 많은 지역인 터라 얼음, 즉 추위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두려움과 공포를 달래주던 것이 바로 불이었고, 이런 자연적 현상으로 토템 사상이 신오에 깊숙히 뿌리를 내릴 수 있던 것이다. 이러한 토템 사상은 신오 신토의 그 모태가 된다.


신오를 통치했던 야스유키 가문은 1147년까지 20여 대(代)동안 존속되다 마지막 왕(왕이란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편의상 왕이라 한다.)이 신하들의 난으로 죽임을 당하며 야스유키 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야스유키의 월국은 1147년까지 20여 대(代)동안 존속되다 신하들의 반란으로 마지막 왕이 죽임을 당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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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국 시대 =
= 난국 시대 =
야스유키 가가 망하게 되면서 지방에서 부를 축적시키며 성장한 세력이 자신들을 성주 혹은 영주라 지칭하며 곳곳에 국가를 세우게 된다. 그러면서 이와키(石城)이란 구조물을 건축하는데, 이러한 점 때문에 이와키 시대라고도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난국 시대는 상당히 어지러운 시기다. 월국의 멸망 이후 지방에서 돈 좀 만졌다 해본 사람들은 자신들을 영주라 칭하며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국가만 10개가 넘어간다. 영주들은 국가를 세우면서 이와키(石成)구조물을 짓는데, 이러한 점때문에 이와키 시대라고도 한다.


난국 시대 동안 3만㎢의 작은 섬에 생긴 국가만 10여 개가 넘어간다. 부족한 영토와 자원 등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는 서로를 침략하여 전쟁을 하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양상이 30년간 이루어지다 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3국에 정리당하며 1177년에 이르러서 혼란스러운 정국이 마무리되며 삼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
4만㎢도 되지 않는 작은 섬에 10개가 넘어가는 국가가 생기니 영토도 비좁고, 자원도 매우 한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국은 부족한 영토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하는 등 피바람이 진하게 불고 있었다. 30년간 어지러운 양상이 지속되다 당시 강대국이던 신월국, 호영국에 의해 정리당하는데, 이 때 호영국이 장원국과 성도국을 흡수하며 국호를 류호국으로 고친다. 신월국은 월국 멸망 이후 건국된 국가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월국을 계승하는 국가이다. 신월국 건국 과정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일부 세력이 떨어져 나갔는데, 이 세력이 건국한 국가는 만월국으로, 어지러웠던 신오는 신월국, 류호국, 만월국 3국에 의해 새로운 형국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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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 시대 =
= 삼국 시대 =
삼국은 난국 시대와는 달리 서로 상부상조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삼국의 국왕은 서로 우열이 없이 평등했고, 활발한 교류를 하며 평화롭게 지내는 듯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도 1426년 북부의 류호국(柳湖國)의 왕으로 즉위한 타테아키가 평화를 깨고 남하정책을 폄으로써 깨지게 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남부 2국은 류호국에 대항하기 위해 신·만 동맹을 맺어 류호국에 맞선다. 하지만 타테아키가 갑작스럽게 병사하자 류호국은 남하 정책을 이어야 한다는 남벌파(南伐派)와 다시 평화의 분위기로 회귀해야 한다는 회귀파(回歸派)로 국론이 나뉘어 류호국은 분열된다.
신월국과 류호국, 만월국 사이에는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류호국은 신오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했고, 신월국과 만월국은 서로가 자신이 월국을 잇는 정통파라며 싸워대기 일쑤였다. 이렇듯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류호국에서는 타테아키가 왕으로 즉위했다. 타테아키의 등장으로 삼국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정복의 야망을 드러내는 류호국이었고, 형식적으로 협력 관계를 맺는 신월국과 만월국이었지만, 서로 동상이몽하며 호흡이 맞지 않았다.
== 신월국의 삼국 통일 ==
남벌파의 서류호, 회귀파의 동류호로 나뉘어진 류호국은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월국과 만월국은 국가 재정비에 나선다. 이후 신월국과 만월국은 서류호를 공격했고, 이어서 동류호도 공격하여 류호국을 멸망시킨다. 류호국이 멸망하고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신월국과 만월국은 서로에 칼을 겨눴고, 결국 신월국에 의해 만월국이 멸망되면서 신월국은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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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시대 =
1430년 삼국을 통일한 신월국은 겉으로는 통일되었지만 내부적으론 많은 문제가 있었다. 삼국을 통일한 야마하시가 사망하면서 왕족 사이 내분이 잦았다. 야마하시 사후 왕들의 재위기간은 채 5년도 넘기지 못했다. 또한 왕위 계승권을 두고 왕족 사이에서 난이 일어났는데, 이 난으로 인해 성이 불타는 등 혼란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닌 곳곳에서 만월국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류호국 유민 일부는 신류호국을 선포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게다가 난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돈 좀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영주라 칭하며 백성들을 현혹하기도 했다.
== 요시히로 정권 ==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1451년 왕위에 오른 요시히로가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군을 총동원하여 봉기를 진압하는 등 내부 상황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전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중앙집권체제도 강화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일본을 통해 불교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영주라 칭하는 자들에게 관직을 내려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등의 정책도 펼쳤다. 이들이 강해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도 병행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혼란스러웠던 신월국은 차츰 안정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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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세 신월국 =
신월국은 별다른 일 없이 지내게 되는데, 요시히로가 피를 부르며 갈고 닦은 강력한 왕권과 그 왕권을 지속해서 발전시켜 가던 후대 왕들에 의해 신월국은 안정된 상태를 가지게 되었고, 이 무렵 주변 국가와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여 전성기를 맞게 된다.
== 군부 시대 ==
그러나 1764년 군부의 반역으로 길었던 평화는 깨지게 된다. 권력의 욕망에 눈이 멀었던 에이소는 군을 일으켜 성을 점령했고, 이어 왕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이후 반대 세력들을 모두 숙청하여 강한 권력을 다져나간다. 권력을 얻은 에이소를 비롯한 군부 세력은 유흥에 빠져 살게 되는데, 자동적으로 지방 관리들도 부패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크나큰 부담이 되었다.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걷거나, 어린 아이 심지어는 가축에 대해서도 세금을 걷는 등 막장스러운 수취 제도가 성행하였다. 사람들은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금방 군에 진압당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한편 국외에선 미국의 흑선내항으로 일본 에도 막부가 개항하는 등 국제 사회는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서로가 헐뜯는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신월국이 휴전을 제의한다. 류호국과 만월국은 휴전을 수락하는 척을 하며 통수를 칠 계획을 짜는데, 웃긴 점은 신월국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형식적 휴전을 맺은 삼국이었고, 아주 잠깐의 평화가 오는 것 같았지만, 예상 외로 신월국이 빨리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전혀 예기치 못했던 류호국과 만월국은 뒤늦게 수습을 하기에 이르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결국 신월국의 계략으로 만월국이 멸망하자 류호국은 신월국을 경계하는 태세를 갖추지만, 미리 심어두었던 신월국의 스파이에 의해 류호국 역시 망하게 된다. 이로써 신월국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며 약 200년간 지속되던 삼국 시대도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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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오민국의 성립과 멸망 =
= 통일 시대/퇴월기 =
== 신오민국의 성립과 발전 과정 ==
통일을 이룩한 신월국이었지만, 너무 급하게 통일을 이룬 탓일까.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 원래도 사이가 안좋던 만월국까지도 흡수했으니 잦은 싸움이 많이 발생했다. 결국 스트레스로 삼국을 통일했던 야마하시 왕이 병사하자 더 큰 혼란이 도래한다. 야마하시 사후 왕들의 재위기간은 5년을 채 넘지 못했다. 한 번은 궁이 불타기도 했고, 여기저기선 난이 일었으며, 아예 유민들은 신월국의 사람이 된는 것을 거부하고 후류호국, 후만월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중앙집권체제가 붕괴하자 여기저기서 쌓인 고름이 터진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난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돈 좀 만진 사람들도 국가를 세워대며 망국 루트를 제대로 타고 있었다.
1868년 12월, 에조 공화국이 성립되자 신월국에도 공화제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막장으로 치닫는 군부 집권에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과 지식인 계층은 본래 목표였던 군부 타도에서 공화정 국가를 설립하자는 다소 급진적인 목표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옆나라 에조를 모델로 하여 민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신오민국건국회의'를 형성한다. 선거를 통해 미노세 코자부로를 총재로 선출하여 군부를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당시 민심은 미쳐 날뛰는 군부 세력보단 신오민국건국회의를 향해 있었기 때문에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이후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해 무장하여 군부와 전면전을 치르게 된다.
희망이라곤 없는 듯했으나, 1451년 즉위하는 요시히로 왕에 의해 놀라우리만큼 안정을 되찾게 된다.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여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으며, 모든 군을 총동원하여 난을 제압하고 중앙집권체제도 다시 보수하는 등 무너져가던 신월국을 바로 잡는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일본을 통해 불교가 신오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군부와 신오민국건국회의의 싸움은 신오민국건국회의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되지만, 나카코하라 전투에서 미노세 코자부로 총재가 전사하여 우도 시게시를 2대 총재로 선출하여 1869년 5월 신오민국 정부를 설립한다. 우도 시게시 내각은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1대 대통령으로 우도 시게시 본인이 취임한다. 또한 외무부, 내무부, 재무부, 방위부, 국토부 5부를 설치하여 정부를 구성해 나갔다.
요시히로 왕이 피를 날리며 갈고 닦은 왕권 탓에 이후 신월국은 매우 안정되었으며, 유래 없는 전성기를 누린다. 주변 국가와 활발한 교역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몇몇 항구 도시들이 특구로 지정되며 경제적으로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5부가 설치되고 현재 민의회의 전신이 되는 국민의회가 설치된다. 3개월 간의 정비 과정을 거쳐 8월에 총선이 예기되어 있었으나, 1869년 8월 미국이 에조와 수교를 맺고 이어 신오에 와서도 수교를 맺으며 총선은 미뤄지게 된다. 또한 이듬해 1870년 신오와 미국은 신미수호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1764년 군부의 쿠데타로 전성기를 맞던 신월국도 무너져가기에 이른다. 오랜 평화와 안정으로 군의 필요성은 점점 떨어졌고, 군 축소까지 가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 반대를 했던 에이소는 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당시 왕을 강제로 폐위시킨 후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처음에는 군사 강국의 건설을 목표로 정책을 펴지만, 처음 맛보는 권력에 에이소는 점점 타락한다. 군사 강국을 원하던 에이소였지만, 그런 꿈은 처참히 밟히고 그저 유흥에 타락해 빠져 사는 에이소만이 눈에 들어왔다. 주요 관직들은 에이소의 측근과 친족들에 장악당했다. 관직이 사고 팔리는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동물, 아이, 심지어는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이 징수되는 등 막장 행보를 걷고 있었다.


미뤄진 총선은 1869년 10월에 실시된다. 선거가 생소했던 시기였기에 당시 선거율과 선거에 나온 정당은 적었지만, 자유신오당이 24석을 가져가며 다수 의석을 확보한다. 우리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민주신오당은 10석, 자유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자유당이 2석을 가져가며 첫 총선은 성황리에 마무리된다.
이런 군부의 막장스런 행보가 계속되자 일부 지식인 계층은 이 나라는 답이 없음을 직감하고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신오민국건국회의가 소집되며 신월국을 타도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군부는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좌절되는가 싶었지만, 끈질기게도 살아남았다. 당시 민심은 신오민국건국회의에 향해 있었고, 망해가는 신월국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혁명을 계획한다. 선거를 통해 초대 총재로 미노세 코자부로를 선출하며 신오민국의 건국에 박차를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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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신오 =
무기고를 털고 나카코하라 고지로 군을 유인한 다음, 매복해 있는 시민군으로 기습하는 작전은 성공했고, 신오민국건국회의가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나카코하라 전투에서 미노세 코자부로가 전사하며 우도 시게시가 2대 총재로 선출된다. 이후 우도 시게시 내각은 신오민국을 건국하며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되고, 본인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또한 외무부, 내무부, 재무부, 방위부, 국토부 5부를 설치하여 정부를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민의회의 전신이 되는 국민의회 역시도 설치되며 총선을 예고한다.


한편 신오민국이 성립되고, 행정 각부가 설치되고, 미국과 수교를 맺고, 총선거가 실시되는 이 많은 일들이 단 1년 만에 발생되어 혼란이 있었으나, 신오민국에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의 지지로 혼란한 시기를 극복한다.
그렇게 실시된 첫 총선. 자유신오당이 24석을, 우리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민주신오당이 10석, 자유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자유당이 2석을 가져가며 첫 총선은 성황리에 마무리된다.


1874년, 우도 시게시 대통령은 약속에 따라 5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며 첫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자유신오당과 민주신오당, 자유당, 그리고 신생 정당인 민중당 등이 후보를 내세우며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결과적으로 자유신오당의 소마자와 아츠유키가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토지개혁, 행정구역 개편, 군부 잔당 세력 소탕 등의 업적을 세운다. 하지만 군부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도 사망하여 비판받기도 한다.
1874년, 우도 시게시는 약속에 따라 임기인 5년을 마치고 퇴임하며 첫 대선이 실시된다. 자유신오당과 민주신오당, 자유당, 민중당 등의 정당이 후보를 냈고, 자유신오당의 소마자와 아츠유키가 당선되며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소마자와 아츠유키는 토지개혁, 군부 잔당 소탕, 행정구역 개편 등의 업적을 이루지만, 군부 잔당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의 피해도 있어서 비판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1876년, 조선에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신오민국은 일본을 경계한다. 일본의 견제를 위해 러시아를 등에 업기도 하고 같은 정서를 보유한 에조와도 친분을 만드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1876년, 조선에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신오민국은 일본을 경계한다. 일본의 경계를 위해 러시아를 등에 업기도 하는 일본의 견제를 위해 노력했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1879년 3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 전 선거와는 달리 민주신오당의 카미우치 케시가 당선되며 민주신오당의 시대가 개막하였다. 한편 총선에서는 자유신오당과 민주신오당이 의석을 양분해 먹는 등 두 정당은 쟁쟁한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소마자와 아츠유키 정부와는 달리 더욱 적극적인 반일본 정책으로 일본과 잦은 충돌이 있었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1879년 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자유신오당이 과점하던 전과는 달리 민주신오당의 카미우치 케시가 당선되며 민주신오당의 시대가 개막한다. 또한 총선에서도 민주신오당이 전과는 구분되는 많은 의석을 확보하며 자유신오당과 쟁쟁한 경쟁을 펼친다. 아마 반일감정의 고조로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과 잦은 충돌이 발생한 점을 빼곤 무사히 임기를 마치며 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이번에는 자유신오당의 카노마타 코키가 당선되며 자유신오당이 다시 정권을 잡는다. 카노마타 코키가 취임하자 마자 청일전쟁이 발발했는데, 청을 도우려던 카노마타 코키 정부였지만 에조 공화국의 만류로 끝내 중립 선언을 한다.
큰 사건 없이 카미우치 케시의 임기가 마무리되며 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민주신오당의 카노마타 코키가 당선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보가 더욱 심화되자 카노마타 코키는 러시아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일본의 견제를 하기에 나서지만, 이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고,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신오민국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으며 신오민국에 영향력을 키워나간다.
== 신오민국의 멸망 ==
청일전쟁의 결과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지는데,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삼국이 일본에 압력을 넣으며 일본은 청에 랴오둥 반도를 반환한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신오민국은 러시아와 적극적인 교류를 하며 일본을 견제하기에 나선다. 이 때 신오민국에 몇 없는 광산이 털리기도 했으나 신오민국은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이후 발생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신오민국에 대해 더 이상 간섭하지 않을 것을 보장받으며 신오민국에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신오민국에 대한 결정권을 얻은 일본은 보호라는 명분 하에 국방권, 외교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타테마쿠라 야스노리 정부는 저항했으나, 이를 막아설 힘이 없었기에 결국 1905년 우야가와 조약이 체결되며 국방권, 외교권을 이양한다.
신오민국에 대한 결정권을 얻은 일본은 보호라는 명분 하에 신오민국 정부로부터 국방권, 외교권 이양을 요구했다. 당시 타테마쿠라 야스노리 정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내부의 친일파에 의해 도장을 뺏기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에 1905년 우야가와 조약이 체결되며 국방권과 외교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1907년 신오민국에 합병을 제의했고, 타테마쿠라 야스노리가 내부의 친일파의 협박으로 일본의 제의를 수락하며 신·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신오민국은 일본에 합병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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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통치기 =
자신의 나라가 다른 나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일본에 합병되자마자 곳곳에선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단체가 등장하였다. 또한 신오독립당이 결성되어 일본에 항전했다. 신오 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거나, 수탈 기관에 테러를 감행하는 등 무장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계속될수록 돌아오는 것은 더욱 강압적인 통치였다. 결국 신오독립당을 비롯한 무장 단체들은 총독부령에 따라 해산 처분을 받게 되며 한풀 꺾이는 듯이 보였다.


일본은 이후 합병을 제의(말이 제의지 사실은 요구였다.)했고, 타테마쿠라 야스노리가 이에 서명하여 신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1907년 신오민국은 일본에 합병당한다.
그러나 온갖 무장 단체는 꺾이지 않았고, 지하에서 활동했다. 또한 소련의 도움을 받아 무장 투쟁을 이어가는 등 외세의 도움도 받았다. 그러나 소련의 도움이 탐탁치 않았던 세력이 떨어져 나와 자유독립당을 결성한다. 자유독립당은 무장 투쟁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중요한 것은 사람 하나 하나 스스로가 깨어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행하며 계몽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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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시대 =
= 소련 점령기 =
나라가 갑자기 빼앗겼으니 이를 반가워 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신오민국이 일본에 합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무장 투쟁을 나섰다. 또한 신오독립당이 결성되며 일본에 항전했다. 신오 총독부를 습격하여 총독을 살해하거나, 곳곳에 생긴 수탈 기관들을 테러하는 등 무장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이렇게 항전할 수록 돌아오는 것은 더욱 강력히 압박하여 통치하는 것이었다. 또한 신오독립당을 비롯한 단체들이 총독부 명령 하에 활동 금지 처분을 당하며 한풀 꺾이는 듯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게 되며 신오민국도 독립을 맞이하나 싶었다. 물론 독립을 하긴 했으나, 신오독립당과 자유독립당 사이의 대립에서 신오독립당이 우세를 점하게 되는데, 결국 신오독립당의 수장이었던 친소련파 시게타다 요시아키가 먼저 총서기장으로 취임하며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한다. 자유독립당은 이에 반발하며 자유시장경제에 입각한 신오민국을 세우길 원했고, 지속적으로 항의했지만,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강한 탄압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활동 금지 처분을 당했어도 꺾이지 않았다. 또한 소련의 도움으로 테러를 일으키고 무장 투쟁 활동을 하는 등 활동을 지속했다.. 하지만 소련의 도움이 탐탁치 않았던 일부 세력은 신오독립당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독립당을 결성한다. 자유독립당은 무장 투쟁도 무장 투쟁이지만 그 전에 국민 스스로가 계몽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학교를 세우고 교육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결국 지하에서 활동하며 자유독립당은 그 세력을 점차 키워나갔다. 선동당한 민중을 대상으로 공산주의의 폐해를 알리기도 하고, 공산당 선전 기구에 테러를 감행하기도 하는 등 무장 투쟁과 계몽 운동을 병행하며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맞섰다. 이러한 자유독립당의 꾸준한 움직임 덕분이었을까, 1989년에 이르러서 많은 사람들이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중앙 정부의 삽질로 빈부격차는 나날이 커지고 있었으며, 권력자의 장시간 독재에 많은 사람들은 자유를 상실한 채로 불우하게 살아야 했다. 이런 이들에게 자유독립당의 신오민국은 달콤한 사탕이었고, 결국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점점 지지 기반을 잃게 된다.


한편 일본의 민족학자들은 신오 신토는 일본 신토의 한 종류라고도 했고, 신오 신토는 그저 미신에 불과하다며 탄압하기도 했다. 이에 신오 신토 교인들은 크게 반발한다.
이러한 민중의 불만이 악화되는 가운데,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당시 군사 훈련 중이던 군이 민간인을 사살해버린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이를 묻고 여론을 통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건의 내용은 생각보다 참혹했다. 사살당한 민간인은 그저 12살밖에 나지 않은 어린 아이였는데, 정부는 이 어린 아이가 간악한 자본가라는 이상한 쌉소리를 했던 것이었다. 이에 불만이 쌓이고 쌓여 터져버린 민중들은 이런 썩은 정권은 필요 없다며, 더 이상 신오를 망치지 말고 물러나라며 시위를 전개했다. 정부는 이에 물대포를 쏘는 등의 대처를 했지만, 이 과정에서 노인이 사망하자 민중들의 분노는 하늘을 치솟게 되었다. 수개월간 이루어진 시위에 아마가사카 우메이치 총서기장은 인민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며 자유독립당에 정권을 이양하며 자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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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신오 =
==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성립 ==
정권을 이양받은 자유독립당은 처음부터 시작하겠다는 의미로 과거 선거의 대를 잇는 것이 아닌, 1대 총선을 실시하여 국민의회를 구성하였으며, 이후 국민의회의 명칭을 민의회로 개칭하고 국호를 신오민국으로 변경하였다. 1대 총선으로 소집된 제헌의회는 헌법을 제정하여 1994년 8월에 공포하였고, 이듬해 1대 대선을 실시하여 자유신오당의 사이다 스에타카가 당선되며 (新)신오민국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고, 이러한 신오민국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며 소련의 영향으로 시게타다 요시아키를 총서기장으로 하는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신오독립당은 환영하는 분위기였으나, 자유독립당은 이에 반발하여 자유신오국민본부를 결성하여 자유민주주의 신오민국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강한 탄압으로 자유신오국민본부는 해체되고 자유민주주의 신오민국 설립의 꿈은 좌절된다. 그러나 신오 신토가 인민들을 홀린다며 신오 신토를 탄압하자 이들도 자유 진영에 가담하여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대립한다.
==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멸망과 신오민국의 성립 ==
날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신오 소비에트 공화국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1989년 소련 내전이 발생하여 소련이 휘청거리자 신오의 자유주의자들은 좌절된 신오민국 건국의 꿈을 다시 품게 된다. 이후 자유신오국민본부를 부활시켜 적극적인 활동에 나선다. 또한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지원하며 신오민국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1991년 결국 소련이 해체되어 지지 기반이 사라지자 아마가사카 우메이치 총서기장은 사임하며 자유신오국민본부에 정권을 이양했다.
 
자유신오국민본부는 과거의 신오가 아닌 새로운 신오를 만들겠다는 의미로 1992년 5월 1대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민의회를 구성하였다. 이후 국민의회의 명칭을 민의회로 변경하고 국호를 신오민국으로 변경했다. 또한 헌법을 제정하여 1994년 8월 공포한다. 이듬해 1대 대선을 실시하여 자유신오당의 아사이다 스에타카가 당선된다.

2021년 1월 5일 (화) 09:41 판

개요

본 문서는 신오민국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2021년 1월 5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화 시대

신오에서 '신화 시대'라 한다면 보통 12세기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부터 일본, 성화국 등과 직간접적인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러한 교류들이 진행됨에 따라 신오의 토착민족과 결합하여 민족을 구성하였다.

신오는 냉대습윤의 기후가 나타나는 국가로, 산악이 많고 고산기후도 함께 나타나는 등 농사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동부의 일부 평지에선 농사가 이루어졌지만, 작게 밭을 매어 간단한 작물만 재배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철기의 보급과 함께 계단식 농사가 성행하면서 일부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신오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국가는 '월국'이다.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천주(天主)가 존재했다고 한다. 천주는 혼란스러운 인계를 구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호노오미카도(炎帝)와 코오리미카도(氷帝)를 창조하여 인계로 내려보내었다.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는 세상에 있으면서 각각 불(빛, 태양 등등), 얼음(어둠, 달 등등)을 주관하였고, 혼라스러운 인계는 차츰 안정되어 갔다. 인계를 사랑했던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는 천주에게 빌어 인계에 남길 원했고, 1남 1녀를 낳게 된다. 오빠인 야스유키(保行)와 동생인 오카야(岡谷)는 이후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의 인도를 받으며 천관산(天冠山)에 오르는데, 천관산 정상에서 천주의 계시를 받고 야스유키는 나라를 세우며, 오카야는 신시(神使, 신의 사자란 뜻으로, 신오 신토의 시조가 되는 이다.)가 된다.

호노오미카도가 불을, 코오리미카도가 얼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월국은 토테미즘의 영향이 강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신오는 날이 춥고 맹수가 많은 지역인 터라 얼음, 즉 추위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두려움과 공포를 달래주던 것이 바로 불이었고, 이런 자연적 현상으로 토템 사상이 신오에 깊숙히 뿌리를 내릴 수 있던 것이다. 이러한 토템 사상은 신오 신토의 그 모태가 된다.

야스유키의 월국은 1147년까지 약 20여 대(代)동안 존속되다 신하들의 반란으로 마지막 왕이 죽임을 당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난국 시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난국 시대는 상당히 어지러운 시기다. 월국의 멸망 이후 지방에서 돈 좀 만졌다 해본 사람들은 자신들을 영주라 칭하며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국가만 10개가 넘어간다. 영주들은 국가를 세우면서 이와키(石成)란 구조물을 짓는데, 이러한 점때문에 이와키 시대라고도 한다.

4만㎢도 되지 않는 작은 섬에 10개가 넘어가는 국가가 생기니 영토도 비좁고, 자원도 매우 한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국은 부족한 영토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하는 등 피바람이 진하게 불고 있었다. 30년간 어지러운 양상이 지속되다 당시 강대국이던 신월국, 호영국에 의해 정리당하는데, 이 때 호영국이 장원국과 성도국을 흡수하며 국호를 류호국으로 고친다. 신월국은 월국 멸망 이후 건국된 국가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월국을 계승하는 국가이다. 신월국 건국 과정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일부 세력이 떨어져 나갔는데, 이 세력이 건국한 국가는 만월국으로, 어지러웠던 신오는 신월국, 류호국, 만월국 3국에 의해 새로운 형국을 맞이했다.

삼국 시대

신월국과 류호국, 만월국 사이에는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류호국은 신오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했고, 신월국과 만월국은 서로가 자신이 월국을 잇는 정통파라며 싸워대기 일쑤였다. 이렇듯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류호국에서는 타테아키가 왕으로 즉위했다. 타테아키의 등장으로 삼국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정복의 야망을 드러내는 류호국이었고, 형식적으로 협력 관계를 맺는 신월국과 만월국이었지만, 서로 동상이몽하며 호흡이 맞지 않았다.

서로가 헐뜯는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신월국이 휴전을 제의한다. 류호국과 만월국은 휴전을 수락하는 척을 하며 통수를 칠 계획을 짜는데, 웃긴 점은 신월국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형식적 휴전을 맺은 삼국이었고, 아주 잠깐의 평화가 오는 것 같았지만, 예상 외로 신월국이 빨리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전혀 예기치 못했던 류호국과 만월국은 뒤늦게 수습을 하기에 이르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결국 신월국의 계략으로 만월국이 멸망하자 류호국은 신월국을 경계하는 태세를 갖추지만, 미리 심어두었던 신월국의 스파이에 의해 류호국 역시 망하게 된다. 이로써 신월국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며 약 200년간 지속되던 삼국 시대도 막을 내린다.

통일 시대/퇴월기

통일을 이룩한 신월국이었지만, 너무 급하게 통일을 이룬 탓일까.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 원래도 사이가 안좋던 만월국까지도 흡수했으니 잦은 싸움이 많이 발생했다. 결국 스트레스로 삼국을 통일했던 야마하시 왕이 병사하자 더 큰 혼란이 도래한다. 야마하시 사후 왕들의 재위기간은 5년을 채 넘지 못했다. 한 번은 궁이 불타기도 했고, 여기저기선 난이 일었으며, 아예 유민들은 신월국의 사람이 된는 것을 거부하고 후류호국, 후만월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중앙집권체제가 붕괴하자 여기저기서 쌓인 고름이 터진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난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돈 좀 만진 사람들도 국가를 세워대며 망국 루트를 제대로 타고 있었다.

희망이라곤 없는 듯했으나, 1451년 즉위하는 요시히로 왕에 의해 놀라우리만큼 안정을 되찾게 된다.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여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으며, 모든 군을 총동원하여 난을 제압하고 중앙집권체제도 다시 보수하는 등 무너져가던 신월국을 바로 잡는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일본을 통해 불교가 신오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요시히로 왕이 피를 날리며 갈고 닦은 왕권 탓에 이후 신월국은 매우 안정되었으며, 유래 없는 전성기를 누린다. 주변 국가와 활발한 교역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몇몇 항구 도시들이 특구로 지정되며 경제적으로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1764년 군부의 쿠데타로 전성기를 맞던 신월국도 무너져가기에 이른다. 오랜 평화와 안정으로 군의 필요성은 점점 떨어졌고, 군 축소까지 가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 반대를 했던 에이소는 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당시 왕을 강제로 폐위시킨 후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처음에는 군사 강국의 건설을 목표로 정책을 펴지만, 처음 맛보는 권력에 에이소는 점점 타락한다. 군사 강국을 원하던 에이소였지만, 그런 꿈은 처참히 밟히고 그저 유흥에 타락해 빠져 사는 에이소만이 눈에 들어왔다. 주요 관직들은 에이소의 측근과 친족들에 장악당했다. 관직이 사고 팔리는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동물, 아이, 심지어는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이 징수되는 등 막장 행보를 걷고 있었다.

이런 군부의 막장스런 행보가 계속되자 일부 지식인 계층은 이 나라는 답이 없음을 직감하고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신오민국건국회의가 소집되며 신월국을 타도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군부는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좌절되는가 싶었지만, 끈질기게도 살아남았다. 당시 민심은 신오민국건국회의에 향해 있었고, 망해가는 신월국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혁명을 계획한다. 선거를 통해 초대 총재로 미노세 코자부로를 선출하며 신오민국의 건국에 박차를 가한다.

구 신오

무기고를 털고 나카코하라 고지로 군을 유인한 다음, 매복해 있는 시민군으로 기습하는 작전은 성공했고, 신오민국건국회의가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나카코하라 전투에서 미노세 코자부로가 전사하며 우도 시게시가 2대 총재로 선출된다. 이후 우도 시게시 내각은 신오민국을 건국하며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되고, 본인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또한 외무부, 내무부, 재무부, 방위부, 국토부 5부를 설치하여 정부를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민의회의 전신이 되는 국민의회 역시도 설치되며 총선을 예고한다.

그렇게 실시된 첫 총선. 자유신오당이 24석을, 우리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민주신오당이 10석, 자유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자유당이 2석을 가져가며 첫 총선은 성황리에 마무리된다.

1874년, 우도 시게시는 약속에 따라 임기인 5년을 마치고 퇴임하며 첫 대선이 실시된다. 자유신오당과 민주신오당, 자유당, 민중당 등의 정당이 후보를 냈고, 자유신오당의 소마자와 아츠유키가 당선되며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소마자와 아츠유키는 토지개혁, 군부 잔당 소탕, 행정구역 개편 등의 업적을 이루지만, 군부 잔당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의 피해도 있어서 비판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 1876년, 조선에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신오민국은 일본을 경계한다. 일본의 경계를 위해 러시아를 등에 업기도 하는 등 일본의 견제를 위해 노력했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1879년 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자유신오당이 과점하던 전과는 달리 민주신오당의 카미우치 케시가 당선되며 민주신오당의 시대가 개막한다. 또한 총선에서도 민주신오당이 전과는 구분되는 많은 의석을 확보하며 자유신오당과 쟁쟁한 경쟁을 펼친다. 아마 반일감정의 고조로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던 것으로 보여진다.

큰 사건 없이 카미우치 케시의 임기가 마무리되며 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민주신오당의 카노마타 코키가 당선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보가 더욱 심화되자 카노마타 코키는 러시아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일본의 견제를 하기에 나서지만, 이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고,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신오민국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으며 신오민국에 영향력을 키워나간다.

신오민국에 대한 결정권을 얻은 일본은 보호라는 명분 하에 신오민국 정부로부터 국방권, 외교권 이양을 요구했다. 당시 타테마쿠라 야스노리 정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내부의 친일파에 의해 도장을 뺏기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에 1905년 우야가와 조약이 체결되며 국방권과 외교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1907년 신오민국에 합병을 제의했고, 타테마쿠라 야스노리가 내부의 친일파의 협박으로 일본의 제의를 수락하며 신·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신오민국은 일본에 합병당한다.

일제통치기

자신의 나라가 다른 나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일본에 합병되자마자 곳곳에선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단체가 등장하였다. 또한 신오독립당이 결성되어 일본에 항전했다. 신오 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거나, 수탈 기관에 테러를 감행하는 등 무장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계속될수록 돌아오는 것은 더욱 강압적인 통치였다. 결국 신오독립당을 비롯한 무장 단체들은 총독부령에 따라 해산 처분을 받게 되며 한풀 꺾이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온갖 무장 단체는 꺾이지 않았고, 지하에서 활동했다. 또한 소련의 도움을 받아 무장 투쟁을 이어가는 등 외세의 도움도 받았다. 그러나 소련의 도움이 탐탁치 않았던 세력이 떨어져 나와 자유독립당을 결성한다. 자유독립당은 무장 투쟁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중요한 것은 사람 하나 하나 스스로가 깨어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행하며 계몽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소련 점령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게 되며 신오민국도 독립을 맞이하나 싶었다. 물론 독립을 하긴 했으나, 신오독립당과 자유독립당 사이의 대립에서 신오독립당이 우세를 점하게 되는데, 결국 신오독립당의 수장이었던 친소련파 시게타다 요시아키가 먼저 총서기장으로 취임하며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한다. 자유독립당은 이에 반발하며 자유시장경제에 입각한 신오민국을 세우길 원했고, 지속적으로 항의했지만,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강한 탄압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결국 지하에서 활동하며 자유독립당은 그 세력을 점차 키워나갔다. 선동당한 민중을 대상으로 공산주의의 폐해를 알리기도 하고, 공산당 선전 기구에 테러를 감행하기도 하는 등 무장 투쟁과 계몽 운동을 병행하며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맞섰다. 이러한 자유독립당의 꾸준한 움직임 덕분이었을까, 1989년에 이르러서 많은 사람들이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중앙 정부의 삽질로 빈부격차는 나날이 커지고 있었으며, 권력자의 장시간 독재에 많은 사람들은 자유를 상실한 채로 불우하게 살아야 했다. 이런 이들에게 자유독립당의 신오민국은 달콤한 사탕이었고, 결국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점점 지지 기반을 잃게 된다.

이러한 민중의 불만이 악화되는 가운데,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당시 군사 훈련 중이던 군이 민간인을 사살해버린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이를 묻고 여론을 통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건의 내용은 생각보다 참혹했다. 사살당한 민간인은 그저 12살밖에 나지 않은 어린 아이였는데, 정부는 이 어린 아이가 간악한 자본가라는 이상한 쌉소리를 했던 것이었다. 이에 불만이 쌓이고 쌓여 터져버린 민중들은 이런 썩은 정권은 필요 없다며, 더 이상 신오를 망치지 말고 물러나라며 시위를 전개했다. 정부는 이에 물대포를 쏘는 등의 대처를 했지만, 이 과정에서 노인이 사망하자 민중들의 분노는 하늘을 치솟게 되었다. 수개월간 이루어진 시위에 아마가사카 우메이치 총서기장은 인민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며 자유독립당에 정권을 이양하며 자결한다.

신 신오

정권을 이양받은 자유독립당은 처음부터 시작하겠다는 의미로 과거 선거의 대를 잇는 것이 아닌, 1대 총선을 실시하여 국민의회를 구성하였으며, 이후 국민의회의 명칭을 민의회로 개칭하고 국호를 신오민국으로 변경하였다. 1대 총선으로 소집된 제헌의회는 헌법을 제정하여 1994년 8월에 공포하였고, 이듬해 1대 대선을 실시하여 자유신오당의 사이다 스에타카가 당선되며 (新)신오민국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고, 이러한 신오민국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