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시라비시카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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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주로 부라쿠민계 후손과 1960년대 기름사업의 성황과 정부의 자치령에 대한 지원 확대로 후일에 한국계와 함께 이주한 일본계로 구분되는데 이들중 일본계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일명 1세대 재패니즈 바로 "부라쿠민" 계열의 역사적 악명은 마치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오니즘과 비슷하다는 의견이 현재까지 나오고 있다.  
 
이들은 주로 부라쿠민계 후손과 1960년대 기름사업의 성황과 정부의 자치령에 대한 지원 확대로 후일에 한국계와 함께 이주한 일본계로 구분되는데 이들중 일본계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일명 1세대 재패니즈 바로 "부라쿠민" 계열의 역사적 악명은 마치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오니즘과 비슷하다는 의견이 현재까지 나오고 있다.  
  
시라비시카로 부라쿠민이 유입된것은 19세기 데지마 무역이 진행되었을당시 네덜란드가 일본에서 노예 목적으로 사온 부라쿠민이 시라비시카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며 자유인이 된것으로 초반엔 10여명 정도의 소수였지만 금세 세를 늘려 20세기초에는 100여명까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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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비시카로 부라쿠민이 유입된것은 19세기 데지마 무역이 진행되었을당시 네덜란드가 일본에서 노예 목적으로 사온 부라쿠민이 시라비시카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며 자유인이 된것으로 초반엔 5명 정도의 소수였지만 금세 세를 늘려 20세기초에는 100여명까지 늘어났다.  
  
 
1919년 시라비시카가 중동 4개국을 구매한 직후 영국이 지정했던 보호국을 해체시킨뒤 정식 식민지로 편입시켰으며 바레인과 쿠웨이트에 사미인과 여러 토착민들을 중동 자치령으로 이전시킨뒤 정착촌을 건설하였는데 이때 부라쿠민도 이주하게 된다. 부라쿠민과 사미인은 초반에 정부의 건설계획에 참여하고 지역의 경공업,의류업에 종사하며 근근하게 살아나갔고 본토의 일본계의 사업의 하청기지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많은수 이주했다해도 적은 정부지원금과 현지인간의 마찰로 자영업에 의존한체 겨우겨우 살아가는경우가 태반이였고 심지어 지역 풍토병과 살인적인 더위는 이들에게 매우 치명적이였다.  
 
1919년 시라비시카가 중동 4개국을 구매한 직후 영국이 지정했던 보호국을 해체시킨뒤 정식 식민지로 편입시켰으며 바레인과 쿠웨이트에 사미인과 여러 토착민들을 중동 자치령으로 이전시킨뒤 정착촌을 건설하였는데 이때 부라쿠민도 이주하게 된다. 부라쿠민과 사미인은 초반에 정부의 건설계획에 참여하고 지역의 경공업,의류업에 종사하며 근근하게 살아나갔고 본토의 일본계의 사업의 하청기지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많은수 이주했다해도 적은 정부지원금과 현지인간의 마찰로 자영업에 의존한체 겨우겨우 살아가는경우가 태반이였고 심지어 지역 풍토병과 살인적인 더위는 이들에게 매우 치명적이였다.  

2021년 7월 8일 (목) 19:54 기준 최신판

개요

재패니즈 스칸디나비안(일본계 시라인)은 코레안 스칸디나비안 그리고 화교와 함께 동양계의 주축을 이루는 일본혈통의 시라비시카인이며 현재 시라비시카 전체인구의 117,89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19세기 후반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 유출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기존 노예무역에서도 시라비시카의 척박한 기후로 인해 불리한 위치를 차지하던중 연방정부는 비슷한 기후조건의 동양계에 대한 이민제한을 완화하고 대대적으로 쿨리를 들여오기 시작했으며 처음엔 저임금 노동자로 일본계도 들어오며 재패니즈 스칸디나비안의 역사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저임금 노동자로 시작했고 대우도 흑인노예와 비슷하게 시작했지만 러일전쟁이후 일본의 급성장과 일본에서의 학술이민 증가와 교류 증가로 1905년부터 일본계 쿨리에 대한 명예권 인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보수당을 중심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며 때마침 1917년 12월 일본계를 주도로 노동봉기가 전개되고 당시 무종교인이 많았던 일본계의 인정받기위해 개종하는 노력을 하고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 정부는 사회적 목소리를 받아들여 '1차 민권선언'을 통해 일본계를 본토인과 동일한 노동자 계급으로 대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18년 쌀 소동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시라비시카로 이주하였으며 인구가 늘어나자 1925년 선거법 개정과 2차 민권선언을 통해 일본인의 일본어 사용이 개종하는 조건하에 이루어졌으며 일본어도 이때부터 공용어로 지정되며 사실상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된다.

이후 1920년대 대공황기와 여러 어려웠던 시기를 거친뒤 시라비시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일본계 시라인들은 자신들을 재패니즈 스칸디나비안으로 부르게 되었고 재패니즈 스칸디나비안은 재계에서도 전후부터 성공한 일본인 사업가가 등장하고 정치계에선 1932년 첫 일본계 시장 '하시모토 유키오'가 나온것을 시작으로 1936년 선거에선 스기하라 마사코라는 의인적 인물이 나오는등 정치계와 재계에서의 여러 족적을 남기게된다.

전후에는 일부 평화주의 일본계 정치인 주도로 사회노동당에서 이탈한 사회민주당을 창당하여 1970년대 후반까지 보수당과 연정을 이끌었고 이후에는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 열풍을 타고 4인방과 함께 큰 정치적 이익을 얻는등 사실상 시라비시카의 상류층으로 자리매김하게된다.

자치령 일본계

이들은 주로 부라쿠민계 후손과 1960년대 기름사업의 성황과 정부의 자치령에 대한 지원 확대로 후일에 한국계와 함께 이주한 일본계로 구분되는데 이들중 일본계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일명 1세대 재패니즈 바로 "부라쿠민" 계열의 역사적 악명은 마치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오니즘과 비슷하다는 의견이 현재까지 나오고 있다.

시라비시카로 부라쿠민이 유입된것은 19세기 데지마 무역이 진행되었을당시 네덜란드가 일본에서 노예 목적으로 사온 부라쿠민이 시라비시카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며 자유인이 된것으로 초반엔 5명 정도의 소수였지만 금세 세를 늘려 20세기초에는 100여명까지 늘어났다.

1919년 시라비시카가 중동 4개국을 구매한 직후 영국이 지정했던 보호국을 해체시킨뒤 정식 식민지로 편입시켰으며 바레인과 쿠웨이트에 사미인과 여러 토착민들을 중동 자치령으로 이전시킨뒤 정착촌을 건설하였는데 이때 부라쿠민도 이주하게 된다. 부라쿠민과 사미인은 초반에 정부의 건설계획에 참여하고 지역의 경공업,의류업에 종사하며 근근하게 살아나갔고 본토의 일본계의 사업의 하청기지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많은수 이주했다해도 적은 정부지원금과 현지인간의 마찰로 자영업에 의존한체 겨우겨우 살아가는경우가 태반이였고 심지어 지역 풍토병과 살인적인 더위는 이들에게 매우 치명적이였다.

이런 사정으로 사미인은 죽었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부라쿠민은 바레인 사회에 서서히 정착하기 시작했고 기존 현지인들과도 피지배인으로서 공감하며 상부상조하며 살아갔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바레인을 시작으로 (당시 아랍에미리트,오만 자치령으로 분리되어 있었음)바레바르 자치령,쿠웨이트에서 대규모 원전이 터졌고 상부상조하며 생존을 뒤쫒던 부라쿠민들은 원주민들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부라쿠민들은 유대인 사업가나 서구 열강의 사업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중동 자치령을 부촌화시켰고 이 석유사업이 터지고 정부의 금융지원이 확대되자 기존의 일본계도 중동 3국으로 이주함은 물론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대규모 이주붐이 이르게 된다.

그들은 이미 시라비시카 정부에게 카타르와 바레인 전체 지역의 사업권을 인정받았고 시라비시카 정부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기때문에 그들에게 독점사업권을 인정해주었고 석유사업을 통한 이익중 50%를 부라쿠민 사업자에게 넘겨주는 "도하 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또한 1920년대 바레인의 자치권이 주어졌을 당시에도 토착민이 아닌 "정착민"에게 보통선거권을 주는 바람에 의회는 석유부자가 된 부라쿠민에게 넘어갔으며 정책도 이들에게 유리하게 짜지게 된다.

하지만 원주민과 정착민간 갈등이 없는건 아니였다. 석유가 터진이후까지만 했어도 원주민들은 소련와 사우디의 지원을 받아 무장투쟁을 계획하였고 바레인에서 1946년경 "도하 폭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1947년에는 쿠웨이트와 바레바르는 아랍계의 침공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부라쿠민과 일본계는 시라비시카의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했고 때마침 레반트에서 중동전쟁까지 벌어지자 전선은 양면전선화 된다. (합의 필요) 이때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은 시라비시카 자치령에 있는 부라쿠민들로 인해 전선 역시 팽팽한것을 알게되었고 이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게된다. 회의적이던 국제사회 역시 찝찝하지만 시라비시카의 걸프만 지배를 인정할수밖에 없었고 1948년을 기점으로 걸프만의 중동전쟁은 부라쿠민이 불리하던 전황에서 부라쿠민이 승기를 잡은 전황으로 변하게 된다.

이후 1차 중동전쟁이 마무리된후 바레인과 쿠웨이트 바레바르 자치령은 공식적으로 시라비시카의 보호를 받겠다고 선언하였고 쿠웨이트를 제외한 2개의 자치령은 시라비시카의 자치령겸 보호령으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시라비시카의 지배가 확립된후 부라쿠민계 바레인인들은 압도적인 자본력을 통해 아랍계를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내쫒기 시작했고 이스라엘과 달리 깐깐한 과정으로 유럽-시라비시칸 문화에 동화된 아랍계는 시민권을 부여한뒤 기존 아랍계를 통치하는 방식으로 아랍계간의 분열을 도모하기까지 하였다. 당연하겠지만 아랍계의 시위 진압에 동원되는 군대 역시 아랍계로 구성되어 있으나 지휘관은 대다수 부라쿠민계거나 본토 시라인인 경우가 태반이다.

현재도 사과의 날을 정한 바레바르를 제외하면 자치령 일본계 일명 부라쿠민계 걸프인들의 아랍계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기업에선 정규직은 물론 비정규직까지 무조적 아시아인,백인,흑인,유대인,동남아인등 6개의 민족에게만 허용하고 아랍계중외국계 아랍계를 제외하면 사람같이 사는건 어렵다 볼정도... 그래서 그런지 바레인군은 군축을 하긴 했지만 아이언돔을 운영할정도로 아랍의 강군으로서 움직이고 있으며 쿠웨이트는 아랍계에 대한 멸절정책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위치

시라비시카의 유대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음은 물론 스칸디나비아 문화에 잘 적응함은 물론 적극적인 대외활동와 재계나 정계에 많이 진출해있으며 다른 아시아계에 비해 상류층이 많은편이다. 그런탓인지 80년대 론 탐피야 1세를 시작으로 총 8명의 수상과 이원정부제 시행이후의 모든 대통령을 배출할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주로 재계에선 석유화학,중공업에 포진해있으며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페네치크 그룹과 스프링필드 은행이 있으며 정부의 ETV 자산 매각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재계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다만 4인방과 같은 독일계 재벌에 비하면 영향력이 적으며 사실상 일본계의 대표 대기업인 페네치크 그룹도 시가총액의 10%밖에 미치지 못하고 언론에서도 영향력 보유량 모두 4인방에게 밀린다. 그래서 주로 4인방이나 유대인의 눈치를 보는 콩라인 신세라 누구보다 4인방의 멸망을 바라고 있다.

종교

처음에는 무종교인이 많았으나 2차 민권선언이후 일본어만이라도 지키기위해 개종하였으며 현재는 루터교와 장로교가 양분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1968년 68혁명으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21세기 신드롬으로 인해 현재는 무종교를 택하는 일본계도 많은편입니다.

정치성향

인구가 11만명정도로 약 0.5%정도 구성되어있지만 정치적 로비스트가 많고 실제 정치인으로 진출하는경우도 많은만큼 무시할수 없는 존재이다. 대부분 시라비시카 남부지역이나 수오미 헬싱키에 포진해있으며 이 지역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보수당의 약우세 지역으로 판별되고 있다.

일본계도 연령대별로 혹은 엘리트냐 비엘리트냐를 두고도 정치성향이 갈리는데 젊은 엘리트일수록 복지축소와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보수당에 젊지만 저학력일수록 복지의 확충과 사회보장제도 강화를 지지하는 노동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고연령층에선 젊은층과 달리 교회의 영향으로 인해 엘리트,비엘리트 구분없이 보수당 성향이 강한편인데 이는 대부분이 전후세력에 사회노동당의 권위주의 정치에 저항했던 세대임과 동시에 민주당의 좌경화에 반대하여 이동한 경우가 많아 현재까지도 보수당의 주요 지지층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예외가 있는데 일본계인 제임스 소프타르처럼 준 엘리트급이 대통령이 되는경우도 존재하며 일부 저학력 일본계도 사르테야 정국시절의 안정적인 국정운영으로 보수당을 지지한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같은 일본계여도 계속전쟁과 겨울전쟁,나치의 민간인 학살등을 바라본 세대인 만큼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비판적이며 난징 대학살등 일본의 만행에 대해 반성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