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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신오민국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2021년 1월 5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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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신오민국]]의 간략한 역사를 다루는 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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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 시대 =
 
신오에서 '신화 시대'라 한다면 보통 12세기 이전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부터 일본, 성화국 등과 직간접적인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러한 교류들이 진행됨에 따라 신오의 토착민족과 결합하여 민족을 구성하였다.
 
 
 
신오는 냉대습윤의 기후가 나타나는 국가로, 산악이 많고 고산기후도 함께 나타나는 등 농사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동부의 일부 평지에선 농사가 이루어졌지만, 작게 밭을 매어 간단한 작물만 재배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철기의 보급과 함께 계단식 농사가 성행하면서 일부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신오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국가는 '월국'이다.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천주(天主)가 존재했다고 한다. 천주는 혼란스러운 인계를 구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호노오미카도(炎帝)와 코오리미카도(氷帝)를 창조하여 인계로 내려보내었다.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는 세상에 있으면서 각각 불(빛, 태양 등등), 얼음(어둠, 달 등등)을 주관하였고, 혼라스러운 인계는 차츰 안정되어 갔다. 인계를 사랑했던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는 천주에게 빌어 인계에 남길 원했고, 1남 1녀를 낳게 된다. 오빠인 야스유키(保行)와 동생인 오카야(岡谷)는 이후 호노오미카도와 코오리미카도의 인도를 받으며 천관산(天冠山)에 오르는데, 천관산 정상에서 천주의 계시를 받고 야스유키는 나라를 세우며, 오카야는 신시(神使, 신의 사자란 뜻으로, 신오 신토의 시조가 되는 이다.)가 된다.
 
 
 
호노오미카도가 불을, 코오리미카도가 얼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월국은 토테미즘의 영향이 강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신오는 날이 춥고 맹수가 많은 지역인 터라 얼음, 즉 추위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두려움과 공포를 달래주던 것이 바로 불이었고, 이런 자연적 현상으로 토템 사상이 신오에 깊숙히 뿌리를 내릴 수 있던 것이다. 이러한 토템 사상은 신오 신토의 그 모태가 된다.
 
 
 
야스유키의 월국은 1147년까지 약 20여 대(代)동안 존속되다 신하들의 반란으로 마지막 왕이 죽임을 당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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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국 시대 =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난국 시대는 상당히 어지러운 시기다. 월국의 멸망 이후 지방에서 돈 좀 만졌다 해본 사람들은 자신들을 영주라 칭하며 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국가만 10개가 넘어간다. 영주들은 국가를 세우면서 이와키(石成)란 구조물을 짓는데, 이러한 점때문에 이와키 시대라고도 한다.
 
 
 
4만㎢도 되지 않는 작은 섬에 10개가 넘어가는 국가가 생기니 영토도 비좁고, 자원도 매우 한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국은 부족한 영토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하는 등 피바람이 진하게 불고 있었다. 30년간 어지러운 양상이 지속되다 당시 강대국이던 신월국, 호영국에 의해 정리당하는데, 이 때 호영국이 장원국과 성도국을 흡수하며 국호를 류호국으로 고친다. 신월국은 월국 멸망 이후 건국된 국가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월국을 계승하는 국가이다. 신월국 건국 과정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일부 세력이 떨어져 나갔는데, 이 세력이 건국한 국가는 만월국으로, 어지러웠던 신오는 신월국, 류호국, 만월국 3국에 의해 새로운 형국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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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 시대 =
 
신월국과 류호국, 만월국 사이에는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류호국은 신오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했고, 신월국과 만월국은 서로가 자신이 월국을 잇는 정통파라며 싸워대기 일쑤였다. 이렇듯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류호국에서는 타테아키가 왕으로 즉위했다. 타테아키의 등장으로 삼국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정복의 야망을 드러내는 류호국이었고, 형식적으로 협력 관계를 맺는 신월국과 만월국이었지만, 서로 동상이몽하며 호흡이 맞지 않았다.
 
 
 
서로가 헐뜯는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신월국이 휴전을 제의한다. 류호국과 만월국은 휴전을 수락하는 척을 하며 통수를 칠 계획을 짜는데, 웃긴 점은 신월국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형식적 휴전을 맺은 삼국이었고, 아주 잠깐의 평화가 오는 것 같았지만, 예상 외로 신월국이 빨리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전혀 예기치 못했던 류호국과 만월국은 뒤늦게 수습을 하기에 이르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결국 신월국의 계략으로 만월국이 멸망하자 류호국은 신월국을 경계하는 태세를 갖추지만, 미리 심어두었던 신월국의 스파이에 의해 류호국 역시 망하게 된다. 이로써 신월국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며 약 200년간 지속되던 삼국 시대도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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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시대/퇴월기 =
 
통일을 이룩한 신월국이었지만, 너무 급하게 통일을 이룬 탓일까.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 원래도 사이가 안좋던 만월국까지도 흡수했으니 잦은 싸움이 많이 발생했다. 결국 스트레스로 삼국을 통일했던 야마하시 왕이 병사하자 더 큰 혼란이 도래한다. 야마하시 사후 왕들의 재위기간은 5년을 채 넘지 못했다. 한 번은 궁이 불타기도 했고, 여기저기선 난이 일었으며, 아예 유민들은 신월국의 사람이 된는 것을 거부하고 후류호국, 후만월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중앙집권체제가 붕괴하자 여기저기서 쌓인 고름이 터진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난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돈 좀 만진 사람들도 국가를 세워대며 망국 루트를 제대로 타고 있었다.
 
 
 
희망이라곤 없는 듯했으나, 1451년 즉위하는 요시히로 왕에 의해 놀라우리만큼 안정을 되찾게 된다.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여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으며, 모든 군을 총동원하여 난을 제압하고 중앙집권체제도 다시 보수하는 등 무너져가던 신월국을 바로 잡는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일본을 통해 불교가 신오에도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요시히로 왕이 피를 날리며 갈고 닦은 왕권 탓에 이후 신월국은 매우 안정되었으며, 유래 없는 전성기를 누린다. 주변 국가와 활발한 교역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몇몇 항구 도시들이 특구로 지정되며 경제적으로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1764년 군부의 쿠데타로 전성기를 맞던 신월국도 무너져가기에 이른다. 오랜 평화와 안정으로 군의 필요성은 점점 떨어졌고, 군 축소까지 가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 반대를 했던 에이소는 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당시 왕을 강제로 폐위시킨 후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처음에는 군사 강국의 건설을 목표로 정책을 펴지만, 처음 맛보는 권력에 에이소는 점점 타락한다. 군사 강국을 원하던 에이소였지만, 그런 꿈은 처참히 밟히고 그저 유흥에 타락해 빠져 사는 에이소만이 눈에 들어왔다. 주요 관직들은 에이소의 측근과 친족들에 장악당했다. 관직이 사고 팔리는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동물, 아이, 심지어는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이 징수되는 등 막장 행보를 걷고 있었다.
 
 
 
이런 군부의 막장스런 행보가 계속되자 일부 지식인 계층은 이 나라는 답이 없음을 직감하고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신오민국건국회의가 소집되며 신월국을 타도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군부는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좌절되는가 싶었지만, 끈질기게도 살아남았다. 당시 민심은 신오민국건국회의에 향해 있었고, 망해가는 신월국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혁명을 계획한다. 선거를 통해 초대 총재로 미노세 코자부로를 선출하며 신오민국의 건국에 박차를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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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신오 =
 
무기고를 털고 나카코하라 고지로 군을 유인한 다음, 매복해 있는 시민군으로 기습하는 작전은 성공했고, 신오민국건국회의가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나카코하라 전투에서 미노세 코자부로가 전사하며 우도 시게시가 2대 총재로 선출된다. 이후 우도 시게시 내각은 신오민국을 건국하며 대통령제를 채택하게 되고, 본인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또한 외무부, 내무부, 재무부, 방위부, 국토부 5부를 설치하여 정부를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민의회의 전신이 되는 국민의회 역시도 설치되며 총선을 예고한다.
 
 
 
그렇게 실시된 첫 총선. 자유신오당이 24석을, 우리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민주신오당이 10석, 자유민주당의 전신이 되는 자유당이 2석을 가져가며 첫 총선은 성황리에 마무리된다.
 
 
 
1874년, 우도 시게시는 약속에 따라 임기인 5년을 마치고 퇴임하며 첫 대선이 실시된다. 자유신오당과 민주신오당, 자유당, 민중당 등의 정당이 후보를 냈고, 자유신오당의 소마자와 아츠유키가 당선되며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소마자와 아츠유키는 토지개혁, 군부 잔당 소탕, 행정구역 개편 등의 업적을 이루지만, 군부 잔당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의 피해도 있어서 비판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 1876년, 조선에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신오민국은 일본을 경계한다. 일본의 경계를 위해 러시아를 등에 업기도 하는 등 일본의 견제를 위해 노력했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1879년 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자유신오당이 과점하던 전과는 달리 민주신오당의 카미우치 케시가 당선되며 민주신오당의 시대가 개막한다. 또한 총선에서도 민주신오당이 전과는 구분되는 많은 의석을 확보하며 자유신오당과 쟁쟁한 경쟁을 펼친다. 아마 반일감정의 고조로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던 것으로 보여진다.
 
 
 
큰 사건 없이 카미우치 케시의 임기가 마무리되며 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민주신오당의 카노마타 코키가 당선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보가 더욱 심화되자 카노마타 코키는 러시아와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일본의 견제를 하기에 나서지만, 이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고,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신오민국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으며 신오민국에 영향력을 키워나간다.
 
 
 
신오민국에 대한 결정권을 얻은 일본은 보호라는 명분 하에 신오민국 정부로부터 국방권, 외교권 이양을 요구했다. 당시 타테마쿠라 야스노리 정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내부의 친일파에 의해 도장을 뺏기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에 1905년 우야가와 조약이 체결되며 국방권과 외교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1907년 신오민국에 합병을 제의했고, 타테마쿠라 야스노리가 내부의 친일파의 협박으로 일본의 제의를 수락하며 신·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신오민국은 일본에 합병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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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통치기 =
 
자신의 나라가 다른 나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일본에 합병되자마자 곳곳에선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단체가 등장하였다. 또한 신오독립당이 결성되어 일본에 항전했다. 신오 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거나, 수탈 기관에 테러를 감행하는 등 무장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계속될수록 돌아오는 것은 더욱 강압적인 통치였다. 결국 신오독립당을 비롯한 무장 단체들은 총독부령에 따라 해산 처분을 받게 되며 한풀 꺾이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온갖 무장 단체는 꺾이지 않았고, 지하에서 활동했다. 또한 소련의 도움을 받아 무장 투쟁을 이어가는 등 외세의 도움도 받았다. 그러나 소련의 도움이 탐탁치 않았던 세력이 떨어져 나와 자유독립당을 결성한다. 자유독립당은 무장 투쟁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중요한 것은 사람 하나 하나 스스로가 깨어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행하며 계몽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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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점령기 =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게 되며 신오민국도 독립을 맞이하나 싶었다. 물론 독립을 하긴 했으나, 신오독립당과 자유독립당 사이의 대립에서 신오독립당이 우세를 점하게 되는데, 결국 신오독립당의 수장이었던 친소련파 시게타다 요시아키가 먼저 총서기장으로 취임하며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한다. 자유독립당은 이에 반발하며 자유시장경제에 입각한 신오민국을 세우길 원했고, 지속적으로 항의했지만,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강한 탄압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결국 지하에서 활동하며 자유독립당은 그 세력을 점차 키워나갔다. 선동당한 민중을 대상으로 공산주의의 폐해를 알리기도 하고, 공산당 선전 기구에 테러를 감행하기도 하는 등 무장 투쟁과 계몽 운동을 병행하며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맞섰다. 이러한 자유독립당의 꾸준한 움직임 덕분이었을까, 1989년에 이르러서 많은 사람들이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중앙 정부의 삽질로 빈부격차는 나날이 커지고 있었으며, 권력자의 장시간 독재에 많은 사람들은 자유를 상실한 채로 불우하게 살아야 했다. 이런 이들에게 자유독립당의 신오민국은 달콤한 사탕이었고, 결국 신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점점 지지 기반을 잃게 된다.
 
 
 
이러한 민중의 불만이 악화되는 가운데,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당시 군사 훈련 중이던 군이 민간인을 사살해버린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이를 묻고 여론을 통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건의 내용은 생각보다 참혹했다. 사살당한 민간인은 그저 12살밖에 나지 않은 어린 아이였는데, 정부는 이 어린 아이가 간악한 자본가라는 이상한 쌉소리를 했던 것이었다. 이에 불만이 쌓이고 쌓여 터져버린 민중들은 이런 썩은 정권은 필요 없다며, 더 이상 신오를 망치지 말고 물러나라며 시위를 전개했다. 정부는 이에 물대포를 쏘는 등의 대처를 했지만, 이 과정에서 노인이 사망하자 민중들의 분노는 하늘을 치솟게 되었다. 수개월간 이루어진 시위에 아마가사카 우메이치 총서기장은 인민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며 자유독립당에 정권을 이양하며 자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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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신오 =
 
정권을 이양받은 자유독립당은 처음부터 시작하겠다는 의미로 과거 선거의 대를 잇는 것이 아닌, 1대 총선을 실시하여 국민의회를 구성하였으며, 이후 국민의회의 명칭을 민의회로 개칭하고 국호를 신오민국으로 변경하였다. 1대 총선으로 소집된 제헌의회는 헌법을 제정하여 1994년 8월에 공포하였고, 이듬해 1대 대선을 실시하여 자유신오당의 사이다 스에타카가 당선되며 (新)신오민국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고, 이러한 신오민국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21년 11월 15일 (월) 21:1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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